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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 얀손스 추모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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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월 6일 3:15 오후

addio Mariss Jansons

 

다정한 미소의 마에스트로

 

마리스 얀손스

1943.1.13~2019.11.30

 

©Peter Meisel BR

 

당신이 운 좋게도 마리스 얀손스를 안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또한 음악 산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마리스가 빈 필하모닉에서 고급 수트 차림으로 보여주었던 행동과 동일하게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피츠버그의 낙후된 지역의 복지 아동 교실에서 나는 그와 함께 아침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존경스러웠던 부분은 그의 좌우명이었다. 그는 모든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리스가 상대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상대에게 일생일대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고, 즐거운 일에는 꽃을 보내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전화를 했을 것이다. 마리스는 타인의 삶에 한 번 들어가면 절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에 물러서 관찰하며, 우정의 안과 밖 모두에 존재할 것이다. 나는 마리스가 나치 탄압 시절, 숲 속 은신처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의 내재된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연주자도 리허설에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연주자의 이름을 알고 한 명 한 명 점수를 체크해 둔다. 첫 번째 쉬는 시간에 연주자들이 커피를 사거나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마리스는 자신이 구상한 소리의 풍경을 구현하기 위해 연습실에 남아 그들의 의자를 1밀리미터 간격으로 조정한다.

공연장에서 그는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 보이지만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다. 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가 지휘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난 뒤 마리스는 자신에게 내재된 숙명론 속에서 살았고, 이후에는 이식형 제세동기 수술을 받았다.

그는 런던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연주자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마리스는 피츠버그로 가서 한 번 더 미소를 퍼뜨리고, 뮌헨에서 숭고한 행복을 성취하고, 암스테르담에서 작은 행복을 만났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친절한 다독가였다. 마리스는 그 자신을 음악과 책, 관념 속에 가둬 두었으며, 대부분의 마에스트로처럼 농담이나 가십, 부조리와 더불어 음식, 술, 스캔들, 재산에 대해 논란이 된 적이 없다. 마리스는 와인 리스트를 어떻게 여는지 몰랐고, 사랑스러웠으며, 흠이 없었다.

자신의 연주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무한했다. 소셜미디어와 핸드폰이 없던 시절, 나는 그가 당시에 몸 담았던 오슬로 필하모닉의 젊은 여성 연주자 세 명이 참여한 실내악 콩쿠르를 위해 호주에 있었다. 마리스는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화를 해서 연주자들이 잘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했다(그들은 비평가 상을 받았다).

1980년대 런던 첫 방문 당시, 그는 호텔과 구 소련 국가 보안위원회(KGB) 경호원들 곁을 떠나 시외에 있는 여행사 직원 가족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리스의 모든 것은 결국 사람으로 향했다. 그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능력은 그의 음악을 향한 목마름과 완벽한 수준의 공연을 선보이려는 욕망만큼이나 대단했다.

번역 김진

2019년 11월 30일 노먼 레브레히트

 

 

The Maestro with the sweetest smile

 

Mariss Jansons

1943.1.13~2019.11.30

 

If you were fortunate enough to know Mariss Jansons, you soon became aware that he was one of the kindest men alive and that he had no interest whatsoever in the business of music.

I spent a morning with him once in a deprived area of Pittsburgh, where he devoted as much respect and attention to a classroom of welfare kids as he did to the Vienna Philharmonic in their finest suits. Respect was his watchword. He treated every person as his equal.

If he went one step further and decided that he liked you then you were his friend for life. Flowers would arrive for happy occasions, phone calls at times of distress. Once he entered your life Mariss never left.

Even so, a part of him was always withheld, stood back, observing. He was both in a friendship and outside of it. Only when he told me of growing up in a forest hideaway under Nazi oppression did I understand his essential wariness.

No musician ever entered rehearsal better prepared. He knew the players’ names and the markings in their scores. In the first interval, when the players went out for coffee and phone calls, Mariss stayed behind to adjust their chairs, a millimetre here or there, to achieve the sound picture he envisaged.

In concert, he appeared expansive and relaxed. Inside, a time-bomb ticked. His father, Arvid, had died in the podium (or very soon after) and Mariss walked ever after with an inbuilt fatalism, soon to be augmented by an implanted defibrillator.

He could have been chief conductor of the London Philharmonic but the players never quite understood what he wanted. Instead, he made Pittsburgh smile once more and achieved sublime happiness in Munich, slightly less so in Amsterdam.

He was curious, widely read, generous. He had none of the usual maestro weaknesses – food, drink, sex, wealth – confining himself to music, books and ideas – as well as jokes, gossip and absurdities. He did not know how to open a wine list. He was loveable and without fault.

His concern for his musicians was boundless. Long before social media and mobile phones, I was in Australia for a chamber music competition where three young women in his Olso Philharmonic were taking part. Every day, without fail, Mariss phoned to see how they were getting on (they won the critics’ prize)

When he first came to London in the 1980s, he soon left his hotel and KGB minders and moved in with a travel agent’s family in the suburbs. Everything with Mariss was personal. His capacity for connecting with people was as great as his hunger for music and his desire to perform it to the highest perfection.

by Norman Lebrecht

 


 

마리스 얀손스의 삶과 예술

 

세상을 비춘 한 줄기 빛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계 거장 마리스 얀손스가 2019년 11월 3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였다. 마리스 얀손스는 20세기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성장하여 21세기의 개방된 세상에서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겪었던 경험은 현세기에서 성장하는 세대의 경험과는 다르지만,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고 있는 모습처럼 밝고 색채감 있는 연주는 누구에게나 음악이 가진 원초적인 즐거움을 깨닫게 했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냉전의 그늘 속에서

얀손스는 유럽 북동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진에서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사실 그가 태어났던 1943년에는 라트비아가 아니라 나치의 점령지로서 홀로코스트의 한 중심에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얀손스의 외가도 그 비극을 피하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희생되었다. 어머니이자 리가 오페라단의 주역이었던 이라디아는 몰래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고, 그 와중에 마리스를 낳았다. 그의 탄생은 인류의 가장 비참한 순간에 비친 한 줄기 빛이었다.

얀손스의 아버지 아르비드스는 당시 리가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맡았던 유능한 지휘자였다. 얀손스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1956년에 아르비드스가 에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이끌고 있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온 가족이 레닌그라드로 이주했다. 그리고 얀손스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한 번 정착하면 오래 머무는 근성이 이때부터 있었던 듯하다. 얀손스는 곧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지휘를 배우며 정식으로 음악가로서의 학업을 시작했다.

당시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해빙의 분위기가 돌면서 서방의 음악가들이 종종 방문하곤 했다. 그중에는 1968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있었다. 적국 출신이자 심지어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의 방문은 당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는 젊은 지휘자로서 얀손스와 드미트리 키타옌코를 눈여겨보았고, 베를린에서 자신에게 배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직 해빙이 완전히 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소비에트 정부는 이때를 틈타 망명이 쇄도하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결국, 얀손스는 당국의 저지로 카라얀의 제안을 따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9년에 빈에서 한스 스바롭스키로부터 수학하는 것은 허용되었고,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과 재회하여 그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으며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이 콩쿠르의 우승자는 폴란드 출신의 가브리엘 흐무라였지만(이 콩쿠르에서 안토니 비트도 2등을 공동 수상했다.), 카라얀은 얀손스를 택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베를린 입성이 좌절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얀손스의 대외적 소통을 감시했고, 그러한 제안이 얀손스의 귀에조차 닿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오슬로의 영웅

학업을 마치고 레닌그라드로 돌아간 얀손스는, 1973년에 아버지가 거쳐 갔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도 아버지처럼 러시아에서 자리를 잡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집은 변함없이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지만, 그의 음악감독으로서의 첫 자리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였다.

마리스 얀손스와 헤르베르트 카라얀

카라얀은 분명 보는 눈이 있었다. 1979년부터 2002년까지 20여 년 동안 오슬로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가 남긴 영향은 실로 괄목할 만했다. 당시 얀손스는 아직 서방세계에서 경력이 많지 않았고, 오슬로 필하모닉도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와 오코 카무를 거치며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지명도가 있는 관현악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1982년 얀손스와 오슬로 필하모닉은 그리그의 작품을 녹음한 음반으로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스펠레만스프리센’상을, 이듬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연주로 노르웨이 음악 비평가상을 받으면서, 노르웨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공격적인 녹음과 투어를 진행하면서 ‘얀손스’와 ‘오슬로’를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로 만들었다. 특히 샨도스에서 발매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은 적극적이고 밝은 해석으로 인정을 받아 필청반으로 등극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얀손스는 1992년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지명되었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객원으로 지휘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그는 자택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오슬로, 런던, 피츠버그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가장 바쁜 지휘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커지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점차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2000년에 얀손스가 부임하기 전인 1977년에 건설된 오슬로 콘서트홀의 음향 문제로 시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2002년에 20여 년 동안 ‘얀손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오슬로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직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잦은 연주 여행으로 시차 적응에 피로를 느낀 그는, 2002년 6월에 피츠버그와의 계약을 2004년까지만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거장의 시기

이러한 변화는 얀손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피츠버그 선언 직후 2002년 10월에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는 2004년부터 9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차기 수석지휘자로 얀손스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오랜 역사를 지닌 관현악단이 젊음을 택했다는 중평이 있었다. 임기 시작 당시 얀손스는 60을 넘긴 나이로 젊은 지휘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젊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직전에 2003/2004 시즌부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로써 정기적인 활동은 유럽대륙 안쪽으로 영역을 좁힌 셈이 되었다. 콘세르트허바우에서는 2014/15 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났지만, 바이에른과의 계약은 계속 유지했다.

그렇다고 그의 활동이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얀손스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여러 차례 세계 투어를 진행했으며, ‘RCO’와 ‘BR-Klassik’라는 관현악단 자체 레이블로 더욱 활발히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많은 명예도 따라왔다. 그는 노르웨이와 영국, 오스트리아, 라트비아,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와 시가 수여하는 상과 훈장을 받았으며, 2013년 지멘스 음악상과 2019년 카라얀 상 등 다수의 영예로운 수상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음반 또한 그래미상과 미뎀 상 등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상과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활발한 활동 이면에는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1996년에 오슬로에서 오페라 ‘라 보엠’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 그의 아버지도 1984년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포디움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처럼,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빠른 조치로 회생했다. 전기충격기를 가슴에 넣었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에 얀손스는 자신의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의 밝은 표정 뒤에는 참고 버텨온 이러한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2019년 11월 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택에서 결국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얀손스의 유산

(왼쪽부터)
차이콥스키 교향곡(Chandos)
브람스 교향곡 전곡(SIMAX)
말러 교향곡 시리즈(RCO)
‘마리스 얀손스의 초상’(BR-Klassik)

얀손스의 음반 중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1980년대에 오슬로 필하모닉과 함께했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다. 일반적인 해석보다도 가볍고 생기가 있어서 중후하고 진지한 연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그렇기에 지금도 독특한 해석으로서 인정 받고 있다. 이 음반은 음악 감상의 남다른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를 평생 ‘젊은 지휘자’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 오슬로 필하모닉과의 밀월이 끝나갈 무렵인 1999년에 녹음한 브람스 교향곡 전곡(SIMAX)도 눈여겨볼 만하다. 1번은 감성적인 흐름에 충실하여 낭만적 인간으로서의 브람스의 모습을 그리며, 2번은 밝고 화사한 음색으로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3번은 고뇌에 부딪히며 도전하는 패기가 있고, 4번은 수준 높은 해석력으로 가볍고 청량감 있게 풀어냈다.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의 음반으로는 말러의 교향곡 시리즈(RCO)가 눈에 띈다. 2005년부터 2016년까지 10여 년 동안 교향곡 1번부터 8번까지 녹음이 이루어졌다. 얀손스의 말러는 금관의 웅장한 소리로 상상의 공간을 확장하고, 목관과 현의 재치 넘치는 선율을 인상 깊게 드러낸다. 그리고 원색적인 색채감과 정성스럽고 섬세한 표현으로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 통해 얀손스의 말러는 삶의 고통이 아닌, 희망적인 미래를 말한다! 교향곡 2번의 경우 길버트 카플란의 2006년 버전의 악보를 사용한 것은 흥미로우며, 교향곡 8번은 실황을 담은 블루레이가 포함되어 영상을 즐길 수 있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도 얀손스의 주요한 레퍼토리를 녹음했으며, 선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뛰어나다. 그래서 다양한 작품들이 고루 수록된 ‘마리스 얀손스의 초상’(BR-Klassik)을 소개한다. 이 박스는 고전의 시작 하이든의 교향곡 88번과 고전의 완성 베토벤의 교향곡 4번, 고전의 부활 브람스의 교향곡 4번, 마지막 낭만주의자 말러의 교향곡 9번과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그리고 20세기의 음악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6번으로 이어진다. 얀손스의 음악 세계와 교향곡의 역사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프로그래밍이 된 앨범이다. 더 이상 얀손스의 연주회에 참석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약 200개의 앨범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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