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여서 빛난 스타들
스타즈 온 스테이지
8월 15일 | 롯데콘서트홀
한 명의 음악가가 탄생하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들에겐 어린 시절부터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연륜을 쌓아가는 평생의 시간 동안 친구들이 필요하다. 그 친구들은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평생의 파트너인 매니저가 될 수도 있다. 아직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사와의 우정의 역사가 깊지 않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근래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듯하다.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사가 함께 펼치는 1일 4회의 실내악 콜라보 무대가 8월 15일 펼쳐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젊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 선 이날 공연에는 피아니스트 임동혁·김선욱·선우예권, 소프라노 황수미,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김수연, 첼리스트 문태국·이상 엔더스, 노부스 콰르텟, 클럽 M까지, 각 기획사에 소속된 연주자들이 신선한 레퍼토리와 조합으로 새로운 감동을 이끌어 냈다.
최근 개관한 민간공연장인 롯데콘서트홀에서 7개의 민간 매니지먼트사가 주축이 되어 뛰어난 젊은 클래식 음악 스타들의 콜라보 실내악이 펼쳐진 이 날 무대는 각 연주 자체의 성공 여부를 떠나 경쟁자가 아닌 친구로 만나 이뤄내는 예술의 따뜻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많은 팬을 가진 연주자들인 만큼 그들이 모여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었다. 클래식 음악 역사 사상 가장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 지금, 서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이들의 음악을 알리고 기회를 주고,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도 이번 무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하루에 4회에 걸쳐 펼쳐진 음악회는 1회(오후 12시) 문태국·클럽 M·김수연·이상 엔더스·임동혁을 시작으로 2회(오후 2시 30분) 김수연·선우예권·김선욱·이상 엔더스, 3회(오후 5시) 문태국·김봄소리·노부스 콰르텟·황수미, 4회(오후 7시 30분) 임동혁·선우예권·김선욱·노부스 콰르텟의 연주로 끝을 맺었다. 전체적으로 고전·낭만·현대 음악까지 레퍼토리도 조화롭게 골고루 들을 수 있었다. 4회에서 들려준 피아노 앙상블의 조화와 역동적인 피아니즘은 특별히 빛났다. 마지막 앙코르곡이었던 ‘아리랑’ 역시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우리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한국의 클래식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어떤 감동을 전해야 할지 생각하게 했다. 4회의 공연을 하루에 모두 보기 위해서는 공연 시간이나 휴식시간 조절 등 좀 더 섬세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도 있었지만, 경쟁이 아닌 동행의 의미를 담은 이 같은 무대가 앞으로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국지연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음악
트리오 제이드 ‘베토벤의 시간 17’20’’
8월 16일 | 금호아트홀
공연을 불과 며칠 앞두고, 주최사인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트리오 제이드의 피아니스트 이효주가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에 서지 못한다는 것. 대신 박종해가 그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이효주에 대한 걱정과, 박종해에 대한 기대와,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진행하기로 한 박지윤·이정란에 대한 응원의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공연장에 들어섰다.
1부에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3중주 1번과 2번은 모두 Op.1에 속하는 곡들로, 하이든 등 기존의 고전적·안정적 경향에 기대어 실내악에 발을 내디딘 베토벤의 반짝이는 시도가 드러난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은 선율의 감정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흐름을 이끌었고, 첼리스트 이정란은 음악의 밑바탕을 탄탄히 잡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올해 독일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박종해의 연주는 두 현악기의 소리에 조심스럽게 호흡을 맞추며 이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2부에서는 짧은 알레그레토 WoO39에 이어 베토벤 피아노 3중주 7번 ‘대공’이 연주됐다. ‘대공’은 1부의 초기작들에 비해 베토벤 특유의 음향과 어법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으로, 연주자들 역시 베토벤의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품 있는 선율의 1악장을 지나 등장하는 2악장의 스케르초는 앞서 1부에서 선보인 초기작의 가벼운 명랑함과는 다른, 건강한 청년적 활기가 묻어나며, 첼로가 전면에 나서서 악상을 이끌었다. 3악장에서 박종해는 의외의 조성이 이어지는 베토벤의 낭만적인 화성 진행을 매력적으로 들려줬다. 후기 현악 4중주와 비슷한 농도의 내밀함이 세 연주자의 호흡에서 느껴졌다. 마지막 4악장의 거침없는 질주까지, 세 명의 에너지는 올곧게 뻗어나갔다.
서로 다른 연주자들이 오랜 기간 한 팀으로 활동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2006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함께해온 트리오 제이드의 무대는 언제나 반가울 수밖에 없다. 머지않은 시일 안에 이효주와 함께하는 ‘완전체’의 트리오 제이드를 만나게 되길 바란다.
이정은
무대 위로 펼쳐진 바닷속 판타지
김선희발레단 ‘인어공주’
8월 10~12일 |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어둠이 극장을 덮는다. 무대 막 위에서 하나씩 흩어져 사라지는 ‘인어공주’라는 글자가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는 듯하다.
김선희발레단의 ‘인어공주’는 1997년 서정적 파드되로 초연되었다. 이후 2001년에 2막 발레로 재탄생, 여러 차례 개작을 거치며 ‘판타지 발레’로서 20여 년간 지속되어 왔다. 작품은 다채로운 색감과 개성 있는 캐릭터로 가득하다. 인어공주와 함께 거북이와 불가사리·새우·게 등 해양생물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각의 특징을 잘 담아낸 독특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바다에 빠진 왕자와 그를 구해 육지로 인도한 인어공주. 둘의 운명적 만남을 시작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그리고 장면은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파티장으로 옮겨간다. 굵은 선을 지닌 힘찬 움직임으로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는 왕의 춤이 파티의 시작을 알리고, 물고기와 불가사리·새우·게, 그리고 인어공주와 거북이의 춤이 이어지며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간다. 의상과 분장은 물론 각 생물의 특징을 잘 짚어낸 동작들이 무용수의 탄탄한 기본기 위에 얹어지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호응을 이끌어낸다. 공연 초반 다소 산만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느새 극에 집중한 관객의 순수한 반응들이 무대와 어우러진다.
김선희발레단의 ‘인어공주’는 현재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무용수들이 거쳐 간 작품이다. 마린스키 발레의 김기민과 파리오페라발레의 박세은 등 많은 발레 스타들이 주역 무용수로 활약한 바 있다. 이번 공연의 첫날(10일) 무대에 오른 이수빈(인어공주)과 이상민(왕자) 역시 익숙한 스토리를 평범하지 않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내년 보스톤 발레 입단을 앞두고 있는 이수빈과 올해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파드되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이상민은 가볍고 유려한 움직임과 연기력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날 주역 못지않게 많은 박수를 받은 이들은 바로 ‘게’로 분한 어린 두 무용수였다. 함께 무대에 오른 성인 무용수들 못지않은 탄탄한 기본기 위로 표현력과 연기력을 선보이며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미래의 주역들을 보는 설렘이 마음에 가득했다.
김선희발레단의 ‘인어공주’는 이번 국내 공연에 이어 오는 10월, 뉴욕시티센터 초청 공연을 앞두고 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안데르센 동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안무와 의상, 음악까지 모두 국내 순수 창작물인 이 작품이 해외에서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미라
사랑과 투쟁의 부재에 ‘그’만 남아
뮤지컬 ‘웃는남자’
7월 10일~8월 26일 |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9월 5일~10월 28일 |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뮤지컬이었다. “이 뮤지컬만큼은 연출 때문이라도 꼭 현장에서 봐야한다”며 몇 번이고 강조한 친구 탓에 반신반의하며 티켓을 잡아 예술의전당으로 향한 터였다. 박효신(그윈플렌), 양준모(우르수스), 신수빈(데아), 정선아(조시아나)가 출연한 회차를 관람했다.
한편의 비극적인 ‘동화’ 같았던 공연. 거친 파도와 일렁이는 물살을 빛과 천을 이용해 구현한 몽환적인 무대, 귀족과 가난한 자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세트, 실제로 무대 위에 물을 흘려 재현한 강가 씬, 그리고 기존의 뮤지컬에서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엔딩 연출까지 5년여의 제작기간이 허투루 쓰인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시각적으로 황홀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을 갖춘 만큼 출연진의 안정적이고 탁월한 연기가 인상 깊었는데,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살펴본 바 있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뮤지컬 무대에서 ‘처음 보는’ 박효신의 연기와 무대 장악력은 실로 놀라웠다. 큰 무대 위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디테일에서부터 표정, 움직이는 조형물 위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노래하던 그의 가창력에 전작인 ‘엘리자벳’과 ‘팬텀’ ‘모차르트!’에서 보여준 연기가 궁금할 정도였다.
양천구에서 ‘소 좀 몰던’ 박효신은 어느새 서초구에 위치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전 좌석을 가득 채울 만큼 팬을 몰고 다니고 있었다. 온몸을 사용해 적재적소에 알맞은 소리를 낼 줄 아는 그의 공력에 어쩌면 박효신에게는 앞으로 가수도, 뮤지컬 배우도 아닌 ‘소리꾼’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연출, 흠잡을 곳 없는 연기, 이전에 본적 없는 환상적인 무대를 보여준 것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나, 대립구조와 그윈플렌의 비장미 넘치는 서사가 상당히 압축돼 원작이 주는 이야기의 힘이 약해진 점. 한 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극하는 배우들을 두고 천정을 뚫을 듯한 고음으로만 가창력과 연기력을 증명해보일 수 있다는 듯 넘버 끝마다 고음을 배치해 음악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3시간 남짓의 시간에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대작’을 전부 담기엔 큰 어려움이 뒤따랐겠으나, 잊지 못할 무대와 흠잡을 곳 없던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 작품보다도 훌륭했으므로 이날의 ‘웃는남자’는 별 4개였노라고 말하겠다. ★★★★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