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신임 예술감독 유수정

본질은 소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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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9일 11:52 오후

INTERVIEW

국립창극단은 오는 6월, ‘심청가’ 공연을 끝으로 이번 시즌을 마무리한다. 다음 시즌부터는 신임 예술감독 유수정과 함께 새로운 여정에 선다. 새 시즌과 ‘심청가’ 공연준비에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유수정을 만났다

 

결국은 또 ‘창극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유수정의 인터뷰를 앞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재밌는 질문을 뽑고 싶어서 며칠간 고민했는데, 빼곡하게 정리한 질문지에는 역시나 창극의 존재론에 관한 물음만 가득하다. 묻는 사람도 지겹고, 대답하는 사람도 숨 막히는 이 질문을 지난 4월에 부임한 신임 예술감독에게 건네기가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진아 연극평론가는 한 창극 리뷰에서 “1962년 국립국극단으로 출범한 이래 ‘창극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국립창극단이 숙명처럼 자문해야 했던 것”이며, “어쩌면 이 존재론적 질문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창극의 운명인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다. 1902년 한성에 세워진 실내극장 협률사에서 창극이 기원했다고 본다면, 무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창극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누구는 창극에서의 판소리를 강조하고, 누구는 근대극인 창극의 변화를 지지한다. 오늘날에도 창극의 고유성에 관한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다르게 보자면, 하나로 정리할 수 없으니 창극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어깨는 늘 무거울 수밖에.

유수정은 1987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현역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예술감독이 됐다. 창극의 실험이 지속될수록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사실 창극단 단원들이었을 터. 단원 출신인 유수정이 그리는 창극단의 방향은 무엇일까. 어렵게 던진 질문에 유수정의 답은 분명했다. 창극의 중심에는 ‘소리’가 있다고. 사실 중심만 분명하면 크게 흔들릴 건 없다.

 

30년이 넘게 활동한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는가.

김성녀 감독님 임기가 끝나고 예술감독 공모가 났다. 나도 우리 창극단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창극단에서 30년이 넘게 단원으로 활동했는데 퇴임하기 전에 뭐라도 해놔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오랜 기간 창극단에 몸담으면서 국립극장과 국립창극단에 느낀 점과 바라는 점이 많았다. 후배와 후학들을 위해 내가 창극단을 더 좋게 변화시키고 나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모에 지원했다.

처음 소리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이신 가야금 명인 유대봉 선생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음악 하는 걸 정말 징글징글하게 싫어했다. 우리 아버지는 예술가들이 살기에 암울한 시대를 겪으신 분이다. 힘든 예술의 길을 자기 대에서 끊고 싶어 하셨다. 여자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내가 가야금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하지 말라고 악기를 발로 차신 기억이 있다.

창극 ‘춘향전’을 보고 어머니를 졸라 만정 김소희의 국악학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이다. 이후 소리의 길을 차분히 걸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흐뭇하셨을 것 같다.

처음 소리를 시작할 때 아버지가 많이 편찮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수정이 아빠, 이번에 수정이가 김소희 선생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말릴 힘도 없었는지 “본인이 하고 싶어서 시작했으면 이왕이면 최고의 소리꾼이 되길 바란다”라고 했다. 중간에 관두려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그 말이 마음에 계속 남아 있다.

지금의 ‘소리꾼 유수정’을 만들어준 두 명의 스승으로는 김소희와 안숙선이 있다. 올해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부임 소식을 듣고 안숙선 선생은 어떠한 말을 전했나.

안숙선 선생님은 지금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다. 내가 예술감독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엄청 기뻐하셨다. 아무래도 실기하는 사람이 예술감독이 됐다는 기쁨이 크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오늘날의 대중이 퓨전을 좋아한다고 해서 뿌리까지 흔드는 공연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세련된 창극을 이끌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기를 바라신다. 혼자 판단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애호가, 학자 등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이라도 허투루 들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신중하게 한 작품 한 작품 만들라는 말이다.

그간 수많은 무대에 올랐겠지만, 가장 감명 깊은 창극단 공연은 무엇이었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88년 올림픽 축제 때 오른 ‘춘향가’이다. 그때는 안숙선 선생님이 독주하던 시절이었고 더블 캐스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허규 연출가가 주역 캐스팅을 스타 팀과 신인 팀, 이렇게 더블로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 국립민속국악원 원장으로 있는 왕기석 선생님과 내가 막내였을 때다. 허규 연출가는 은희진 선생님이나 안숙선 선생님이 언제까지나 계속 춘향이를 할 순 없을 테니 젊은 친구들도 주역을 맡길 바라신 거다. 당시 주변 반대가 거셌다. 그 무대를 준비하며 창극이 정말 힘든 장르라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 판소리를 할 때는 몰랐는데, 창극은 상대의 연기와 소리 느낌까지 세심히 받아들여야 하니 어렵더라. 또 손진책 연출의 ‘천명’을 꼽고 싶다. 당시 창극단과 극단, 무용단, 국악관현악단이 협업한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아직까지 생생하고, 다시 무대에 올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불과 몇 년 전 국립창극단 퇴직을 고민한 걸로 알고 있다. 안숙선 선생의 따끔한 조언으로 정년을 채우리라 마음을 바꿨다고.

창극단을 그만두더라도 안숙선 선생님에게는 말하고 관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선생님 댁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밑바닥부터 시작한 잔뼈 굵은 단원이 갑자기 관두는 거는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예술감독이 되어서 단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립창극단을 이끌 수 있지도 않겠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는 정말 ‘아야’ 소리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무엇이 그리도 답답했나.

국립창극단은 제한이 많다. 국립극장 측은 단원들이 창극단에만 집중하기를 바란다. 창극단에 남상일이나 박예리 씨가 있었을 때도 그랬고…. 아무래도 단원 한 명이라도 자리에 없으면 연습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국립창극단 단원들 월급이 열악한 편인데, 다른 활동까지 제한하니 안타깝다. 나 역시 외부 공연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무엇보다 완창 판소리를 하고 싶었다. 창극단 단원으로 있으면서 완창 무대에 서기가 쉽지 않다. 한 번 완창을 하면 4~6시간이니 시간을 잘 안배해 오랫동안 연습해야 한다. 그런데 창극단 공연에 발이 묶여버리면 연습하기가 힘드니 답답했다. 자유가 필요했다.

국립창극단은 그동안 예술감독에 따라 추구하는 창극 방식이 조금씩 달라져왔다. 가까운 시기의 유영대 감독(재임 기간 2006~2011)이나 김성녀 감독(재임 기간 2012~2019) 시기만 봐도 그러하다.

그 부분은 정말 숙제라고 생각한다. 허규 연출가도 창극 스타일이 얼른 정립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은 백 년이 지나도 그 색깔이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창극은 예술감독 입맛에 따라 작품 스타일이 달라지니 정착되기가 쉽지 않다. 한 번 예술감독을 맡으면 3년, 더 나아가 6년 정도를 한다. 그리고 예술감독이 바뀌면 다시 창극단 색깔이 달라진다. 이 문제는 모든 국악인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국립창극단의 신임 예술감독으로서 지향하거나 지양하고 싶은 점이 있나.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직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정의 내리지 못했다. 김성녀 감독님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했고, 현대 감각에 부합하는 창극을 위해 노력했다. 김성녀 감독님 덕분에 국립창극단이 새롭게 발전한 건 분명하다. 티켓 파워도 생겼고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창극단 이름이 알려졌다. 다만 소리꾼으로서 조금 아쉬웠던 점은 ‘코카서스의 백묵원’이나 ‘우주소리’ 같은 작품은 소리에서 빗겨난 감이 있다. 나는 음악은 전통 소리에 가깝게 가고자 한다. 물론 무대나 의상, 조명, 소품은 김성녀 감독님이 하신 것처럼 모던하고 세련돼야 할 것이다.

지난해 ‘심청가’ 초연을 봤다. 최근 몇 년 간 창극단이 해온 작업들 중 가장 소리에 집중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맞다. 손진책 연출가의 ‘심청가’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아까 언급한 ‘천명’도 손진책 선생님의 연출작이다. 지난해 ‘심청가’ 초연을 보면서 손진책 연출가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내가 그린 지점과 손진책 연출이 맞닿은 부분이 많더라. 무대는 모던하고, 의상은 세련됐는데, 어떻게 보면 마당극 같기도 하다. 그런데 소리는 오리지널 버전을 삽입했으니 말이다.

이번 국립창극단 ‘심청가’에서 도창으로 무대에 설 예정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창극만의 독특한 공연예술 특징으로 ‘도창’(제삼자가 극의 전개를 창으로 해설하는 일)을 꼽기도 한다. ‘심청가’ 작창을 맡은 안숙선 선생은 6시간에 달하는 원작을 2시간여짜리 공연으로 압축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던데, 이처럼 전통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창극은 시간을 짧게 압축해야 하니 도창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도창은 창극의 고유 역할로 자리매김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창극으로 만들려면 도창은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다섯 바탕 정서에 맞는다. 그만큼 도창은 창극에서 필요한 역할이지만, 창작 작품에서는 선택적으로 쓰인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에서는 아츠닥이 도창이면서도 무대 안에 들어가 배우들과 함께 대화를 하다가 다시 무대 밖으로 나오는 설정이었다. 10년 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라이온 킹’을 봤는데, 그 작품에도 도창이 있어서 재밌었다.

임기 중 국립창극단을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안숙선 선생님이 아비뇽이나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이미 완창 판소리를 하고 뜨거운 호응을 얻은 바 있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 파리 공연만 보더라도 해외에서 우리 공연이 화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계획적으로 창극의 해외 투어 공연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 파리 공연이 끝나고 반응이 이리도 좋은데 왜 해외 공연이 드문지 국립극장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예산 때문이라고 하더라. 모든 게 예산에 가로막히니 창극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창극에 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내가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에는 창극의 해외 공연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외국 축제나 극장에서 초청을 받아서 비용 부담 없이 가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해외 극장을 대관하는 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해외에서 우리 창극단을 초청하고 싶어도 투어 인원이 50명이 넘나보니 항공과 숙박, 공연료를 모두 해결해주기가 부담스럽다고 한다. 한국 정부에서 항공료나 화물비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해외 공연 기회가 더 많아질 텐데, 일부분의 정부 지원도 부족한 상황이니 답답하다.

‘소리꾼 유수정’이 소망하는 것도 있을 텐데.

한 번은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에서 완창을 부른 적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관계자가 뮌헨에서 한 번만 더 공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두 번이나 완창을 했기 때문에 진이 빠져서 거절했다. 당시 현지 기사를 봤는데 ‘한국의 전통 예술은 자유롭고 재미있다’라고 하더라. 공연을 하다가 갑자기 물을 마시고, 고수와 재담을 나누는 게 신기했나 보다. 전통인데도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의 공연 양식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나 역시 해외에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 싶다.

장혜선 사진 황필주(studio 79)·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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