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2년 전 대화를 나눴던 어린 소년은, 그새 목소리가 굵어지고 키가 훌쩍 큰 만 19세 청년이 됐다. 당시 인터뷰에서 ‘라흐마니노프를 잘 연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그는 2018년 11월 하마마쓰 피아노 콩쿠르의 파이널 라운드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해 3위를 차지했다. 1991년 시작돼 3년마다 개최되는 하마마쓰 콩쿠르는 임동혁(2000년 준우승), 라파우 블레하츠(2003년 준우승), 김태형(20006년 3위), 조성진(2009년 우승) 등의 입상자를 배출하며 ‘스타 피아니스트를 점칠 수 있는 등용문’으로 손꼽힌다. 피아니스트 이혁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고 싶어 하는 레퍼토리 아닌가. 지금 다니고 있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연주하는 걸 들으면서 나도 무대에서 이 곡을 꼭 선보이고 싶었는데, 이번에 도전하게 됐다. 난도 높은 작품이라 부담도 느꼈지만, 매력적인 도전이었다.”
이혁은 3차 예선에서 알캉의 ‘독주 피아노를 위한 교향곡’ 연주 도중, 70분 이내로 연주를 끝내야 한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연주를 중단하게 되어 마지막 악장을 완주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2명 중 6명이 진출하는 결승에 올랐다. 연주시간 초과를 의미하는 종소리가 울린 참가자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사례는 국제 경연에서 극히 이례적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는 ‘3차 예선까지 내 관점에서 최고의 경연자는 이혁이었다. 결승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고난도의 곡으로, 이혁 스스로 여전히 발전할 여지가 있음을 잘 알 것’이라고 코멘트했다.
“비르살라제 교수님을 대회 후 리셉션에서 마주쳤다.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자주 보았고 내 지도교수 블라디미르 옵친니코프와도 가까운 분이 내 무대를 4번 다 보셨으니, 용기를 내어 내 연주에 대한 소감과 조언을 요청했다. 1~3차 예선에서 보여준 독주에 대해 호평해주셨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주목하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했다.”
이혁은 자신의 길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있다. 2012년 모스크바 쇼팽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우승, 2014년 파데레프스키 콩쿠르 역대 최연소 우승과 이번 하마마쓰 콩쿠르 3위 입상 등, 조금씩 보폭을 넓히고 있다. 2014년부터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현재 차이콥스키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
“콩쿠르에 나가는 나의 가장 큰 동기는 그 과정을 통해 내 레퍼토리를 늘리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하마마쓰 콩쿠르도 결과를 떠나 경험 자체로 즐거운 도전이었다. 나는 아직 학생이고, 연주기회를 하나하나 얻는 것이 매우 소중한 때다. 그런 점에서 콩쿠르는 매력적인 기회다. 등록비를 내고 접수하면 연주 기회가 일단 한 번 생기니까.(웃음) 잘 돼서 라운드를 통과하면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기고. 또한 콩쿠르를 준비함으로써 많은 레퍼토리를 익힐 수 있는 것도 내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포부에 응답이라도 하듯, 하마마쓰 콩쿠르는 경연 우승자에게만 일본 내 입상 특전 연주를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그간의 관례를 깨고 3위 입상한 이혁에게도 공연 기회를 공식 제안했다. 이혁은 부상으로 하마마쓰 문화재단이 기획하는 악트시티 독주회 및 야마하가 주최하는 도쿄 긴자홀 독주회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또한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하마마쓰 콩쿠르 입상자 자격으로 연주한 공연은 현지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오는 가을 재초청이 성사됐다. NHK는 하마마쓰 콩쿠르 참가자 가운데 이혁을 선정해 경연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했고, NHK TV로 방영할 예정이다.
숨겨진 보석을 발굴하기
하마마쓰 콩쿠르가 진행한 입상자 인터뷰에서 이혁은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괴물 같은 기교를 가진 아믈랭처럼, 자신도 그러한 비르투오소 연주자의 길을 걸을 것인지 물었다. “기교에 있어서는 아믈랭을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웃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레퍼토리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발굴하는 그의 자세를 존경한다.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에 특히 관심이 많다. 이번 하마마쓰에서 연주한 알캉의 작품처럼,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을 발굴해서 청중에게 선보이는 것이 연주자로서의 중요한 목표다. 기교라는 것은 결국 작곡가가 원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단지 그것이 어려울 뿐이다. 테크닉에 치중하지 않고 본질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그의 오래된 취미는 다름 아닌 체스다. 피아노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일인데, 본격적인 대회에 참가하는 등 단순한 취미의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언뜻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지만, 체스를 두는 것은 음악을 대하는 그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
“동생과 거의 매일 체스를 둔다. 2017년 모스크바 오픈이라는 체스 토너먼트에 출전했다. 9번의 대국에서 2번 이기고 2번 지고 무승부 5회를 기록했다. 그때 처음으로 국제 순위를 받았다. 체스의 매력은 음악과 비슷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해서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차분히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2017년 인터뷰에서 ‘지금보다 항상 조금씩 더 발전하는 연주자로 청중의 마음속에 남고 싶다’고 말했던 이혁의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내어 온 이혁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마치 체스를 한 수 한 수 두듯이, 차분하고 신중하게 행보를 이어나갈 것이다. 올해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그의 도전이 어떠한 열매을 맺을지 기다려진다.
글 이정은 기자 사진 에투알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