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9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통이란 불길을 보살피는 것이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이 말은 우리 클래식 음악계에도 적용 가능하다. 시간의 체로 걸러 남은 과거의 영화만 바라보면 전통은 퇴색한다. 불길을 보살피며 새로운 시대를 나아가기 위해서는 후예들의 끊임없는 등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젊은 지휘자를 무대에 세우는 코리안심포니의 ‘넥스트 스테이지’는 고무적이다. 활동 초기 지휘자에게 가장 갈급한 건 무대다.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김유원도 그러했으리라. 서울대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커티스에서 공부하고 여러 지휘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휘대로 걸어나온 김유원은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지휘했다. 플루트에 이어 하프 소리가 더블베이스 위로 떠갔다. 두 팔을 따라 파도의 양감이 밀려왔다. 정돈된 느낌을 주는 정적인 연주였다.
공연 전 지휘자 못지않게 협연자가 화제였다. 지난 6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만 열아홉 나이에 3위에 오른 김동현이 등장했다. ‘잘해야 본전’인 레퍼토리인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을 골랐다는 데서 당찬 패기가 느껴졌다.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걱정은 사라졌다. 완벽하게 제어되는 운궁으로 기분 좋게 전진하는 프레이징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바람처럼 전해졌다. 김동현의 바이올린은 청명한 날 흰 구름 같이 맑고 깨끗했다. 적재적소에 몸을 쓸 줄 아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걸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호사다마인가.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1악장 중간에서 바이올린 현이 끊어졌다. 김동현은 즉시 무대 안으로 들어갔고 객석엔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등장한 그에게 환한 빛 같은 격려의 갈채가 쏟아졌다. 김동현과 김유원, 코리안심포니는 1악장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맨손으로 지휘하는 김유원과 절도 있게 연주하는 김동현의 모습에서 처음의 생경함이 줄어든 듯했다. 나무랄 데 없는 기교로 전혀 부담을 안 느끼듯 3악장까지 완주했다. 김동현은 앙코르로 파가니니 카프리스 1번을 연주했다. 그의 바이올린은 가벼웠다. 새털처럼 가볍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민첩할 수 있지만 깊이에 제약이 있다. 향후 그의 바이올린에 턴테이블의 스태빌라이저 같은 묵직한 무게중심이 더해진다면 거장을 향한 순조로운 항해를 기대해도 좋다.
2부의 베토벤 교향곡 2번 역시 신진 지휘자가 소화하기에는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조적인 베토벤의 작품들은 단시간에 효과적으로 청중에게 어필하기 쉽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유원의 베토벤은 바지런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유유한 물결로 다가왔다. 1악장 총주의 팀파니가 상큼했다. 심각해지는 특유의 부분에서도 코리안 심포니의 총주는 뭉개지지 않고 결이 살아 있었다. 경쾌한 진행이었지만 템포가 빠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김유원은 전체를 조망하며 지휘했다. 느긋한 2악장에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목관과 현의 조응이 좋았다. 3악장 반복되는 부분의 표정이 좋았고 4악장이 약간 거칠었지만 경쾌하게 질주했다.
김유원은 앙코르로 코리안심포니와 엘가 ‘사랑의 인사’를 연주했다. 임무를 완수한 듯 힘을 빼고 모두와 함께 즐기는 곡이었다. 출발은 나무랄 데 없었다. 하지만 공연 한 편으로는 부족하다. 김유원의 지휘 스타일을 감지하려면 다양한 레퍼토리를 접해 봐야겠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코리안심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