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안무가도 춤을 추고, 무용수도 춤을 짓는다. 안무의 영역은 훨씬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간다. 설치미술가도 영화감독도 심리학자도 안무에 빠져 새로운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고, 반대로 무용수도 또 다른 예술의 영역을 탐미하며 작품을 창조해 낸다. 무용수로 시작해 안무가로, 본인만의 색깔을 담아 창조의 세계를 열어가는 두 명의 크리에이터, 김용걸과 김설진을 만나보았다
김용걸
파리 오페라 발레 스타의 재탄생
‘자연’과 ‘엄마’로 시작해 ‘침묵’ ‘게임’ ‘사랑’ ‘삶’으로… 정육면체의 큐브에 담긴 6개의 알파벳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수많은 단어를 만들어낸다. 무대 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발레리노에서 안무가로 끊임없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김용걸. 그의 머릿속 다채로운 생각과 관심사들이 ‘더 타입 비(The type B)’라는 제목으로 제8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 무대에서 펼쳐졌다. 그는 스스로 이번 무대를 가리켜 ‘불친절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누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B형 발레리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김용걸을 발레 무용수의 길로 이끈 것은 어머니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아들 넷을 키우며 엄하게만 보였던 어머니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단다. 발레를 해보지 않겠냐고. 무용의 꿈을 접었던 어머니가 보인 눈물에 발레를 시작했지만, 남들의 시선에 대한 부끄러움에 부산예고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는 전공을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서 본 남자선배들의 무대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무용을 계속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다른 무용수보다 내가 신체적으로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처음으로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웃음)” 자신감이 생긴 이후 김용걸은 슬럼프 없이 계속 달렸다. 부산예고 졸업 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고, 1995년부터 국립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2000년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할 때까지 발레 무용수로서 그야말로 수직 상승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 코르 드 발레로 입단한 그는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내가 한국에서 훈장을 받고, 모스크바 콩쿠르에서 3등을 했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처음 2~3년은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성숙의 시기를 거치며 천천히 나아간 그는 마침내 명성 높은 파리 오페라의 솔리스트가 됐다.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9년이었다. 37세의 나이, 42세가 정년인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무용수로서 남은 5년의 시간을 접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돌아온 것이다. 무용수에서 교육자의 길로 접어든 그는 곧 안무가로서의 행보까지 덧붙인다. “학교에 뛰어난 학생들이 너무나 많았다. 훌륭한 재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요리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나. 처음에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에 주저했지만, 조금씩 인정을 받으니 더 신이 나서 하게 된 것 같다. 아직은 춤이 더 좋지만, 춤을 추는 것만큼 보람과 희열이 있는 매력적인 작업이다.”
한국에 온 지 2년의 세월이 지나고, 2011년 제1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선보인 작품 ‘워크(Work)’를 시작으로 김용걸은 본격적인 안무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이 김용걸댄스씨어터를 만들었고, ‘빛, 침묵, 그리고…’(2014),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2016)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김용걸의 작품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한다. 피나 바우슈의 연극적 요소와 윌리엄 포사이스의 클래식 발레의 변형과 확장성, 이르지 킬리안의 추상적이고 동물적인 움직임과 루돌프 누레예프의 수천가지 동작의 변형까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안무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의 철학과 만나 또 다른 예술로 나타난다. 발레 무용수로서 지닌 본능적인 미적 기준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용걸. 그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시도를 무대에 던지고 있다.
김설진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뀐 순간
무대 저 안쪽, 조명이 거의 닿지 않는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뒤돌은 채로 중얼거린다. “짧죠, 머리도 크고, 그런데 팔은 좀 길어요…”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자신의 콤플렉스를 늘어놓는 이 남자, 현대무용가 김설진이다. 몇 분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궁금증을 자아내더니 드디어 얼굴을 보이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춤 안에서는 그 모든 콤플렉스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듯이. 이렇게 시작한 무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반덴브란덴가 32번지’의 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2014년도 국립현대무용단이 선보인 ‘춤이 말하다’의 한 장면. 그는 20분 동안 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춤, 자신의 삶을 내놓는다.
김설진과 춤의 만남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버튼으로 조작하던 옛날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던 그는 우연히 미국의 댄스 프로그램 ‘소울 트레인(Soul Train)’을 보게 된다. 제주도에서는 잘 나오지 않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말이다. 춤에 흥미를 느끼게 된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제주도 소년은 그렇게 방송에서 본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학교 행사에서 공연도 했다. 딱히 정해진 장르는 없었다. 그저 추고 싶은 춤을 추었다. 조금 더 커서는 함께 춤추던 형들이 서울 문라이트 나이트클럽 뒷골목 옷가게에서 구해온 유명 댄서들의 비디오 자료들을 보며 연습했고, 당시 7~8만 원 정도의 거금을 들여 비디오테이프를 직접 사오기도 했다. 테이프가 늘어날까 봐 복사본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몇 번이고 돌려봤다.
춤에 대한 대단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반대는 심했고, 춤을 추다 걸려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일도 있었다. 꿈을 이룬 여느 인물들의 뻔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그는 춤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안될 거라 예상했던 오디션에 덜컥 합격하며 고등학교 2학년,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백업댄서로 활동하던 김설진이 현대무용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그때 당시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주변 형들이 대부분 춤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더라. 나이가 더 들어도 계속 춤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부상을 입고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빈자리는 없었다. 나 없이도 똑같았다. 그러던 중 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게 ‘백야’였다.” 영화 속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춤은 김설진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영화 속 그 춤은 무용수의 존재감으로 가득했다. 그 춤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그에게 누군가 현대무용이라 알려주었고(사실 컨템퍼러리 발레였다), 그렇게 김설진과 현대무용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서점에서 현대무용 개론서나 안무법 같은 책을 찾아 읽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유명한 무용수와 안무가들의 사진을 보는 정도였다.” 그렇게 현대무용을 배울 곳을 찾던 그는 서울예대 무용과에 입학했고,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과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던 2004년과 2006년, ‘정원(Le Jarden)’과 ‘르 살롱(Le Salon)’으로 두 차례 내한한 세계적인 현대무용단 피핑 톰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를 2008년 피핑 톰 무용단의 오디션 현장으로 이끈다. 오디션 과정도 쉽지 않았다. 오디션 날짜를 놓치고, 기차를 잘못 타기도 하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끈질기게 쫓아간 오디션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 피핑 톰 무용단의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무용계에서는 이미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댄싱9’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프로그램의 시즌2와 3에서 MVP와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후 가수 이효리의 앨범 안무에 참여하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공연과 방송을 통해 대중의 인지도를 높였다. 방송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이 더 많아졌지만, 최근까지 피핑 톰과 이탈리아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벨기에에서 ‘반덴브란덴가 32번지’로 유럽투어를 했다. 2009년에 첫 공연을 올린 이후 200회 가까이 공연한 이 작품 외에도 그는 ‘아 루에(A louer, 2011년)’에 출연했다. 피핑 톰 무용단의 안무가 가브리엘라 카리조의 조안무로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 I)의 ‘더 미싱 도어(The missing door)’에 참여했고, 그것을 계기로 피핑 톰의 ‘아버지(Vader, 2014년)’에도 조안무로 참여했다. 이는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김설진을 향한 무용단의 신뢰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외를 오가며 피핑 톰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무버(MOVER)의 예술감독으로 자유로운 예술작업을 이어가는 김설진. 그는 대중이 붙인 다양한 수식어 사이에서도 ‘춤’이라는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무대 위에서 더욱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이 춤으로 건네는 인생 이야기
국내외를 오가며 너무나도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는 두 안무가를 한 자리에서 만났다. 촬영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미 ‘쓰리 볼레로’ ‘춤이 말하다’ 등의 무대에서 여러 차례 만난 인연이 있었다. 오는 7월에 열리는 ‘2018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서는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오랜만의 만남에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음악과 조명으로 채워진 촬영현장을 순식간에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상상했던 이미지를 파괴하고, 유쾌함과 진지함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감정을 쏟아낸다. 서 있는 곳이 어디든 순식간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두 사람, 두 명의 크리에이터 김용걸, 김설진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안무작이 기억나는가?
김설진 초등학교 캠프파이어 때다.(웃음) 지금 ‘쿨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친구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국민체조’, 그리고 듀스의 ‘우리는’을 섞어서 춤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남다른 감각을 보인 것 같다.(웃음)
김설진 녹음기술이 없으니 카세트 돌아가는 소리를 지우개로 막아가면서 동시녹음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은 스트리트 댄스를 할 때였고, 현대무용을 하면서 처음 만든 작품은 지금의 아내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효정설진’이라는 제목의 사랑 이야기. 그것을 발전시킨 작품이 서울예대 졸업작품으로 선보인 ‘고리’다. 영상·대사·소품이 모두 들어갔다. 지금 보면 쑥스럽지만, 당시에는 진지하게 임했던 작품이다.
김용걸 안무가는 어떤가?
김용걸 내 첫 안무작은 대한민국발레축제 1회 때 발표한 ‘워크’ 시리즈다. 소극장 작품 공모에서 운 좋게 선발됐다. 하지만 그전에도 안무에 부담 없이 접근했던 적은 있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 무용수로 활동하던 때를 말하는 것인가?
김용걸 쉬는 날이면 지방 공연을 가곤했다. 공연 시간을 채우기 위해 친구들과 안무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2006년 정동극장 ‘아트 프런티어 시리즈’에 아내(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김미애)가 선정되어 공연했을 때, 2부에서 선보인 2인무 ‘회색빛 하늘’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서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담은 우리 둘의 이야기였다. 2011년에 처음으로 ‘워크’를 선보이기 전까지 이렇게 조금씩 안무라는 영역에 접근했다. 사실 그때는 아직 내가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이듬해부터는 취향의 완성, 확신이 생겼다.
파리 오페라 발레와 피핑 톰 무용단, 발레와 현대무용이라는 배경의 차이가 작업방식에서도 나타날 것 같다.
김용걸 내가 활동했던 파리 오페라 발레의 경우에는 한 시즌에서 신작이 차지하는 비중이 20~30퍼센트 정도다. 10편을 한다면 그중 2~3개는 유명 안무가나 신진 안무가를 초빙해 발레단만을 위한 세계초연작을 만든다.
김설진 피핑 톰 무용단은 2년에 한 번꼴로 신작을 선보인다. 5~6개월 정도 연습하고 2년 동안 투어 공연을 한다. 투어가 끝나갈 즈음에는 다시 신작 작업에 들어가고.
발레는 동작이, 현대무용에서는 연극적 요소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안무가의 비중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지.
김용걸 발레의 경우에는 동작과 움직임이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안무가의 역할이 훨씬 크다. 특히 클래식 발레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나? 연극적 요소보다 동작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움직임에 더 초점을 맞춘다. 말로 전하는 감동이 아닌 움직임을 통해 감동을 전하는 것이 발레이기 때문에 발레 무용수들은 움직임에 집착하고, 동작의 완성도를 위해 더 노력한다. 반면에 현대무용에서는 안무가와 무용수가 서로 이야기를 하며 작품을 같이 만들어가는 것 같다.
김설진 그렇다. 그래서 피핑 톰에서는 댄서가 아니라 크리에이터(Creator)라고 표기하고 있다. 나타낼 수 있는 움직임은 거의 다 연구하고 테스트해보며 작품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다 함께 만들고 있다. 내가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에 더 애정을 담게 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피핑 톰은 몸풀기부터 다르다. 매일 각자의 상황과 몸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을 대입한다는 것이 모순이라 하더라. 오전 중에는 무용수마다 3~4개 이상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오후에는 연극적인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
김설진 가수면 상태의 움직임을 찾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촬영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동영상을 찾아보거나 병원, 박물관 등의 현장을 찾아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거기서 찾은 움직임들을 여러 가지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반덴브란덴가 32번지’에서 뒤집어진 우산을 들고 날아가는 장면도 사실은 굉장히 운이 없는 상황에서 발견한 아이디어다. 브뤼셀에 항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유독 비가 많이 쏟아진 날이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 제일 싼 우산을 사서 나왔는데, 우산을 펴는 순간 확 뒤집어졌다. 그 순간 내일 연습에 가져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뒤집힌 우산을 쓰고 집에 돌아가 이런저런 재밌는 아이디어를 더 만들어 봤다. 사실 그 상황만 본다면 운이 나빴던 경우인데, 그것을 작업과 연결하니까 다 재료가 되더라.
발레는 동작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김용걸의 작품에는 연극적 요소도 다분하다.
김용걸 발레와 현대무용에서 볼 수 있는 작업 방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더 타입 비’를 작업할 때도 움직임이 주가 되는 장면에서는 말보다는 동작의 리허설을 많이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용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시각을 나타내기 위해 무용수에게 개, 돼지의 가면을 씌우고, ‘날개’를 사용해 정형화된 교육 속에서 억지로 등 떠밀려 날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빛, 침묵, 그리고’(2014)나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2016) 등을 보면 사회적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다. 사회적 이슈들이 작품의 주된 영감이 되는지.
김용걸 작업에 대한 영감은 주로 삶에서 오는 것 같다. 연습실 밖으로 나오며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많이 보이고 들리더라.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내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지금은 정치인을 비롯해 동물 학대·아동 학대·환경·교육 등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과 연결해보고 있다.
김설진 나에게도 일상생활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작품의 소재이다. 내가 겪은 일이나 사람들의 행동, 그리고 평범한 일상 중에 갑자기 드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글이나 그림으로 모두 노트에 기록해 둔다. 항상 노트 2~3개 정도를 들고 다니는데, 이렇게 모은 노트가 신발 상자로 3박스 정도다.
굉장한 재산 아닌가?
김설진 내 보물 1호다. 어떤 것은 글로 적어야 하는 게 있고, 어떤 것은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게 있다. 그러나 글과 그림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무대에 서기도 한다. 물론 춤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모두 상호보완적인 존재다. 관심이 없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작업하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 없이 노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에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이 무대 아이디어로 이어지기도 한다.
각자 안무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방향성이 있다면.
김용걸 아버지가 그러셨다. 남을 도와줄망정 폐는 끼치지 말고 살라고.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만 산다면 세상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업을 할 때도 서로 존중한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설진 맞다. 이 부분은 피핑 톰 무용단을 통해 많이 느낄 수 있다. 트럭 운전사, 매니저, 안무가, 무용수가 모두 동등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좋은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또 한가지 가치라면 ‘솔직해지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이정도면 됐어, 이건 모르겠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야’라는 식의 얕은 생각은 할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간혹 나태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지가 더 중요한 것이지 아닌 척 포장에만 급급하면 자기 합리화밖에 되지 않는다.
‘음악’이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도 궁금하다.
김용걸 내 작업에서는 음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아이팟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는데, 좋은 곡을 발견하면 일단 다 넣어놓고 안무와 음악을 매치해 본다. 음악이 먼저고, 그 위에 콘셉트와 동작 등 여러 가지 옷을 입혀보며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김설진 내 경우에는 작품마다 다르다. 음악이 먼저 주가 될 때도 있고, 아예 상관없을 때도 있다. 두 가지가 같이 가는 경우도 있고. 2003년에 한예종에 입학하고 바로 신인 콩쿠르에 나갔었는데. 말이 참 많았다. 운이 좋게도 상을 받았지만, 약간 허무함과 동시에 슬럼프가 왔다. 주변 시선 때문이었다. 만약 조금 덜하면 상을 받더니 덜하네, 조금 더 하면 받았다고 오버하네, 똑같으면 변한 게 없네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때 무언가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공부, 그중에서도 음악 공부를 조금 더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작품에는 주로 어떤 음악을 사용하고 있나?
김용걸 바로크부터 현대, 미니멀리즘 등 다양하다. 음악은 내 안무에 영감을 주는 첫 번째 요소다. 그 요소가 다른 음악으로 파생되고, 또 동작으로 이어지는 거다. 꼭 창작 음악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다 다루지 못할 정도의 매우 많은 음악이 있으니까. 평소에 라디오도 계속 듣는데, 오늘은 운전하며 국악방송을 들었다. 장르 구분 없이 나를 당기는 음악이 있더라.
김설진 졸업할 때까지 유명 안무가들이 거쳤던 음악들, 생상스·라벨·스트라빈스키 등의 클래식 음악을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더 다양한 음악을 접했다. 학교에 다닐 때야 상관없지만,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는 내 작품에 차별성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면서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들, 연극적인 요소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현대무용에서는 대중음악도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음악을 발레 안무로 선보인다면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김용걸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대중음악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퓨전 국악이나 생황소리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좋아한다. 골동품 가게에서 나는 냄새가 느껴진 달까.
허물어진 경계
최근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진 작품들이 많아졌다.
김설진 그 경계는 공연예술이냐, 필름 예술이냐, 설치 예술이냐 정도의 차이일 것 같다. 경계를 나누는 것이 의미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김용걸 나는 무용과 연극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거기에 음악과 미술, 영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지 않게 잘 융합된다면 좋겠다.
김설진 사실 지원금을 받기 위한 경우도 있다. 갑자기 ‘융복합’이란 것이 생기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룹들이 지원금 사업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작업을 하든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장르가 무엇인지는 본인이 판단하기보다는 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더불어 설치 미술가나 영화감독 등 다른 분야에서 안무가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김용걸 안무가가 설치미술이나 연극 분야 출신일 때 또 다른 방식이 나온다. 그것도 예술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유럽에서 이러한 시도들이 많은데, 좋은 자극을 받았으면 한다.
김설진 빔반데키부스같은 경우도 영화감독 출신이고, 알랑 플라텔도 심리 분야에서 일을 했었다. 우리나라의 홍승엽 안무가도 원래는 섬유공학 디자인을 하다가 안무를 한 경우다. 반대로 포사이드는 요즘 설치미술을 하고 있다. 본인이 하던 장르에서 풀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 있어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는 사람 중 주목하는 안무가가 있는지.
김용걸 딱 한 사람 있다. 그리스 출신의 안무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김설진 나도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가 생각났다. 그리스에서 만난 적이 있다.
김용걸 원래 설치미술가 출신으로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총감독을 맡았었다.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로 내한해 ‘위대한 조련사’라는 작품을 공연했는데, 충격적이었다. 역사와 철학·인문·사회·예술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철학자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공연이 끝나고 세트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무가와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돌아갔다. 음악·미술·연극·인문·철학 등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김설진 한국에서는 규모가 큰 작품들로만 유명한데, 다른 소규모 작품들을 봐도 굉장히 큰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시각적으로 굉장히 뛰어나다.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용걸 바람직한 흐름이다. 국내에서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발레 안무가의 성장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있다. 발레 무용수 출신의 안무가가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춤 장르가 아닌 발레 무용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에 비해 한국의 발레 안무가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만의 색깔을 찾기 위한 과정 중에 있다.
김설진 해외에서 활약하는 발레 무용수에 비해 발레 안무가가 국내에 많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무용의 경우 작품이 레퍼토리화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내 현대무용단체나 작품의 해외 진출이 타 무용 장르보다 더 빠른 것 같다.
올해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국내를 대표하는 안무가로 함께 오른다. 처음으로 안무가와 함께하는 공연이어서 의미가 크다.
김설진 ‘한국을 빛내는’이란 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감사하다.(웃음) ‘고막 속 난쟁이’라는 작품을 선보이는데,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내 안의 여러 가지 자아들이 나와 속삭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김용걸 올해로 4년째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데, 이번에는 안무가로도 초청받았다. 이번 공연에서 내가 안무한 총 4작품을 선보인다. 정재은(폴란드 국립발레)과 최원준(폴란드 브로츠와프 오페라 발레)이 ‘의식(Conscience)’을, 툴사 발레의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던 이현준(유니버설 발레단)과 강미선(유니버설 발레단)이 ‘산책’을, 김용걸발레시어터가 ‘레 무브망’을 선보인다. 나 또한 김다운 무용수와 함께 무대에 올라 ‘망각(Obliviate)’을 공연한다. 올해 공연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에게만 초점을 두지 않고, 국내 영스타와 안무가 등 무용계의 흐름에 맞추어 그 시선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국내 무용계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두 남자의 춤이 남긴 것… 안무가로서 만난 김용걸과 김설진은 작품 하나만으로도 밤새워 이야기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무대’라는 중심을 두고, 교육과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춤과 무대로 옮겨놓는 두 안무가. 그들은 끊임없이 ‘왜(Why)?’를 외치며 더 깊고 더 넓게 파고든다. 진지하기만 할 것 같았던 그들과의 대화는 오히려 위트와 유머로 반전을 주었다. 촬영장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김용걸과 김설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무대로 피어난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김용호
해외 한국 무용수들의 부가가치
한국 무용수들의 해외 활약상이 쉼 없이 전해지는 가운데, 국내 무용계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무용계의 변화와 성장, 그 흐름을 따라가 본다
이번에는 프랑스였다. 6월 5일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낭보,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의 브노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 등극은 대한민국 댄서들이 세계 발레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박세은이 2007년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영스타로 출연했을 때 예술감독을 맡았던 강수진, 당시 슈투트가르트발레 수석 무용수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대단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댄서”라고 힘주어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 무용계의 변화와 성장
대한민국의 무용수들이 이렇듯 빼어난 춤을 보여주는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고대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기던 민족적인 기질, 실기전문 교육을 표방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출범으로 인한 교육 시스템의 진화, 바가노바나 RAD 등 외국 발레 교육 메소드와 외국인 지도자의 영입, 직업발레단과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을 통한 다양한 작품의 유입, 그리고 무용수들의 체형변화 등을 그 요인으로 꼽는다. 지난 10여 년 사이 한국 발레계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 양상은 창작 작업 증가·발레 축제 태동·컨템퍼러리 발레 확산·직업발레단과 전문발레단의 활성화, 특정 관객층을 위한 타깃형 작품 제작 증가·성인 발레 등 대중들과의 소통기회 확대·발레 관객층 확산·해외 무용수들의 국내 교류 확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무용수들의 해외 진출은 한국과 세계 여러 나라와의 춤 교류 채널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공연 교류에서부터 무용수들, 안무가들의 교류, 나아가 교육적인 프로그램의 교환에서부터 공동 프로덕션까지도 가능해질 수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무용수들이 안무가로 성장하거나(허용순·주재만·김세연·정현진·허성임 등), 국내로 돌아와 직업무용단에서 활약하거나(김지영·한상이·박나리 등), 전문 무용단을 결성해 운영하거나 (전은선·김남진·이용인·예효승·차진엽 등) 뛰어난 발레 교육자나 지도자로 변신(김용걸·조주현·유지연·강예나·조주환·서동현 등)한 사례 등은 이들의 활약이 그대로 국내 무용계 발전과 연계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흐름에 맞춰 변화된 무대
한국 무용수들의 해외 무대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매년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무용수들을 초청해 고국에서 공연 무대를 마련해 주는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00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이 공연을 통해 초청된 해외 무용수들의 숫자가 100여 명에 이르며, 해외 무대로의 진출이 예상되는 영스타로 초청된 무용수들 대부분이 실제 메이저 발레단에서 주역급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영스타로 출연한 이상은은 드레스덴 발레, 2007년 출연한 박세은과 채지영은 파리 오페라 발레와 보스턴 발레의 주역 무용수로, 2008년에 출연한 김기민과 최영규는 마린스키 발레와 네덜란드 국립발레에서 각각 수석 무용수로, 2010년 출연한 김민정은 헝가리 국립발레에서 활약하고 있다.
올해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 공연’은 무용계의 흐름에 발맞추어 올해 새롭게 도약한다. 그동안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무용수들의 성장한 모습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인 것에 그쳤다면, 올해부터는 안무가가 참여하며 무용수들이 새로운 레퍼토리를 통해 해외 활동에서 더 큰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예술감독 김용걸과 피핑 톰 무용단의 김설진이 국내를 대표하는 안무가로 참여한다. 무용수는 레퍼토리를 늘리고, 안무가는 자신의 작품을 여러 무대로 유통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온 무용수, 국내초청 영스타 등 국내외를 아우르는 새로운 시도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무용계의 미래를 위한 투자
세계 여러 나라의 컴퍼니에서 활약하는 한국 출신의 무용수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한국 무용계의 위상이나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 들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대한민국을 알리는 일이 되고, 결국에는 문화예술을 통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외에 진출해 있는 무용수를 지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무용수 개인에 대한 후원이기보다는 뒤집어 보면 국내 무용계 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작업을 존중하고 그 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글 장광열(춤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