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와 베스’ vs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

재즈와 탱고, 오페라에 스며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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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5월 1일 9:00 오전

THEME RECORD

아메리카 대륙에서 꽃피운 거슈윈과 피아졸라의 음악

거슈윈과 피아졸라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생한 음악의 거장들이자, 클래식 음악가의 꿈을 갖고 있었으며, 단 한 곡의 뛰어난 오페라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들이 남긴 유일한 오페라는 바로 거슈윈 ‘포기와 베스’, 그리고 피아졸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다.

아르농쿠르의 해석으로 재탄생한 재즈 오페라

‘미국 음악이란 무엇인가?’ 이민자의 나라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인디언으로 불렸던 원주민의 음악이 미국 음악인가? 이민자의 핏줄에 흐르고 있는 익숙한 음악이 미국 음악인가? 전자라면 이주민들에게는 낯설 것이고, 후자라면 모방으로 폄하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그 시기에 미국에서 자생한 음악이 제법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바로 ‘재즈’이다.

조지 거슈윈(1898~1937)도 미국 음악의 특징을 재즈라고 생각했다. 클래식 음악가를 꿈꾸었던 그는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 협주곡’ 등 클래식 음악의 양식에 재즈를 결합한 천재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비교적 초창기의 시도였음에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그의 작품들은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한다.

그중에는 재즈 오페라라고 불리는 걸작 ‘포기와 베스’가 있다. 대중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주옥같은 멜로디가 풍부하기도 하지만, 장장 세 시간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나 장면의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음악적 장치들은 클래식 오페라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대중적인 코드를 강조하느냐 혹은 클래식 음악적인 장치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런데 아르농쿠르의 거슈윈이라니! 고음악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인 아르농쿠르는 이 음반에서 거슈윈의 친필 악보를 바탕으로 ‘원전’을 구현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지지하는 고전적 양식과 구조를 효과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클래식 음악가로서 거슈윈이 품었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독창자들도 이러한 아르농쿠르의 의도에 반응하여 스윙과 소울풀한 재즈 연주를 선보이기보다는 오페라 아리아로서 접근한다. 만약 루이 암스트롱 스타일의 끈적끈적한 ‘서머 타임’을 기대했다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에서 가벼운 성격의 스포틴 라이프 역을 맡은 데이먼 에반스의 가늘고 날카로운 음성을 들었다면, 이 음반에 등장하는 마이클 포레스트의 무거운 목소리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해당 음반에서는 뛰어난 선율에 가려졌던 관현악의 활약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뚜렷하고 콘트라스트 높은 음색을 가진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총주보다는 악기 그룹의 앙상블로 구성된 오케스트레이션에 절묘하게 들어맞으면서 ‘포기와 베스’의 관현악 사운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재즈의 감각적인 기교보다도 화려한 관현악의 향연이 극을 긴장시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양한 색깔을 선보이는 탱고 오페레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탱고는 머나먼 남미의 이국적인 춤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있지 않았을까? 춤보다는 감상을 위한 탱고를 추구했던 그 덕분에 탱고는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뉴욕에서 접했던 재즈와 아버지의 강요로 억지로 익혔던 반도네온, 그리고 젊은 시절의 클래식 음악 공부 등 복합적인 음악적 배경이 깔려있다. 특히 소울풀한 스윙, 당김음과 엇박자로 만드는 긴장감 가득한 리듬, 반복되는 반주 음형, 확장된 화음과 불협화음, 즉흥연주 등 재즈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히나스테라와 불랑제에게서 배운 고전음악 이론도 그의 음악에 깊숙이 자리했다. 바흐와 스트라빈스키, 버르토크는 피아졸라의 우상이었으며(그는 침대 머리맡에 버르토크의 사진을 두었다.), 사석에서는 반도네온으로 바흐와 쇼팽, 라흐마니노프 등을 즐겨 연주했다. 작품에서는 대위법과 오스티나토, 템포 및 다이내믹의 변화와 대조, 현대적인 음향 등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의 영향이 곳곳에 넘쳐나고, 관현악곡과 협주곡, 오라토리오 등 전통적인 양식을 갖춘 곡들도 다수 썼다. 이러한 점은 어두운 클럽에서 연주되던 재즈를 콘서트홀과 메트로폴리탄에 올려놓은 거슈윈과도 닮았다. 피아졸라는 자신을 탱고의 혁명가라고 여기며, 자신의 음악을 기존의 탱고와 구분하여 ‘누에보 탕고’라고 불렀지만, 그렇다고 전통 탱고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전 탱고, 원시 탱고를 대단히 존경한다. 하지만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 피아졸라의 음악에 자주 등장하는 4분의 4박자에 3-3-2 리듬은 젊은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 오케스트라 음악에서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었으며, 악기를 두드리거나 현악기의 브릿지 아래를 긁는 소음 효과 또한 당시 몇몇 연주자들이 선보인 바 있다. 중요한 것은 피아졸라가 탱고의 정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저속하고 슬픔에 젖어있으며, 다혈질적이고 호전적인 특성이 그것으로, 빠른 부분은 투쟁적이고 거칠며 느린 부분은 극도의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이로부터 온 것이다. 1986년 제작된 전설적인 음반 ‘제로 아워(Zero Hour)’에 적혀있는 ‘누에보 탕고=탱고+비극+희극+사창가’라는 문구는 피아졸라의 음악이 가진 즐거우면서 슬프고, 열정적이면서 냉소적인 다중적 분위기를 집약한다.

피아졸라 최대의 걸작인 탱고 오페레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1968)에는 이러한 정서가 오롯이 담겨있다. 그는 1958년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무대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한다.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갱단의 이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오버랩 되어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신의 ‘타락한’ 음악과도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구상은 1966년에 작가 오라시오 페레르와 작업하면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들은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우루과이의 숲속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부으며 밤낮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피아졸라는 이 작품으로 ‘다른 피아졸라’가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전까지 작곡한 자신의 모든 작품 중 최고라고 자부했다. 1968년 5월 8일에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이루어졌던 초연에서는 페레르가 악령 역을 맡았으며, 피아졸라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가수 아멜리타 발타르가 마리아 역을 맡았다. 그리고 피아졸라 자신이 반도네온을 연주했다. 하지만 오페레타로서의 온전한 연출 무대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91년이 되어서야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단의 연주로 이뤄졌다.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뒤늦게 초연됐는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당시 피아졸라는 의식이 없는 채로 병상에 누워있어 이 공연을 보지 못했다.

2막으로 구성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춘부인 마리아의 비극적인 삶과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악령이 작품을 이끌어 갈 뿐 아니라 2막에는 ‘마리아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혼령이 등장하며, 심리적인 세계를 다루는 등 내용이 다소 초현실적이다. 마지막에 마리아의 그림자가 어린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과 대비된다. ‘수태고지의 밀롱가’와 ‘탕구스 데이’라는 제목 역시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을 정화할 구원자일까? 작품은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 의미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나리오가 이 작품이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며, 전곡 음반이 흔치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1막에 등장하는 ‘푸가와 신비’만이 따로 연주될 뿐이다.

그래서 2016년 베토벤의 고향 본에서 열린 오라토리오 형태의 전막 공연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매우 반갑다. 마리아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루치아나 만치니는 슬픔이 진하게 묻어나는 열정적인 음성과 관능적인 표현으로, 노래가 이어지는 내내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그녀는 본래 바로크 음악 분야에서 괄목한 성과를 얻은 성악가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출신성분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마리아의 감성에 충실하다. 악령 등의 역할을 맡은 다니엘 보니야 토레스는 안정적이면서도 강직한 저음으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가우초·도둑 우두머리 등의 역할을 맡은 테너 요하네스 메르테스는 비아냥거리는 음성으로 극적 분위기를 이끈다. 이렇게 체념하는 만치니와 냉소적인 메르테스가 대조되며, 보니야 토레스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균형을 맞추는 구도로 진행된다.

관현악과 함께 여러 악기가 독주자로 등장하는데, 탱고 음악이기에 반도네온이 눈에 띄는 역할을 맡는다. 이 음반에서는 반도네온의 종주국 독일을 대표하는 로타르 헨젤이 연주를 맡아 수준을 더욱 높였다. 2막 중간에 ‘항구의 겨울’ 3악장이 언뜻 들리는 것은 외지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반갑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다양한 접점으로 우리시대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 ‘콘미공’ 진행자,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 드림싱어즈 음악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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