많은 이가 알고 있듯,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이름을 먼저 세계에 알린 것은 유튜브였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자신의 연주회를 보여주려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그녀를 ‘유튜브 스타’로 만들어줬다. ‘음악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시작점’이었다. 인터넷에 오른 연주 영상들은 그녀를 더 멀리, 더 많은 사람과 만나게 이끌었다.
임현정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5월이다. EMI 클래식스에서 2011년 8월 데뷔반으로 내놓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국내에 소개하던 때다. 25세 나이로 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감행하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레코딩 역사상 최연소를 기록한 그녀의 데뷔반은 빌보드·아이튠스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 6개월이 지난 2016년의 끝자락, 그녀를 다시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바흐·브람스·쇼팽·라흐마니노프 등을 거치며 4년 전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20대에 완성하고 싶다던 레퍼토리를 거의 이뤄냈고 그중 라벨과 스크랴빈은 2014년 워너 클래식을 통해 음반으로 내놓았다. 2016년 프랑스 유수의 출판사인 알뱅 미셸에서 그녀의 에세이집 ‘침묵의 소리(Le Son du Silence)’가 나왔고, 번역본이 같은 해 한국에 소개되었다. 워너뮤직 코리아는 2017년을 앞두고 그녀의 베토벤 소나타 녹음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진 ‘비창’ ‘월광’ ‘발트슈타인’ ‘열정’을 모아 음반으로 발매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예술은 영혼의 도구이고, 음악은 예술의 수단”이라는 그녀의 말, 듣는 이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녀의 단단한 생각, 응축된 에너지 모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임(林)_수풀, 숲, 사물이 많이 모이는 곳
드넓은 음악의 숲을 가꾸는 데 꼭 필요한 재목들을 심고, 물을 주는 데 임현정은 지난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서른을 넘기며, 그 숲을 더욱 윤택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오랜 시간 갈급해오던 샘물 같은 음악을 꺼내어놓을 시간을 앞두고 있다.
임현정이 2017년 2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갖는다. 꼭 2년 만이다. 지난 2015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집, 베토벤 소나타 ‘월광’ ‘열정’,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에튀드를 선보였던 그녀가 이번엔 자신의 에세이집과 동명인 ‘침묵의 소리’라는 주제로 “오랜 시간 아끼고 사모해온” 레퍼토리―슈만 ‘사육제’, 브람스 8개의 피아노 소품 Op.76, 라벨 ‘거울’, 프랑크 프렐류드, 코랄과 푸가―로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베토벤 소나타, 바흐 평균율이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좋은 음식에 비유할 수 있어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의무이자 숙제라고 할까요. 그 계획했던 것들을 다 치러냈기에 이젠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해요. 특히 브람스 소품들은 열세 살 때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늘 선물을 받는 느낌이에요. 몰래 숨어서 먹는 군것질거리처럼요. 슈만 ‘사육제’는 작품 속 다양한 캐릭터를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모두 연출하며 연기하고, 그 캐릭터 자체가 되어야 하죠. 제 영혼 안에 그 많은 캐릭터가 다 들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한 작품에 서로 다른 캐릭터가 등장하는 슈만의 ‘사육제’가 혈기왕성한 ‘젊은 영혼에 대한 탐구’라면, 그녀에게 브람스 8개의 소품은 고뇌와 고통을 겪어낸 ‘완숙한 영혼의 다방면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라벨은 ‘자연에 대한 탐구’이지 않던가.
“영혼의 탐구, 영혼의 표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곧 예술의 본질이라 생각해요. 음악은 그것을 돕는 수단일 뿐이죠. 그림이든 요리든 청소든 그 무엇이든,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사람이 곧 예술가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술인 것 아닐까요.”
현(鉉)_솥귀, 솥의 손잡이
임현정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녀의 에세이집 ‘침묵의 소리’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임현정을 빚어낸 시간의 굴곡에 가슴 깊이 이입했고, 오늘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공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눈에 띄는 몇 대목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현(鉉)은 아주 큰 가마솥을 들어 올리기 위한 솥귀, 즉 솥에 붙어 있는 귀처럼 나와 있는 손잡이를 뜻한다. 과거 한국에는 손잡이를 만다는 기술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이런 손잡이들 가운데에는 간혹 금이나 보석으로 제작하는 것들이 있을 정도였다. 큰 가마솥을 들어 올리는 이 손잡이는 온 가족의 끼니가 달려 있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상징한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소중한 손잡이.” – ‘침묵의 소리’ 중 ‘한국’ 편 발췌
그리하여 어린 시절 학교에서 ‘30년 후 내 모습’을 주제로 글짓기를 할 때 “나는 빛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는 그 이름처럼 세상 전부 같던 엄마, 그리고 가족을 끌어안아 들어 올리는 존재로,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드는 빛이 되었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자. 2006년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한 임헌정은 이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에 입성했다. 그 무렵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인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 바라콥스키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고, 그의 조언을 듣는 가운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녀는 결국 “음악의 이름으로 영위하게 될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삶’, 폭풍의 역경이 몰아치고 가뭄이 와도 감수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삶”이 손짓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 나이 스물한 살. 만약 그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임현정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을 위하여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음악에 몸을 맡긴 사람이니까. 내가 외로울 때 나를 지켜주고 살펴준 것이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이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었으니까. 두려움에 떨 때도, 음악이 나의 손을 잡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곳으로, 프랑스로, 벨기에로, 유럽으로 나를 이끌어주었고 나의 꿈을 이루어주었으니까. 음악이 나의 엄마가 되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는 음악에게 빚을 졌다. 존재할 수 있는 이 영광을 삶이 우리에게 준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 그 은혜에 보담을 해야 하듯이, 나는 음악에 보답해야 했다. 더 이상 피아노를 통해서 엄마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 음악에게 나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 것이다. 결심이 섰다. 이곳을 떠나리라.” – ‘침묵의 소리’ 중 ‘벨기에’ 편 발췌
정(靜)_ 고요하다, 깨끗하다, 조용하다
우리가 타인과 만나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얼핏 상당수 메시지가 ‘언어’에 의해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30%만이 언어에 의한 것이라 한다. 나머지 70%가량은 눈빛이나 몸짓 같은 ‘비언어’ 단서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진다. ‘침묵’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 이것은 음악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 침묵의 질에 따라 첫 소리의 질이 결정되죠. 시간이 흐를수록 침묵의 중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무대뿐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에는 명상, 그리고 침묵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명상 가운데 침묵의 순간, 침묵의 소리와 마주한다. 지금 그녀에겐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도 명상이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이 곧 명상의 시간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녀의 음악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나의 도전은 특정 작품을 마스터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음악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청중과의 영적 합일을 이루는 데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만큼의 끊임없는 연습과 탐구가 물론 필요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본질이 바뀌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예전과는 다른 길이 시작되었다.
바로 깨달음의 길, 침묵의 길이다. 내가 연주회를 통해서 객석과 내가 하나가 될 정도로 음악의 은총이 느껴질 때면 이따금씩 만났던 길이다. 피아노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그 공간을 열어준다. 그러면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말이 필요 없고 표현을 초월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연주회장을 찾은 청중 한 사람, 한 사람과 하나가 된다. 그들의 본질과 나의 본질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을, 그리고 그때 드디어 침묵에 닿는 것을 느낀다.” – ‘침묵의 소리’ 중 ‘벨기에’ 편 발췌
임현정은 눈물이 많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할 때면 곡이 지닌 아름다움에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명상을 하면서도 많이 운다.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할 때가 많은데, 정말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릴 때면 충만한 기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있어 콘서트도 예외는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 아니 ‘고국’에서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땀과 눈물이 한데 뒤섞여 있다.
마침내 다가올 2월의 겨울 저녁, 우리는 임현정과 더불어 ‘침묵의 소리’, 그녀의 ‘에센스’, 눈물을 머금은 ‘황홀한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진 황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