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인·이상준·김인식 ‘조선의 서양음악 시작점, 창가’

한국 작곡가 열전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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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월 14일 9:00 오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들
한국 작곡가 열전①

그동안 서양 작곡가 중심으로 진행된 ‘이달에 주목해야 할 작곡가’ 시리즈가 신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 작곡가를 조명하고자 한다. 국내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어느 덧 백여 년. 이들의 활동은 미약했지만 창작의 주춧돌이 되었고, 오늘날 작곡가들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세기를 살았지만, 이들의 이름과 존재는 17세기 서양 작곡가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이 연재를 통해 이들의 삶과 흩어진 자취들을 돌아보며 한국창작음악이 걸어온 길을 살펴볼 예정이다. 작곡가별로 한 명씩 소개되던 지난 시리즈와 달리 ‘한국 작곡가 열전’의 작곡가들은 몇 개의 테마와 함께 소개될 예정이다.

예를 들어 홍난파(1897~1941), 채동선(1901~1953), 김재훈(1903~1951)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으니 ‘바이올린을 든 작곡가’로, 윤극영(1903~1988)과 윤용하(1922~1965)는 어린이 노래를 즐겨 지은 삼촌들이었으나 ‘동요’라는 주제로 살펴본다. 이번 호는 한국 양악사의 문을 연 ‘창가’를 짓고 보급했던 세 명의 작곡가를 한 자리에서 만나본다. 정사인, 이상준, 김인식이다.

 

에케르트와 양악 관악대

조선에 뿌리내린 창가

한국 근대 창작음악의 역사는 1905년 김인식(1885~1962)이 지은 ‘창가’라는 형태로 시작된다. 그리고 김인식과 아울러 이상준(1884~1948), 홍난파(1897~1941), 정사인(1881~1958), 백우용(1883~1930)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작곡가가 등장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김인식, 이상준, 홍난파는 선교사로부터, 양악대 출신인 정사인과 백우용은 프란츠 에케르트로부터 조선에 유입된 서양음악을 배웠다. 즉 우리 나라 초기의 작곡가들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국내에서 외국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울러 이들은 모두 창가를 작곡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창가(唱歌)라는 말은 일본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창가는 메이지유신 이후 학교 교육에서 사용된 교육용 노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에서 창가란 당시 불렀던 서양식 노래를 모두 지칭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당시 찬송가와 같은 서양식 노래를 차용하여 만든 노래, 일본 창가와 군가를 차용한 노래, 한국의 창작 동요와 창작 가곡이 등장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성악곡 등을 일컫는다. 노래의 국적을 불문하고 신식(서양식) 노래를 모두 창가라 하였기에, 서양의 노래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작곡한 노래와 한국 사람이 작곡한 노래 모두를 창가라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애국가와 독립군가, 항일 투쟁가 등과 같이 항일의 내용으로 한 노래나, 그 역에 있는 친일적인 내용의 노래도 창가라 불렀다.

당시 창가의 음악적 특징에 대하여 ‘우리 양악 100년’(이강숙·김춘미·민경찬 공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서양의 장·단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 ②으뜸음·딸림음·버금딸림음과 같은 기능화성의 음 진행 원리에 의해 선율이 진행된다는 점, ③여러 절로 된 가사가 같은 선율로 반복된다는 점, ④4분의 2 혹은 4분의 4박자가 많으며, 기본적으로 앞의 음표는 길고 뒤의 음표는 짧아 이른바 ‘깡총리듬’을 연상시키는 유형을 즐겨 사용한다는 점, ⑤계이름 중 파와 시가 생략된 장음계, 즉 도·레·미·솔·라를 주로 사용하며, 이러한 음들이 ‘깡총리듬’을 타고 진행된다는 점, ⑦대부분 행진곡 풍이라는 점 등이다.

창가의 작곡 원리는 주제동기가 발전하고 변용되는 서양음악의 원리에 따른다기보다는 여러 선율의 조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에 깡총리듬은 각 악구의 종지음에 해당하는 목표점으로 음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리듬이다. 곡의 구성 원리 중 하나인 통일성은 선율의 반복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깡총리듬의 리듬감과 선율 유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유절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곡이 통일성을 갖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곡의 또 다른 구성 원리의 하나인 변화감은 두 번째 구절의 종지음과 세 번째 구절의 첫 음을 도약시킴으로써 상승감을 부여하여 변화감을 준다. 즉 기-승-전-결이라는 네 개의 음표가 있다면, ‘전’에 해당되는 부분을 상승·도약시킴으로써 변화의 효과를 주는 것이다. 만약 ‘전’에 해당하는 음에 도약의 기능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창가는 순조로운 선율이 무한 반복되는, 한마디로 지루한 느낌을 줄 뿐이다.

창가는 원래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학교의 노래’라는 기능을 해야 했다. 다음 살펴볼 정사인, 이상준, 김인식이 모두 교사였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더욱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창가는 학교를 벗어나 바깥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불리곤 하였다. 그 내용도 계몽적이고 애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감상용 음악이 아니라 부르는 이들을 계도 및 선도하는 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시되었다. 어쨌든 이 시기에 창작된 창가는 곧 우리 나라에서 시작된 서양음악의 시작점이었으며, 기존에 전래되던 전통음악(국악)과 다른 서양음악의 선율을 학생과 일반인에게 접하게 하는 음악이었다. 이후에 등장하는 동요, 가곡, 대중가요, 국민가요 등이 나온 것도 창가를 분수령 삼아서 진행된 것이었다. 창가는 서양의 악곡에서 빌어온 것이지만, 창가 자체의 깊은 뿌리나 발생 과정에는 한국 전통음악의 갈래들을 차지하는 민요, 가사, 시가, 잡가 등의 영향이 보인다. 특히 창가에서 발견되는 서양식 7음 음계와 다른 5음 음계(도·레·미·솔·라)의 음계적 특징, 전통 장단과 같이 유형화된 박자감, 민요적 소재 등이 그 근거이다.

 

관악대의 후예, 정사인

서울에서 태어난 정사인(1881~1958)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에 1902년에 입대하였다. 군악대의 지도자는 프란츠 폰 에케르트(1852~1916)였다. 에케르트는 1879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에 근무하다가 1900년 조선에 군악대가 창설되게 되자 1901년 2월 50인조 정규 군악대가 사용하는 각종 악기를 가지고 내한하였다.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이 주한 독일공사와 협의한 후 군악대 교사로 그를 초빙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 내용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경술국치 이후 군악대는 이왕가(李王家)의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명되었고, 1916년 에케르트 생존 시까지 정사인은 단원으로 활동했다. 사인은 에케르트의 지도로 플루트와 작곡을 배웠고 여러 노래를 남겼다. 1910년에 잠시 경성고아학교에서 창가와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6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의 관악지도교사로 1930년까지 재직하며 교내 관악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당시 개성은 물론 전국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가 주최한 음악경연대회에서 정사인이 이끄는 송도고보가 1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관악대

‘금번 연희전문 주최와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최되었던 제1회 전조선학생현상음악대회에서 명예의 1등상을 받은 송도고보, 호수돈여고보의 출연학생을 환영하고 동시에 그들의 아름다움 음악을 5만 개성 서민에게도 소개하고자 명 24일 밤 8시 반부터 시내 북부예배당에서 북부교회찬양대 주최와 본보 개성지국 후원 아래 환영음악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동아일보 1932년 6월 24일)

정사인은 당시 관악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관악행진곡을 작곡하였다. 1920년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추풍(秋風)’과 ‘돌진(突進)’이 대표작이다. 두 작품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조선인이 작곡한 유일한 관악곡이었다.

그는 1930년대 후반에 개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경성중앙방송 관현악단에 입단하여 단원으로 활동했다. 한전·철도국 등의 관악대에서도 지도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14년 동안 몸담았던 개성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개성에 있는 음악가 제씨(諸氏)는 금번에 송도악우회(松都樂友會)라는 단체를 조직하는 첫 선전으로 오는 20일 경 시내 중앙회관에서 납량 대음악회를 개최한다는데 당야(當夜)에 출연할 악사로는 정사인 씨의 지휘아래 박순덕, 임성숙, 오응철 씨 등 저명한 음악가 전부가 출연하는 외에 오케스트라도 특별 출연한다는데 본보 개성지국에서 후원을 하기로 되었다. 더욱이 개성에서 음악회를 마치고 나서는 곧 중부 조선일대를 (…) 순회하리라 한다.’(동아일보 1933년 7월 15일)

그의 작품은 에케르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작곡기법은 썼지만, 한국 전통적인 음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의 한국음악 기반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일명 ‘태평가’라 불리는 민요 ‘뉠리리야’, 가곡 ‘타향’(‘내 고향을 이별하고’) 그리고 1916년에 지은 ‘사향가’ 등이 있다. 이 노래들은 1945년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많이 불렸다.

그동안 북한 최고의 항일혁명가요로 애창되던 ‘사향가’는 그동안 김일성이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뜰 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아 귀에 쟁쟁해…’ 등으로 이어지는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담고 있다. 하지만 1998년에 민경찬(음악학)에 의해 정사인의 작품임이 밝혀졌다. 김일성이 정사인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다. 정사인의 ‘사향가’는 홍난파 편저의 ‘통속가요집’(1916년 박문서관)에 게재되어 있다. 이 책에 그 제목은 ‘사향가’가 아닌 ‘추색(秋色)’으로 실려 있다.

 

창가의 기록자, 이상준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한 이상준(1884~1948)은 12세에 상경하여 정동에 위치한 피어슨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식교육과 함께 풍금을 통해 서양음악을 배웠다. 15세에 평양으로 간 그는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이후 경성으로 돌아와 중앙·보성·휘문고등보통학교, 숙명·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24세가 되던 1910년에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입학했다. 조선정악전습소라고도 불린 조양구락부는 1909년에 서울 도동(刀洞)에 설립된 음악기관으로, 현재 20세기 최초의 민간 음악기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는 조선의 여러 제도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제개편이라는 명분하에 많은 부분이 개혁·폐지되던 때였다. 조선시대에 음악을 관장했던 장악(掌樂)제도도 이 시대의 국운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상준(1884~1948)

조선 전기부터 지속되어온 장악원은 1908년 이후 그 기능이 거의 정지되다시피 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지사들은 전통예술의 계승을 위해 1909년 도동(刀洞)에 조양구락부를 설립했다. 1911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로 전환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의 구성원은 조양구락부 시절과 거의 동일했다. 함화진과 같은 궁중악사, 조이순, 하순일 등과 같은 서울의 민간 풍류계의 명인들, 그리고 김인식과 같은 양악의 선구자가 당시 수입된 서양음악을 교습하기도 했다. 조선악과에서 가곡·거문고·가야금·양금·단소·생황을, 서양악과에서 음악이론·창가·풍금·사현금(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난파 홍영후(1898~1941)는 1912년에 이곳에 입학하여 1913년 4월에 2회 졸업생이 되었고, 같은 해에 서양악과에 다시 입학하여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후 1914년 졸업하였다. 다음 해인 1915년에는 서양악과 교사로 임용되기도 했다.

1910년 입학한 이상준은 조선악과에서 수학했다. 전통음악의 한 장르인 가곡을 공부하는 한편, 김인식으로부터 서양음악의 이론을 배우기도 했다. 이러한 학습과정을 토대로 훗날 그는 전통음악을 서양 기보법인 오선보에 채보하는 길로 나아갔다.

이상준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에는 다양한 형태의 잡가집이 대량으로 출간되던 때였다. 오늘날 이상준의 업적은 작곡을 통한 작품 생산보다는 그가 발간했던 잡가집 작업에 있다.

당시 그의 잡가집 출간 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재래의 노래들을 서양음악의 오선보로 채록하고자 한 것으로 ‘조선속곡집상권’(1913, 조선복음인쇄소), ‘조선잡가집’(1916, 신구서림), ‘조선신구잡가’(1921, 박문서관), ‘신찬속곡집’(1921, 광익서판), ‘나팔가곡집’(1929, 삼성사), ‘조선속곡집’(1929, 삼성사), ‘조선신구잡가’(1929, 삼성사)가 있다. 다른 하나는 창가집으로 ‘보통악전대요’(1916, 박문서관), ‘최신창가집’(1918, 박문서관), ‘풍금독습 중등창가’(1921, 박문서관), ‘조선명승지리창가’(1921, 광문서사), ‘최신중등창가집’(1922, 박문서관) 등이다.

이상준의 ‘최신중등창가집’(1922)

이중 ‘풍금독습 중등창가집’을 통해 당시 유입되고 유행한 창가 교육을 둘러싼 환경을 살펴보도록 한다. 책의 앞 부분에는 창가의 가사만 따로 실었고, 그 옆에는 악보와 가사를 함께 실었다. 악보는 현재의 서양악보와 같지만, 각 음표들 밑에 숫자 ‘0’부터 ‘7’까지의 숫자, 숫자 밑에 직선 기호들이 그려져 있다. 숫자 ‘0’은 쉼표를 의미하며, 1에서 7까지의 숫자가 도·레·미·파·솔·라·시에 상응하는 역할을 한다. 숫자 1이 놓이는 곳은 곧 으뜸음을 가리키고, 2는 그 조성에서의 ‘레’를, 3음은 ‘미’를 뜻한다. 그래서 1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노래가 무슨 조인지 알 수 있다.

‘최신창가집’은 ‘풍금독습 중등창가’보다 3년 전인 1918년에 발행되었다. 1편과 2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1편은 의식용 창가라 지칭하여 일본의 국가와 일본 창가집에 수록된 곡들을 실었고, 2편은 일반의 창가가 실려 있다. 이러한 그의 창가집들은 당시 한국인의 음악정서를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와 의의를 갖는다.

 

최초의 창가를 작곡한, 김인식

김인식(1885~1962)은 이상준보다 어리지만,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이상준에게 서양음악을 가르친 이다. 평북 강서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 숭덕학교에 입학하여 창가를 배우고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6세에 선교사 부인 헌트와 정의여학교 교사인 수눅에게 성악을 배웠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05년에 평양 서문 밖 소학교에서 연합 운동회가 열렸을 적에 이를 위해 창가 ‘학도가’를 작사·작곡했다. 이 노래는 한국 창작 창가 및 창작음악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많은 음악학자는 한국 창작음악사의 원년을 1905년으로 잡곤 한다. 즉, 1905년 이전에는 외국의 노래만 불러야했는데, 1905년부터는 외국의 노래와 함께 우리의 손으로 작곡한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인식(1885~1962)

‘학도가’는 1914년에 출간된 ‘최신창가집’에 수록되었다. ‘학도가’는 4분의 3박자이며, 8마디로 되어 있다. 10절의 가사가 같은 선율로 반복된다. 서양음악의 조성을 기조로 하면서, 장음계의 선율이 기능화성의 음진행 원리에 의해 전개되고, 세 박자의 붓점 리듬이 곡의 골격을 이룬다. 또한 ‘파’와 ‘시’가 생략된 장음계이며, 서양음악보다는 한국 전통음악에 가까운 도·레·미·솔·라로 구성된 5음 음계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앞서 설명한 창가의 특징(‘우리 양악 100년’)과 잘 맞아 떨어진다. 김인식은 1907년 황성기독청년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에서 중학부 음악교사가 되었고, 이후 조선정악전습소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청년 교육과 민족 계몽에 음악으로 앞장섰다. 1922년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1월 22일자)가 나오는데, 그가 음악지도자로서 가진 위상과 인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동 예배당 안에 있는 음악구락부에서는 금번에 김인식 씨를 교사로 정하여 청년에게 음악을 가르칠 터인데, 그 구락부에 가입코자하는 사람은 금일 요일 예배 후에 부장 양재명 씨에게 원서를 청구하면 좋겠다더라.’ 앞서 거론한 이상준은 물론 홍난파 등도 그의 제자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을 결성하여 노래 운동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김인식이 편찬한 ‘보통창가집’(1912)에는 30여 편의 창가가 수록되어 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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