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5
인문학의 질문을 담은 고민
소통이 어려운 이유
흔하게 쓰느라 뜻이 바래버린 말들이 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국민’ 같은 단어가 그렇다. 자기네는 오직 국민의 뜻에 따랐다는데 어떤 국민도 그들에게 그런 언행을 요구하거나 그런 몰염치를 허락한 적은 없다. 국민이란 말은 정치인에게 실체가 없는 허언(虛言)에 불과한 거다. 이런 비어있는 말은 우리 일상에도 차고 넘친다. 정의라는 말도 그렇고 윤리라는 말도 그렇다. 정의를 말하는 이들은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일 때가 많고, 윤리를 말하는 이들은 윤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일 때가 많다. 사람살이의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는 말일수록 왜 이리 쉽게 죽은 단어가 되어버리는 걸까. 말이 가벼워진 탓일 거다. 본래 말(言)이란 몸(人)으로 증명될 때 신뢰(信)를 얻을 수 있는 법이거늘, 자기가 한 말대로 행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입으로 내뱉은 말을 몸으로 주워 담지 않을 때 말은 삶이 되지 못하니, 말을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오직 하나, 삶이다. 삶으로 끌어안지 않은 말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공허함은 비단 정의와 윤리 같은 거대한 단어만의 몫은 아니다. 공감과 소통 같은 따뜻한 말 역시 비어있긴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공감이란, 말 그대로 당신의 마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너와 나는 같은 마음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왜냐,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같든, 처지가 같든, 대상이 같든, 공통점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둘 사이에 동질감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공감이 자칫 일방적인 자기화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자기의 경험 안으로 상대방의 경우를 끌어당겨 생각하는 것을 공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거다. 그나마 둘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면? 공감의 상대는 방관의 대상이 되기 쉽다. 정말 안됐네, 그렇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쩌면 ‘공감하기’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방관하지 않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통이란 이런 뜻일 거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방관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매개를 찾아 나가기 위한, 끝이 보이지 않는 노력. 이런 노력은 티도 나지 않고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다른 이와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나부터 깨뜨려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어렵다. 소통을 목 놓아 외치지만 우리 사회에 소통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通)하기 위해서는 막힌 것이 트여야(疏) 하건만, 언제나 막힌 탓은 다른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돋보기를 들이댄 것처럼 잘 보아도 자기 눈에 박힌 기둥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다. 이런 사람이 소통하자며 들이댄다면? 무서운 일이다. 신발도 신지 않고 얼른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을 빼려다가 눈알을 뽑아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소통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열린 문이 아니다. 자기의 벽을 먼저 허문 사람만이 시작할 수 있는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 바로 소통인 바, 다른 이와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가 평생 꿈꿔야 할 판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 판타지의 온도는 분명 따뜻할 터.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이런 따뜻함을 품은 작품이다.
키워드를 찾아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뮤지컬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이 바로 ‘벽을 뚫는 남자’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과는 사뭇 결이 다른 이 작품은, 그렇다. 프랑스 뮤지컬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원작을 뮤지컬로 옮긴 이 작품은 1996년에 초연됐을 때 그해 프랑스의 대표적인 연극상을 받았을 만큼 ‘프랑스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형식부터가 그렇다. 보통 프랑스 뮤지컬이라고 하면, ‘노트르담 드 파리’나 ‘레미제라블’처럼,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잇는 ‘송스루’ 형식과 배우의 노래와 댄서의 춤을 분리해 구성하는 퍼포먼스의 방식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벽을 뚫는 남자’ 역시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극 전체를 노래로 이끄는 송스루의 형식을 그대로 잇고 있다. 그렇다면 퍼포먼스는?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만듦새를 보자면 프랑스 뮤지컬의 강한 퍼포먼스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피아노 한 대로 채워지는 음악의 미니멀리즘도 그렇고 배우들의 일상적이고도 조형적인 움직임이 어우러진 무대화의 방식은 강한 퍼포먼스의 전통을 연극의 문법으로 간결하게 압축시켰다. 퍼포먼스의 밀도가 더 높아진 셈이다. 그래도 이 작품이 지니는 독특함의 핵심은 역시 이야기에 있다. ‘아모르’로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뜯어고친 브로드웨이의 공연이 쫄딱 망했던 것을 떠올리자면, 이 작품의 고갱이는 다름 아닌 이야기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원작의 이야기는 언뜻 동화 같다. 존재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벽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벌써 재미있지 않나? 마르셀 에메는 짧은 이야기 안에 풍자와 역설, 유머와 따뜻함을 모두 담아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니,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이야기에 담긴 생각거리는 많기도 하다. 무료할 만큼 평범한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이나, 그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일부러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몸을 혹사해서 기력이 없을 만큼 무언가에 열정을 쏟아야지만 이 증상이 사라질 수 있다는 치료법에서부터, 평생 경험하지 못한 사랑에 깊이 빠진 순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능력을 잃어버린 채 벽에 갇혀 버리는 남자의 최후까지,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쉬운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뮤지컬은 원작을 수평적으로 옮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각색되었다. 분량부터가 그렇다. 원작보다 각색 대본이 훨씬 길고 자세하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캐릭터의 디테일이 생기고 사람마다의 사연이 추가되는 등 다소 건조한 원작보다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가 된 거다. 그렇다고 뮤지컬 작가가 마음대로 작품을 뜯어고친 건 절대 아니다. 각색된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마르셀 에메의 다른 작품에 나타나는 문제의식, 즉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그대로 배어있다. 나치에 부역했을 뿐 아니라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인간이 다른 사람의 죄를 묻는 검사의 자리에 있다거나,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긴 의사가 오히려 나치의 부역자로 몰려 술주정뱅이가 된다거나 하는 설정 등등이 그렇다. 작가의 전작(全作)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이 구체적인 디테일로 대본에 첨가되었을 때 이야기의 키워드는 분명해진다. 사랑? 그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벽’이다.
저마다의 ‘벽’에 갇힌 사람들
브로드웨이에서는 이 작품의 키워드를 ‘사랑’으로 이해했지만, 이 뮤지컬은 전적으로 ‘벽’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보이는 벽에 갇혔거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려져 있다. 주인공 듀티율은 원작에서는 등기소 직원이지만 뮤지컬에서는 우체국 민원처리과 직원으로 바뀌어 있다. ‘소통의 부서’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소통’을 해야 하는 듀티율은 친절한 편지로 사람들에게 대답하지만, 정작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진지하게 듣고, 가장 성실하게 답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욕설(‘왜 민원처리를 안 해주는 거야!’)이나 조롱(‘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하다니!’)이다. 고객에게나 동료에게 듀티율의 존재감은 없다. 효율성의 논리로 꽉 찬 세계에서 듀티율 같은 사람은 무관심의 벽에 가려진 사람인 거다. 물질세계에서 ‘없는 것과 다름없는’ 이 사람에게 물질세계를 넘나드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작가의 유쾌한 반어법이다. 비물질을 의인화하면 바로 이 사람일 테니 말이다. 듀티율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려져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 듀블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힌 사람이다. 듀블은 유능했을 뿐 아니라 하루에 17시간씩 무료로 환자를 돌볼 정도로 열정이 있는 의사였다. 나치가 사람들을 부역자로 끌어갈 때 가짜 사망진단서로 사람들을 구했고, 나치군인이라는 사실에 상관없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그의 용기와 윤리는 이적 행위가 되어버렸다. 적군인 나치를 구하다니. 다른 이유는 들을 필요도 없다, 나치를 살린 너는 반역자다! 적군과 아군의 이분법에 갇혀버렸을 때 생명의 윤리는 쉽게 반역의 행위로 전락해버린다. 듀블을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벽이니, 그의 우스꽝스러운 술주정이 마냥 재미있을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사벨은 말 그대로 벽에 갇힌 여자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한창 꽃을 피울 나이에 나이 든 남편과 결혼해서 집에만 갇혀 살아간다. 그는 자유를 꿈꾸지만 그건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외출할 때마다 그의 방을 자물쇠로 닫아거는 남편은, 사회에서는 불의한 권력층이요 가정에서는 폭력적인 가부장이니, 이사벨은 남편에게 예쁜 장식품 같은 소유물에 불과할 뿐이다. 아내라는 이름보다는 노예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는 이 집 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일상적이고 익숙하지만 가장 견고하고 잔인한 벽에 갇혀버린 사람이 이사벨일 것이다. 이사벨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신념이라고도 하고 계층이라고도 하고 상황이라고도 하는, 자기의 벽 안에서 자주 체념하며 살아간다. 예술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화가가 등장하는데, 원작에서는 사람들의 작은 변화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놀라운 관찰력의 소유자로서, 변장한 듀티율을 한눈에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뮤지컬에서는 조금 다르다. 화가는 벽을 넘나들며 이사벨과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듀티율을 보면서 자기의 예술을 되돌아본다. 듀티율은 사랑을 위해 벽을 넘나들건만, 판박이 같은 초상화만 반복하는 나의 그림은 밥벌이에 갇혀버렸구나! 화가는 듀티율을 통해 자기가 어떤 벽에 갇혀있는지 스스로 발견한다. 예술이란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통로이건만 밥벌이에 갇힌 그림은 ‘허공을 오가는 무뎌진 붓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벽의 종류는 제각각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벽에 모두 갇혀 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벽을 넘나드는 ‘능력’
그런데 이 모든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가 넘쳐나기 시작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이 ‘벽을 넘나들게 되면서’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벽을 넘나드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건네는 손길이 되고, 거리의 여자에게 귀부인의 보석을 선물하는 신사가 된다. 한 번도 호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을 때 그들은 삶이 아름다운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벽을 넘나드는 사람’이 불법행위자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와 매춘부와 공무원이 그를 변호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 이들이 협력하다니! 서로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를 위해 ‘함께’라는 구호를 외치는 풍경은 풍자와 선량함이 잘 섞인 유쾌한 판타지다. ‘벽을 넘나드는 사람’의 활약은 따뜻함에 국한되지 않는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는지, 얼마나 추악한 쾌락을 즐기는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데 얼마나 거리낌이 없는지, 힘 있는 자의 추악한 진실을 세상 앞에 까발리는 이는 ‘벽을 넘나드는’ 평범한 사람이다. 통쾌한 순간이다. ‘벽을 넘나드는 사람’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변해간다. 놀라운 것은 그 관계 안에서 ‘벽을 넘나드는 사람’도 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안전한 벽을 뚫고 나와 이제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거다! 자기가 쌓아올린 벽과 사회가 가로막은 벽에 가로막혀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떠한 벽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만나는 순간 그들의 마주침은 깊은 사랑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 과정에서 모든 힘을 다하느라 기력이 빠져 ‘벽에 갇힌 채’ 죽어버릴 위험이 있지만, 이미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벽은 더 이상 넘지 못할 장애물이 아니다. 이제 벽은, 그 벽을 넘나들었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만남의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의미를 바꾼다. ‘벽을 넘나드는 능력’이 던지는 생각거리는 따뜻하고도 묵직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 듀티율이 처음 발휘하는 힘은 자본주의적 유능함(얼마든지 빵과 보석을 가질 수 있다!)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느끼는 허기가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음을 금세 깨닫는다. 이제 그는 물건이 아닌 사람들 사이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것을 마음껏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을 가로막는 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자연을 넘어서는 힘이 초능력이라면, 소통을 꿈꾸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강력한 초능력자일 거다. 가질 수 있는(有) 능력이 아니라 넘어서야만(超) 가능한 능력. 우리 주위 어딘가에 분명 초능력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초능력자여야 할지도 모른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