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정영두·건축가 정이삭·작곡가 카입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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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10일 12:13 오전

INTERVIEW

왼쪽부터 안무가 정영두·작곡가 카입(Kayip)·건축가 정이삭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땅과 인간, 집에 관한 깊은 사유

 

두산아트센터가 2013년 시작한 두산인문극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해 과학적·인문학적·예술적으로 접근하며, 매년 ‘모험’ ‘갈등’ ‘이타주의자’ 등의 주제로 현 사회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올해는 ‘아파트’를 주제로 하는 강연 8회, 공연 3편, 전시 1편이 펼쳐진다.

다소 구체성을 띤 존재인 아파트가 인문학적 주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다분하다.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에서 ‘불평등 상태가 과거와는 달리 문화적 생활양식을 통해 개인의 무의식과 습관을 지배하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연유로 해서 현대사회의 권력 관계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화적 생활양식 중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부조리한 인간 욕망이 ‘아파트’라는 존재에 투영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 아파트만의 고유한 특징인, 단지에 담장을 두르는 현상 역시 주목할 만하다. 단절과 폐쇄를 통해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믿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때, 아파트라는 존재가 ‘지혜로운 관계 맺기’를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해 보인다. 사고의 전환을 거쳐, 아파트를 단순히 ‘욕망’이나 ‘정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 역시 기성세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프레임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 또한 제기해볼 만하다.

연극 ‘철가방추적작전’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잇는 마지막 공연은 다원 ‘포스트 아파트 Post APT’다. 안무가 정영두·건축가 정이삭·작곡가 카입(kayip)이 공동주택으로서 아파트의 이상과 가능성을 새로운 형식의 공연으로 선보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나의 아파트’에서 벗어나라!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온 3명의 크리에이티브 간 협력 과정이 궁금하다.

정영두 지난해 프로덕션에 참여할 사람들을 꾸렸다. 이후 아파트와 관련된 주요 이슈를 찾고, 전문가들의 강연을 들으며, 영상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등 내부적인 리서치를 꾸준히 진행했다. 연초가 지나가면서 다른 파트와 연계해서 프로젝트를 만들어갈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공연이다 보니 배려와 확고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소재들을 놓고는 분야마다 이견들이 있는데, 그 위치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각자가 생각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에 와있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연출가로서 가장 먼저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낀다.

카입 초기에 합의하고 시작했던 것이 여러 매체가 참여하는데, 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각 매체가 동일한 작동 원리를 공유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느 한 장르가 멈춘 다음에 다음 장르가 더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상호작용하면서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혼란은 필수 불가결하다.

정이삭 협력 작업의 결과물은 평균보다 밑이거나 위다. 혼자 작업할 때는 자극이 부족하나, 요즘 두 분의 자극을 많이 받는다. 좋은 것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한 세팅이다. 협력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느리고 힘들지만, 방법 자체는 맞는다고 생각한다.

정영두 어제 제작진에게 ‘포스트 아파트 선언문’을 써보자고 했다. 프로덕션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지향점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포스트 아파트’에 대한 공통적인 의견으로는 ‘재산 증식의 도구가 되선 안 된다’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 ‘지역사회나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다양한 인종·문화·계층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정도였다. 70% 정도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큰 수확이었다. 일부 퍼포머는 ‘모든 것이 아파트여야 한다’ ‘모든 생활이 아파트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재밌는 관점들을 내놓기도 했다.

‘포스트 아파트’에서는 현재의 아파트 이후 세대를 그리고자 한 것인가.

정영두 시간적인 배경이 미래 사회로 설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바라보는 걱정이나 기대, 우려 같은 것들을 펼쳐놓고, 땅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 다음, 마지막 3장쯤 가서 미래의 아파트는 어때야 하는지 현실이나 과거를 근거로 설명할 예정이다. ‘포스트 아파트’라면 이러한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고, 이런 부분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포스트 아파트’,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해야 하나.

카입 그 입장을 세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도 작품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양극단으로 나뉘지 않는 것들의 경우, 중간의 모든 지점을 봐야 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 자체가 미래가 될 수 있다.

정이삭 ‘포스트 아파트’는 단순한 미래가 아니다. 미래를 단순히 기술적으로 예측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작품에서의 ‘포스트’는 ‘애프터(After)’라기보다는 ‘비욘드(Beyond)’의 의미기 때문이다. ‘비욘드’를 위해선 시간 순서대로 그다음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광범위한 지구의 역사까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자연사로 보자면 인간의 역사는 매우 짧지 않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뛰어넘으려(Beyond)’ 노력하는, 수많은 고민의 순간들이 모여 공연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한 관계 맺기의 확장이나 인구 감소 등 인간 삶의 형태가 변화함에 따라 주거 환경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 아파트’의 형태에 영향을 미칠 만한 또 다른 사회과학적인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

정이삭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가 도입된 지 꽤 됐고,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가 성인이 되어 그 이후에 대해 생각하게 된 시기다. 이들이 생각하는 아파트가 과연 얼마나 폭력적일까 돌이켜보면, 그렇게 폭력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파트라고 하는 보완된 기계장치 안에서도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가치를 수호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 이뤄졌다. 형식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분명히 있고, 이것은 분명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라는 발명품 그 자체에 면죄부가 쓰일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 때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먼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모든 팩터를 고려할 수도 없다. 최적이라고 판단했던, 20세기 초 기능적이고 모던한 아파트라는 발명품은 결국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이 측면들을 고려하면, 향후 우리가 마치 발명품을 만들어내듯이 하나의 주거형식을 선언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번 ‘포스트 아파트’ 프로젝트를 해나가면서 합의되지 않고 나열되는 내용들이 있는 것처럼 주거 형태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하나로 합일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파트 다음의 특정한 주거 형태를, 획일한 방법으로, 소수의 사람이 정하는 폭력적인 과오를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된다.

정영두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아파트라는 존재를 생물(生物), 즉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규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정영두 문화를 생물이자 하나의 진화한 종으로 바라보는 의견이 있다. 아파트 역시 기계적이거나 내 몸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고 인식한다면 유효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이렇게 설정해봤다.

카입 고정된 것은 아니고 시대적·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동의한다.

정이삭 아파트 자체를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파트의 본질적인 아이디어가 어느 지점부터 있었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진화해 온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기념비적인 기준점을 만들어서 이를 아파트의 시작으로 삼자라고 정의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시간적인 경과를 가늠하고자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미국·일본 등을 거쳐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 아파트는 처음에는 ‘독신가구 전용 임대주택’으로, 현재의 양상과 다소 달랐다. 오늘날 한국은 아파트 ‘단지’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단지에 담장을 두르는 형태를 띤다. 이렇게 배타성을 띠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이삭 한국형 아파트의 가장 큰 특징은 단지형이라는 점이다. 또한 서구의 아파트와는 다르게 가로는 길고 세로는 좁다. 단지형을 만들어낸 것은 1960년대 초 마포아파트가 맞다. 국가에서 도시환경을 개선해줄 수 없으니, 부분적으로나마 민간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소수의 사람이 힘을 모아서 본인들이 살 수 있는 영역만큼은 모든 세팅을 갖춰놓고 깔끔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가 기껏 힘들여서 갖춰놓은 세팅을 공유하고 싶겠나. 이건 오직 나만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담을 쌓기 시작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제대로 된 주거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집단 이기심의 발현이다.

카입 경계 밖에 있는 것이 더 좋다면 경계를 칠 이유가 없다. 바깥 상황 자체가 이 사람들에게 보호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경계를 치는 것이고,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단지형 아파트는 인간 본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욕망 자체를 ‘좋다 나쁘다’라고 가치 판단할 순 없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본성이며, 이를 통해 인류는 사회나 부족을 이루며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정영두 국가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어떤 공동체로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힘든 만큼, 한국 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시대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야 다시 한번 그 과정을 돌이켜보자는 반성이 일어나는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생각 역시 작곡가의 말에 동의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동체는 소속감과 동시에 배타성을 지닌다. 칼이라는 도구 자체를 두고 가치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단지형 아파트를 두고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단지형 아파트 역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 인상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인 부작용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포스트 아파트’는 어떻게 기능해야 할까.

정영두 단지 이외의 환경이라든가 다른 단지와의 대립 등 단지형 아파트로 인한 사회적인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다른 기준으로 어떠한 조치는 분명 취해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공간이나 땅에 대해 가져야 하는 예의, 타인에 대한 예의와 같은 것들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는 작업이 되면 좋겠다.

카입 개인은 여러 층의 울타리 속에 산다. 그래서 여러 집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나 큰 울타리에서 보면 같은 집단에 있는 인간 존재들이다. 타인과 나의 거리감은 자신의 이익에 가까운 것들을 고려하여, 이들 사이에 어떤 경계를 짓느냐 하는 문제다. 이것이 외부 사람에게는 박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경계 밖에 있는 타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정이삭 무대를 구성하면서, 세상이나 집 등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압축하는 것들로서의 오브제를 나열한 후 사람을 넣었다. 그런데 사람도 오브제 같이 느껴지더라. 세상을 바라보는 신이나 이를 관장하는 주체가 아니라, 무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관객들도 자신이 이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해, 나의 존재 자체에 질문하도록 하고 싶다. 공연이 끝난 후, 스스로의 ‘포스트 아파트’는 각자 결정해야 한다. 그걸 우리가 결정해주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 번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다.

 

‘포스트 아파트’, 그 실체를 밝히다

정이삭

쉽게 예상되지 않는 공연 형태다. 출연진의 역할이 궁금하다.

정영두 처음에는 안무하는 사람들로만 출연진을 구성하려고 했다. 5~6명 정도로 진행하려고 하다가 3명을 먼저 캐스팅했다. 그러다가 아파트라는 소재가 추상적인 존재는 아니어서, 최소한의 합의된 매체로서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후 배우 3명이 추가로 합류해서 총 6명의 출연진이 등장한다. 누가 보더라도 무용이구나 하는 장면도 있고, 연극처럼 캐릭터의 일부구나 하는 장면도 있다. 함께 섞여서 진행하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움직임의 근거들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움직임이 다른 파트에 어떤 영감을 줄 것인지, 그리고 다른 파트로부터 어떻게 영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다.

사운드 작업 과정 역시 궁금하다.

카입 음악이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안무와 건축이라는 두 매체 사이의 촉매 역할을 상상하고 있다. 작곡하는 방식에 건축·디자인적인 언어나 움직임적인 언어의 영향을 받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무대는 그리드(Grid), 즉 수평과 수직의 언어로 구성되는데, 평면으로 본 상황에서 하나하나 픽셀의 움직임을 이용해 음악적인 신호로 변환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그리드 안 객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소리가 발생하는 것이 도시 환경에서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무의 언어로서는 직교가 어긋나는 움직임을 통해 그리드가 허물어지면서, 유기적인 결과물로 남는 그림을 상상하며 작업하고 있다. ‘아파트 오케스트라’ 또한 구상하는 단계다. 아파트 단지를 직접 방문하여 단지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24시간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녹음했다. 이를 토대로 ‘아파트의 목소리’라는 주제로 사운드 작업을 했다. 야간에 녹음하다 보니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파트의 불빛이 켜지고 꺼지는 것이 보이더라. 그런 패턴의 움직임이 아름다웠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악기와 소리가 모여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나. ‘포스트 아파트’ 역시 다양한 움직임과 상징적인 동작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카입

주제가 아파트인 만큼 ‘포스트 아파트’를 상징하는 건물이 등장하는가.

정이삭 건물을 보고 싶겠지만 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설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여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각자의 ‘포스트 아파트’는 주체적으로 생각해나가야 한다. 이번 무대는 삶 그 자체이고, 집이기도 하며, 동네·사회·도시·세계이기도 하다. 무대에는 개개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오브제들이 나열된다. 이 부분들 사이 존재하는 큰 여백은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나 제작자로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특정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무대가 아닌 실제 환경에서 공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을 가지고 프리 액팅을 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공연에서 사용될 예정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아파트는 00다’를 한 문장으로 정의해 달라.

카입 아파트는 경계다. 앞서 이야기한 이유에서다.

정영두 아파트는 신념이다. 하나의 신념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다. 연출가인 나부터도 현재 아파트를 1~2채를 소유했다든가,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있다면 지금처럼 아파트를 비판할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오직 신념만으로 집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이번 작품을 통해 땅 또는 집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신념이라도 견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이삭 아파트는 집이다. 인간의 건축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껏 하는 행위는 바람과 비와 태양과 추위를 피하는 가장 기본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행위의 변주에 불과하다. 인간은 거주할 수밖에 없고, 거주하는 곳이 나와 공간 사이 어떠한 끈을 만든다. 우리는 끈으로 연결된 그 장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아파트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하영 기자 사진 황필주(studio 79)

 

두산인문극장 다원 ‘포스트 아파트 Post APT’

6월 18일~7월 6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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