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연속성 있는 무대를 펼칠 그의 이야기
피아노를 연주해 본 사람이라면 눈앞의 악보에서 벗어나 즉흥적으로 흘러나오는 저만의 선율에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 생(生)의 소리를 무대 위에서 제대로 연주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담대함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의식과 숱한 연습으로 단련된 실력에서 비롯한 것이다. 2008년 나고야 콩쿠르 최연소 2위를 시작으로 더블린 콩쿠르·퀸 엘리자베스 피아노 콩쿠르 등을 거쳐 지난 6월 게자 안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박종해는 올해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서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이어간다.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활동하게 된 소감은? 이전부터 해보고 싶었다. 일회성으로 공연을 해오면서 내가 하고 싶은 레퍼토리들로 연속성 있게 공연하는 것이 피아니스트로서의 꿈 중 하나였다. 특히 하고 싶었던 시기에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다.
‘플레이그라운드’라는 부제로 총 5번의 무대를 갖는다. 무대에서 마음껏 뛰어놀아보겠다는 의미로 봐도 되는가? 맞다. 무대에서 진지한 모습도 중요하지만 연주자 자신의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무대에서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관객들도 좋아하더라.
오는 1월 10일에는 고도프스키·슈베르트·프로코피예프 작품을 연주하며 고전과 낭만 레퍼토리를 아우른다. 상주음악가로서의 첫 무대로 해당 레퍼토리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고도프스키의 르네상스 모음곡은 작곡을 전공한 친구가 알려준 곡이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언젠가 꼭 연주해야겠다고 아껴두고 있었다. 특히 오프닝 곡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1월 10일에 선보이는 곡들은 좋아하는 것 절반, 잘 해보고 싶은 것 절반이다. 프로코피예프 소나타의 경우는 한국에서도 많이 연주했었고, 반응도 꽤 좋았지만 한 번도 스스로 만족해본 적이 없다. 이번에는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프로코피예프의 연주를 들려주고자 한다.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 3개 중 하나인 19번을 연주하는 이유는 서른의 시작을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해왔기 때문이다. 삶의 연륜이 꼭 필요한 곡들이 있고, 그것이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 ‘내가 과연 이 곡을 연주할 준비가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도전하려 한다.
그동안 많이 연주했던 프로코피예프를 어떻게 다르게 연주할 생각인가? 프로코피예프라고 하면 무조건 강하거나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기가 쉽다. 나도 그렇게 쳐왔다.(웃음)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차가운 면모를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피아노를 치더라. 또 옛날 악보들을 보면 작곡가 이름 밑에 그들의 사진이 작게 삽입되어 있는데, 악보 속 그는 냉혈한 같아 보였다. 그의 인생도 순탄하지만은 않았기에 이번엔 차가운 프로코피예프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후의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첫 무대가 ‘소개’와 같은 느낌이라면 두 번째부터는 어떠한 주제에 의한 ‘탐구’로 보면 될 것 같다. 두 번째 무대는 고전 소나타로만 준비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C.P.E. 바흐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등 시대순으로 소나타가 이렇게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마지막 곡으로 베토벤 소나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2부에서는 6번 F장조와 23번 ‘열정’ F단조 두 곡을 연이어 선보인다. 같은 조성의 장·단조곡이기도 하고 시대상으로도 각각 베토벤 초·중기의 작품이라서, 한 작곡가의 다른 음악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무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다섯 번의 무대 중에서 가장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12월에 있을 마지막 무대인 ‘2019 라스트 시퀀스’에서 리스트 ‘순례의 해’를 연주할 계획이다. ‘순례의 해’처럼 사색적인 부분이 많고, 계속해서 잔잔하게 흐르는 곡은 거의 쳐 본 적이 없다. 그럴 기회가 많이 없기도 했다. 이번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무대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볼 계획이다.
자유분방함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2017년 3월 금호아트홀에서의 공연 중 즉흥연주를 선보였다. 관객이 제시한 4개의 불협화음을 가지고 유려한 선율의 왈츠를 만들어내서 환호를 받은 바 있다. 이를 선보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전부터 즉흥연주로 무대에 서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우연찮게 처음으로 무대에서 이를 선보이게 된 건 지난 2016년 금호아시아나 솔로이스츠 공연에서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첼리스트 김민지, 피아니스트 김다솔과 함께 리허설하면서 앙코르곡으로 어떤 곡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지혜 누나와 함께 거슈윈의 ‘서머 타임’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런데 앙코르가 시작되자 다솔이 형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무대에 혼자 남겨지게 됐고, 첫 즉흥연주 무대를 정신없이 끝마쳤다. 다행히 객석 반응이 꽤 좋아서 금호아트홀 쪽에서 이를 확장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다. 나에게 즉흥연주는 일종의 놀 거리였는데, 본격적으로 무대에서 선보이려고 하니 망설여졌던 거다.
망설임 끝에 작년 3월 공연에서는 2부 전체를 즉흥연주로 선보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초시계만 가지고서 맨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작년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도 약 50분간 즉흥연주를 했다. 이렇게 두세 번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괜찮아졌고, 함께 즐기는 관객들을 보면서 재미도 느꼈다. 그런데 내가 원래 하던 즉흥연주와 무대에서 하는 즉흥연주는 조금 다르다. 무대에서 하는 연주가 좀 더 대중적이라고 보면 된다.
음을 제시받는 것 외에도 키워드를 바탕으로 연주를 풀어나가거나 특정 멜로디를 여러 작곡가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방식의 즉흥연주를 선보였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 순 있겠지만, 즉흥연주로 이어지는 사고 회로 과정이 궁금하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즉흥연주는 여태껏 들어왔던 수많은 곡 중에서 발췌가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떠한 주제를 받았다고 하면 기억 속에 있던 음들을 한둘씩 끄집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연주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주하는 도중에도 고민을 많이 한다. 막히는 부분이 생길 때면 어떻게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굉장히 빠른 회전이 일어난다. 마치 컴퓨터처럼 현재 나의 상황과 알고 있는 음악을 매칭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즉흥연주를 무대에서 선보이는 것이 부담되진 않나? 사실 즉흥연주를 오래 해왔다. 나에게는 피아노에서 찾을 수 있는 오락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좋아해 주시는 것을 보고 꽤 놀랐다. 그런데 즉흥연주를 그렇게 많이 하진 않을 것이다. 2년 연속 해본 결과, 비슷한 음악이 계속 나오더라. 일반 곡들을 연주해도 연주자 본인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즉흥연주는 훨씬 심하다. 무대에서 벗는 느낌이다. ‘현재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걸 너무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서 연주하면서 소름이 돋는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선보이기보다는 한 번씩 앙코르 무대로 선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즉흥연주와 작곡이 꽤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추후 계획은 없나? 작곡은 안 할 거다. 물론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작곡은 고뇌가 필요한 것인 반면 즉흥연주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즉흥의 매력은 그 순간, 그 시간에만 나올 수 있는 일회성에 있다. 가끔 굉장히 좋은 선율이 나올 때면 아까울 때도 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겨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녹음하고서 즉흥연주를 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주를 하지 못한다. 녹음이라는 행위는 시작부터 즉흥과 맞지 않는다.
즉흥연주처럼 자유롭게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수백 년 전 기록된, 정형화된 악보가 존재하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자유분방함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유가 있는 자유분방함이랄까. 모차르트를 자유분방하게 연주한다고 해서 재즈 음악처럼 즉흥적으로 칠 순 없다. 나는 먼저 마음 가는 대로 곡을 연주해보는 편이다. 이후에 옛날 악보들을 보면서 내 연주에 하나씩 대입해본다. 대입해본 값이 맞아떨어질 때면 기분이 좋다. 물론 내 연주가 작곡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직감을 많이 따른다. 이렇게 시대적 배경이나 음악가가 이 부분을 이렇게 작곡한 이유 등 관련된 자료를 찾아본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자유분방함을 추구한다.
서른, 성숙함을 입다
지난해 6월 게자 안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수상 이후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나?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까지는 오만하게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번 콩쿠르에 나가기 전 6~7개월 정도가 굉장히 힘들었다. 음악은 좋지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적인 슬럼프라기보다 ‘내가 왜 연주하고 있지?’라는 근원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그땐 연주도 많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다. 콩쿠르를 결심했을 때도 고민이 많았다. 부담감을 떨치고 연주하듯이 모든 라운드에 임하자는 생각에 주변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매 라운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주했고, 수상은 연주 일생에서 굉장한 전환점이 됐다.
향후 정복하고 싶은 레퍼토리가 있다면? 바흐를 지겹도록 쳐보고 싶다. 워낙에 다성부 음악이나 푸가를 좋아한다. 그리고 프랑스 작곡가를 탐구해보고 싶다. 이전에는 프랑스 음악을 듣고서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최근 새롭게 들리기 시작하더라. 올해 상주음악가 프로그램에도 포함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넣지 못했다.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뿐 아니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취리히 톤할레 등 유럽 유수의 콘서트홀에서의 연주들이 예정되어 있다. 피아니스트로서 바쁜 한 해가 될 것 같은데, 2019년을 맞이하는 소감은?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됐는데, 나이만큼 성숙한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러나 삼십 대의 첫 시작을 바쁘게 맞이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이번처럼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많은 분들이 피아니스트 박종해가 과연 누군지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2019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피아니스트 박종해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1월 10일 고도프스키 ‘피아노를 위한 르네상스 모음곡 1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 외
3월 28일 C.P.E. 바흐·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소나타
5월 9일 ‘세상의 모든 변주’
8월 29일 ‘메모리얼’
12월 5일 ‘2019 라스트 시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