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서거 100주년-1 드뷔시의 삶, 새로운 시대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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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2월 10일 4:06 오후

파리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한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41~1918)가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두 권의 전주곡집과 발레음악, 오페라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등 수많은 역작을 남기며 새로운 시각으로 전통에 도전했으며 후대 20세기 현대음악을 낳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삶과 예술, 작품, 그리고 드뷔시를 연주한 연주자들과 올해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무대를 찾아가 본다.

 


드뷔시를 찾아서

올해는 드뷔시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이것을 환기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주변이 잠잠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들이 유독 독일어권 작곡가와 작품을 선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와 작품’과 같은 목록에서 드뷔시의 이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베토벤·모차르트·브람스·바흐·슈베르트·슈만 등 독일어권 작곡가들이 순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부분은 관현악곡·성악곡·실내악곡 등 대부분의 상위 순위들을 다 거친 후에 독주곡 부분에서 피아노 소품으로 드뷔시의 이름을 뒤늦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이 선호하는 해외 여행지에서는 상황이 역전된다. 프랑스 파리는 한국인의 꿈의 여행지 순위에서 좀처럼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와 함께. 프랑스는 전통이 살아있는 나라이자 혁명의 나라이다.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의 규모와 호화로움은 절대 왕정이 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는지 기억하게 한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세워진 1889년 당시에는 지나치게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대표적인 탑이 됐다. 어느 시대든 새로운 시대와 전통은 강한 저항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지나치리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시간을 거슬러 옛 시간에 머무르며 현재를 반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빠르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프랑스 음악가 드뷔시, 경계를 넘다

드뷔시 칸타타 ‘축복받은 처녀’의 악보 재킷 ©OTI SGBS

 

 

 

 

 

 

 

 

 

 

 

 

여기 시대를 앞서가며 새로운 전통을 만든 한 예술가가 있다. 자신들을 지배하던 독일 음악에 대항하고 고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했던 프랑스 음악가 드뷔시. 잃어버린 자신의 세계를 찾기 위한 그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동시에 현재 우리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독특한 울림으로 이루어진 그의 음악에서 꿈을 이룬 이상주의자의 소리가 함께 메아리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음악사에 결정적인 인상을 남긴 드뷔시는 1862년 8월 22일에 생 제르망 앙 레에서 태어나서 1918년 3월 25일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음악가’. 드뷔시는 말년에 작곡한 세 개의 소나타에 이렇게 명기했다. 가장 독일적인 음악형식인 소나타에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는 대담한 시도를 하며 자신에 대한 수식어를 새삼스럽게 악보에 기입할 만큼 그는 프랑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그의 관심이 프랑스적인 것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전통에 도전해 독자적인 음악언어를 확립한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이었다. 그의 음악적 혁명은 기존의 것을 과격하게 뒤집기 보다는 제한된 틀을 벗어나 음악에서 새로운 음향을 창조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1909년에 드뷔시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새로운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어집니까? 그 새로운 길을 이제야 예감하게 됐다는 것을. 엄청나게 많은 일이 남아 있어요. 그것을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드뷔시의 예감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1884년, 로마대상 수상

틀에 박힌 것을 거부하는 드뷔시의 성격과 개성은 파리 음악원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드뷔시는 8세 때 쇼팽의 제자로 알려진 모테 부인을 만났다. 모테 부인은 드뷔시의 음악적인 재능에 확신을 가지고 드뷔시의 부모를 설득해 그를 파리 음악원으로 보내도록 했다. 드뷔시는 1872년부터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880년부터 기로의 제자가 되면서 작곡 수업을 받았다. 드뷔시는 전통적인 화성법이나 형식에서 벗어나는 작품을 써서 기존 권위에 도전했다. 기로는 드뷔시의 음악적인 개성을 인정하는 한편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양식을 먼저 철저히 배울 것을 충고했다. 드뷔시는 비교적 충실하게 음악 훈련을 받았다. 이것의 결실이 로마대상이다.

드뷔시는 1884년에 칸타타 ‘탕자’로 로마대상을 받았다. 로마대상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수상자에게는 로마에 프랑스의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유학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상에 대해서 드뷔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로마대상의 집단 수련이 예술가가 될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만족할 만한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고 엄격한 조항들로 구속한다고 비난했다. 드뷔시는 로마 유학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음악가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로마대상 수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획일적인 교육 방식이 예술가가 자연스러운 개성을 발휘하는데 얼마나 좁은 틀인지를 보여주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지만 드뷔시는 언젠가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에서 로마법을 따르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그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드뷔시는 로마대상 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전통을 벗어난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선보였다. 그는 음악원과 로마대상 기간 동안 사람들이 그에게 교육한 모든 것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길, 열린 음향의 세계

드뷔시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한때 바그너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일출로 착각할 수 있는 일몰”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바그너가 새로운 음악의 선구자라 생각했지만 그 역시 이전 시대에 묶여있는 작곡가라는 의미이다. 드뷔시는 자신만의 색채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의 혁신적인 요소가 쓰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1894)은 ‘20세기 음악의 전주곡’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는 “현대 음악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깨어났다”고 평가했다.

그의 새로운 음악양식은 흔히 인상주의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미술사조에 쓰이는 용어를 음악에 사용한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특별히 빛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태양의 빛에 따라서 미묘하게 변하는 풍경의 색채를 그렸다. 구조나 형식보다는 빛과 색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 인상주의 화풍과 드뷔시의 작품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음악에서의 인상주의는 화성이나 음색을 통해 특정한 분위기와 감각적인 인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드뷔시에게 실제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인상주의 회화가 아닌 상징주의 시였다. 드뷔시는 보들레르·베를렌·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시를 작품에 사용했다. 상징주의는 지성적 이해보다는 감각적 표현에 더 중점을 두었으며 기존의 문장 구조를 깨뜨리고 시인에게 지각된 인상을 개성적 감각에 따라 나타냈다. 깊은 철학이나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과는 달리 드뷔시의 음악은 순간적이고 특정한 기분, 느낌, 정취나 장면을 환기시킨다.

드뷔시의 음악은 다양한 측면에서 혁신적인 면모를 보인다. 선율은 반복되지만 발전할 필요가 없고, 리듬은 불규칙적이며, 전통적으로 금지되던 병진행이 자유롭게 활용됐다. 화성은 기본 3화음에 9음·11음·13음까지 첨가했으며 불협화음들은 해결하지 않고 기능화성의 모든 원리를 무시했다. 또한 온음음계·8음음계·5음음계 등을 사용해 모호성과 다양성을 성취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음향과 더불어 특별히 음색에 대한 그의 생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화음을 전체 화성 진행 속에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고 각 화음을 독특하고 독립적인 표현력을 가진 개체로 인정했다. 또한 각각의 악기가 가진 고유한 음색적인 특성을 부각시키고 각 악가들의 음색을 대조함으로써 다채롭고도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드뷔시의 독자적인 음악언어를 확립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이었다. 드뷔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려진 창공의 세계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그런 종류의 음악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화성진행은 사면이 벽으로 막힌 음악회장에서는 비정상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열려진 창공의 세계에서는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음악을 방해했던 것들, 즉 감정의 메마름, 지나치게 정밀하고 기계적인 형식과 조성 개념과 같은 것들을 추방해 버릴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음색은 단순한 음악의 색채가 아니라 음악의 본질적인 내용이 되었다. 즉 그는 음악에서 음악의 분위기, 음의 색채감을 추구한 것이다. 드뷔시는 화음을 조성의 맥락에서가 아닌 화음 자체의 고유한 색채로 본 최초의 작곡가로, 풍성하게 열린 음향 세계의 문을 활짝 열었다.

 


평론과 드뷔시, 그를 둘러싼 말과 글

새로운 음향 세계의 문을 연 드뷔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 시절과 로마대상 기간 중 기존의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는 작품들로 음악원 교수들과 평론가들에게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다. 드뷔시의 1887년 작품 ‘봄’에 대해서 평론가들은 “음색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형식이나 기본적인 법칙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 그는 예술적인 진실에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할 만한 이 모호한 인상주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비평했다. 그러나 드뷔시는 계속적인 혹평을 받으면서도 과감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혹평을 받은 내용들을 더욱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었다.

드뷔시는 음악뿐만이 아니라 음악 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음악 혁신의 필요성에 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1901년부터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의 평론들은 드뷔시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1921년에 파리에서 ‘안티 딜레탕크 크로슈 씨’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드뷔시는 ‘프랑스 음악은 어디에 서있는가?’(1904)라는 대담에서 19세기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마스네를 언급하면서 예술과 음악의 본질과 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람들은 교육되어진 모든 과잉 치장으로부터 음악을 자유롭게 해야만 합니다. 음악은 겸허하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제한 안에서 아마도 커다란 아름다움이 가능할 것입니다. 극에 달하는 복잡함은 예술에 상반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로 인해 예술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고, 음악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없이도 음악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자리하고 스며듭니다.”

이러한 음악관을 지닌 드뷔시는 19세기의 마스네 이후 20세기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드뷔시 곁의 여인들, 경계 없는 사랑

어린 시절의 드뷔시 사진 액자 ©OTI SGBS

 

 

 

 

 

 

 

 

 

 

 

 

 

구습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드뷔시의 자유롭고 대담한 성향은 연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파리 음악원 시절에는 유부녀인 바니에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로마 유학 이후에 파리로 돌아온 드뷔시는 가브리엘 뒤퐁을 만나 함께 살았는데, 드뷔시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또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의 주인공이 됐다. 1899년에는 가브리엘의 친구인 릴리 텍시에와 결혼했으며, 몇 년 지나지 않아 1903년에는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 바르다크와 사랑에 빠졌다. 1905년에는 엠마 사이에서 드뷔시가 특별히 사랑한 딸 클로드 엠마가 태어났고, 두 사람은 1908년에 결혼했다. 이 과정에서 릴리는 권총 자살을 시도하고, 이로써 드뷔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의 예술에서의 아름다운 사랑의 소재는 현실에서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이 사건으로 드뷔시의 가까운 친구들이 그의 곁을 떠났다.

드뷔시의 곁에 머물렀던 여인들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는 수시로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펼쳐진 그의 경계 없는 사랑은 이중주가 아니라 삼중주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양한 여인들과의 사랑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품 창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의 손끝에서 어떤 작곡가도 찾지 못한 신비와 미지의 세계를 어루만지는 매혹적인 작품들이 탄생됐다. 낭만적 연애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함께 드뷔시의 삶을 끊임없이 이끌어간 추동력이기도 했다.

 


드뷔시 이후의 여정

드뷔시가 잠든 묘역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음악사의 거대한 흐름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전환시켰다. 누구보다도 격동적인 삶을 산 그가 이루어낸 음악적 성취는 음악사적인 양식의 전환으로 이어지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드뷔시는 말년에 직장암의 고통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인 프랑스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곡에 매진했다. 드뷔시는 그의 시대를 이끄는 양식의 선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프랑스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또한 20세기 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음악학자 그라우트는 “한때라도 드뷔시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면, 20세기 초반과 중반의 유명한 작곡가 전부(라벨·메시앙·불레즈에서부터 푸치니·야나체크·슈트라우스·스크랴빈·아이브스·파야·버르토크·스트라빈스키·베르크·힌데미트 등을 포함해서)와 미국의 재즈 및 팝 음악가들의 이름까지 총망라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개척한 길은 새로운 소리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가는 후세 작곡가들에게 여전히 새로운 영감을 주는 길이 되고 있다.

 

글 서주원(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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