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6
인문학의 질문을 담은 고전
인간의 조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의 역사는 유구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선택해야 했고, 국수를 먹기 시작할 때부터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해야 했다. 남이냐 북이냐의 이념적 질문을 받는 시대는 지났지만, 주말에 광화문을 지나가려면 자칭 우파와 좌파 사이에 서서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떡해야 하나.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쉽다. 엄마와 아빠는 비교우위로 선택할 대상이 아니고, 짜장면과 짬뽕은 짬짜면으로 통합되었으며, 우파와 좌파는 이념이 아닌 상식으로 가늠하면 된다. 애초에 둘로 나뉘는 게 아니거나 조금만 과감하면 쉽게 합칠 수 있는 것을 심각한 이분법으로 생각해왔던 거다. 돈이냐 명예냐의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돈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명예를 추구할 것인지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다. 둘 다 필요해요. 사회와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안정감과 존재감. 안정감의 토대는 경제적인 안전함이다. ‘세상 살면서 풍파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와 우리 식구 먹을 건 있다!’ 삶의 존엄을 위협당하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인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의 필수조건이다. 존재감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 살면서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한다 해도 내 삶에는 의미가 있다!’ 물론 자기 확신만으로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당신은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타인의 인정이 더해져야만 비로소 존재감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결국 사람살이란 삶의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을 만큼의 안정감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존재감을 얻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기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얻기 힘든 것이 안정감이요 제일 먼저 훼손되는 것이 존재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직한 노동만으로는 안전함을 느낄 만큼의 경제적 토대를 다지기가 아예 불가능한 시대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미래의 불안에서 자기를 지킬 수가 없는 거다. 게다가 일할 자리를 구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일단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서 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아예 내쫓겨 쓰임새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잉여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먼저 알아채는 것은 언제나 사회다. 이 두려움의 틈을 타 사람의 값을 내리깎고 인격의 존엄을 후려친다. 열심히 정직하게 살려고 애쓸수록 이 사회에서 견뎌내야 할 모욕의 분량은 점점 늘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여기에 과연 희망은 있을까. 뮤지컬 ‘빨래’에는 이런 고민이 담겨 있다.
우리 시대의 리얼리티
2005년에 초연된 후 지금까지 공연이 되는 뮤지컬 ‘빨래’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인 작품이다. 일단은 공연의 기간이 그렇다. 10년을 훌쩍 넘기는 생명력을 보여준 창작뮤지컬은 몇 편 없는데, ‘빨래’는 그중에서도 가장 긴 수명을 지닌 작품이다. 공연의 환경이나 관객의 취향으로 보자면 강산이 몇 번이나 뒤집어진 세월인데도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이 작품의 힘은 일단 이야기에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다. 사연도 제각각 많기도 하다. 하지만 환경과 조건에 무릎 꿇지 않고 서로를 위로하며 꿋꿋이 살아나가는 이야기는 따뜻하고 눈물겹다. 노래의 힘도 대단하다. 이제는 노래방에서도 부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노래가 된 이 작품의 음악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 돋보이는데, 뮤지컬의 문법에 매이기보다는 노래극을 연상시킬 만큼 쉽고 분명했기에 가능한 성과였을 거다. 이 작품이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을 다루는 대표적인 뮤지컬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뮤지컬의 옷을 입은 리얼리티에 있다. 뮤지컬의 틀 안에서 현실적인 주제를 다룬 거의 첫 번째의 작품이 아닐까? 언뜻 보면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 여직원의 사랑이야기지만, 관객의 공감을 먼저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당한 부당한 해고와 억울한 임금체불이다. 사십 년 동안 중증 장애인 딸을 돌보는 할머니의 사연 역시 뮤지컬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 작품에는 죄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 뮤지컬의 가벼움과 현실의 무거움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이 작품은 의미 있는 답변을 보여주는 거다. 물론 초연의 관객들과 지금의 관객들이 느끼는 현실감에는 차이가 있을 거다. 이 작품의 배경인 달동네만 해도 그렇다. 달동네란, 세입자는 여럿인데 화장실은 하나인 데다가 옆방에서 속삭이는 이야기를 온 동네가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옹색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제 서울에서 달동네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미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로 채워진 지 오래니 말이다. 지금은 쪽방촌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말에는 아직 따뜻함이 남아있지만, 쪽방촌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정감도 담겨 있지 않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 달동네는 지금의 관객들에게 리얼리티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거다. 구조조정을 비롯해 온갖 횡포를 저지르는 악덕 기업이 대형서점으로 설정된 것도 그렇다. 다소 낭만적이지 않나. 작품 곳곳에는 이 작품이 꽤 오래전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설정들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리얼리티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면면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여직원, 일용직 아저씨, 뜨내기 장사꾼, 중증 장애인, 가난한 노인, 망한 자영업자, 추방당한 외국인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경계의 바깥으로 내몰려 경제적인 안전함과 사회적인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쫓겨난 사람들인 거다. 이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일상에 깔린 모욕이다. 안전함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존재감을 가질 수 없는 법. 예고 없는 해고, 어처구니없는 박봉, 아무리 애써도 달동네를 면하지 못하는 빈곤으로 그들의 삶은 매일매일 모욕당한다. 하지만 모두 개인의 능력 때문이란다. 억울하면 무능한 자기 자신을 탓하란다. 이 모멸감을 어쩌지 못해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향해 똑같은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일거리가 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월급을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를 향해 화풀이하고, 무능해 불안한 고용주가 쫓겨날까 불안한 직원들을 함부로 대한다. 삶의 환경과 시대의 정서는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모욕의 풍경은 이 작품이 초연됐을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먹고 사는 일은 더욱 힘들어졌고 견뎌야 할 모욕은 더욱 모질어졌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이야기의 공동체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쟁에서 밀려나 사회의 무용지물로 치부되는 사람의 삶은 정말로 의미가 없나? 함부로 모욕해도 될 만큼 허투루 살아온 삶이라고 누가 판단할 수 있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비중이 있는 인물에서부터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놓을 때마다 그들의 삶은 곧 질문이 된다. 한국말이 어눌한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는 자기 나라의 유수한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한 엘리트이다. 그는 몽골어와 러시아어에 한국어까지 구사할 줄 아는 능력 있는 청년이다. 그가 바보인가? 서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사원 나영은 시집 읽기를 좋아하고 한때 시인을 꿈꿨던 문학청년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책을 안내하고 추천한다. 그가 무능한가? 돈을 밝히는 것 같은 주인할머니에게는 사십 년 넘게 돌봐온 장애인 딸이 있고, 남자를 밝히는 것 같은 희정엄마에게는 키우지 못하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이들이 그악스럽고 추접스러운가?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말하는 입도 가질 수 없고 들어주는 귀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정을 얻은 사람들에게나 주어지게 마련이니까. 수많은 자서전이 성공담을 반복할 때 사회의 바깥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자기의 이야기마저 박탈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서로의 관계 안에서 회복해낸다. 서로의 존재를 선입관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나영과 솔롱고이다. 나영에게 솔롱고는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이웃에 사는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나영과의 만남을 통해 솔롱고는 ‘개새끼’가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 된다. 나영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그는 ‘건방진 여자 주제’이지만 솔롱고는 그를 ‘참 예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아름다움을 서로에게서 발견해주는 사람들인 거다. 서로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사람들도 있다. 주인집 할머니와 희정엄마다. 주인집 할머니에게는 사지가 없어 ‘반토막’으로 불리는 딸 둘이가 있다. 홧김에 저지른 맞바람으로 덜컥 생겨버린 딸이 온전치 못하게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한 어미라고 아들에게 외면당하면서 평생의 죗값을 치르는 심정으로 몇십 년 동안 딸을 돌봐왔지만, 이제는 늙어서 딸이 죽을 만큼 아파도 혼자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다. 이때 아픈 둘이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는 사람이 희정엄마다. 할머니가 감춰온 평생의 상처는 희정엄마의 등 위에서 비로소 평범해진다. 자기 자식을 키우지 못한 희정엄마에게 자식 가진 남자와 살림을 합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할머니이다. 자식을 온전하지 낳아주지 못한 책임이 자기의 원죄에 있다고 평생 자책해온 할머니보다 희정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 삶의 이야기 안에는 그네들의 진짜 얼굴이 담겨 있다. 따라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 척할 수 없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사람과 상관없는 사이가 아닌 거다. 서로의 약함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면서 이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지켜봐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 이 안정감은 돈이 줄 수 있는 안전함과는 질감이 다르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것은 이들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이미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내어주는 자리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는 어디일까? 솔롱고와 나영이가 빨래를 널다가 처음 만났던 옥상이 먼저 떠오른다. 눈을 들면 하늘을 볼 수 있고 마주 서면 서로를 볼 수 있는 장소. 하늘을 보면서는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잘 다려 걸치는’ 다짐을 하고, 서로를 보면서는 ‘나와 닮은 사람, 참 예뻐요’라는 고백을 하는 장소가 옥상이다. 하지만 옥상보다 더 따뜻한 장소가 있다. 바로 주인할머니의 안방이다. 딸 둘이를 숨기느라 그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았던 바로 그 방. 사람들에게 둘이의 존재를 밝히고 난 후 할머니는 그 방의 아랫목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준다. 회사에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나영이 울고 있을 때, 필리핀 청년이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할 때, 할머니는 그들의 손을 붙잡아 따뜻한 방으로 이끈다. 짧은 대사로 지나가는지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순간이지만 이 장면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어느새 냄새나고 어두운 방은 사회의 자리에서 내몰린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자리가 되어있는 거다. 할머니의 방은 사람들을 환대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생생해지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솔롱고와 나영이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을 합친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었으니 사랑의 결실을 맺은 셈이지만, 우리는 안다. 다문화가족으로 살아갈 이들의 일상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할머니의 집에는 사업이 망해 갈 곳 없는 아들이 들어온단다. 남보다 못한 사이인 이 아들이 과연 장애인 동생이나 늙은 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을까. 동생을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야 하는 때가 점점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갈등은 깊어질 것이고 형편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살아가는 희정엄마에게 좋아하는 사람과 눈치 보지 않고 살 미래는 여전히 요원할 테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은 헤어짐이 아쉽지만 다시 만날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다. 희정엄마 말대로,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아무것도 없는 이 사람들은 앞으로도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악다구니에는 힘들고 추운 이에게 자기의 방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업고 뛰며 함께 살았던 기억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새롭게 만나는 또 다른 힘든 사람들과 더불어 온기를 나눌 것이다. 어려울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살이에 이런 짐작은 어쩌면 사람에 대한 순진한 낙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빨래’에 담겨 있는 따뜻한 판타지는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희망이다. ‘빨래’ 같은 작품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