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김은선, 비상한 그녀의 고공비행

비상한 그녀의 고공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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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7월 27일 2:43 오후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잘 알려진, 그래서 ‘은선 킴(Eun Sun Kim)’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익숙한 사람. 이제는 미국으로까지 날개를 펼친 마에스트라. 지휘자 김은선은 지금 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다. ‘여성 최초’ ‘한국인 최초’라는 그녀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 거쳐 간 도시들, 지금의 김은선을 있게 한 사람들까지. 김은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국내에서 그녀의 소식을 접하긴 힘들었다. 4월 첫째 주, 궁금함을 가득 담아 김은선에게 이메일로 질문지를 보냈다. 한 주 뒤 날아온 답변은꼼꼼하고 차분했다. 답변을 읽고 그녀의 이야기를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어져, 오스트리아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하늘을 날다

‘테아트로 레알’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스페인 왕립오페라극장. 1858년 설립된 이 극장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가 2010년 탄생했다. 그녀의 이름은 ‘은선 킴’. 1980년 한국 태생의 그녀는 연세대 작곡과와 같은 대학원 지휘과를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 음대 재학 중이던 2008년 스페인에서 열린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오페라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우승 특전으로, 김은선은 스페인의 이 유서 깊은 극장의 포디엄에 오를 기회를 거머쥐었다.2012년 프랑크푸르트 오퍼의 ‘라 보엠’ 공연은 그녀가 본격적인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2013년 영국의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2014년에는 이탈리아의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며 호평이 이어졌다. 스톡홀름 로열 오페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베를린 슈타츠오퍼, 쾰른 오퍼 등 굵직한 무대에 연이어 데뷔했다. 올 시즌에는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 개막공연을 통해 미국 진출을 이뤘고,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 데뷔함으로써 독일의 주요 오페라극장을 섭렵했다. 드레스덴·베를린·프랑크푸르트 등지의 재초청은 어느덧 익숙한 일이 됐다. 노르웨이 방송교향악단과 스웨덴의 말뫼 심포니, 덴마크의 아르후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교향곡 지휘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첫발을 내디딜 때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첫 무대’는 어떤 공연이었나? 

2012년 프랑크푸르트 오퍼에서의 첫 무대가 내 커리어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사실 그건 갑자기 생겨난 공연이었다. 원래 계획됐던 공연이 한 달 전에 취소되면서, 극장장이 즉흥적으로 그 시즌에 공연 중이던 오페라 ‘라 보엠’을 추가한 것이다. 오페라하우스에서 그 공연을 위해 연주자들을 급하게 구하고 있었고, 극장장이 지휘자 베르트랑 드 비이(Bertrand de Billy)에게 ‘리허설 없이 바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지휘자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김은선을 시켜보라’고 해서 기회가 온 것이다. 아무 연습 없이 공연 당일 저녁에 바로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를 했고, 공연이 감사하게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프랑크푸르트 극장장은 그 뒤로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등에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공연을 관람했던 마르세유 오페라의 상임지휘자도 나를 좋게 평가해서 프랑스에서도 제안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

2017/2018 시즌 역시 굵직한 공연들로 채워져 있다.

공연과 리허설을 오가며 바쁘게 보내고 있다. 올 시즌 드레스덴 젬퍼오퍼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베를린 슈타츠오퍼 등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번 시즌을 지나면서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지난 1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재공연한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의 감회가 남달랐다. 2015년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데뷔해 여러 공연을 했지만, 2010년부터 2017년 여름까지 극장이 보수공사를 해 다른 건물에서 공연했기 때문에, 극장의 본 건물에서 연주하는 것은 나도 지난 1월이 처음이었다. 리허설하러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는데, 관객석 저 멀리 내가 유학생 시절 처음 앉았던 맨 꼭대기 좌석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참 묘했다. 처음 이 극장에 들어와서 ‘내가 진짜 유럽에 온 것이 맞구나, 나도 나중에 여기에 서게 될 날이 올까’하고 설레던 기억과,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오케스트라 단원들 얼굴을 보며 드는 편안한 마음이 합쳐지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한 번은 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더 이상 운이 아닌 실력’이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베를린·드레스덴·스톡홀름 등 여러 오페라극장과 거듭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결국 다른 모든 인간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 서로 실력도 좋고 잘 통하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오퍼와는 특히 궁합이 잘 맞나 보다. 마침 어젯밤에 프랑크푸르트 오퍼와 함께한 레하르 ‘룩셈부르크 백작’ 2015년 실황 음반(욈스 레이블)을 들었다. 한밤중에 들었는데도 신나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음반이 나왔나?(놀라며 웃음) 전혀 몰랐다.

 

김은선이 지휘한 프랑크푸르트 오퍼 ‘룩셈부르크 백작’의 2015년 실황 음반(욈스)

 

‘그라모폰’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와 평론이 이 음반에 호평을 내놓았다. “김은선은 이 작품에 대한 완벽한 지휘권을 가진다” “누가 노래를 하든, 이 오페레타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김은선이다” 등 좋은 평가가 달렸던데.

해석은 각자에게 맡기고 싶다. 언젠가 바렌보임이 뉴욕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는데, 같은 연주를 두고 한 매체는 극찬, 다른 매체는 혹평을 했다고 한다. 바렌보임은 그걸 보더니 “바렌보임이 둘이었나 보다”고 웃으며 얘기했다. 연주에 대한 반응과 판단은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지난해 10월 휴스턴에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로 미국 데뷔를 이뤘다. 당시 홍수로 인해 다소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도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는데.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의 2017/2018 시즌 개막공연이자 내게는 미국에서의 첫 무대였는데, 작년 여름 허리케인으로 인해 극장이 완전히 물에 잠겨 문을 닫은 상황을 듣게 됐다. 휴스턴 측은 내게 ‘미국 데뷔를 이런 상황에서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며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는데, 내가 그냥 하겠다고 했다. 전시장을 빌려 오페라 무대로 겨우 꾸민 임시 공연장이었지만, 매 공연마다 매진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음악의 힘을 또다시 깨닫게 됐다.

오는 5월 미국 신시내티 메이 페스티벌(May Festival)에서 제임스 러바인을 대신해 베르디 ‘레퀴엠’의 지휘를 맡게 돼 또 한 번 미국 무대를 밟는다(러바인은 지난 3월 성추문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파면되며 음악계에서 불명예를 떠안았다). 페스티벌의 145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로 무대에 오르게 됐다.

1월 말쯤 에이전시를 통해 ‘신시내티에서 러바인을 대신할 지휘자로 나를 선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오케스트라와의 만남은 항상 기대되고 흥분된다.

 

ⓒNikolaj Lund

거장을 통해 자양분을 흡수하다

테아트로 레알 부지휘자 시절, 김은선은 2년 동안 단원들은 물론, 극장의 스태프 등 동료들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 다니엘 바렌보임과 키릴 페트렌코 등의 보조지휘자 경험을 통해 선배 지휘자들의 장점과 노하우를 흡수해갔다. 지금도 틈날 때면 이들의 리허설을 찾아가서 영감을 얻고, 작품에 대해 질문한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하며 배운 점은 무엇인가.(김은선은 ‘다니엘’과 ‘키릴’로 편하게 칭했다. 뉘앙스를 살리고자 그대로 싣는다)

다니엘과의 인연은 2010년부터 시작됐는데, 그는 악보 안에 담겨 있는 음악의 뜻을 읽어내는 법, 그리고 ‘왜’와 ‘어떻게’를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다니엘은 연습을 연습처럼 하지 말고 연주를 연주처럼 하지 말한다. 연습이나 연주나 늘 똑같이 정성들여서 하라는 너무나 쉬운 말 같지만, 사실 오케스트라나 다른 연주자들에게는 매일 있는 리허설을 늘 연주처럼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음악은 언제나 순간의 예술이고, 지금 이 순간 내는 음을 최선을 다해서 아름답게 유지하다가 공기 중으로 잘 보내줘야 한다”고 늘 말한다.

2011년 키릴 페트렌코의 보조 지휘를 맡으며 그와 인연을 쌓았다.

다니엘에게서 기본적인 큰 틀을 배웠다면 키릴을 통해서는 그 큰 틀 안에서 끝없이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 키릴은 악보 공부와 연구를 위해 잠도 거의 자지 않을 정도로 열정을 쏟는다. 어느 디테일 하나도 그냥 흘리지 않고, 단 한마디를 가지고도 본인이 궁금한 것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고 공부하며 작곡가의 의도에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악보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지휘자다. ‘이 사람은 남들이 이 정도면 됐다고 공부를 끝낼 때가 시작점인 사람이구나’ 싶었다. 키릴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지휘자라면, 난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싶었다. 키릴도 내게 “우리 에이전시에서 당신을 내게 보조 지휘로 붙인 이유가 이런 부분을 더 많이 보고 배우라는 뜻인 것 같다”고 하더라.

자신도 누구 못지않게 독한 사람 아닌가.

나도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키릴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된다. 내가 감히 지휘를 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어떤 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언론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 지휘자라 더욱 궁금하다.

원하는 바를 집요하고 확실하게 얻어내면서도 위트가 넘쳐서 늘 좋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지휘자가 원하는 수준과 연주자가 가진 역량이 다를 때, 키릴은 상대방의 역량에서 10%를 더 발휘하게끔 만든다. 예전에 어느 공연에서 한 성악가가 준비를 충분히 못한 상태였는데, 키릴은 그 사람과 매일매일 1시간씩 함께했다. 매번 처음 만난 사람처럼 정성껏 노력하더라. 지휘자의 역할이란 게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지금처럼 바쁘지 않았던 때에는 거의 매일 키릴의 리허설을 보러 갔다.

 

Ugo Ponte/ONL

젊은·아시아·여성 지휘자의 길

2015년 1월 김은선은 ‘잉그리트 추 졸름스 재단 문화상(Kulturpreise der Ingrid Zu Solms-Stiftung)’을 받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다양한 분야의 여성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으로, 김은선은 2014년 프랑크푸르트 오퍼에서 공연한 벨리니 ‘몽유병 여인’을 계기로 이 상을 받게 됐다. 김은선은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혹자는 그녀의 커리어에 대해 ‘정명훈의 30대 시절 경력을 웃돈다’는 말로 확실한 기준치를 보여준다.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최초’의 타이틀을 쌓아가는 그녀의 커리어는 음악계 전체의 지형도 위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1. 여성 지휘자 김은선

동양인 지휘자의 길도 어렵고 여성 지휘자의 길도 어려운데, ‘동양인 여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경험도 하고 복잡한 감정도 느끼지 않나.

처음 가는 오케스트라에서, 첫날 첫 순간에 가끔 느끼는 편견의 눈빛들이 있다. 여성 지휘자는 몇 번 봤어도 동양인 여성 지휘자는 많이 보지 못한데다가,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 출신이지 않나. 나는 그것을 서양음악을 하는 서양세계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독일 오케스트라와 독일 성악가들과 바그너를 연주하는데 어리게 생긴 동양인이 들어오는데 그들이 의심이나 선입견을 품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한 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기 편한 점은, 자국민 못지않은 언어와 음악적인 이해도를 보여주면 그 순간에 이미 ‘프로 대 프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 지휘자들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난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스페인 왕립극장 부지휘자를 끝내고 지금의 에이전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제일 처음 했던 질문이 “인내심이 있는가”였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는 “당신은 여자고, 동양인이고, 어리고, 키도 작기 때문에 남들보다 4배 이상 실력이 좋아야 겨우 남들과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쟁을 시작할 수 있다. 나도 그런 선입견들이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고, 당신의 실력으로 언젠가는 그 외적인 조건들을 뛰어넘고 인정받는 지휘자가 되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일단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내게 말해줬다.

맞닥뜨려야 할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였을 텐데.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데 세상의 잣대에 맞춰서 불평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들은 모두 내가 지휘대에 서 있을 때는 ‘지휘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대할 때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 예를 들면 첼로 연주자, 플루트 연주자 등으로 대하지 굳이 플루트 여단원, 바이올린 남단원이라고 성별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에이전시 식구인 시몬 영(Simone Young)에 대해서도, 그녀가 지휘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면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나도 시몬 같이 훌륭한 ‘여성’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지휘자일 뿐이다.

현재 속해 있는 에이전시(Arsis)도 흥미롭다. 키릴 페트렌코와 필리프 조르당 등을 포함해 12명의 지휘자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4명이 여성이다-김은선, 시몬 영, 카렌 카멘세크(Karen Kamensek), 요아나 말비츠(Joana Mallwitz). 꽤 높은 비율 아닌가. 여기서 발생하는 시너지도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그 에이전트가 바로 우리 에이전시의 대표(김은선의 전남편)다. 그는 음악만 보고 사는 사람, 걸어 다니는 음악백과사전 같은 사람이다. 연주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에이전트다. 나를 뽑을 때도 그랬고, 이십여 년 전에 시몬 영을 영입할 때도 성별에 대한 선입견 없이 실력만으로 판단해 영입했다. 키릴 페트렌코도 학생 졸업연주 때 그가 발탁했다.

음악계의 수많은 직업 중 성별 고정관념이 가장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지휘자인데, 여성으로서 지휘자를 꿈꾸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는지.

연세대 3학년 시절, 혹시나 나중에 내가 쓴 곡을 직접 지휘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초만 배워보려고 ‘교향악 지휘법’을 수강했는데, 그 강의가 끝나갈 무렵 최승한 교수님께서 내게 지휘를 공부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이후 4학년 때 학교 오페라공연에 연습지휘를 하면서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손을 움직이는 대로 오케스트라가 따라오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전에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너무나 떨렸고, 지휘자가 아닌 일상의 김은선 상태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한다. 입꼬리가 막 떨린다.(웃음) 하지만 지휘할 때는 떨리지 않고, 늘 즐겁다.

교수님이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본 것이다.

지금은 여성 지휘자들이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최 교수님이 내게서 그런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해주신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자로서의 나의 삶을 걱정하셨다. “지휘자는 어디 가서 쭈뼛거리지 말고 항상 당당해야 하는데, 여자인 네가 어떻게 먼저 손 내밀면서 당당하게 악수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저보다 2세대쯤 윗분이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재밌는 건, 지금도 한국에 가끔 가서 예전 선생님들이나 남자 어른들과 인사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먼저 손을 내민다.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악수하니까. 근데 상대방 쪽에서 손이 나오지 않는 거다! ‘아, 내가 한국에 왔구나’를 깨닫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가끔 연주를 끝내고 나올 때 연주자 입구에 그 도시 음대에 지휘하는 여학생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당신을 보면서 우리도 열심히 하고 있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구나’하고 느끼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여성’이 지휘를 한다는 것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외국에서도 인터뷰할 때 많은 이들이 “여성 지휘자라서 남자보다 더 힘들지 않느냐”고 궁금해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남자였던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럼 사람들이 다 웃는다. 사실 이 직업은 여성과 남성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어려운 직업이라 남자들이 정말 여자들보다 더 쉽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문현답이다. 물론 내가 지금 이 정도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것은 시몬 영 같은 선배 여성 지휘자가 앞서서 걸어간 덕분이다. 정말 많은 어려움과 무시를 겪으며 유리천장을 깨부수던 선배들이다. 그래서 시몬에게 항상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시몬이 지휘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더라. 거기에 비하면 나는 비교적 쉽게 가고 있는 편이다.

Jurgen Keiper

#2. 동양인 지휘자 김은선

45년간 빈 필하모닉의 최장수 악장이었던 라이너 퀴힐과 지난해 인터뷰를 했다. 비엔나 왈츠의 독특한 리듬을 예로 들면서 각 지역마다의 고유한 특색이 있고, 타 지역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온전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하지만 현재, 특히 비서구권인 아시아 출신 음악가들은 ‘음악에는 인종과 국경이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양음악을 하는 것 아닌가. 과연 무엇이 맞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졌던 대화였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동양인 지휘자로서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기자님 이야기와 퀴힐의 말 모두 동의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독일에 가면 비엔나 왈츠의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빈에서만 나올 수 있는 뉘앙스인 것이다. 외국 오케스트라가 한국의 ‘아리랑’을 연주하는 느낌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악보에 쓰여 있지 않은 밀리미터만큼의 루바토가 있지 않나. 그 미세한 차이를 포착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결국 그래서 언어를 정복해야 하는 것이고.

언어가 생각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사람은 언어를 도구 삼아 생각을 펼쳐나가는데, 그 언어의 특성이 곧 사고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니, 음악적인 어법을 뛰어넘는 독특한 뉘앙스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바로 그거다. 발음 문제만 봐도 그렇다. 예컨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는 문장을 놓고 보면, 독일어는 악센트가 앞음절에 붙기 때문에, 독일사람이 이 문장을 읽으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로 발음할 거고, 한국어는 말끝을 길게 늘이는 편이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에 가깝게 들릴 거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유학생을 말을 따라할 때 “○○세요~ ○○○○다~”라고 흉내를 낸다. 그런 미묘한 차이가 음악에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언어 공부에 항상 매진한다고 들었다. 영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늦은 나이에 유학을 왔기 때문에 쉬지 않고 공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한다. 단원들과 소통하고 리허설이 빠르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한국말이 서투른 외국인의 특이한 억양을 들으면서 가끔 그 외국인의 국적을 맞힐 수 있는 것처럼 각각의 언어에는 리듬과 다이내믹이 있다. 작곡가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자기 언어의 리듬을 따라 곡을 썼다. 오페라뿐 아니라 교향곡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프랑스 작품인지 독일 작품인지 유추할 수 있고, 심지어는 같은 독일어권이라도 ‘모차르트 같은지 베토벤 같은지’를 구분하며 작곡가 개인의 특성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문제로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텐데.

처음 프랑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갔을 때는 프랑스어를 인사말과 간단한 숫자 정도만 알아서 리허설을 영어로 했다. 영어로 해도 다 통하는 것 같지만, 정말 세부적인 것들이나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잘 소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단원들은 내게 프랑스어로 질문을 하더라. 연주가 끝나고 오케스트라 단장이 다음 시즌에 한 번 더 와달라고 해서 스케줄이 확정된 뒤로 정말 미친 듯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년 뒤 다시 그 악단에 가서 프랑스어로 리허설을 했더니, 단원들이 너무나 크게 박수를 보내주면서 좋아했다. 그때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현재는 내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할 ‘루살카’를 위해 체코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3. 젊은 지휘자 김은선

한참 경력을 쌓아가는 젊은 지휘자로서의 솔직한 고민이 느껴진다.

모든 음악전공을 통틀어 유일하게 집에서 연습해 볼 수 있는 악기(오케스트라)가 없는 직업이고, 또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직업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이고 과제인데, 그것은 혼자 연습해 볼 수 없고 실전을 통해서만 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상상하던 소리와 실제 앞에 있는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를 경우 그것을 주어진 리허설시간 안에 어떻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지휘자들에게는 매번 실전 리허설 현장이 연습이라 실수가 많은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는 소위 리더라고 불리는 앞에 서 있는 역할이라 너무 서투르거나 실수가 많을 경우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어지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원들과의 신뢰와 유대를 쌓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것 같다.

딴지 걸고 투덜대는 사람은 어느 오케스트라에나, 어느 집단에나 있다. 다니엘이나 키릴도 그런 불평을 듣지만, 그 순간 아주 유머러스하게 대처한다. 연륜과 여유다. 2년 전쯤 어느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어느 단원이 “당신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며 내게 화를 내더라. 내가 연주 도중에 그를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나는 당신을 쳐다본 적이 없지만, 내 눈이 이렇게 작고 찢어져서, 내가 다른 사람을 봤는데 당신을 봤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박장대소를 하더니 “당신 눈 작은 거 당신도 알아?”라고 하더라(나중에 알았는데, 그 단원은 한국인 부인과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자존심도 엄청 상하고 화도 났을 텐데, 그런 일을 많이 겪어서 무뎌진 것 같다.

도전해야 할 상황이 오면 기꺼이 즐기는 것 같다.

후회가 없는 성격이다. ‘할걸’ 혹은 ‘하지 말걸’ 같은 후회는 안 한다. ‘이번엔 실수가 있었으니,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휘자는 결정이 빨라야 한다. 찰나의 순간에 결정이 이뤄져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한국에서 만날 김은선을 기대하며

한국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날은 아직인가.

아쉽게도 아직 정해진 바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좋은 기회에 좋은 작품으로 한국을 찾는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한국에서 에이전시를 통해 스케줄 문의가 종종 온다. 하지만 유럽은 2~3년 치 스케줄이 미리 정해지는데, 한국에서는 당해의 공연 일정을 이야기하니 아직은 맞추기가 어렵다.

한국은 뛰어난 성악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오페라 인프라는 부족한 실정이다. 구조의 한계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선 내가 한 번도 한국 환경에서 작업해본 적이 없어서 말하기 조심스럽긴 하다. 여태껏 내게 들어온 공연 문의들을 생각해보면, 일본의 공연기획자 및 캐스팅 담당자들은 해외정보에 정통하다. 일본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클래식 음악 시장이 발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해외에서 활동한다고 하면 ‘덮어놓고’ 캐스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더 잘할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우리나라도 좋은 기획자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할 것 같다.

한국 음악가들과는 교류가 많은 편이신지.

많지는 않다. 연광철 선생님은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라서 성악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가끔 연락하며 지낸다. 최수열 지휘자와 자주 연락하고 음악적인 이야기도 많이 한다. 진짜 공부 열심히 하는 지휘자다.

지휘자를 꿈꾸는 한국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언어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해외에서 활동할 계획이라면, 언어를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음악 활동 이외의 일상도 궁금하다.

8년째 빈에 살고 있는데, 사실 빈에 있는 시간은 1년을 통틀어 한 달이 채 안 된다. 항상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고 다른 기후나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 사실 지금 하는 작품을 준비하고, 앞으로 할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고, 언어를 공부하는 등의 시간을 제외하면 취미생활을 할 여유는 거의 없다. 만약에 시간이 생긴다면 바둑을 꼭 배워보고 싶다.

2008년 콩쿠르 우승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2018년의 지휘자 김은선을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는가?

지금 어떤 지휘자인지보다는, 되고 싶은 모습을 말하고 싶다. 옛 거장 지휘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가 쓴 ‘The Composer’s Advocate’라는 책이 있다. ‘지휘자는 작곡가의 대변인이어야 한다’는 말인데, 내가 원하는 지휘자상에 가장 적합한 말인 것 같다. 작곡가가 머릿속에 상상했던 그 음악을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고자 하는 지휘자, 그리고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이 즐기며 연주할 수 있게 영감을 주는 지휘자, 그런 지휘자가 되기 위해 늘 노력하는 중이다.

지금부터 또 10년이 흘러 2028년이 되면, 그때의 김은선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28년에 다시 질문해주면 그때 대답하겠다!(웃음) 지금과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하는 김은선을 2028년에도 만났으면 좋겠다.

 

Ugo Ponte/ONL

epilogue

 

서울과 빈, 밤과 낮. 김은선과 나는 지구를 가로질러 대화했다. 몇 차례의 메일과 전화, 메신저를 통해 마주한 그녀는 밝고 독한 사람이었다. 여성이면서 동양인, 동양인이면서 여성. 어쩌면 그녀가 매번 누군가와 새롭게 만날 때마다 ‘인식 당할’ 바코드 같은 표식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여의사’라는 말은 있으나 ‘남의사’라는 단어는 없는 사회다. 남의사는 의사로 바로 표현될 수 있기에, 한 글자가 더 낭비된 단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지휘자’ 역시 아직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현악기든 관악기든 여성 연주자에 대해 더 이상 신기하게 보진 않지만, 포디엄에 오르는 지휘자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낯설게 바라본다. 그러나 김은선은 동양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부인하지도, 그 속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는다. 그저 열심히 매 순간을 살 뿐이다. 다행인 것은 김은선을 이야기할 때 여성이라는 라벨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또 동양인이라는 수식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녀는 스스로 온전히 지휘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녀는 ‘지휘자 김은선’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갈 예정이다. 도전을 즐기는 그녀가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2019년 파리 관현악단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2020년 빈 슈타츠오퍼와 밀워키 심포니, 2021년 시카고 오페라. 앞으로 김은선이 새롭게 데뷔할 곳들이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와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 베르겐 필하모닉 등은 2022년까지 매 시즌 스케줄이 잡혀있다. 세계 곳곳을 누비는 그녀의 무대를 조만간 한국에서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전에, 한국에 오면 함께 커피 한 잔 하자는 약속부터 속히 이뤄지기를!글 이정은 기자  사진 Arsi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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