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 DNA 복제로 탄생한 클론

이 춤의 운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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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월 14일 9:23 오전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One Flat Thing_Reproduced ©Laurent PHILIPPE

 

 

 

 

 

 

 

 

 

 

 

 

 

 

DNA 복제로 탄생한 클론 신체적 사고는, 몸을 제외한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보일까

(What else, besides the body, could physical thinking look like)?

-윌리엄 포사이드-

 

최근 한 중국 과학자가 유전자를 편집한 쌍둥이 아기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인간 배아를 조작해 에이즈(AIDS)를 일으키는 HIV 바이러스에 면역력을 지니도록 특정 유전자를 제거했다는 그의 주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나, 과학계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며 발칵 뒤집혔다. ‘복제 양 돌리’가 등장했을 때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다면 복제인간 클론은 훨씬 거대한 윤리적·존재론적 논란을 일으킨다. 영생과 생명복제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자 두려움이다. 고대 설화부터 SF소설에 이르기까지 필멸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고 과학은 이를 가능케 했다.

무용평론가 마샤 시걸(Marcia Siegel)이 말하듯 춤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지점’에 존재한다. 따라서 사라지는 춤을 고정하려는 무용계의 욕망은 종교적 신념처럼 강렬하다. 그런데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49~)의 실험은 이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 자신의 작품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One Flat Thing, reproduced, 2000)’(이하 ‘편평한 것’)을 복제한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무대 작품인 ‘편평한 것’에 내재된 DNA를 추출하여 새로운 개체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원본과 사뭇 다르다. 춤을 복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춤을 보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가. ‘편평한 것’과 그것의 클론(Clone)은 유전자 조작 아기처럼 경탄과 두려움을 자아낸다.

 

대위법 드러내기

막이 열리면 17명의 무용수가 무대 뒤편에서 객석 쪽으로 굉음을 일으키며 책상을 끌고 나온다. 20개의 동일한 책상이 4열로 섬세하게 각을 맞춰 늘어선다. 마치 격자처럼 규칙적으로 구획된 공간을 좌표 삼아 무용수들은 책상 위로 올라타고 미끄러지고 책상 사이와 아래를 관통한다. 톰 윌렘스(Thom Willems)의 금속적 음악이 깔리지만, 음악이 춤의 흐름을 리드하지 않고 무용수의 호흡과 휘젓는 팔다리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책상을 내리치거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고요하고 각진 무채색의 책상과 컬러풀한 의상을 입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용수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윌리엄 포사이드는 작품 제목을 건조한 수수께끼처럼 제시한다. ‘편평한 것’은 말 그대로 편평한 것, 그러니까 책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책상 자체의 속성보다는 책상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을 보게끔 하는 장치이다. 비슷한 예로 ‘가운데, 조금 높은 지점의(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 1987)’가 있다. 말 그대로 무대의 중간, 조금 위에 황금 체리가 매달려 있었다(체리는 파리 오페라 발레가 상주한 가르니에 극장의 상징이고, 이 작품은 발레단 무용수들의 속성과 관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편평한 것’에서 책상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일까.

의외이긴 하나 ‘편평한 것’은 남극을 탐험했던 영국인 로버트 팔콘 스콧 경에서 시작한다. 포사이드는 스콧 경의 생애를 다룬 프란시스 스퍼포드의 책 ‘나는 언젠가 될 것이다(I May Be Some Time)’를 읽고서 ‘편평한 것’을 안무했다고 한다. 스콧 경은 죽을 고생을 하여 남극에 도착했으나 아문센 일행이 불과 5주 전에 다녀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산에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악천후로 조난당해 사망한 비운의 탐험가. ‘최초’가 아니면 의미 없던 도전이다.

포사이드는 스콧 경의 허망하고 비극적인 도전에 감명받은 것일까? 그보다는 스콧과 아문센의 탐험을 ‘바로크적 대위법’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말에서 무릎을 쳤다. 대위법은 서로 다른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작곡 방식이다. 스콧과 아문센은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그러나 독립된 루트로 남극점을 향해 나아갔다. 탐험 루트가 대위법에 비유될 수 있다면 안무법 역시 가능할 것이다. 포사이드는 자신의 안무방식을 대위법이라 명명하고, 조지 발란신부터 트리샤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여러 안무가의 안무법에서 이 전통을 읽어냈다. 포사이드의 작품에서 무용수들은 서로 독립된 개체로서 춤추면서도 다른 무용수들과 움직임 모티브와 신호, 정렬을 주고받는다. 무작위로 쏟아지는 우연적인 결합 속에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일치, 무질서 속의 질서, 독립된 것들 사이의 교류를 구현해내는 것이 대위법이라는 것이다. ‘편평한 것’은 책상이라는 공간적 장치를 통해 안무적 대위법을 더욱 잘 관찰할 수 있도록 구성한 작품이다. 물론 여러 무용수가 동시다발적으로 행하는 빠르고 찰나적인 움직임들은 관객의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지만.

 

발레, 컨템퍼러리 댄스, 설치미술을 관통하는 것

안무가 포사이드의 이력은 반전의 연속이다. 대학에 진학하고서야 정식으로 무용 수업을 받았으며, 미국인이지만 30년 넘게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유럽에선 일찌감치 거장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미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74년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합격했지만,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예술감독 존 크랑코가 급사하며 거장에게 지도받을 기회를 잃었다. 그러나 안무가의 부재로 인해 그 자신이 일찌감치 안무가로 부각될 수 있었다. 1984년 프랑크푸르트 발레의 예술감독이 되어 고전발레의 문법을 파격적으로 해체하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며 이 작은 발레단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단체로 만들었다. 재계약을 반복하며 20년 동안 예술감독으로 활약했으나 2004년, 보다 ‘고전적인’ 발레단을 원했던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해고되었다. 이후 포사이드 무용단(2005~2015)을 이끌며 보다 급진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일흔을 앞두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야 고국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포사이드의 작품 경향 역시 반전의 연속이다. 포사이드는 자신의 무용단에서 ‘발레’ 명칭을 빼버리고 실험적인 컨템퍼러리 댄스로 확장했지만, 포사이드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인 더 미들’과 같은 초기 발레작품이다. 그의 발레는 모순적이다. 고전발레의 전통적인 훈련법으로 잘 조련된 무용수가 행할 수 있는 테크닉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몸을 던지고 풀어버린다. 관습과 장식을 걷어내고 신체를 분절시키며 고전발레의 문법을 해체한 그의 발레는 ‘조지 발란신의 후계자’라는 찬사와 ‘발레의 적그리스도’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그런데 ‘현대발레’ 안무가로서 각광받던 시절부터 포사이드는 발레 너머의 움직임에 관심 있었다. 1989년 그는 건축가 다니엘 리버스킨트(Daniel Libeskind)의 의뢰로 건축과 공연을 연계한 설치예술을 창작했다. ‘안무 오브제(Choreographic Objects)’라고 명명한 이 실험을 최근까지도 진행하면서 텍스트나 언어, 오브제를 활용하는 실험적인 공연·설치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는 안무 오브제를 “단순한 신체의 대리물이 아니며 행위들이 조직되고 실시되는 잠재적 방법들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대안적 지점”이라 정의한다. 미술관의 전시실을 풍선·금속 추·줄에 달린 고리로 가득 채워 관객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거나 심지어는 기계장치가 거대한 깃발을 펄럭이는 것을 보여주는 등 안무 오브제는 움직임, 그리고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계획적이고도 즉흥적인 움직임 패턴과 구조에 대해 탐구한다.

‘안무 오브제’는 춤과 안무를 분리시켰다. 안무를 바탕으로 춤이 발생하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즉흥춤처럼 안무가 없는 춤도 있고, 행렬의 움직임이나 새들의 대형처럼 춤이 아닌 곳에서도 안무는 발견된다. ‘안무는 조직화의 근본 상태이고, 어떤 형식으로든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니 안무는 춤을 떠나서 수많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안무 오브제’는 포사이드의 사상을 극단까지 확장시킨 실험대상이자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포사이드는 안무가에서 작가로, 무대에서 미술관으로 옮겨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2017년 그는 자신의 초기작 발레인 ‘인공물(Artifact, 1984)’을 재공연했다. ‘인공물’은 발레의 전통과 기본 어휘를 급진적으로, 그러나 애정 어린 방식으로 해체한 작품이다. 무용수가, 아니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안무를 섭렵했던 그가 다시 토슈즈로 돌아온 것이다. 정작 포사이드는 자신의 행보에 대해 크게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 ‘백조의 호수’나 ‘인공물’은 같은 종(種)이다. 외형이 어떠하든 발레의 문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무용 작품과 설치미술 역시 안무라는 동일한 DNA를 공유한다. 어쩌면 포사이드는, 세간의 이해와는 달리, 발레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 덩이의 데이터로서의 춤

포사이드는 그다지 감상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편평한 것’은 자꾸만 스콧 경을 연상케 한다. 영원할 것처럼 존재하는 책상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용수의 움직임은 불멸과 찰나, 자연과 인간, 존재와 무(無)처럼 대조적이다. 만들어지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춤의 속성이 스콧의 탐험처럼 허무하다. 빠르고 복잡한 포사이드의 춤은 기억하기는커녕 목격하는 순간에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오직 무용수들의 근육기억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춤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이러한 신체적 사고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몸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가? ‘안무 오브제’ 작업을 쏟아낸 후 그는 이제 자신의 춤을 오브제로 치환시켰다. ‘편평한 것’의 DNA를 추출하여 만든 클론이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에 대한 ‘동기발생적 오브제(Synchronous Objects for One Flat Thing, reproduced)’이다.

‘동기발생적 오브제’는 2005년부터 포사이드가 오하이오 대학의 ACCAD(Advanced Computing Center for the Arts and Design)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온라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감상하려면 웹사이트(https://synchronousobjects.osu.edu)를 방문해야 한다. 첫 화면을 클릭하면 ‘신체적 사고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보일까?’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지난 40년간 포사이드를 자극했던 호기심이 응축된 질문이다. 그에게 춤은 ‘신체적 사고’이다. 신체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안무를 신체로부터 분리하는 것. 마치 조각을 걷어낸 거푸집처럼 텅 빈 동시에 복잡한 정보를 담아낸 것이 바로 ‘동기발생적 오브제’이다.

연구소의 협업자들은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편평한 것’의 원작 영상을 바탕으로 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를 꼬박 2년에 걸쳐 데이터로 환원하였다. 데이터는 ‘공간 데이터’와 ‘질적 데이터’로 구분된다. 공간 데이터는 무용수의 신체가 3차원의 공간 좌표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정보이고, 질적 데이터는 무용수들이 주고받는 신호와 정렬에 대한 정보다. 수천 개의 정렬 중에서 200여 개의 동기화(sync-up)를 구별해냈다.

일단 디지털로 변환된 데이터는 여러 분야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논리로 조합되어 시각적인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홈페이지에는 모두 스무 가지의 오브제가 제시되어 있는데 무용수가 머무른 공간의 빈도에 따라 등고선이 그려진 것, 무용수의 팔과 다리가 만드는 궤적이 쌓이며 선과 면으로 나타나는 것, 혹은 춤 데이터를 건축적 관점에서 재료의 질감으로 형상화한 것 등이다. 이들의 생김새는 모두 다르지만 DNA는 같으니 ‘편평한 것’과 그야말로 ‘동기발생된’ 클론이다. 춤은 이제 한 덩어리의 데이터가 되었다.

‘편평한 것’이 ‘동기발생적 오브제’로 변환되는 과정은 과학 실험을 닮았다.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합심하듯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협업하여 ‘편평한 것’에 내재된 극도로 복잡한 안무의 원리를 재구성했다. 안무법에 대한 포사이드의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실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포사이드는 1994년부터 5년간 독일 카를스루에 미디어예술센터와 협업하여 즉흥 테크놀로지 CD-ROM을 발표한 바 있다. 즉흥에 대한 자기 생각과 안무 원리를 총 63개의 짧은 강의들로 설명하며 시각화했다. 또한 2006년부터 2년간 작업하여 온라인으로 발표한 ‘모션 뱅크(Motion Bank)’ 프로젝트는 다양한 안무가의 춤 기록을 디지털로 수집하고 수량화하며 가시화하는 작업이었다. 선행 작업들이 움직임 분석과 안무법에 대한 원리를 제공했다면 ‘동기발생적 오브제’는 구체적인 춤의 작동방식을 낱낱이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복잡한 예술 창작물이 한 덩어리의 데이터로 말끔히 치환되는 걸 목격하는 경험은 놀랍다. 동시에 이는 마침내 인간 복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처럼 섬뜩하기도 하다. ‘동기발생적 오브제’의 섬뜩함은 유사성이 아닌 동일성에 있다. 오브제들은 그 어느 것도 원작의 생김새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동일한 데이터에서 발생했기에 원작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 DNA가 일치한다는 것은 겉모습이 닮았다는 것보다 훨씬 오싹하다. 범죄 수사나 친자 확인, 법적 판결을 생각해보자. 흐릿한 지문이나 혈흔에서 발견된 ‘DNA의 일치’는 두 개체가 같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발레의 겉치레를 모두 걷어 내버린 그의 발레처럼 ‘동기발생적 오브제’는 춤의 분자구조까지 파고들어 간다.

윌리엄 포사이드 ©Dominik Mentzos

춤을 발생시키기

포사이드가 춤을 데이터로 치환한 목적은 무엇일까? ‘동기발생적 오브제’의 데이터는 ‘편평한 것’의 무보(舞譜)가 아니기에 춤을 완벽히 재구성할 수 없다. 게다가 포사이드는 거장으로 폼 잡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역사’ ‘유산’ ‘걸작’과 같은 의미부여에 대해서도 냉담하다. 2002년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엔 자기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금지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이 작품들을 공연할 의미가 없다. 다음 세대에게도 뭔가 새롭게 창조할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땐 세상도 다를 것이다.”

거장의 작품을 계속하여 보고 싶은 후대 세대의 욕망이 작동하는 한 작품들이 실제로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작품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포사이드에게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최첨단 기술을 춤에 접목하는 것이 목적인 것도 아니다. ‘동기발생적 오브제’에는 여러 가지 기술이 활용되었지만 신박한 것을 자랑하기 보단 현재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는 기술을 집적한 것이다. 또한 춤에서 신체를 제거했다고 하지만, 이는 이미 1990년대에 모션캡쳐를 활용했던 빌 티 존스의 ‘고스트캐칭(Ghostcatching, 1999)’에서 시적으로 빼어나게 구현된 바 있다. 기술을 활용한 무용작품은 무수히 많지만 ‘동기발생적 오브제’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초점이 결과물이 아닌 과정, 감상이 아닌 참여에 있다는 것이다. 웹사이트에 모든 데이터가 공개되었기에 누구나 참여하여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 수 있다. 수용자는 수동적으로 ‘닫힌 구조’를 읽어내기보다는 제공된 데이터를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창작에 참여하여 계속하여 춤을 발생시킨다. 그 ‘춤’이 우리에게 익숙한 춤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편평한 것’과 그 클론인 ‘동기발생적 오브제’는 데이터를 구심점으로 삼아 춤, 즉 신체적 사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유도하는 촉매제이다. 춤에 담긴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가? 안무적 사고는 다른 분야의 지식 및 관점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춤이 지닌 복잡한 내적 논리를 가시화하는 작업은 춤을 박제시키려는 욕망보다는 비무용인도 참여할 수 있는 지적 대화로 만들려는 포사이드의 열망을 드러낸다.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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