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울연극제, 대한민국연극제 등 대규모 행사가 끝난 대학로에는 특색 있는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작년에 이어 2회째 개최되는 페미니즘연극제이다. 1회에 비해 작품 수는 줄었지만 분명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 중 세 번째 작품인 ‘너에게’는 문제의식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이 매우 독특했으며 페미니즘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작품이기에 이번 연극제의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 한편 연극제 작품들과는 별도로 주목되는 작품은 2017년 ‘해방의 서울’ 이후 2년 만에 선보인 박근형 연출의 신작이다. 마치 고승의 선문답 같은 제목인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두 작품을 한데 놓고 들여다보니 상반된 특징을 가졌다. 박근형 연출의 신작은 배경도 시골인데다가 작품 전반적으로 푸근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너에게’는 변화된 엄마와 아기, 생명에 대한 태도를 최근의 감각으로 표현한다. 마치 TV 드라마 ‘전원일기’와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를 함께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두 작품의 거리는 그만큼 연극계의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반갑고, 두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동시대적 현상의 공통된 반영이기에 의미 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긴 우리네 삶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라는 제목은 당연한 명제 같은데 어딘가 낯설다. 여름이 더우면 겨울은 춥다. 그런데 ‘춥다’는 단어가 ‘길다’는 단어로 대체됐다. 작품의 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겨울은 춥다’라는 당연한 것을 ‘겨울은 길다’로 바꾸면서 춥다, 덥다의 주어진 환경이 중심이 아니라 그 속을 살아내고 견뎌내는, 그래서 길고 짧은 정서적 감각으로 환경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중심이다. 덥고 긴 계절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꾸듯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비록 어떤 때는 말할 수 없이 덥고, 어떤 때는 끝없이 춥더라도 말이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데, 이것이 나쁘지 않다. 참으로 당연한 명제인데도 필요한 만큼 세월을 겪어야 하고 마주치는 상황이 쌓여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는 노하우가 축적돼야 비로소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불혹(不惑)과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에 가까워진 박근형 연출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질 수 있는 말이고, 무게를 갖고 관객과 공감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모두 익숙하다. 고향을 지키는 형, 도시를 떠도는 동생, 고향에 남은 부모, 그곳으로 돌아온 실패한 자식, 무책임한 남편, 자식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싶은 엄마 등. 형제와 부모, 자식의 관계가 어디선가 이미 봐왔던 모습이고 이들의 현실적 문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데, 이 속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바로 어린 생명에 대해 “예쁘다”라고 말하는 태도다. 박근형의 전작들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대사인데,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강아지 메롱이가 새끼를 낳는 모습에 연신 “예쁘다”고 토닥이고,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서 생명 탄생이 얼마나 힘들면서도 좋은지 얘기하는 경애를 예쁘다고 하는 어머니의 심성은 그 자체로 더운 여름과 춥고 긴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니 함께 견디고 살자는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벅찬 이 메시지가 편안하게 다가온 것은 작품의 안과 밖에 쌓인 세월과 인생의 무게 덕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아쉬움은 캐릭터의 나이와 맞지 않은 배우 캐스팅이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70대 초반에서 60대 후반인데 배우들은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었다. 극단의 작품이기에 극단 배우 캐스팅은 필요한 일이지만, 노인 분장을 한 배우들은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졌다. 강지은, 이봉련처럼 비교적 캐릭터와 연령대가 가까운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민기의 노래 ‘가뭄’이 메인 음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면 곳곳에 뜬금없이 등장해 대금을 연주하는 한충은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작품의 전반적인 정서가 신파나 비극으로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대금 연주를 소극장에서, 그것도 연극 공연 중에 듣다니, 놀라운 발상이었다.
아무리 하찮아도 모든 생명은 “우와~야!”
‘너에게’는 발상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는 인물은 콘스탄티노플, 건장한 체격의 남자 배우가 연기하지만 실상은 사산된 아기다. 엄마 뱃속에서 잘 자라다가 태어나기 바로 전 죽음을 맞이한 존재. 엄마와의 교감은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존재.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지만 세상에서 가져야 할 것들을 가지지 못한 존재.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산아가 등장함으로써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엄마의 냄새를 따라가다 임신한 10대의 돌로레스를 만났고, 엄마의 심장소리를 따라가서 진짜 엄마를 만났다. 모건을 만난 돌로레스는 자신이 부정했던 외로움을 직면하면서 태아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죽은 아기를 낳은 모건의 상실감은 돌로레스와 콘스탄티노플을 만나면서 상쇄됐고, 조산원이었던 엘레나의 죄책감은 돌로레스와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새로운 희망으로 대체된다.
극중 설정이 비현실적임에도 임신이나 태아, 유산, 사산, 낙태 등 생명과 관련된 정황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사랑을 쏟던 아기의 탄생을 보지 못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해 “침묵에 귀가 멀 것 같다”는 모건의 대사는 생명에 대한 어떤 미사여구보다 더 직설적이다. 작품의 원제인 ‘Still’을 ‘너’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해 바꾼 것도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한다. 생명을 가진 불특정한 상대방인 ‘너’라는 인칭대명사가 이만큼 소중하고 무거운 단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흔히 보는 가족구조가 아님에도 생명과 죽음, 사랑, 외로움, 관계, 거기서 비롯되는 수많은 감정을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생명과 직접 관련된 존재들로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연출의 감각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작품을 대하는 설유진 연출의 태도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대하는 돌로레스의 따뜻함이 보인다. 우선 배우 캐스팅이 절묘했다. 건장한 체격의 임영준 배우가 콘스탄티노플을 연기했는데, 아직 배운 단어가 별로 없어서 좋고 예쁜 것을 “우와~!”라고만 표현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단순하고 순수한 모습을 해맑게 보여줬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안타까움까지 시각적으로 느끼게 했다. 아기를 사산한 상실감에 납작하지 않은 호박을 어르고 달래는 모건 역의 박지아 배우는 감정의 변화를 밀고 당기는 화술의 변용으로 표현했는데, 때론 서늘하고 때론 따뜻한 간극이 모건의 고통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했다. 태생적인 선함의 엘레나를 선보인 황순미, 나쁘고 못되게 포장했으나 외로움 덩어리인 돌로레스 역의 강서희 배우도 좋은 앙상블을 보여줬다. 다음으로는 무대 장치의 배치와 조명의 깊이 있는 활용을 통해 무대 자체를 엄마의 자궁처럼 심연의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가장 나이 많은 모건의 고통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함은 전적으로 무대의 질감과 조명의 색감에 기댄 바가 크다.
마지막에 모건, 콘스탄티노플과 나란히 앉아 편지를 읽는 돌로레스의 말은 이 작품이 관객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 “너에게”. 생명을 품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수많은 존재들, 태어날 수도 있고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생명들, 그 모든 “너에게” 얘기한다. “너는 정말 우와~야!”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골목길·페미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