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

이방인, 그 날선 이물감과 두려움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7월 8일 9:00 오전

영화

※ 영화의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걸어간다. 처음에는 비포장도로 같던 거친 길을 욕망으로 꾹꾹 밟아 다진 뒤, 만들어진 길은 각자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앞길이 된다. 그런데 그 길에 불쑥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발자국이 충돌한다. 일견 평온한 내 삶, 내가 만들어둔 나의 길에 불쑥 끼어든 이방인은 늘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나만의 길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함께 한다. 그래서 내 길 위에서 치워버리고 싶다. 루카 과다니노의 ‘서스페리아’(Suspiria, 2018)는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 속에 들어온 이방인이라는 이물감을 공포와 불안이라는 화두로 풀어낸다.

마녀, 엄마, 여성

루카 과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서스페리아’(1977)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마녀 집단이 운영하는 베를린의 댄스 아카데미에 도착한 미국 소녀 수지, 등장인물과 배경, 마녀와 흑마술이라는 원작의 콘셉트를 빌려오지만, 영화가 풀어내는 이야기와 결말은 원작과 아주 다르다. 원작 속 수지와 달리, 2018년의 수지는 달아나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이끌고 가는 ‘서스페리아’는 1977년 작품의 하드고어 확장판처럼 보인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 2015)의 관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있지만, 루카 과다니노 감독은 다코타 존슨과 함께한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 2015)에 담은 것처럼 그녀에게 관능에 눈뜨기 전 깡마른 소녀의 모습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 ‘서스페리아’는 어수선한 어린 시간을 거친 소녀가, 악몽 같은 욕망을 더 깊이,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포착해 낸다. 수지는 아카데미에서 계속 엄마의 환영에 시달린다. 엄마는 그녀의 숨통을 죄는 보수적인 권력자였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엄마는 수지에게 죄의식을 덧입히고, 수지에게 엄마는 죄의식 그 자체가 된다. 이방인의 이물감을 입고 있지만, 수지가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낯선 땅에서 겪게 되는 이방인으로서의 이물감, 신입생에 대한 적대심, 주인공과 조연이 극명하게 갈라질 수밖에 없는 무용 공연의 현실 등. 미국인 수지가 독일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날 선 이물감과 두려움은 ‘서스페리아’를 관통하는 정서다. 이 영화는 여성이 중심인 이야기다. 댄스 아카데미는 전쟁 중에 마녀들이 일궈내고, 마녀들이 지켜낸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여성들은 예술을 만들어 낸다. 마녀라 불리지만, 남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잔혹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엄마이자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마녀가 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되짚는 장치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들은 현존하는 모든 여성성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속 남성들은 세상을 망치고 있는 군인, 무기력한 형사, 사라진 아내를 그리워하는 클렘 페러 박사 등 대부분 늙은이거나 무력한 사람들이다. 클렘 페러 박사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정서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 박사를 연기한 인물은 틸다 스윈튼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모든 주요 배역에서 남성을 배제한 셈이다. ‘서스페리아’의 세계에서 남성들은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실제로 댄스 아카데미를 찾아온 형사들은 옷이 벗겨진 채 희롱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지옥 같은 혼란 속을 찾아올 수는 있지만, 구원자의 자격을 갖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아카데미 역시 철저히 여성들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원작에서는 남성 발레리노와 집사 등 남성 캐릭터가 있지만 루카 과다니노가 묘사하는 마녀들의 세상에는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남성들이 일으킨 전쟁의 상흔과 그 속에서 마녀가 되어 예술학교를 지켜온 여성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 그리고 그 소동을 피해 들어온 안전한 공간에서는 오직 여성들만 살아가고 있다. 폭압도, 그 폭압을 온전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다 여성의 힘에 달려있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선언을 지켜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하드고어 장면이 이 영화를 대중과 아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감독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전환점처럼 보인다.

그 겨울의 환각, 그 춤 원작의 수지가 춤에 별다른 의지가 없어 보이는 데 반해, 루카 과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 속 수지는 댄스 아카데미를 목표로 미국을 떠나온 적극적인 소녀로 그려진다. 춤 장면이 적었던 원작과 달리, 춤은 이 영화의 정서를 이루는 아주 중요한 메타포다. 수지의 적극적인 태도는 소녀들이 단순히 희생되는 원작의 이야기와 결을 다르게 만든다. 수지가 난장의 끝에서 달아나는 원작의 끝과 달리, 수지의 적극적인 태도는 흑마술의 중심으로 들어가 피의 페스티벌을 벌이며 스스로 마녀가 되는 설정과도 맞닿아 그 의미를 강화한다. 댄스 필름과 연극 협업으로 잘 알려진 안무가 다미앵 잘레(Damien Jalet)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속 춤은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독일 표현주의 춤은 가볍게 날아오르는 발레와 달리, 무용수들의 몸을 땅에 가깝게 끌어내린다. 무용과 극이 결합한 형태의 탄츠테아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불안, 공포, 정신적 좌절과 공허함 등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담는다. 이런 전통을 잘 담아내면서 흑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 속 춤은 선정적이고, 오싹하다. 춤이 소품처럼 쓰인 전작과 달리, 루카 과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 속 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붉은 군무는 영화 속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이기도 하다.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은 정치적 함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베를린 장벽은 물론이고, 전쟁과 그 상흔에 대해서 더 깊이 파고든다. 마녀들이 지배하는 예술학교라는 원작의 의미에 정치적 함의를 더해 설득력을 가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가 음악을 맡았는데, 공포가 스멀스멀 관객들의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이 음악을 눈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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