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
악(惡)이 싹트는 자리
이 세상이 천국과 지옥 중에서 어디에 더 가까운지 묻는다면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같을 것이다. 이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완전하고(善) 아름다운(美) 진짜배기(眞) 세상이 천국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소위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함 없는 여기가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국을 맛보기 위해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언뜻 스치는 풍문과 쏟아지는 뉴스를 듣고 있자면 그들의 천국이야말로 지옥의 한복판임을 보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살기 힘든 지옥이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상은 지루해 힘든 지옥이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선과 악이 싸울 때 악의 승률이 높은 것을 봐도 그렇고, 돈과 힘을 가질수록 악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악이다. 여기가 지옥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 세상이 지옥임을 진즉에 간파해버렸다. 중세를 통과하면서 예술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지만 은연중에도 문학의 시선은 땅을 향했더랬다. 단테의 ‘신곡’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재미있게도 그중에서 가장 실감나는 부분은 지옥편이다. 탐욕 분노 폭력 등등 지옥을 가득 채우는 악의 풍경은 지금의 이야기라고 해도 될 만큼 현실감이 넘쳐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 세상 지옥 불변의 법칙이랄까. 단테에게도 천국은 상상의 세계였을 뿐이지만 지옥은 매일매일 겪는 현실이었던 거다. 그러니 밀턴이 아예 낙원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실낙원’)은 새삼스러운 비관이 아닌 셈이다.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원래 존재했던 낙원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토피아에 속고 있었던 것일까.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악이 싹트는 자리가 인간에게 점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절대적인 지식을 주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은 파우스트를 흔들지만, 아직 악마의 자리는 인간의 바깥이다. 인간은 눈앞에서 유혹하는 악마의 제안을 호기롭게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악마가 나로부터 비롯된 존재라면? 프랑켄슈타인이 과학의 절대지식으로 만들어낸 생명은 끔찍한 괴물이다. 창조물은 조물주의 형상을 닮는 법. 괴물의 존재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제 악은 인간의 안으로 들어온다. 지킬과 하이드는 같은 몸에 공존하는 선과 악이다. 지킬을 집어삼키려는 하이드에게 대항하려면? 몸을 버리는 것뿐이다! 존재하면서 악을 이길 도리는 없으니 악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음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어찌해야 할까. 인간을 집어삼키는 악에 대한 문학의 탐색은 뮤지컬로 이어진다. ‘스위니 토드’를 통해 뮤지컬이라는 해맑은 장르도 이제 악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모던’, 범죄의 토대
뮤지컬의 역사에서 ‘스위니 토드’는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의 작가이자 작곡가인 스티븐 손드하임은 현대적인 뮤지컬의 문법을 제시함으로써 장르의 범주를 확장시킨 사람으로, 한마디로 말해 불세출의 천재라고 보면 된다. 손드하임이 일군 뮤지컬의 혁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음악의 기능을 바꾸었다는 데 있다. 전통적인 뮤지컬에서 음악은 극을 돋보이게 할 수는 있어도 극에 종속되지는 않는, 극은 극이요 노래는 노래로다 식의 치외 법권의 권위를 가졌더랬다. 그런데 손드하임의 뮤지컬은 이 개념을 확 뒤집어버렸다. 뮤지컬이 극이라면 음악은 온전히 대사가 되어야 하느니. 이것은 음악이 극에 결합했던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음악은 극의 언어이자 배우의 말이 됨으로써 관객의 뇌리에 남아있는 선율이 아니라 극에 녹아들어 사라지는 화술이 되었다. 손드하임에 의해서 음악의 리얼리티는 감정에서 논리로 그 터전을 바꾼 것이다. 음악의 변화에 힘입어 때로는 일상을 담담히 그려내는 틀이었다가 때로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담아내는 틀로 변신을 거듭하는 손드하임의 작품은 뮤지컬의 재미가 예술적 깊이와 상충하는 가치가 아님을 증명하는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스위니 토드’는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뮤지컬 스릴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기존의 뮤지컬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인바, 이야기부터가 도시 괴담이다. 권력자인 판사에게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멀리 감옥에 갇혔던 이발사가 복수를 위해 런던으로 돌아와 차례차례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실화인지 소설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괴담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소재로만 보자면 적잖이 선정적이다. 살인과 겁탈, 인육과 식인 등 잔혹한 설정들이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작품 전체에 퍼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저 19세기에 유행했던 범죄 찌라시(?) 잡지의 내용을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음악의 혁신이 있었다 하더라도 뮤지컬의 영역을 깊이의 차원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말하긴 어려웠을 터다. 살인마를 앞세운 이 작품의 바탕에는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한 통찰이 깔려 있다.
일차적으로 여기서의 죄악이란 신 앞의 죄가 아니라 법 앞의 죄이다. 범죄라는 개념은 근대적 도덕률이 시작되면서 등장했던바, 법을 기준 삼아 죄를 명명하기 시작하면서 형이상학적 죄는 사회적 범죄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태초의 인간이 죄를 저지른 장소는 에덴이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죄악의 장소는 도시였으니,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처럼 농촌인구와 외국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발달한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법의 체계가 사회를 유지하는 제도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더랬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범죄는 늘어났다. 이 당시에 범죄자들의 실화를 소개하는 ‘뉴게이트 캘린더’같은 잡지의 인기가 높았던 것은 범죄가 사회적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잡지가 단지 범죄자들의 엽기적인 범행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 앞의 죄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이들이 왜 이런 범행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과연 적절한지, 범죄를 바라보는 시선은 범인으로부터 사회로 확장되었다. ‘스위니 토드’는 이런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 작품 역시 인간의 죄악은 사회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에 먹혀버린 사람들
그렇다면 사회적 악을 저지르고 있는 인물을 단죄하면 되는 거 아닌가? 멜로드라마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자면 억울한 주인공은 마땅히 사회적 악을 향해 심판을 선언해야 한다. 이 작품 안에서 법의 단죄를 받은 사람은 아무 죄를 짓지 않은 벤저민 바커이고, 그에게 벌을 구형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를 겁탈한 판사 터핀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법을 휘두르면서 죄가 없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니. 벤저민 바커는 무조건 복수해야 한다, 그게 정의다! 악으로 가득 찬 사회, 정의의 이름과 소시민의 손으로 심판하리니!
하지만 악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억울한 피해자 벤저민 바커의 행로를 보면 확연해지는바, 그는 정의로운 심판자가 아닌 연쇄살인마 스위니 토드로 변모해버린다.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 지독한 악마가 되어버리는 거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복잡해진다. 모름지기 복수는 무너진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개인의 숭고한 싸움일 때 의미를 갖는 법이다. 벤저민 바커로 남아있을 때 그의 죄는 사회의 모순과 권력의 폐해를 드러내는 무기일 테지만, 스위니 토드로 저지르는 그의 계속된 살육은 복수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거다. 그의 억울함에 연민은 생길지언정 그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그가 저지르는 과오를 볼 때 그가 단순한 악마라기보다 비극의 주인공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위니 토드는 오이디푸스와 닮았다.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던 오이디푸스가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스위니 토드는 죽여야 할 터핀을 보느라 살려야 할 아내를 보지 못한다. 아내야말로 그의 복수의 이유였건만 그는 끝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아내를 죽이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스위니 토드는, 오이디푸스가 자기의 눈을 찌른 것처럼, 자기의 목을 내놓는다. 오이디푸스는 오만함에 눈이 가려졌지만 스위니 토드는 복수에 눈이 멀어버렸으니, ‘가장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자’라는 점에서 그는 비극의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공유한다.
하지만 스위니 토드는 오이디푸스와 같은 비극적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에게는 아무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복수는 맥락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원수 터핀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그 복수의 맥락은 악행에 대한 정확한 징벌이 아니라 기계적인 연쇄살인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러빗 부인의 파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재료(?)를 공급하는 스위니 토드의 살인은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이다. 그 익숙한 패턴이 터핀을 죽이기 전에 누구를 죽이는지 보시라. 아내를 죽인다. 터핀을 죽인 후에는? 딸을 죽이려 한다. 살인의 습관으로 복수의 대상(터핀)과 복수의 이유(아내)를 모두 죽여 버린 스위니 토드에게 형이상학적 미래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의 복수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딸 조안나가 이 잔혹함에 대한 아무런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채 아비로부터 도망치는 결말에서 그의 복수는 온전한 무의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의 죽음은 비극적 도약이 아닌 인과응보에 그쳐버린다.
남은 것은 온통 악한 것들뿐이다. 자, 한 번 골라보시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사람들의 숨통을 끊는 권력자, 유일하게 남은 칼 하나로 사람들의 목을 그어버리는 살인마, 그리고 사람 고기로 파이를 만들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장사꾼. 이 중에 누가 악마일까?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악에 먹혀버린 사람들이다. 심지어 억울한 사람마저 악마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경구는 초라해진다. 이기기 위해서는 악을 누를 만큼의 힘을 갖는 게 어쩌면 더 빠를 거다. 하지만 돈과 권력이 선의 무기가 되기는 불가능한 일. 도시의 악을 형이상학적인 선으로 이긴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될 때 비극의 철학적인 의미는 멜로의 윤리적인 질문으로 바뀐다. 악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에서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스위니 토드에게도 인간의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다. 앤서니와 만날 때이다. 그는 토드의 딸 조안나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이다. 극의 맥락으로 보자면 타락한 도시와 순수한 사랑을 대조시키는 역할인 셈이다. 분량은 많지 않다. 하지만 스위니 토드와의 관계에서 볼 때 앤서니는 조안나보다 더 의미가 깊은 인물이다. 죽어가는 토드를 살린 것이 앤서니이고, 토드는 그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그가 위기에 빠질 때 도움을 자처한다. 물론 조안나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스위니 토드가 인간의 진심으로 하는 모든 일의 가운데에는 앤서니가 있다. 앤서니는 스위니 토드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정을 베푸는 평범한 청년과 만날 때 스위니 토드는 잠시나마 벤저민 바커를 되찾는다. 철학자 강상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서로가 도움을 요청할 때 응답(response)을 할 수 있는(ability) 관계인 것이다. 이 관계를 통해 스위니 토드는 앤서니와 조안나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를 자각하게 된다.
조안나가 딸이니까 토드의 책임감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스위니 토드는, 사랑하는 딸 조안나를 생각할 때조차도, 살인의 일상을 쉬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미로운 노래인 ‘조안나’의 가사는 딸을 그리워하는 아비의 마음을 절절하게 담고 있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답고 창백한 나의 귀염둥이, 죽는 날까지 널 그리워하겠지?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우리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데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서 스위니 토드는 이발 의자에 앉은 손님들의 목을 그어버린다. 이 장면만큼 악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그의 기계적인 행위는 그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사람임을,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어떤 짓을 해도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는 그에게 삶은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다. 그가 악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인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위니 토드의 곁에 터핀 판사나 러빗 부인이 아니라 앤서니와 조안나가 있었다면 그는 어떤 사람으로 살았을까. 서로에게 책임을 느낄 때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닌 사람이 악마가 될 수는 없는 법. 그랬다면 스위니 토드의 이발소 골방은 사람들을 죽이는 지옥이 아니라 만남의 광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악의 반대말은 삶이라고 했던가.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틈을 찾아 우리는 악착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악에 먹히지 않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