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Ⅰ. 클라라, 예술이 된 삶
어떤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된다. 끊임없이 영감과 감동을 주며, 늘 새롭게 해석되는 작품인 것이다.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의 삶이 그러하다. 200년 전 독일에서 탄생한 이 위대한 여성은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갔다. 그녀는 예외적인 존재이자 독특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신동 음악가로, 뛰어난 작곡가로, 대가 연주가로, 악보 편집자로, 그리고 유명한 교수로 클라라는 평생 자신의 길을 확장해갔다. 그녀와 함께 여성 음악가에 대한 인식의 지평도 함께 확장되었다. 선동가는 아니었지만 클라라가 지나간 곳에는 폭탄이 떨어진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됐다. 진정한 영향력이다. 이제 세상은 그녀의 삶과 음악을 다시 볼 준비가 됐다.
클라라, 그리고 프리드리히 비크
클라라는 1819년 9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라이프치히에서 유명한 음악교사였고, 어머니 마리안 트롬리츠는 뛰어난 성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는 이들 부부의 장녀였다. 음악가가 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지만, 집안은 억압적 성격의 비크로 인해 늘 긴장된 분위기였다. 네 살 무렵까지 클라라는 전혀 말을 하지 못했다. 부부는 1825년 당시로서는 드물게 이혼을 했다. 클라라는 다섯 살부터 양육권이 있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음악을 위안처로 삼은 클라라와 딸을 유명한 음악가로 키우려는 비크의 야심은 클라라가 예술가로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비크는 클라라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클라라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클라라의 일기를 자신이 쓰기 시작했다. 클라라의 생활뿐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클라라가 써야 했던 일기는 비크가 음악 사업을 위해 다양한 이들에게 쓴 공격적인 편지들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클라라는 열아홉 살 때 출가하면서 비로소 일기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있었다. 클라라는 유년시절을 상실했지만 뜻밖의 보상이 있었다. 바로 연주를 어떻게 기획하고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방법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이 능력은 훗날 클라라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클라라는 당시 최고의 음악 교사들에게 실기와 이론을 배우면서 주목받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1828년 10월 20일, 아홉 살의 클라라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첫 공식 공연을 했다. 그녀는 호평과 함께 음악계의 기대를 받았다. 이후로 클라라 부녀는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양한 도시에서 크고 작은 성공을 이루며 명성을 쌓아갔다. 1832년에는 파리에서 연주했고, 1837~1838년에는 빈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명예와 돈이 한꺼번에 주어졌다. 빛나는 시절을 맞이한 클라라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로베르트 슈만과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클라라,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단련된 클라라에게는 아버지만큼이나 강한 집념과 신념이 있었다. 결혼을 격렬히 반대하는 비크에 맞서 클라라와 슈만은 법정 투쟁 끝에 승소했다. 이들은 1840년 9월 12일, 클라라의 스물한 살 생일 전날에 결혼했다. 이미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는 슈만의 창작력을 흠모했으며, 야심찬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클라라의 연주력에 감탄했다. 음악을 매개로 한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음악사에도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한 결합이었다. 이들이 결혼한 해에 슈만의 창작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클라라는 결혼한 다음 해에 첫 딸 마리를 출산했다. 이후 이들 부부는 일곱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슈만과의 14년간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 개성 강한 두 예술가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편, 서로의 경력과 능력에 대한 질투와 좌절에 시달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 수 없는 존재였다. 자존심 강한 슈만은 자신보다 유명한 아내를 견디기 힘들어 했고, 클라라는 슈만이 작곡할 때는 피아노 연습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절망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작곡에 대해서도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게 됐다. 클라라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를 원했다. 장녀 마리를 낳은 다음 해인 1842년 그녀는 연주자로 다시 복귀했다. 이후로 계속되는 임신과 출산 속에서도 클라라는 음악 활동을 강행했다. 1854년에 슈만은 정신질환으로 엔데니히의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슈만의 발작과 클라라의 충격을 염려해 클라라의 면회를 금지했다. 슈만이 병원에 있는 이년 반 동안 클라라는 그를 방문하지도 못했다. 슈만의 상태를 제대로 알 수도 없는 가혹한 상황에서 슈만의 병원비와 가족들의 생계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주변의 경제적 도움을 일체 거부한 클라라는 슈만이 입원한 이틀 후부터 일을 시작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연주 일정을 잡았다. 음악 활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단인 동시에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안식처가 되었다.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야 비로소 그를 볼 수 있었다. 슈만의 죽음 후에 그녀는 슈만 작품의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 그의 음악을 알리는데 힘썼다.
클라라,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
슈만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브람스가 클라라의 곁을 지켰다. 브람스는 클라라와 아이들, 그리고 집안 전반의 일들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내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점차 사랑으로 깊어졌다. 그렇지만 슈만의 죽음 이후에 클라라와 브람스는 평생 평행선을 그어가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자신의 작품을 출판해온 뛰어난 선배 작곡가였던 클라라는 음악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인맥, 그리고 기획력을 갖춘 여인이었다. 슈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브람스는 경력 초기에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평생 브람스 작품의 가장 탁월한 비평가로서 그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연주를 통해 브람스의 작품을 알리고 작품의 출판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브람스 역시 클라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도움을 주었다. 작곡가로 연륜이 쌓인 후에 브람스는 클라라의 연주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비평가가 되었다. 클라라와 슈만이 그러했듯, 클라라와 브람스도 서로에게 가장 힘이 되는 음악 동지였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 세 사람이 서로에게 보인 존경과 헌신은 절대적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1개월 후에 브람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운명의 공동체
프리드리히 비크, 로베르트 슈만,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 이들에게 클라라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또한 클라라는 이들 모두가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개성 강한 이들로 이루어진 이 운명 공동체에서 오는 혼돈과 갈등을 그녀는 삶과 음악을 통해 창조적으로 풀어갔다. 그녀는 새로운 변화와 성취를 이루어가는 중심점이 되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에 한 편지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독재자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자신에게 극도로 엄격했던 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으며, 그로 인해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예술에서 신선함이 남아있고 세상의 찬사에 거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유년 시절부터 굴곡 많은 삶을 살면서 클라라는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클라라는 아버지의 고된 훈련, 슈만과의 결혼과 사별, 브람스와의 특별한 만남을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해가는 동력으로 삼았다. 이 위대한 예술가에게 음악은 삶의 끝없는 부침속에서 견고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다. 클라라가 이룬 예술적 성취와 그녀의 영향력은 슈만과 브람스의 시대를 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술을 위한 삶
클라라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부응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가진 음악가였다. 전문 음악인으로서 그녀의 확고한 정체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이러한 클라라에 대해 “성스럽고 충직하고 엄격한 사제”라고 표현했다. 일곱 명의 자녀를 양육하며 무리하게 활동하는 클라라를 염려하는 브람스에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내 모든 힘을 다 쓰지 않는다면 건강은 더 좋아지겠죠. 그렇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몰두했다. 그녀의 음악활동이 그 성과물이었다. 자료로 기록된 클라라의 연주 횟수만도 1,300회에 이른다. 그녀는 음악을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악보에 충실함으로써 당대의 여타 연주자들과 뚜렷이 구별됐다. 60년이 넘는 그녀의 연주경력동안 비평가들과 청중은 한결같이 그녀의 연주에 찬사를 보냈다. 또한 그녀는 뛰어난 작곡가로서 열한 살에 처음으로 작품번호를 붙인 ‘네 개의 폴로네이즈’ Op.1을 출판하기 시작해 많은 독주곡과 앙상블, 그리고 가곡들을 작곡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클라라의 작품들은 이제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 목소리를 되찾고 있다. 클라라에게 예술을 위한 삶은 곧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루는 길이었다. 정신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다른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자신의 삶을 명징하게 삶으로써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 자유를 주는 것이다.” 두 세기 앞서서 클라라는 여성의 활동이 제한됐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 편집자, 그리고 교육자 등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약하며 후대 음악가들이 딛고 설 수 있는 거대한 어깨가 되었다.
글 서주원(음악평론가)
Ⅱ. 클라라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 세계
19세기 낭만 시대의 유럽은 사회, 정치적 환경의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사고와 철학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사회적 체계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의 역할과 기능 또한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조심스럽게 허용되면서 특별히 대중연주에서의 여성의 영역도 넓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활동은 제한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이런 다양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여성 작가나 작곡가들이 생겨났다. 출판물을 주도하는 창작 영역보다는 창작물을 재연출하는 연주 분야에서의 여성 활동이 좀 더 너그럽게 받아들여졌지만, 여전히 유럽사회는 여성들에게 대단히 폐쇄적이었다. 클라라 슈만은 이런 예술 환경적 변화의 시기를 살면서 연주가로서, 예술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녀는 창작물보다는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로 더 알려져 있고 슈만 작품의 영감의 근원이자 뮤즈였으며 그의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여성 피아니스트 정도로 평가 받아왔다. 이것만 해도 당시의 사회적 정서로는 대단히 높은 평가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의 역량이 충분히 반영된 평가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유로화로 유럽의 화폐가 통합되기 전까지 100마르크에 해당하는 독일 지폐의 초상화가 바로 클라라의 것이었으니 현재 독일인들에게 클라라의 존재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가 아닌 독립적 인격체로, 또 예술가로서의 연구와 평가는 그리 많지 않고 더군다나 작곡가로 제대로 연구되고 조명되어진 사례는 더욱 많지 않다. 올해가 클라라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인 것을 계기로 클라라 슈만의 창작 세계, 특별히 피아노를 위한 그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클라라의 삶은 연주자에서 슈만의 아내로 내조하고 시간이 가면서 생겨나는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창작 측면에서 보면 그리 녹록지는 않은 환경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그녀의 작품들은 결혼 전과 결혼생활 중, 그리고 슈만의 사후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오른쪽의 표는 이런 기준으로 분류한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작품을 요약한 것이다. 이 표에서는 각 시기별로 나눠진 작품들의 특징과, 당시 작곡되어진 피아노 외의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표시해 두었다. 오른쪽의 표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기교적으로 화려하거나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명기적인 성향의 작품을 주로 작곡했다. 또한 성격소품(서정적인 피아노 소품)들을 많이 작곡하여, 어린 클라라의 음악은 진지하기보다 사교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라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음악교육을 받으며, 예술가로서 일생을 살 수 있는 음악적 기반을 마련했다. 10세가 되기 전부터 대중 연주를 시작했던 클라라는 당대 유명 음악가들로부터 극찬을 들으며 연주자의 길을 탄탄하게 만들어갔다. 그녀의 연주 레퍼토리는 슈만과 결혼한 1840년까지 화려한 곡들을 위주로 하면서도 모차르트·베토벤·쇼팽·멘델스존·슈만 등의 작품들을 망라했다 하니 그녀의 레퍼토리 폭이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혼 후 더욱 넓어진 음악세계
결혼 생활을 시작하며 남편인 슈만과 함께 바흐·베토벤·하이든·모차르트 등의 작곡가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실내악과 관현악곡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성장시켜나갔다. 클라라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남편과 함께 매일 푸가와 대위법에 대해 공부했다고 하니 작곡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결혼 후 클라라가 남편 슈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내조와 양육을 병행하면서 작곡활동에 집중하기는 매우 어려웠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성격소품을 작곡하면서 고전적 형식의 피아노곡과 실내악 작품을 다수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로베르트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는 다시 연주하는 일과 작곡, 그리고 남편의 악보를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연주 활동에도 좀 더 많이 집중할 수 있었지만, 이 당시 그녀의 활동은 오롯이 창작을 위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가장으로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생계형 연주자로 살아야 했고 이것은 그녀의 예술성을 많은 부분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음악 중에서 주목할 만한 세곡을 살펴본다.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음악
‘음악 야회’ Op.6
먼저 ‘음악 야회(Soirées musicales)’ Op.6은 6개의 소품을 묶어 놓은 성격적 소품이다. 다음은 각 곡의 조성과 형식을 정리한 것이다.
살롱 음악적 특징을 가진 여섯 곡의 연관성은 특별한 통일적 요소는 없으나 각 작품의 특징은 제목에 잘 드러난다. ‘토카티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의 제목을 보면 쇼팽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작품은 토카타보다 작은 형식의 의미로 토카티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고 ABA′형식으로 A부분은 a단조로 시작하며 포르테(f)의 프레스토(presto)로 진행하고, B부분에서는 ‘조용하면서도 풍부한 표정으로(espressivo e tranquillo)’의 지시어가 나타내듯 A부분과 대조적인 분위기로 A장조로 전조되어 부드럽게 표현된다. ‘노투르노’(Notturno)는 F장조로 시작하는 AA′BA″형식의 작품으로, 이른바 ‘클라라 주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A부분에서의 단순한 선율 진행은 A′에서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며 발전한다. B부분은 d단조로 전조되어 시칠리아노풍의 느낌으로 전개되고, 이어서 A″에서는 F Major로 돌아오며 선율이 더욱 화려하게 장식된다. ‘마주르카(Mazurka)’는 마주르카 리듬(점 8분음표-16분음표-4분음표)이 작품의 전반에 사용되었고 ‘발라드(Ballade)’는 ABA′ 구조에 코다(coda)가 붙은 형태이다. 이 작품의 두 번째 마주르카는 로베르트 슈만이 ‘다비드 동맹 무곡’ Op.6의 시작 부분 두 마디에 사용했던 주제를 사용했다. ‘폴로네이즈(Polonaise)’ ABA′+coda로 이루어져 있고 전형적인 폴로네이즈 리듬(♪♬♫♫)이 왼손에서 나타나고, A장조로 전조된 B부분에서는 이 리듬이 오른손에서 등장하며 변화를 주었다.
3개의 프렐류드와 푸가 Op.16
클라라 슈만의 3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는 세 개의 전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인 트리오 소나타, 춤곡, 리체르카레의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푸가에서는 자유로운 모방 대위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 번째 전주곡은 AA’의 2부 형식이며 당김음이 특징적인 A부분의 오른손 선율은 A’에서는 테너 성부로 주선율을 옮겨 진행한다. 두 번째 전주곡은 ABA′의 3부 형식이다. 8마디씩의 각 프레이즈들이 대칭적으로 진행되고, A부분에서 주제가 두 번 제시된 후 B부분에서는 전조가 계속된다. 두 번째 푸가는 4성 푸가이고 첫 푸가와 마찬가지로 베이스에서부터 주제가 시작되어 테너, 알토, 소프라노 순으로 성부가 차례로 올라가며 주제를 4도 간격으로 제시한다. 세 번째 전주곡은 ABA′의 3부 형식이다. A부분 역시 aa′b로 작은 3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B부분에서 음악적 긴장감은 고조되고 A′부분으로 돌아오며 A부분을 짧게 재현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리체르카레 기법으로 소프라노와 테너 간의 모방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로베르트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0
로베르트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0은 로베르트 슈만의 ‘갖가지 소품(Bunte Bläter)’ Op.99 중 네 번째 곡, ‘클라라 주제’가 사용된 ‘음악수첩(Albumbläter) 1′을 도돌이표만 생략하고 작품을 그대로 인용하여 변주곡으로 만든 작품이다. 전체의 조성과 형식은 아래와 같다.
이 작품의 조성, 박자와 형식은 로베르트 슈만의 원곡과 같은f#단조, 2/4박자의 ABA′형식이다. 2/4박자는 주제와 모든 변주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조성과 형식 또한 큰 변화 없이 변주곡 전반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클라라 주제’ 선율 또한 변주에서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며, 리듬·화성·셈여림·텍스처로 변화를 주고 있다. 처음 네 개의 변주는 대체적으로 조용하지만 서서히 긴장감이 형성되고, 제5변주에서 정점에 도달한 후, 다음 두 개의 변주에서 차분해지고 주제를 회상시키며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주제는 A부분의 종지에서 A장조로 전조되고 B부분에서는 c#단조로 진행되다가 A′에서 원조로 돌아온다. 주제와 대부분의 변주는 ABA′ 형식이고 마디수 역시 제2변주와 제7변주를 제외하고는 8+8+8마디 구조의 24마디로 이루어지며 곡의 통일감을 형성한다. 제2변주는 27마디로 B부분의 마지막에 3마디가 추가되었고, 제7변주는 66마디로 기존의 ABA′구조에 A″가 F#장조로 전조되어 다시 한 번 나타난 후 제3변주 전체가 변형되어 제시되고 코다가 뒤이어 마무리하는 다소 복잡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제6변주는 카논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소프라노의 주제를 테너에서 한 마디 뒤에 5도 아래에서 모방하며 진행 하다가 마지막 마디에서 변형 된 후 마무리한다. 이 세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클라라 슈만의 작품은 기본에 충실하며 전통적인 형식과 화성의 틀 안에서 자신의 색깔을 입히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에 피아니스트가 느끼는 악기의 기능과 표현의 필요성을 더해 낭만시대 피아노 음악의 특징에 자신의 분명한 소리를 만들었고 이것은 당시 사회적 환경에서 매우 고무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척박한 불모지였던 낭만시대의 여성창작가로, 공연예술가로 자신의 족적을 남긴 여성예술가라는 점에서 클라라 슈만의 재능과 업적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앞으로는 우리 음악분야에서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작품에 대한 연구와 연주가 더 많이 진행되길 바란다. 글 최현숙(피아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
참고문헌
청년 브람스에게, 슈만 부부로부터: 클라라 슈만의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0과 요하네스 바람스의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9의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전옥길, 김원, 최민경, 음악학 vol. 24, no.1(2016), 통권 30호 pp.102-141 Clara Schumann의 피아노 작품 연구, 서지현, 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8) 클라라 슈만, 정희선, 피아노 음악 2000.7월, pp.72-77 http://mural.maynoothuniversity.ie/5203/1/Claire_Flynn_20140711152541.pdf 클라라 슈만, 낸시 B. 라이히, 장정윤 옮김 정유희 개인노트, 최연정 개인분석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