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철학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이성주는 오는 4월 25일,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번·5번(봄)·7번을 연주한다. 연말에는 김대진이 지휘하는 조이오브스트링스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인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은 5월 10일,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의 첫 신호탄을 쏜다. 올해 총 3회에 걸쳐 진행되는 전곡 시리즈 공연은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함께한다.
2009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하루 만에’ 연주해 화제를 모았다. 벌써 10년 전인데 그때의 소회를 풀자면. 1997년에 바흐 파르티타 전곡 연주를 하면서 공부가 많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10년 뒤에 더 성숙해지면 꼭 다시 전곡 연주를 하고 싶었다. 열 곡을 하루에 연주하는 건 특별한 경험이 됐다. 베토벤의 작곡 흐름이 한눈에 보였으니까. 올해도 다시 한번 전곡을 하고 싶었는데, 여러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곡을 꼽아서 연주하기로 했다.
10년 만에 다시 베토벤을 꺼내보는 소감은. 매번 연주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노련해졌다고는 생각하지만, 전체적인 음악적 해석은 큰 변화가 없다. 젊은 시절, ‘나의 베토벤’을 만들어 놓았다. 2009년 리사이틀 영상을 보면서 보강해야 하는 점은 발견했지만, 전체적인 방향성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대신 함께하는 피아니스트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조합에 대한 기대는 생긴다.
코로나19 여파로 피아니스트가 올리버 케른에서 아비람 라이케르트로 바뀌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새로운 만남에 설렌다. 원래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5·9번을 선보일 예정이었는데, 라이케르트의 의견을 반영해 9번을 빼고 7번을 하기로 했다. 베토벤 7번 c단조와 로망스 2번이 붙으면 좋을 것 같아서, 로망스 2번도 추가했다.
올리버 케른과는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왔다. 2009년 베토벤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슈만·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도 함께했다. 솔리스트에게 오랫동안 함께할 음악적 파트너는 필수적일까. 중요하다. 미국에서 연주 활동을 하던 때에는 늘 피아니스트 스티븐 라자루스와 함께했다. 음악을 하다 보면 말없이 소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소통이 가능한 파트너가 매우 중요하다. 2009년, 전곡 연주를 준비하면서 어떤 피아니스트가 과연 하루에 이 곡을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많은 피아니스트를 지켜봤다. 그러던 중 올리버 케른이 연주한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를 봤다. 느낌이 딱 왔다.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인연 같았다. 이제는 서로를 믿는 음악적 파트너가 됐다.
바이올린을 배우던 학생 시절,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는 누구의 연주를 많이 들었나. 이츠하크 펄먼(1945~)이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등 학구적인 음반을 남긴 연주자들이 있다. 사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에서는 피아노가 중요하다. 이츠하크 펄먼의 연주를 많이 들었던 건,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1937~) 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케나지의 해석은 탁월하고, 그에게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베토벤 소나타는 초기와 후기작의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1번은 아무래도 단순한 면들이 많다. 말하자면 모차르트 같다. 마지막 10번은 난해하고 음악 흐름이 분산되어 있다. 돌발적인 부분도 많고. 1번에 고전적 성향이 가득하다면, 10번은 낭만시대로 본격적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베토벤은 고전과 낭만을 관통하는 작곡가다. 동시대 작곡가들의 화성 움직임을 함께 보면 곡에 대한 이해가 더 빨리 된다. 특히 슈베르트가 베토벤의 음악적 흐름과 같이 가는 느낌이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는 베토벤의 무엇을 가장 강조하나. 학생들은 베토벤을 의무적으로 한다. 베토벤 소나타에는 특별한 악상이 많다. 멜로디는 흘러가지만 때때로 특이한 악상이 튀어나오곤 한다. 학생들이 이 점을 잘 이해 못 하고, 기교적으로만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한다. 아름다운 선율은 유지하면서 악상의 컬러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악상이 분명히 나와야지만 확실히 베토벤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중 한 곡만 특별히 추천한다면. 7번! 베토벤이 추구하는 여러 가지가 이 한 곡에 다 담겨있는 것 같다. 베토벤의 매력은 느린 악장이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2악장을 할 때가 제일 긴장된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 틀어진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해이다. 리사이틀 외에 준비 중인 공연이 있나. 12월 30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김대진이 지휘하는 조이오브스트링스와 함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3중 협주곡을 맞춘다. 5년 전부터 조이오브스트링스를 오케스트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조이오브스트링스와 나는 하나의 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이제야 알게 된 것들
고대하던 ‘전곡 연주’를 앞두고 있다. 첫 전곡 연주로 베토벤을 택했다. 은연히 부담을 느낄 것 같은데.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는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는데, 긴 공백기로 기회가 없었다. 베토벤은 어떤 역경도 음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최근 나는 침체기에서 벗어났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리며 마음에 품었던 도전을 하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
원래 도전적인 성향인가. 안전함을 추구하는 성향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공존하는데, 모험을 택했을 때 더 좋은 일들이 생겼던 것 같다.
연주는 1년 동안 진행한다. 열 개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어떤 순서로 나눌지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세 번의 리사이틀로 나눌 예정이다. 열 곡 중 네 개가 A조(key)로 되어 있다. A장조 두 곡(2·6번), a단조 한 곡(4번), 그리고 정체불명의 소나타 9번 ‘크로이처’. 9번은 시작과 끝이 A장조이지만 전체적으로 단조 느낌이 강하여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우선 A조의 곡들을 적절히 배분했고 시기도 다양하게 구성했다. 첫 연주에서는 1·3·9번, 두 번째에는 2·4·8·10번, 마지막에는 5·6·7번을 선보이려고 한다.
이번 전곡 연주를 앞두고 개인적인 목표도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고백하면 아직 연주해보지 않은 소나타도 있고, 굉장히 오랜만에 꺼내보는 소나타도 있다. 하얀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전에 그렸던 그림에 다른 명암을 주는 것도 같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설렌다. 지금 내가 알고 이해한 만큼의 베토벤을 공유할 것이다. 삶의 길을 계속 걷다 보면 베토벤과 더 친해지겠지.
1년 동안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어떻게 맺어진 인연인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다.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하고 공통점이 많다고 느껴서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다. 김태형의 베토벤 연주를 라이브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베토벤의 ‘합창 환상곡’ 연주 영상이 인상 깊었다.
베토벤의 삶이 음악적 모티브
‘한수진의 베토벤’에 영향을 준 것들은. 바이올린보다는 성악이나 오케스트라, 실내악 연주를 들으며 깨닫는 점이 많았다. 처음 베토벤과 인연을 맺은 음반은 빌헬름 캠프(1895~1991)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엄숙함이 느껴졌고, 듣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의 경우는 코드 몇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클라이버(1930~2004)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영상을 보며 힌트를 얻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무게감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의 리코딩을 가끔 들었다.
어린 나이에는 베토벤 작품에 녹아 있는 입체성이 복잡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어릴 때는 베토벤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레슨 선생님은 베토벤이 테크닉으로 어렵다기보다는, 음악적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특히 협주곡은 성장한 이후에 배우라는 말도 들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렇다면 베토벤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던 건 언제였나. 첫 베토벤 연주는 13세 때 로망스 1번이었다. 두 번째 연주는 15세 때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한 이해 없이 연주했던 것 같다. 베토벤의 실내악을 접하고, 교향곡을 듣기 시작하면서 이해가 조금씩 깊어졌다. 베토벤은 인간적인 작곡가다.
베토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좀 더 듣고 싶다. 인간 승리의 대표적인 예이지 않은가?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심하게 학대받으며 연습했다. 그러면 음악이 싫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음악이 너무 좋아서 당시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힐 정도로 실력을 갈고닦았다.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배우려고 했으나 결국 하이든과 살리에리에게 배우게 됐다. 귀에 문제가 생겨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어했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했다. 베토벤의 음악은 삶 그대로가 모티브다.
베토벤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한 점이 있다면.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늘 자신만의 색을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베토벤이 곡을 쓸 당시 개인적으로, 사회·문화·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해야 한다. 특히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곡을 보면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 베토벤은 원하는 게 뚜렷하고, 악보에 디테일을 정확히 적으려고 했다. 악보에 담긴 디테일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 더불어 연주자 자신이 베토벤이 되어서 연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특히 베토벤 소나타는 ‘예쁘고 깔끔한 소리’에만 집착하다 보면 자칫 본질이 흐려지기 쉽다.
베토벤 열 개의 소나타 중 가장 애정하는 곡이 궁금하다. ‘애정’하는 곡을 하나만 꼽으라면 힘들다. 아마 ‘애증’의 곡이라면 9번 ‘크로이처’일 것이다.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오면 바로 꺼버릴 정도로 왠지 싫었다. 나중에 톨스토이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고 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바딤 레핀(1971~)과 니콜라이 루간스키(1972~)의 듀오 연주를 들은 후 편견이 깨졌다. 그날 이후 이 곡이 좋아져서 제대로 탐구하기 시작했고, 연주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지난해 이대욱 피아니스트와 처음으로 연주했는데, 그 한 곡이 거의 리사이틀 수준으로 육체적·정신적·감정적 에너지가 소모되더라. 평범한 소나타가 아닌, 협주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스케일이 큰 곡이었다. 그래도 행복한 연주였다. 베토벤 여정을 잘 마무리한 후, 몰입해보고 싶은 작곡가가 있나. 바흐 무반주 소나타 전곡 시리즈도 언젠가는 도전하고 싶다. 바흐 무반주는 특히 어쿠스틱이 좋은 장소에서 연주할 때 화음 진행이 또렷하게 들린다. 그 화음에 담긴 음악적 경이로움은 음악을 하는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글 장혜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