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사무엘 아들러, 거장의 생애가 내리운 큰 그림자

THE GREAT MENTOR ②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1928년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난 사무엘 아들러는 보스턴 인근의 한 유대교 템플의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고, 보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작곡을, 탱글우드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작곡가로서 6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5편의 오페라, 12곡의 협주곡, 9곡의 현악 4중주, 5편의 오라토리오 등 총 400여 곡을 작곡했다. 이스트만 음대 작곡과 교수로 30년간 재직한 이후,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20년 동안 작곡과 교수로 후학을 지도했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아들러 교수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 중인 작곡가들을 비롯해 이미 여러 차례 방문하며 익숙해진 지명과 학교, 연주홀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이스트만 음대에서 재직하던 동안 19명의 한국인 제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위해 한국으로 향하던 중 연주를 맡기로 했던 지휘자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 갑자기 지휘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연까지, 그의 한국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아들러 교수는 현재 오하이오주에 거주하며 일이 있을 때마다 뉴욕을 오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연주되는 그의 작품과 초청 강연, 마스터클래스 등으로 인터뷰 스케줄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다행히 일정이 절묘하게 맞았다.

향후 1년간의 스케줄, 연주 시간과 장소, 연주자. 관련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전에 있었던 만남이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마치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체력적인 문제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오는 초청은 줄이고 있다고 했지만, 여전히 활력이 넘쳐 보였다.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지휘자와 교육자, 그리고 저술가로도 이름이 알려졌는데, 어떤 직함이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좋은 영향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작곡하는 사람이다. 다른 분야는 곡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얻게 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곡을 잘 쓰기 위해 작곡이라는 한 우물을 파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음악가로서 사무엘 아들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1950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1년 만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2년에 제대했으니 실제 지휘를 한 기간은 1년 정도인데, 당시 이 악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빠른 기간에 소문이 났다.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으로 떠나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재직했던 브랜다이스 대학과 뉴올리언스의 한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댈러스에 위치한 엠마누엘 템플의 음악감독으로 갔다(이곳은 미 남부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유대교 템플이다). 재직 기간 동안 댈러스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영입되었고, 지역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댈러스 심포니의 위촉으로 첫 번째 교향곡을 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작곡가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텍사스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나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고, 일하면서 성취감과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준비된 사람이 행운을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운이라는 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하다.

커리어 초반에는 지휘자로서 활약이 컸던 것 같다.

사실이다. 그런데 1965년, 댈러스에 온 지 17년째 되던 해에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 생겼다. 미 전역 9개의 대학에서 나를 초빙하고 싶다며 관심을 보내온 것이다. 댈러스를 떠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지난 수년 동안 제안을 받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 중 한 곳이 이스트만 음대였다. 지휘자로 살았던 20여 년간의 커리어에 변곡점이 생긴 것이다.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작곡과 교수로 부임했고, 1995년 퇴임까지 30년 동안 재직했다.

동부에서 자라 모든 교육을 받다가 오랜 시간 동안 텍사스와 로체스터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대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가?

나와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여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뉴욕과 같은 중심 도시에서만 활동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뉴욕에는 그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미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텍사스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17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텍사스에 사는 동안 댈러스 심포니에서 내 작품을 여덟 곡이나 연주했다. 새내기 젊은 작곡가가 이런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때 뉴욕이나 보스턴에 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 같은 애송이 작곡가의 작품보다는 에런 코플런드의 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말은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 꼭 장소만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작품 중에는 음악을 처음 접하는 어린아이들도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있다. 현악기 초급자들을 위한 곡도 출판되었고, 현대음악 어법이 익숙하지 않은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맞춤형 작품도 작곡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60명의 아이들의 연주를 위해 60개의 짧은 곡을 쓰기도 했다. 첫 곡은 가장 나이가 어린아이를 위한 15초짜리 곡이었는데,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휘자인 아내가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현악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적이 있는데,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를 보는 것처럼 훌륭했다. 작곡가는 이런 다양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작품을 쓰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 것만큼, 교육적 측면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어린아이부터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학생들과 함께 일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외국 학생들과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느꼈던 적이 거의 없다. 음악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는 예술을 통해서 극대화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술과 스포츠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한국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사회를 견인하는 힘은 예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음악은 이 진리를 매우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교육자로서 작곡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해 어떤 점을 기대하는가?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단호하게 대하는 편이다. 동시에 모든 학생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단 한 명이라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일에 처하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일정 기간 나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테크닉’을 익히도록 요구했다. 음악사를 돌아보면 테크닉이 부족한 작곡가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작곡가라고 해도 바탕, 즉 테크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뜨거움을 오선지로 옮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활동하는 작곡가들 가운데 불완전한 기본 때문에 자신의 음악과 접합되지 않은 파편들만 나열된 곡들을 볼 때면 아쉽다. 학생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돕는 일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철두철미한 존재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두 음악가로부터 전해진 가르침

사무엘 아들러가 군대에서 창단한 오케스트라(Seventh Army Symphony Orchestra)

 

 

 

 

 

 

 

 

 

 

 

 

 

코플런드, 힌데미트와 작곡을 공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두 작곡가의 가르침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두 분의 스타일은 무섭고 철저했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지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는 극과 극이었다. 예를 들면, 힌데미트의 경우는 ‘이 부분의 화성은 말도 안 되니까 이런 식으로 고치면 해결된다’는 접근법이었다. 구체적인 방향까지 직접 제시해서 금방 따라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반면 코플런드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이런 화성은 다시 들여다볼 가치도 없으니 집에 가서 수정해와!’ 즉, 문제가 된 부분을 학생이 직접 해결하도록 하고, 본인은 뒤로 한발 물러서는 스타일이었다.

어느 분의 교육 철학이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가?

힌데미트는 음악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엄청난 테크닉을 가진 천재였다. 비행기 안에서 잉글리시 호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스케치의 사보를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악보를 단 한 번의 수정도 없이 곧바로 출판사로 넘겼다. 실제로 힌데미트는 그 당시 존재했던 모든 악기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지 않았는가? 음악과 악기에 대한 이해가 대단했다. 이런 분과 함께 공부했으니 얼마나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는지 상상에 맡기겠다. 그 결과, 나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작품으로 모든 오케스트라 악기들을 위한 연주용 연습곡 시리즈를 작곡할 수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코플런드를 말한다면, 가장 창의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던 선생님이었다. 작곡한 곡을 들고 가면 집에 가서 고쳐오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던 분이다. 직접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내 목소리를 쌓고, 또 허물기를 반복했다.

코플런드가 작곡에 있어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가.

힌데미트와 공부했던 하버드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선생님의 눈높이에 맞춰 곡을 썼다. 어떻게 곡을 쓰면 좋아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만 가고 있었다. 당시 또 다른 멘토였던 작곡가 어빙 파인(Irving Fine)은 힌데미트의 작법을 따라 하는 내 상황을 딱하게 여기며 코플런드를 만나볼 것을 제안했다. 그의 소개로 다섯 곡을 골라 코플런드에게 보냈다. 2주 후에 그의 답장을 받았는데, 나를 가르칠 생각이 없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편지를 들고 어빙 파인을 찾아가서 울며 하소연을 했더니 다시 코플런드에게 연락을 해서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다행히 그에게 초대를 받았고, 뉴욕에서 만나게 되었다. 중요한 깨우침은 이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뉴욕에서 히치하이크로 차를 겨우 얻어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꽤 화려한 연회장 같은 곳이었다. 그는 한쪽에 놓여있던 피아노 곁으로 가더니 C장조 화음을 눌렀다.

“샘, 이게 뭐지?”

“아… C장조 3화음입니다.”

“나는 네가 절대음감을 가졌는지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야.”

그리고는 같은 화음을 다시 누르며 다시 같은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었다.

“듣기 좋니?”

“네….”

“그게 바로 네가 생각하는 음악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너의 악보는 음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냥 그려 넣은 것 같아. 내가 방금 연주한 ‘도’와 ‘미’, 그리고 ‘솔’ 각자의 음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를 무시했던 것처럼.”

이 사건 이후 나는 내가 쓴 모든 곡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음 하나에 대한 의미를 놓치지 않는 작곡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플런드와의 첫 만남은 내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지금까지 출판한 4권의 저서들 가운데 ‘관현악법 연구(The Study of Orchestration)’는 전 세계 젊은 작곡가들의 길잡이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초판은 1982년에 W.W. 노턴(Norton)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후 필요한 내용이 보강되어 1989년과 2001년에 새로운 에디션이 나왔고, 현재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관현악법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판은 이스트만 음대 재직 당시 함께 공부했던 윤성현(연세대 작곡과 교수)의 번역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얼마 전 이 책이 중국에서 출간되었는데, 발행 첫날에만 5,000부가 판매되었다. 최근에는 이란에서 ‘시창(Sight Singing)’을 출판했다.

올해로 90세가 되었다. 최근에 이를 기념하는 음반이 발매되었다고 들었는데, 의미 있는 곡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9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계획 중인 연주단체들이 있어서 한동안 바쁘게 다니게 될 것 같다. 최근 영국 레이블인 린 레코드(Lynn Records)에서 출시된 음반에는 10개의 작품이 두 장의 CD에 나뉘어 담겨있다. 이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몇 년 전 이 곡을 초연했던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김시우가 녹음했다. 초연 당시 김시우는 줄리어드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의 연주를 인상 깊게 듣고 초연을 부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의 바른 동양 학생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 곡에 대한 비평과 제안을 해줘서 원래 계획에 없던 카덴차를 포함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 숨결을 불어 넣어준 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고 선호하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긴 인터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나간 것은 결코 화려한 경력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음악이라는 큰 줄기를 가지고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시선은 아이들과 학생들, 아마추어와 전문가, 그리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열린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많은 사람이 쉬어갈 수 있는 것처럼, 거장의 생애를 통해 내려진 그림자는 크고 넉넉했다.

 

 

글 김동민(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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