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8
배워야 할 사랑
제목 때문에 자주 오해받는 책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도 그런 책 중 하난데, 예전에 동네서점에 갔을 때 이 책은 건강 코너에 꽂혀있었다. 제목을 보고 인도의 카마수트라나 중국의 소녀경 같은 일종의 ‘기술전수서’로 이 책을 분류한 주인아저씨의 성실한 배치에 한참 웃었더랬다. 책의 원래 제목이 ‘더 아트 오브 러빙(The Art of Loving)’이니까 여기에서 기술은 ‘테크닉’이 아니라 ‘아트’이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배치가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제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으니 이 책 역시 ‘기술전수서’인 것은 맞는 셈이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니라 힘써 배우고 애써 행해야 할 삶의 기술(art)일지니. 누구나 몸이 성장하고 나이를 먹게 되면 자연스레 사랑을 하게 되고 인생도 알게 되겠거니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면서 경험하는 사랑은 결실보다 상처를 더 많이 남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서로 부딪히고 어긋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어쩌면 상대적인 존재인 우리가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변하지도 않아 퇴색하지도 않는 절대의 사랑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세속의 사랑은 절대가 아닌 상대에 있다. 사랑의 기술이란 상대와 나를 엮어 그 관계를 가꾸는 기술인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너’가 함께 온전해지고자 하는, 불가능을 향한 추구. 사랑을 배우려면 사람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우리의 사랑에 일상의 옷을 입은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판타지에서의 사랑은 실패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판타지 안의 사람들은 사랑을 배우는 데 선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프로다.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며 의지를 다지고 용기를 발휘하는 와중에, 그들은 ‘나’를 알아가며 변하고 ‘너’를 이해하며 변한다. 스스로를 변하도록 놔둘 줄 아는 그들의 결론은 아름다운 해피엔딩, 말 그대로 뻔한 전형이요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판타지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이런 전형 아닐까. 사랑의 힘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변화를 통해 서로의 삶이 행복해지며, 그 행복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사랑의 판타지는 현실의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가상의 승리’를 선사한다. 이 ‘가상의 승리’ 안에 성공하는 사랑의 비결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한 번 찾아볼 일이다.
‘맘마미아!’의 낭만
‘맘마미아!’는 최고의 주크박스 뮤지컬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1999년에 초연되었으니까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지금도 여전히 절찬리에 공연되는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니. 이건 대단한 성과다. 기존의 대중음악을 재료로 삼는 만큼 변화하는 대중의 취향을 관통할 힘을 갖추지 않으면 주크박스는 추억상품이거나 지역특산물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유럽이라는 공간을 가볍게 뛰어넘었고 20년이라는 시간을 현재형으로 잇고 있는 거다. 이러한 저력의 일차적인 토대는 역시 음악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룹 아바의 노래도 멋지지만 아바의 노래를 다루는 이 작품의 솜씨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가사 하나, 편곡 한 줄도 바꾸지 않았기에 노래를 들으면 마치 콘서트에 온 것처럼 익숙하다가도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원래부터 뮤지컬 넘버인 것처럼 자연스레 들리기도 하니 노래와 이야기의 찰떡궁합에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완성도의 주크박스 뮤지컬은 정말이지 만나기 힘들다. 언뜻 보기에 주크박스 뮤지컬은 기존에 있는 대중음악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 출발하는 수월한 장르로 보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주크박스는 가장 창작하기 어려운 뮤지컬 장르 중 하나다. 뮤지컬에서 문학의 원작은 축약과 각색을 거칠 수 있지만, 주크박스에서 음악의 원작은 원래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 왜냐, 음악은 이미 대중들에게 공유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대로 재현하되 그 음악이 놓인 맥락을 바꿈으로써 대중들에게 각인된 음악의 정서를 넓히거나 뒤집거나 발견케 하는 것이 주크박스의 새로움인 바, 주크박스의 성공의 열쇠는 어느새 음악에서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맘마미아!’의 탁월함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를 찾는 딸의 소동극은 노래가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의 짜임새는 주크박스가 아니어도 통할 만큼 상당히 쫀쫀하다. 굉장한 솜씨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야기가 익숙하다. 원작이 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거다. 들어도 까먹을 만한 제목(‘보나세라, 미세스 캠벨’이란다!)의 미국 영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다지만 이 뮤지컬에서 그 영화를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익숙함을 거슬러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이야기의 젖줄은 따로 있다.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이다. 도시에 사는 남자들(아빠 후보들!)과 오랜만에 뭉친 여자들(엄마 친구들)이 섬으로 모여들어 섬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엉키면서 벌어지는 ‘맘마미아!’의 소동극은 낭만희극의 전형적인 틀에 가깝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나,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모든 오해가 풀어지는 것도 그렇고, 연인들의 오해와 화해 사이에 어긋난 짝짓기와 정체 찾기의 퍼즐이 숨겨져 있는 것부터, 모자란 사람은 있을지언정 악당은 한 명도 없이 행복한 결혼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까지, 전체적인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낭만희극의 공식과 거의 일치한다. ‘맘마미아!’는 현대판 낭만희극인 셈이다. 셰익스피어가 낭만희극에 담아내는 사랑의 메시지는 이렇다. 사랑은 어리석음에 속지 않고 정열에 눈멀지 않으며 가려진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이니, 사랑만이 모든 장애물과 오해와 편견을 넘어 조화와 화해를 이루는 힘이라오. ‘맘마미아!’는 이런 낭만희극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작품은 아바의 노래만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들을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믿음이 배인, 셰익스피어의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두 개의 판타지
이런 낭만은 크게 두 개의 판타지로 모인다. 하나는 함께 있음의 판타지요 또 하나는 홀로 있음의 판타지이다. 전자의 판타지는 엄마 도나의 몫이다. 도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다. 젊은 날의 도나는 클럽에서 노래할 만큼 활달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열정에 사로잡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도나만큼 뜨거울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는 고향에 돌아가 감감무소식이고 도나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딸 하나뿐이다. 미혼모가 된 도나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휴양지인 섬에 정착해서 혼자 힘으로 집도 짓고 일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도나에게 사랑이란? 참담한 배신이다. 사랑 따윈 다 필요 없다, 그저 ‘돈 많은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에 냉소적인 도나가 변화하는 계기는 스스로 가졌던 수많은 ‘오해’를 깨달으면서부터다. 남자가 떠난 게 아니라 자기가 기다리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20년이나 걸리다니. 그동안 눌러왔던 진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자기 안에는 ‘보니까 다시 좋아지는’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 정작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들과 ‘연인도, 친구도 되어보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 샘의 말대로 이별도, 결혼도, 이혼도, 그 어떤 것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자기임을 깨닫게 되는 거다. 아직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좋아 보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사랑하는 성급함을 열정이라 오해했던 젊음의 어리석음에 지금껏 갇혀 있었던 셈이다. 도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랑에 무지한 사람이다. 20년의 세월을 돌아와서 그 무지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도나는 함께 있음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결혼식은 도나를 위한 판타지인 셈이다. 딸 소피의 판타지는 엄마와 다르다. 소피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다. 결혼을 앞둔 그의 관심은 엄마가 사랑했던 세 명의 남자 중에 누가 자기의 아버지인지에 온통 쏠려 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질문에 가깝다. 나는 왜 이리 빨리 결혼을 하려고 했을까? 아름답고 성대한 결혼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왜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사랑받는 신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소피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결혼할 상대인 스카이가 아니라 결혼을 선택한 자기 자신이다. 한 마디로 소피는 불안한 거다. 불안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인바, 소피가 진짜 찾고 싶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마지막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아도 소피가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피는 자기의 기원이 ‘사고’가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소피는 낭만희극의 주인공에 더 가까워진다. 그는 엄마인 도나가 했던 실수(자기에 대한 무지)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 실수를 바로잡을 뿐(자기에 대한 지식) 아니라, 자기를 감싼 모든 틀에서 벗어날 것을 선언한다. 결혼이라는 사랑의 형식으로부터도 벗어날 것이고, 섬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도 떠날 것이다! 엄마 도나는 도시로부터 섬으로 옮겨와 결혼이라는 판타지에 정착하지만, 딸 소피는 섬에서 벗어나 세상 한가운데서 ‘나’라는 단독자로 살아가기를 준비한다. 사랑을 통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소피의 마지막 장면은 홀로 있음이 기대하는 가장 완벽한 판타지일 터. 엄마의 과거와 딸의 현재가 겹쳐지면서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한 두 개의 판타지는 어느새 하나로 이어진다. ‘홀로’를 감당하는 사람이 ‘함께’를 일궈낼 수 있는 법이니,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은 사랑을 완성하는 뫼비우스의 띠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두 사람 중에서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당연히 소피이다. 도나의 사랑은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귀결되었지만 소피의 사랑은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으로 뻗어 나갈 테니 말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실패한다 해도 할 것이고, 아무리 멀고 어렵고 어둡다 해도 가야 할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소피의 노래를 들어보면, 이제 소피의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 그러니까 한 사람을 향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소피는 세상과 관계 맺기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실패해도 해야 할 일’과 ‘멀어도 가야 할 길’은 소피가 이뤄야 할 성취가 아니라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사람들일 거다. 소피의 사랑은 어느새 우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정이란 자기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의미 있게 연결할 줄 아는 태도이다. 서로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서로 다르다 해도 조화를 이룰 줄 알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관계의 힘. 우정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의 방식인 셈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우정을 쌓을 줄 모르는 사람이 특별한 관계에서 사랑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정이야말로 우리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소피는 이 사실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 명의 아버지 후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소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친구가 되길 바라요!’ 놀랍게도 세 명의 남자는 기꺼이 소피에게 삼 분의 일만큼의 아버지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들의 호의는 아버지의 사랑일 뿐 아니라 친구의 우정과 다름이 없다. 도나가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던 토대 역시 우정이다. 섬을 찾아오는 첫 손님은 바로 도나의 옛 친구들이다. 도나의 사랑과 임신과 삶의 굴곡까지 모두 봐온 이 친구들은 씩씩하고 억척스런 도나의 겉모습 밑에 깔린 혼란과 후회까지 대번에 알아챈다. 이들은 도나가 흔들릴 때 단단히 붙잡아준다. 임신은 너의 잘못이 아니고, 아이를 책임진 너의 인생이 정말 대단하며, 나쁜 건 그놈들이라고 호탕하게 말해줄 때 얼마나 시원한지. 오랫동안 노래를 잊고 살았던 도나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 것도 이 친구들이다. 도나의 과거는, 딸과 마주 앉는 수직적인 고백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하는 수평적인 격려에서 다시금 빛을 얻는다. 이 작품에서 사랑보다 더 부러운 부분이 이것이다. 이런 친구들이 현실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판타지를 현실로 끌어내릴 방법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정말 사랑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 사랑을 배우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말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배우기 위한 첫걸음은 아마도 고해성사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무지하고 우정에 무능합니다. 사랑과 우정을 배우는 데 게을렀습니다. 그동안 마주했던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했다면 이제 결심할 것은 하나다. 열심히 공부하기. 사랑을 배우고 익히기를 쉬지 않는(學而時習!) 사람에게 우정을 나눌 친구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有朋自遠方來!). 공자님의 말씀이니 믿어도 좋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