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면의 노래 작곡가 정재형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대중음악가 정재형은 늘 이단아라고 소개됐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재형의 음악을 명명하려 애쓴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7월 8일 9:00 오전

HE IS NOW

작곡가 정재형의 신보 ‘피아노와 함께(Avec Piano)’의 첫 트랙을 재생한다. 아득하게 먼 어딘가로부터 물어오는 안부. 첼리스트 심준호가 연주하는 고음역대의 선율이 울컥하게 할 만큼 처연한 인사를 건넨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고독한 풍경. 정재형의 피아노는 천천히 회답을 시작한다. 바람(‘Mistral’)과 바다(‘La Mer’)의 장면을 그리며 시작한 앨범은 아이들의 움직임(‘Summer Swim’), 사랑에 대한 관조(‘Andante’), 산과 아침(‘Le Mont’ ‘그곳, 아침에서’), 허무의 단상(‘Waltz for Emptiness’) 등 자연에 대한 심상을 회화적으로 담아낸다.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색채들이 스스로를 대중음악가라 소개하는 정재형의 언어를 입고 하나의 앨범으로 탄생했다. 실내악 편성으로, 5분 남짓한 길이의 총 여덟 개의 곡이 실렸다. 9년 만의 음반. 두 번째 연주곡집. 정재형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정식 발매 3일 전, 미리 앨범을 건네받고 대화를 나눴다.

9년 만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그동안 음악의 끈을 완전히 놓고 있던 건 아니다. CJ ENM이 제작하는 빅토르 위고 소설 ‘웃는 남자’의 뮤지컬 작업에 참여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상 지금은 잠정 중단된 상태다. 2년 쯤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스무 개가 넘는 테마를 완성했는데 선보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내부적으로 호평도 받았는데. ‘두근두근 내 인생’(2014) 영화음악 작업도 했고, 가수 정승환이 노래한 ‘그댄 모르죠’(2017)라는 곡도 발표했다. 그런데 정작 내 앨범을 준비하려니 고민이 많이 되더라. 어떤 콘셉트로 출발해야 하나, 어떤 정서를 담아야 하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5월, 3년 간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그만 두면서 안에서 무언가 툭 터졌다.

‘피아노와 함께(Avec Piano)’라는 제목의 이번 앨범은 이전의 ‘작은 피아노(Le Petit Piano)’에 비해 정서적으로 깊어진 느낌이다. 제목들도 추상적이고, 훨씬 크고 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시기에 도쿄 근교의 가마쿠라라는 도시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보낸 3주 간의 시간이 강한 영감이 됐다. 깊은 산속에 있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라 자연의 소리가 더 잘 들리더라. 파도소리, 새소리, 빗소리를 들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인간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가 여럿일 수 있지만 그 맨 끝에는 자연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나’를 테마로 삼게 된 이유다.

몇몇 제목이 프랑스어이고, 특히 피아노 파트에서 드뷔시의 색깔이 강하게 느껴져서인지 프랑스 유학시절의 감상을 담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일본이라니 의외다.

자연이 있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물론 풍경은 다 다르지만, 그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중요한 거다. 일본에서 본 장면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때의 기억들도 다시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20세기 초반 근대음악의 재료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은,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두 개의 트랙에서는 음향 발진기를 사용했다. 앞선 트랙들과는 다른, 작은 편성의 정적인 흐름에 부분적으로 사운드 디자인을 입혔는데, 오히려 자연의 소리를 묘사하고 있는 듯 느껴져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의도한 바대로 된 것 같다. 몇 달 전에 파도 소리를 담으려 바닷가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가니 바람 소리 밖에 안 들리더라. 어쨌든 그게 자연의 소리이니 그걸 그대로 담아왔다. ‘그곳, 아침에서’에 활용했는데, 자연의 소리를 기계에 담아, 그걸 변형시켜 다시 자연을 묘사한 음악에 담은 셈이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연주자들과는 어떻게 만났나?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비올리스트 김상진, 첼리스트 심준호 외 여러 클래식 음악가들이 참여했는데.

MIK앙상블(김수빈·김상진·송영훈·김정원)로부터 위촉을 받아 ‘에트나(L’etna)’라는 곡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상진의 압도적인 비올라 연주에 반했다. 이번 음반에 실린 ‘안단테’라는 비올라 협주곡은 2012년 LG아트센터 공연에서 이미 상진과 선보인 곡이다. 첼로가 주도하는 ‘미스트랄’은 극도로 높은 음역대를 포함하고 있어서 제대로 연주하는 첼리스트를 찾기 어려웠다. 누군가 심준호를 추천해서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가 김용배 선생 등과 가진 술자리에서 음악가들에게 물었더니 바로 연결이 되더라. 얼마 후에 집으로 초대해 악보를 건네고 연주를 부탁했는데, 도입부를 듣자마자 제격인 연주자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풍부하고 깊은 소리, 노래하는 힘이 대단한 것 같다. 백주영 교수는 다른 말이 필요 없지 않나. 모든 걸 뚫고 나갈 것 같은 힘, 슬프지만 화려한 기술을 요하는 작품들에서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본다.

음악을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 음원 서비스 플랫폼 멜론에서 보니 ‘작은 피아노’ 앨범이 뉴에이지 장르에 속해 있더라. 그 전 음반인 ‘프롬나드’는 일렉트로니카에, ‘재클린을 위해’는 발라드로 분류되어 있다. 알고 있었나?

(웃음) 몰랐다.

장르에 대한 구분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미디어나 대중이 정재형의 음악을 구분 짓고 명명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내가 하는 건 ‘가요’다. 대중음악, 팝 뮤직. 이게 내가 하는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의 재료를 썼을 뿐 접근 방식은 명백히 그렇다. 이번에 오랜만에 앨범을 발표하면서도 소개하는 방식에 대해 주변에서 어려워하기에 여전히 그런 건가, 싶었다. 1995년 베이시스로 데뷔했을 때도 그랬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대중음악가라는 이유로 이단아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많은 사람이 그냥 정재형의 음악, 현대음악적인 요소 등 여러 가지가 담긴 연주 앨범이라고 여길 거라 생각한다.

베이시스 활동 이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에콜 노르말에서 영화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왜 프랑스였는지 궁금하다.

드뷔시를 좋아한 이유도 있고 음, 버클리 음악대학의 학비가 너무 비쌌다! 클래식 음악을 베이스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에콜 노르말에서 영화음악 2년, 클래식 음악을 5년 동안 공부했는데 어떤 시대, 어떤 음악가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나?

영화음악을 공부할 때는 테크닉 등 음악적으로 다양한 것을 습득할 수 있었고, 클래식 음악을 배우면서 매진한 건 미니멀리즘 음악이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는데, 유럽에서는 대중적인 음악이더라. 스티브 라이히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어려웠던 음악이 점점 좋아지는 경험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진은숙 선생 공연도 많이 쫓아다니고, 로사스 무용단이나 피핑톰 무용단 공연도 자주 봤다. 현대음악연구소 이르캄(IRCAM) 작업들도 물론. 예술 작품들을 늘 가까이할 수 있다는 게 파리에서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때의 경험들이 현재 음악 작업에 큰 자산이다.

음악 작업을 하러 여행을 종종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로 가나?

서핑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 과거에는 좋은 호텔을 찾는 등 환경을 따지곤 했는데 서핑을 하고부터는 전혀 상관이 없어졌다. 그저 파도가 좋은 곳이면 된다. 자연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도 서핑 덕이다. 조용한 해변에서 하는 생각, 파도 위에서의 느낌 같은 것들이 현재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서핑 실력은 수준급인가?

전혀. 체력이 많이 딸린다.(웃음)

무조건 피아노 앞에 오래 앉아, 오래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혼자 느끼는 ‘발견하는 즐거움’이랄까, 그런 순간들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다양한 경험이 음악에 영향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안테나라는 회사에 속한 다른 음악가들과 공연을 준비하며 얻는 것들도 많다.

2019년의 정재형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과거에는 목표나 바람이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에펠탑이나 한강공원 같은 곳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고 싶다는 등 구체적인 꿈을 말했는데, 이제는 전혀 없다. ‘다짐’과 ‘노력’만 있을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모범생처럼 나아가는 것, 내 디스코그래피에 책임을 지면서 허투루 음악하지 않는 것. 이것 말고는 없다. 이건 ‘깊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는 일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정도의 깊이를 만들어내면서 움직이고 싶다.

글 김호경(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안테나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