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에일리의 ‘계시’

창조자를 압도해버린 피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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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15일 9:00 오전

이 춤의 운명이라니_4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에일리 무용단의 ‘계시’ ©Whitney Browne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미국 흑인 무용가들이 주류 미국 춤에 합류하는 것이다. 정문을 통해.”
흑인 무용가라면 육감적인 혹은 토착적인 춤밖에 선택지가 없던 시절에 앨빈 에일리는 이들을 극장예술춤의 주체로 세웠다.
‘계시’는 ‘미국 흑인이라는 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창조자를 압도시킬 만큼.

 

‘원 히트 원더’의 굴레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히트시킨 아버지 덕분에 평생 백수로 살아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캐럴 시즌이면 어김없이 쌓이는 저작권료가 반가우면서도 캐럴 제목만 말해도 사람들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지긋지긋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히트곡 작곡가의 아들도 그러할진대 당사자는 어떠할까?

작곡가가 곡 하나를 크게 성공시켰으나 이에 필적한 곡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를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부른다. ‘마카레나’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대개의 창작자는 그만큼의 성공 자체를 부러워하겠지만 당사자에게 ‘원 히트 원더’는 족쇄이다. 아무리 신곡을 꾸준히 발표해도 20년 전의 노래만 듣고파 하는 대중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다.

미국 안무가 앨빈 에일리(Alvin Ailey)의 ‘계시(Revelations, 1960)’는 무용계에서 가장 유명한 원 히트 원더이다. ‘계시’의 기록은 어마어마하다. 초연 이후 지금까지 71개국 2천 3백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1968년의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식, 지미 카터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 등 굵직한 국가행사에 등장했다.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세계순회공연을 했고 1970년에 서방세계 무용단으로는 최초로 소련에서 공연했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수차례 방영되었으며 이 작품을 토대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무용 작품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을 흠뻑 누린 셈이다.

‘계시’는 에일리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이다. 그는 1953년부터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988년까지 총 79편의 작품을 안무했다. 그 중엔 ‘블루스 스위트(Blues Suite, 1958)’나 ‘크라이(Cry, 1971)’처럼 흥행작도 많지만, 어느 것도 ‘계시’의 성공에는 필적할 수 없다. 에일리의 자서전 제목이 ‘계시’이고, 평전의 제목은 ‘계시 춤추기(Dancing Revelations)’이니 말이다.

그러나 ‘계시’는 그저 기특한 화수분에 머무르지 않았다. 관객의 환호를 먹고 성장한 피조물은 안무가나 무용단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졌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 이하 에일리 무용단)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은 ‘계시’를 보러 가는 것을 뜻했고, 이 작품은 무용단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에일리는 ‘계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공연 프로그램에서 ‘계시’를 뺐다가 관객들의 거센 항의로 다시 넣었다. 심지어는 프로그램 초반에 ‘계시’를 넣자 관객들이 이것만 보고 집에 가는 바람에 항상 마지막 순서로 공연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에일리 무용단의 공연은 매회 ‘계시’로 마무리된다. 이번 시즌도 말이다. 에일리의 표현대로 ‘계시’는 ‘그의 목을 조르는 앨버트로스’가 되었다.

 

앨빈 에일리 ©Carl Van Vechten

‘블러드 메모리’의 서사

‘계시’의 팬덤이 유난스러운 이유는 에일리가 주장하듯 미국 흑인의 ‘블러드 메모리(Blood Memory)’에 대한 춤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팽배했던 텍사스 남부에서 자란 흑인 안무가 에일리에게 남겨진 유년의 기억은 일요일에 교회 가기 위해 원색의 외출복으로 차려입은 사람들, 강가에서 펼쳐지던 침례 의식, 목사의 설교와 성가대의 합창, 그 냄새와 후텁지근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등이다. 이러한 일면들을 형상화한 ‘계시’는 미국 흑인들이 지닌 문화적 경험과 기억이 쓸모없는 게 아니라고, 주류 백인 문화보다 열등한 게 아니라고 한다.

‘계시’의 구성은 명료하다. ‘슬픔의 순례(Pilgrim of Sorrow)’ ‘나를 물가로 데려가오(Take Me to the Water)’ ‘움직여라 군중이여 움직여라(Move, Members, Move)’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노예 생활, 침례의식, 교회 예배를 소재로 한다.

‘슬픔의 순례’는 노예의 경험을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갈색 의상을 입은 남녀무용수들이 역삼각형 대형을 이루어 땅에서 솟아나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고난과 구원을 형상화한다. ‘나를 물가로 데려가오’는 흰색과 파란색을 테마로 하여 미국 남부교회의 침례 의식을 묘사한다. 나뭇가지와 흰 천, 커다란 흰 양산을 든 무용수들이 등장하며 여유롭고 풍부한 의식을 수행한다. 배꼽에서부터 사지로 자유로이 요동치는 움직임이 흑인 음악의 당김음과 폴리리듬에 어우러진다. ‘움직여라 군중이여 움직여라’에서는 노란 드레스와 노란 모자를 차려입은 여성들이 의자를 옆구리에 끼고 밀짚 부채를 부치며 등장해서 수다 떨고 웃는다. 무더운 남부 교회의 느긋한 풍경에서 시작하여 점차 달아오르는 남녀 무용수의 흥겨운 춤에 무대 너머 관객도 합류한다. 내밀한 자기성찰에서 시작하여 탁 트인 강가에서의 씻김 의식,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로 전개되는 서사는 에일리의 자전적인 기억과 맞닿은 동시에 미국 흑인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강점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예제라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담으면서도 분노의 대상을 직설적으로 지목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흥겹고 떠들썩한 난장으로 마무리하여 마치 문제가 해결된 듯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이 작품은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싫은 소리라곤 하지 않는 사교계 인사처럼 ‘계시’는 인종갈등이 첨예하던 60년대 미국 사회에서도 두루 사랑받았다.

 

주크박스 댄스콘서트

흑인 영가는 ‘계시’의 뼈대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흥얼거리던 노래, 교회 예배에서 듣던 설교와 찬송가, 학교 글리클럽에서 부르던 가스펠 등의 흑인 음악은 에일리에게 각인되었다.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탈출, 내세에서의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영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미국 흑인의 역사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 보편의 감정을 응축하여 드러낸다. 흑인 영가를 자양분 삼아 탄생한 ‘계시’는 흑인 공동체의 경험, 희망과 믿음에 대한 깊은 감정을 형상화했다.

‘계시’ ©James R. Brantley

이 작품은 주크박스 댄스콘서트라 할 수 있다. ‘주여 나를 고치소서(Fix me, Jesus)’ ‘물가로 들어가라(Wade in the Water)’ ‘나의 영혼에 안식을(Rocka My Soul in the Bosom of Abraham)’ 등 흑인들에게 친숙한 영가가 메들리로 이어진다. 짤막한 히트곡이 이어지는 주크박스 형식은 군무·일인무·이인무 등의 구성을 다채롭게 보여주면서도 재구성과 수정이 쉽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안무전략이다. 초연 시엔 8명의 무용수와 4명의 합창단이 무대에 함께 등장하여 한 시간 동안 16곡을 선보였으나 조금씩 수정되어 현재는 30분 분량의 10곡으로 압축되고 무용수는 19명까지 확장되었다.

그런데 아바의 음악을 엮은 뮤지컬 ‘맘마미아’가 그러하듯, 주크박스 형식은 작품에 선행하는 주제나 예술적 목표보다는 기존 히트곡에 맞춘 것이기에 인기에 비해 비평적인 인정은 박하다. ‘계시’ 역시 그러하다. 당시의 현대무용은 자신만의 움직임을 개발하고 장르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작업에 충실하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계시’는 쉬운 춤이다. 각 춤은 음악의 고저와 양감과 그대로 시각화하고, 가사의 내용과 질감을 그대로 표현한다. 군무와 솔리스트의 대조가 확실하여 주제와 변주를 쉽게 구분할 수 있고, 처음의 주제가 변형되다가 되돌아오는 A-B-C-D-A의 구성이기에 완결된 충족감을 준다. 게다가 재즈 댄스·발레·현대무용·아프리칸 댄스 등 다양한 춤 양식이 절충적으로 결합되었다. ‘계시’는 현대무용이 어렵지 않고, 심지어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보여주었다. 이를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혹은 입문단계의 습작으로 치부한 비평가들도 있었으나 에일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쇼 비즈니스라는 게 부끄럽지 않다. 흑인들은 이에 긴 전통이 있고, 우리 무용단이 매우 잘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선전물

미국 서부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무용에 입문한 에일리는 1950년대 중반에 뉴욕에 와서 브로드웨이쇼에 출연하다가 픽업 무용단을 조직하여 1958년에 데뷔했다. 1960년에 초연된 ‘계시’는 불과 2년 후인 1962년에 WCBS-TV 방송국에서 전국으로 방영되었으며, 같은 해 미국 정부의 후원 아래 13주 동안 호주·홍콩·베트남·일본·한국 등을 순회하는 아시아 투어에서 단골로 공연되었다. 이후로도 ‘계시’는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전국구의 명성과 정부의 공식지원은 상식에서 어긋난다. 겨우 데뷔공연을 치른 서른한 살의 흑인 무용가를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끌어올린 힘은 무엇일까? 게다가 1960년대 초는 민권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 아닌가?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겐 꿈이 있다’고 연설한 것이 1963년이다.

에일리 무용단이 미국문화의 ‘공식적인’ 대표가 되는 데에는 냉전 시대의 문화전쟁이 작용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 정부는 공산권 진영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미국문화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예술가들을 선발하여 파견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흑인 현대무용단은 내부적으로 극렬해가는 인종갈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고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력을 과시하는데 적절한 대상이었다. 긍정적이고 무해한 ‘계시’를 필두로 하여 에일리 무용단은 국내 관객보다도 해외 관객들에게 인지도를 쌓으며 주류 무용단으로 성장했다.

수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투어, 공연, 인터뷰, 각종 사교 행사를 넌덜머리 내면서도 에일리가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흑인 무용가로서의 사명 때문이다. 당시 미국 무용계에서 흑인 무용수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곤 육감적인 혹은 ‘흑인만의’ 토착적인 춤을 추는 것 정도였다. 에일리는 백인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현대무용에서 흑인 무용수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표현의 자유를 주고자 했다. 특히 국제적 명성을 바탕으로 학교나 무용단 등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타 흑인 현대무용가들과 차별되었다.

이례적인 성공으로 인해 ‘계시’는 블랙 댄스의 표본이 되었다. 젊고 활기찬 흑인 무용수의 몸, 흑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 다양한 춤 장르를 혼합하는 것, 여러 안무가의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것은 흑인 현대무용단의 표본이 되었다. 필라델피아 댄스 컴퍼니(1969), 댈러스 블랙 댄스 시어터(1980) 등의 무용단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모두 에일리 무용단의 춤과 운영방식을 따랐다. ‘계시’가 몸집을 불리며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동안 흑인 안무가로서의 야심과 책임감은 에일리 개인을 압도했다. 에일리는 커리어 초반부터 미국을 대표하고 흑인을 대표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증폭시키기 위해 그는 무용단뿐 아니라 레퍼토리 앙상블·학생 워크숍·댄스 센터 등 다수의 조직을 운영했다. 이사회의 간섭과 방대한 조직의 압박은 그의 목을 죄었다. 예술적 자유를 잃고 자기 작품에서 소외된 에일리는 끝없는 심리치료와 마약중독에 빠졌다가 1989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새로운 아우라

©Paul Kolnik

©christopher Duggan

앨빈 에일리의 ‘계시’는 무용 작품이 아니라 ‘현상’이고 ‘경험’이다. DVD나 유튜브로 이 작품을 감상하면 작품의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나머지 반쪽은 객석에서 완성된다. 최근 ‘맘마미아’의 싱어롱 버전 상영회가 인기를 끌었듯이 ‘계시’는 현장에서 참여하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미국 흑인 관객에게 ‘계시’는 통과의례이자 집회이다. 공연 전 로비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설렘, 막이 오르기도 전에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공연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호응은 이 작품이 관객에게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무용작품이라면 여러 무용단에 의해 공연되고 재해석되곤 한다. 이 연재에서 다룬 ‘백조의 호수’ ‘불새’ ‘봄의 제전’만 해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안무가가 재해석하고 해체했다. 그런데 ‘계시’는 다르다. 에일리 무용단이 아닌 단체가 이 작품을 공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테크닉이나 스타일의 측면에서 어려워서는 아니다. ‘계시’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기에 에일리 무용단이 공연하는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 희한하게도 ‘계시’의 아우라는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으로 응축되고 있다. 무용작품의 보존, 재공연, 감상이 더없이 쉬워지고 한 무용가가 구축한 움직임 어휘가 누구나 자유자재로 골라 쓰는 도구로 여겨지는 오늘날이지만, ‘계시’만큼은 고집스러울 만큼 신성한 경험으로 남은 까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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