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끝나지 않은 끝, 그다음 말

MOVIE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15일 9:00 오전

관계라는 건 어쩌면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커다란 퍼즐판 같다. 멀리서 떨어져 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이는 미세하게 균열이 나 있다. 완성된 그림으로 보이는 관계도 있지만, 아무리 채워보려 해도 어긋난 그림처럼 보이는 사이도 있다. 그래서 어느 빈틈 사이를 채워 넣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나도 이 관계가 처음이라…….

가족 간의 관계가 위안이면서 또한 비극인 이유는 지랄 같은 소동을 겪는 아이들과 그 시절을 이미 겪은 부모 사이에 유대감이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마음의 소동을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 무심한 어른들의 말과 시선은 아이들의 맘에 가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증발한다. 자신들도 치열하게 겪었을 그 시절을 안온한 일상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어렵다. 학교, 공부, 친구,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는 모두 지독하게 어려워 풀기 힘든 수학공식 같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치열하고 지독한 짐이라는 것을 이해할 리가 없는 부모 앞에서 서툴고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부모들은 두렵다. 기운을 내야 한다고 되뇌며, 자신의 무능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이 뭔가를 물어봤을 때 그럴듯한 답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이 나이 먹도록 아직’ 모르는 게 있다는 말을 꺼내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자신들이 겪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을 겪고 중년이 된 부모는 대충 살아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조금 더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도전하면 뾰족한 수가 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두렵고 서툴지만 숨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잔소리를 하고, 자식들의 삶을 자극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른다. 이번 생에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 역할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현명할 수는 있지만 능숙하긴 힘들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레이디 버드’는 나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늘 서툴기 때문에 서로에게 생채기를 주고야 마는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엄마와 딸, 형제와 아빠,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각각 성숙해지는 성장담이다. 상대방의 말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말이 되는 순간, 무너져 버리는 위태로운 관계를 지탱하는 것이 결국 외면과 부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오롯이 나를 방어하려는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공격하는 폭력이 된다. 이미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다시 생채기가 되어 돌아온다. 감싸주기보단 서로가 더 힘들다며 포악을 하는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사이의 다툼 사이로 누구나 공감 가능한 보편성이 담긴다.

우리, 첫 삶의 뒤통수는 쓸쓸하다

그레타 거윅은 관객이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보폭을 맞춰 걷게 만들어 준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누군가는 크리스틴에게, 누군가는 엄마에게, 또 누군가는 숨은 듯 살아가지만 그 존재가 든든한 아빠에게 마음이 동화된다. 사는 게 어렵고 서툰 영화 속 인물들이 여전히 관계 속에서 휘청대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에두르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윅은 ‘레이디 버드’ 속에 진심과 적의를 능숙하게 감춰내지 못하고 너무나 투명해 곧 깨져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사춘기 소녀의 두려움과 함께 여전히 자라서도 관계가 서툰 어른들의 모습을 더하는데, 이는 뒷모습이 쓸쓸한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스스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새크라멘토에서 벗어나고 싶은 크리스틴은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수준에 맞게 시립대 입학을 권한다. 단짝 친구와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극반에 들지만, 단역에 불과하다. 첫사랑의 상처를 딛고, 멋쟁이 카일과 첫 경험을 가지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착한 절친 대신 부잣집 날라리에게 마음이 끌리고,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도, 답답한 부모도 모두 싫다. 뉴욕으로 가서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다.

‘레이디 버드’에는 각본과 감독을 맡은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겼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버드’는 마치 ‘프란시스 하’의 프리퀄인 듯한 기시감이 있다. 크리스틴이 뉴욕 생활 10년 후, 프란시스의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그토록 지겨워하던 고향을 떠나 꿈에 그리던 뉴욕으로 왔지만, 크리스틴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삶은 이름을 바꾸거나, 삶의 터전을 바꾼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시작은 늘 깨달음과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쉽지 않다.

 

멋지지 않은 연극의 조연이라도 괜찮아

지긋지긋한 카톨릭 학교에 다니는 크리스틴은 변화를 꿈꾸며 연극을 하지만, 그럴듯한 배역 없이 코러스에 머문다. 게다가 학교의 연극은 우리들의 서툰 인생처럼 멋지지 않다. 일상 속에서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더 능숙한 연기자가 된다.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다른 길 위에서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레이디 버드’는 결국 온전한 내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나를 이해하는 것에 앞서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온전한 내 길은 오직 내 발걸음으로 딛고 찾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읊조린다. 크리스틴은 결국 서로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대신 각자의 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 틀린 것을 알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헛된 자존심을 내려놓는 순간, 새로운 길 위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거윅은 애먼 가족의 화해를 내세우거나 애써 갈등을 봉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뉴욕으로 갔지만 응급실에서 초라한 몰골로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미래를 방치하듯 툭 현실 속으로 던진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지만 끝내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는 않는다. 혼자 앞서 나가라고 등을 떠밀기보다는, 혼자 걸어갈 수 있다고 살포시 손을 잡아주는 것 같다. 강한 어조의 충고나 파국을 통한 카타르시스, 거짓말인줄 알지만 달짝지근하고 강한 감미료 같은 위로를 느끼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꾹 눌러쓴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처럼 끝나지 않은 끝이란 건 언제나 그 다음 말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는 법이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