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문 안은미, 시대를 파격하는 예술을, 또 다시 파격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4월 20일 9:00 오전

이희문 안은미

시대를 파격하는 예술을, 또 다시 파격하다

스승은 편견을 밀어버리고, 제자는 새로운 스타일을 끊임없이 장착한다. 그러면서 각자가 딛고 선 무용의 지대를, 전통예술의 지면을 변화시킨다. 힘이 필요할 때는 과감히 협업하여 파격의 농도를 한 수치 끌어올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제로서, 동료로서, 파격의 사도로서 오늘을 살고 있다. 두 사람에게 ‘예술’을 물었다. 아주 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지금의 예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다

 

안은미(1962~)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이 2006년 ‘신 춘향’이다. 전통의 뿌리와 줄기는 서로를 끊어내고 안은미의 색과 몸짓으로 환원됐다. 무엇보다 연분홍빛 춘향전의 서사는 안은미 특유의 눈을 찌를 듯한 강렬한 색, 원색과 대비되는 살색의 향연, 역전된 신체의 표정 속에서 붉은빛 춘향이 되었다. 게다가 이몽룡과 변학도는 사랑까지 나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우리는 협소한 과거만을 바라보며 조선에도 찬란한 색이 있었음을, 동성애가 있었음을 잊는다. 이렇게 그는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과거를 현세화(現世化)한다. 시간을 이어 과거가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몸과 움직임을 미래로 이어지게 하여 기형적 단절에서 오는 장애를 치유하기도 한다.

1988년 첫 개인 발표회 이후 지금까지 작업해온 작품은 어림잡아 150점 이상. 생산도 파격도 부지런했다. 그 가운데 안은미의 2010년대는 좀 남다르다. 전문 무용가가 아닌 무명씨들과 그의 작품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생을 조용히 보내던 할머니들과 함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선보였고, 야근과 밥벌이에 지친 대한민국 남성들이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에서 무책임할 정도로 몸을 흔들어댔다. 안은미는 ‘예술춤’을 끌어내는 하방운동의 역군이자, 삶에서 튀어나오는 ‘막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 춤… 막춤에는 무명씨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막춤의 신바람은 2015·16년에 파리를 뒤흔들기도 했다.

150여개 이상의 작품 중 스스로 꼽는 작품은 ‘Let me change your name!’부터 ‘바리’ 시리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쓰리쓰리랑’ ‘안은미의 북.한.춤’ 등이다. 대부분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나온 작품들로 그의 성숙기가 언제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에 의하면 이 작품들은 “150여개 작품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한마디로 끈질긴 생명력의 아이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춤들 속에 전통예술의 한 조각이, 사회의 일면이, 인간의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술춤이 절연하고 끊은 세속성, 하지만 알고 보면 놀라운 세속성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하여, 예술의 파격이란 일상적인 것, 우리와 닿아 있는 것의 야금술로 나아갈 때에 배가된다는 것을, 안은미는 직접 보여준다.

이희문(1976~)은 안은미의 제자다. 소리꾼이 안무가의 족보에 입적하여 배운 것은 춤이 아니라 위와 같은 ‘예술하기’의 방식이었다. 희문아, 너도 전통을, 사회를, 슬픔을, 희망을 담거라. 일본에서 영상을 전공한 그가 민요와 소리 세계에 발끝을 처음 담갔을 때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모친 고주랑이 유명한 소리꾼이라 할지라도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미의 노래를 따라 불렀고 스승의 삶을 고스란히 살아본다. 그렇게 부단히 살아온 그가 나름 득도했을 적에 내게 했던 말이 있다. “팝송 가사를 어떻게 일일이 다 알고 듣나. 그냥 즐기는 거지.” 그는 이제 ‘즐겨라’라는 말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장영규와 함께 씽씽밴드로 이름을 날렸고 철학자 도올과 KBS1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스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희문도 ‘이희문스럽다’라는 말을 만들고 있다.

작년 6월과 올해 2월, 안은미와 이희문은 각각 색다른 작업을 선보였다. 안은미는 춤으로 일구어온 30여년의 시간을 전시회로 풀어버렸다. ‘안은미래’전이다. 6월 26일부터 9월 29일까지 3개월 동안 이어진 전시(서울시립미술관)는 ‘날마다 축제’였다. 화이트큐브에는 안은미 특유의 강렬한 색채, 과도할 정도로 거대한 물방울 문양, 요상스러운 무대 소품들이 전시되었다. 모두 공연에 쓰인 물품들이다. 안무가의 전시장이니 춤도 빠질 수 없었다. 안은미는 매일 출근하며 자신을 전시했고 관람객들을 춤으로 반겼다. 누군가는 ‘안은미래’라는 전시명에서 ‘안은미’를, 또 누군가는 춤의 ‘미래’를 읽었다.

이희문은 2월 20일부터 2월 26일까지 ‘깊은舍廊사랑’ 3부작을 선보였다(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민요와 모노드라마가 한데 섞인 시간이었는데, 그중 1부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였다. 이희문은 홀로 노래를 불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백했다. 그 이야기는 곧 그의 노래를 듣고 즐기는 ‘사용설명서’와도 같았다. 2부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남성 소리꾼들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그리고 3부.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노래 부르고 고백하고, 또다시 노래하는 그 순간은 노래-고백체의 문장으로 쓴 이희문의 서사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한 다락을 매듭짓는 정리의 과정을 마쳤다.

현재형으로 ‘전시’한, 춤인생 30년

‘안은미래’전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서울시립미술관이 시끌시끌한 시간이었습니다.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참여워크숍 프로그램(‘안은미야’)도 있었습니다. 춤을 배워보는 ‘몸춤’, 안은미컴퍼니의 연습·리허설·공연을 완전히 노출한 ‘눈춤’, 강연과 토론의 ‘입춤’ 프로그램 등. 관객들은 여러 예술가의 퍼포먼스와 함께 전시장 곳곳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마치 여러 춤과 예술적 사건이 일어나며 하루를 책임진 원더랜드 같았어요. 전시된 오브제들의 강렬한 색채가 눈동자를 얼마나 물들였는지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눈앞의 덕수궁이 형광색으로 보이더군요.

안은미 삼십여 년 동안 안무가로 살면서 제 작품의 무대와 의상을 직접 디자인했어요. 그래서인지 관객들에게 ‘안은미’는 독특한 색의 주인공으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그 시각적인 것들의 기록을 병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회고전의 장소로 전시공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시립미술관이 3개월 동안 저에게 장소를 내주었어요. 미술관 역사상, 그리고 무용계 역사상 안무가에게 이렇게 장시간을 내어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전시장 내에는 무용실도 마련하여 저와 안은미컴퍼니 단원들이 출퇴근하며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몸, 그리고 춤추는 몸을 전시한 것입니다. 개방된 작업실이니 관람객과의 만남도 당연했죠. 그래서 관람객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정해진 시간과 순간에만 저를 만나던 관객들이 항시 전시된 ‘안은미’를 만나니 더 즐거워하더라고요. 그렇게 석 달 동안 9만 3천 명이 저를 보고 갔습니다.

순간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무대 공간이 아니라, 뭔가가 항존할 수 있는 전시 공간에 춤을 전시했으니 끝나고 나서의 소회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안은미 무대라는 곳이 이 시대 예술이 향해 있는 지향점을 보여주고, 춤이 그런 예언의 행동이라면, 그 순간을 기록으로 잘 남기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여자구나’라는 생각도. ‘안은미래’전은 저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큐레이팅한 전시이기도 했거든요.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많이들 도와주었어요. 그러다보니 예술가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프닝 퍼포먼스에는 이희문을 포함한 여럿 소리꾼이 함께 출연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색깔니스트’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안은미 님을 대변하는 색이 참 강합니다. 한편 미술관으로 간 안무가의 행보가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안은미 전시 공간은 앞·뒤와 양옆이 하나로 묶인 입체적 공간입니다. 이러한 ‘열린 공간’이 주는 힘을 믿게 되었어요. 그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재미도 많이 느꼈고요. ‘함께’라는 화두는 제가 몇 년 간 붙들고 온 것이거든요. ‘개체로서의 경험’과 ‘함께 하는 경험’은 아주 다른 가능태를 만들어줍니다.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서

이쯤에서 ‘깊은舍廊사랑’ 시리즈를 마친 이희문 님께도 질문하겠습니다. 두 분이 인연을 맺은 때가 2007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였나요?

이희문 안 선생님이 안무한 ‘심포카(Symphonic arts) 안은미의 바리-이승 편’ 때였죠. 바리데기 설화를 토대로 한 작품이었는데, 안은미컴퍼니 단원들과 개성 있는 젊은 국악인들이 참가한 작품이었습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오디션 할 테니 나와!”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약속 장소가 노래방이었어요.

안은미 노래하는 가수이니 당연히 그곳으로 잡은 거였지! 이희문 님이 국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때가 2008년, 그러니깐 서른셋일 때입니다. 지금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는데요. 민요계는 남성 소리꾼이 드물다보니 의외로 각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춘희 제자’와 ‘고주랑의 아들’이라는 점이 그의 막후를 든든히 받쳐줬고요. 그런데 지금과 같은 끼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발매한 음반을 보면 멀쩡히 갓 쓰고 도포 입고 민요 부르고.

안은미 저도 잘 몰랐는데, 이정우(미술평론가) 소개로 알게 됐어요. 처음 보았을 적에 눈매가 참 고왔어요. 소리는 아주 청명하면서도 깊은 서글픔이 배어 있었어요. 바리가 여자 아이 아닙니까? 희문 씨는 뭔가 남성스럽거나 우악스러운 느낌도 없어 바리가 내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하는 이희문’을 ‘춤추며, 노래까지 하는 이희문’으로 만들기까지 그나 나나 많이 노력했네요.

이희문 바리 역을 맡으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숨은 헉헉댔는데 갑갑하게 조이고 있던 숨통이 트였습니다. ‘본업’인 경기민요가 아닌 무용단의 공연에서 말이죠.

‘나 이희문은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라고 할 때 분기점으로 꼽을 공연은 무엇인가요?

이희문 2014년 ‘쾌(快)’ 공연. 2013년 ‘잡(雜)’과 함께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라 이름 붙인 시리즈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전통음악들이 ‘기성복’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어요. 지금 이 시대와 내 자신과 맞지 않는… 그래서 내게 맞는 음악을 맞춤 제작한 것입니다. 안 선생님도 ‘신 춘향’ ‘바리’ 등에서 국악인들과 함께 하시며 이쪽 판을 쭉 훑어보셨는데, 이런 작업을 하는 눈에 띄는 소리꾼이 없으니 저에게 적극 권장하셨죠.

그래서, 그 노래의 옷들은 몸에 잘 맞았나요?

이희문 형식에 대한 변화, 시대와 더 찐한 스킨십… 그런 생각뿐이었어요.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시대가 우울해보였어요. 나는 이렇게 매일 신나는 노래만 하는데 말이죠(지금의 코로나 이야기가 한창 펼쳐졌다. 생략). 한마디로 유쾌·상쾌·통쾌한 일이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런 기운을 주겠노라며 나선 거였죠. ‘잡(雜)’과 ‘쾌(快)’를 하다보니 뭔가 더 깨달은 게 있어서 시리즈의 세 번째로 ‘탐’을 했었고. 그로 인해 찾은 것은 이 시대에 내가 필요한 이유였어요. 그러다가 결국 가발을 쓴 이희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 시리즈의 노래든, 가발이든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갈수록 퀄리티가 높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가끔 가발한테 말을 걸어요. 너와 나는 닮았구나, 얘야. 처음에는 가모로 시작했는데 우리는 지금 고급 인모가 되었어!

당시 희문 님 공연장 가면 재밌었어요. 평소 전통음악 쪽에서 욕하던 사람들이 다 와 있었어요. ‘잡’스럽고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자리 깔고 앉아서 보면서 어느 순간 상‘쾌’함을 느꼈던 거죠.

이희문 전통음악을 하다보니 ‘전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현대라는 시대와 도시라는 공간에 살고 있잖아요. 전통이 없는, 없어진 시공간입니다.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나는 ‘전통’이란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또 그래서 잘 보존해야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어느 예술을 아방가르드화할 수 있는 무기, 혹은 어떤 예술의 컨템포러리화를 도모하는 숨은 무기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에 얹혀진 상징을 내려놓다

그런데 진짜… 그 가발은 왜 쓰는 겁니까? 예전에 그걸 쓰고 공연장에 와서 제 앞에 떡하니 앉은 적도 있어요. 저는 그때 무대 위의 출연진이 희문 님 가발 위에 올라간 사람들로만 보였어요.

이희문 그 전에 안 선생님께 삭발한 이유를 물어봅시다. 예전에 그 이유를 들었을 때, 저는 선생님의 심정이 십분 이해됐었거든요.(시선을 안은미에게로)

안은미 한국사회에서 길거리에 이러고 돌아다니면 딱 두 종류로 봅니다. 문제 있는 여자거나 여승으로. 1991년에 삭발했어요. 강수연이 삭발하고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에 출연해 히트 치기도 했는데, 아마 그때 삭발한 여자는 강수연과 나 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때 머리를 밀고 출전한 콩쿠르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지금이야 그 이유를 여럿 들 수 있지만 사실 그때는 ‘나는 왜 머리를 밀고 싶어할까’ 질문만 던지던 중에 ‘그냥’ 밀어버렸어요. 미용실도 아니고 이발소에서. 그런데 거울 앞에 서니 너무 좋고 내 모습이 예쁜 거예요. 머리카락의 실제 무게는 얼마 되진 않는데, 뭔가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누르던 중력의 상징물이 다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죠.

그렇게 하고 처음으로 춘 춤, 혹은 안무한 작품이 뭡니까?

안은미 바로 나왔죠. 그날 이발소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계속 춤추며 갔으니.

그래서 결국 머리를 밀고 싶었던 이유는 찾았나요?

안은미 이유보다 결론이 딱 나오더라고요. ‘생각’과 ‘말’은 쉽지만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행동, 이거 참 어려운 거예요. 행동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위해서는 행동을 해봐야, 또 행동이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거니. 그리고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니 그 다음에도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되더라고요. 춤추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몸이었지. 이 옷이라는 거, 이걸 입는 게 너무 형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상의를 탈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색으로 칠하고 콩쿠르에 나갔어요. 사람들이 엄청난 쇼크에 빠졌어요. 28살 때의 일입니다.

그 뒤에 다시 기른 적은 없었나요?

안은미 그러고 나서 미국 유학 중에 다시 기르다가 말았어요. 원래 쪽 지고 다니려고 했는데, 참다 참다 다시 밀었죠.

 

깊은 사랑, 이희문의 고백체 예술

자, 안은미 님의 삭발론을 들었으니 이제는 이희문 님의 가발론을 들어보겠습니다.

이희문 저에게 가발은 감춤의 상징이에요. 감춤… 그래요.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마음의 상징물인 셈이죠. 이 감추고 싶은 것들은 뭔가 정리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마음을 맴돕니다.

듣고 보니 ‘깊은舍廊사랑’도 일종의 그런 ‘감춤의 드러내기’나 ‘감춰온 것의 현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깊은’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 여기는 깊은 곳이다, 그러니 조심해라, 조금은 은밀한 곳이다, 결국 나만의 공간이다, 라는. 이제 ‘깊은舍廊사랑’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희문 과거에 농번기가 끝나고 땅이 놀 적에 그곳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해요. 위에는 서까래를 얹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며 놀았던 거죠. 일종의 사랑채인데 땅 밑에 있으니 ‘깊은 사랑’이라 했다고 합니다.

올해 선보인 ‘깊은舍廊사랑’은 3부작인데, 그중 인상적인 게 어머니의 삶을 노래한 3부 ‘민요삼천리’였습니다.

이희문 경기민요는 여성을 중심으로 전승됐는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일제 강점기에 권번의 기생들에게 소리가 전달되면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해방 후에는 여성의 목소리로 이어져왔던 것이죠. 저는 노래를 두 여성-이춘희와 고주랑-에게 물려받았어요. 여성의 노래를 물려받은 남자인 셈이죠. 그러다 보니 역으로 남성 소리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사계축’ 공연으로 남성 소리꾼들의 뿌리를 살펴보기도 했어요. 자료를 뒤져보면서 그들이 당대에 느꼈을 동시대성이란 것도 생각해봤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1900년이라면 그때의 시대성이, 1910년이라면 그때의 스타일 말에요. 각 자가 시대와 닿아 있는 부분들을 잘 문질러 개성과 스타일과 시대를 잘 조합시킨 것 같더라고요.

어머니 얘기만 하면 아버지가 서운해 하실 것 같기도 한데요. 어떤 분이셨나요?

이희문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내 안의 아버지, 아니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부성’이라는 게 없으니 대한민국 특유의 남성성이라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러다보니 ‘한국남자’ 프로젝트도 가능했던 것 같아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규정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소리와 재담방식으로 풀이한 공연이었어요. 지금은 그저 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일단 나는 나한테 없는 것을 하지는 않기로 했거든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안은미의 춤

두 분의 작업은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대변하는, 일종의 ‘입 달아주기’와 ‘말 걸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 2010년대에 들어서 안은미 님은 작업들이 좀 다른 방향을 향하는데, 무명의 할머니들이 안은미컴퍼니 단원들과 함께 무대를 누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를 시작으로, 입시에 시달리는 청소년들과 함께 한 ‘사심 없는 땐스’(2012),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남성에 초점을 맞춘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2013), 저신장 장애를 가진 이들이 함께 한 ‘대심(大心) 땐쓰’(2017) 등입니다. 무명 씨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아니, 춤추기를 유도하며 그들의 세대론을 대변하고 내적 고민을 풀어낸 작업들이었죠. 춤이 어느 순간 행동인류학이 되는 순간들이었어요. 이희문 님이 선보인 ‘한국 남자’는 안은미 님이 연출한 것이고, 그 전에는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를 선보이기도 하셨는데, 그럼 안은미 님이 본 한국 남자는 어떤 존재인 듯 했습니까?

안은미 희문 씨가 아버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 이거 쉽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삶도 같이 걸려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두 사람의 합의가 없다면 그들의 역사는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보고 억압적이다, 권위적이라고 하는데요. 내가 본 아버지들은 남성이 짊어져야 할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아저씨들과 함께 모여 춤춘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가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남의 시선과 책임감에 묶여 사는 사람들인데, 무대에 풀어 놓으니 난리가 난 거였죠.

일종의 ‘땐스’ 시리즈로 불리는 함께 춤추기로서의 작업을 대변하는 코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안은미 ‘자기가 자기일 수 있는 순간’을 춤으로 찾고 춤으로 즐기는 것. 2016년 파리에서 ‘1분 59초 프로젝트’를 선보였어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딱 1분 59초 동안 무대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선 자신의 이야기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죠. 저는 몸에서 그들의 언어를, 정말 솔직하게 끌어내야 하는 안무가였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파리 청년이 와서 말하더라고요. ‘은미, 나는 이것 덕분에 매일매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라고요.

춤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눈에는 안은미 님이 어떻게 비춰졌을까요?

안은미 ‘쎈 언니’라는 소리 많이 들었지. 사실 나는 이 말보다 ‘튼튼한 언니’ 혹은 ‘씩씩한 언니’가 더 맞다고 봐요. 더 정확히는 ‘정직한 언니’인 거죠. 아무리 파격을 밥먹 듯 하여도 뭔가를 타파하고 쇄신하고자 할 때의 불안감은 매번 옵니다. 그럴 때마다 필요한 건 어떤 내적 결단이고 그 힘으로 불안정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몸이 편하면 아무 것도 안 나오니까. 그래서 아무런 직업을 ‘일부러’ 갖지 않는 것도 직업을 갖으려는 의지만큼 힘든 것이죠.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늘 빈털터리다보니 더불어 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아요. 이 힘이 없었으면 ‘땐스’ 시리즈는 나올 수 없었죠.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국경을 넘어 순항 중인데, 그 사람들도 함께 한다는 것의 힘을 아는 겁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오늘날의 춤이 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춤이 필요한 공간과 순간을 이 사회 속에서 찾아다니는 사람이고.

 

새로운 춤, 새로울 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떠오른 단어는 ‘수평’과 ‘수직’이었다. 안은미의 ‘땐쓰’ 시리즈는 수평의 상태에서 교감할 수 있는 춤이다. 그 수평의 지대 위에서 예술춤과 막춤이 만난다. 너와 내가 만난다. 멀쩡한 나와 멍든 내가 만나고, 가진 게 많은 너와 가난한 내가 만난다. 안은미가 펼친 춤의 지대가 평평하고 수평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할머니, 아저씨, 학생, 장애인은 안은미와 함께 춤추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 순간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한편 이희문, 그의 고백은 수직성을 지녔다. 노래와 고백을 듣기 위해선 우리는 ‘깊은 사랑’이라는, 그의 노래와 기억이 밀실화된 그곳으로 내려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핫팬츠와 망사스타킹이 아닌 한복과 저고리를 입고, 가발이 아닌 갓을 쓴 이희문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역사를 풀어낸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예술계의 변화도 적지 않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이번 호 ‘객석’의 특집을 차지했고, 기자들이 한데 모여 중계 공연을 보고 소감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안은미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몸과 몸이 만나는 것보다 몸과 스크린의 만남이 더 자연스러워졌어요. 직접 대면하고 춤을 가르치고 배우던 시대를 떠나 유튜브를 통해 배우는 사람도 많아졌죠.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압니다. 외부와 단절되고 자기만의 공간에 갇히면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은 정신입니다. 그러니 이 힘든 시대에 그러한 정신을 모으고 끌어갈 이슈와 담론들도 많이 나와야겠죠. 이 상황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방식과 방법으로 답을 찾곤 했어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리더가 될 젊은이들이 다음을 고민하고 준비 할 수 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추는 춤은 아니지만, 개인 간의 거리는 두되 이 어려움을 풀어갈 수 있는 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반드시 이겨내고 새로운 국면을 일으키는 힘이 생기기를! 인류는 두발로 딛고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면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춤은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언어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영치기 영차!”

글 송현민(편집장·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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