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김명곤, 광대의 균형잡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5월 11일 9:00 오전

광대의 균형잡기

연출가 김명곤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끈 김명곤.
그가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작
국립창극단 ‘춘향’의 대본·연출을 맡았다

 

김명곤(1952~)은 극작가, 연출가이자 배우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박초월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영화 ‘서편제’ ‘춘향뎐’ 각본을 비롯하여 국립창극단 완판장막창극 ‘춘향전’ ‘수궁가’ ‘백범 김구’ 등 다수 창극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국립극장 극장장(2000~2005)과 문화부장관(2006~2007)을 맡았다

그는 광대다. 연출, 극작, 행정을 두루 섭렵한 광대다. 그는 녹록지 않았던 선조 광대들의 삶을 기록하여 저서 ‘광대 열전: 어느 광대가 만난 광대들 이야기’(1988)를 내놓은 광대이기도 하다. 광대가 다시 돌아왔다. 새로운 춘향이를 데리고. 김명곤은 오는 5월 대본·연출을 맡은 국립창극단 ‘춘향’을 무대에 올린다. 국립극장 창설 70주년을 맞아 올리는 무대이다.
국립극장 지하 연습실에 들어가니, 단옷날 남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구성진 노랫가락에 마룻바닥은 씨름판이 되고, 바퀴 달린 의자는 몽룡의 흰 나귀로 둔갑한다. 수양버들에 매 놓은 그네를 탄 춘향의 풀치마, 아니 비단치마가 살랑이는 그 한가운데 김명곤이 있었다. 목청 높여 잔칫날을 진두지휘하는 그의 표정이 유독 진지하다.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재임하기 전부터 국립창극단과는 인연이 깊었다. 오랜만의 귀향인데, 소회가 어떤가? 짧은 단가의 소리조로 불러줘도 좋다. “뭐 그럴 것까지야. 다만 단원들과 다시 만나니 반갑다. ‘춘향전’(1998) 대본작가로 처음 함께했을 적에 공연 제목 앞에 ‘완판장막창극’이라는 말이 붙었다. 각본을 쓰고 출연한 영화 ‘서편제’(1993)로 이름을 알린 후였다. 그때 새파랗게 젊었던 단원들도, 나도 이제는 원로가 됐다. 세월 참 무상하다 싶더라.”
벌써 20여 년 전이다. 그때와 지금 창극단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단원들의 분위기는 변한 것이 없다. 작품의 성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예술감독이나 극장장이 바뀔 때마다 그랬다. 십 년간 창극단은 새로운 관객을 끌 작품 발굴에 주력했다. 창극의 현대화 작업이랄까. ‘판소리 음악극을 하는 단체’라는 정체성은 다소 흐려졌다.”

김명곤은 외부에 있었지만, 충분히 이런 말을 할 만했다. 그는 여러 차례 국립창극단 혹은 전통 소리의 구원 투수 역할을 했다. “너무 현대적이다” 1998년의 창극도 지금과 같은 문제의식에 직면했었다. 판소리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실험을 일삼던 연출가들에 의해 창극이 본래의 ‘소리맛’을 잃었다는 비판이었다.
전통의 회복을 외치며 국립창극단은 완판장막창극 ‘춘향전’을 기획했다. 전해오는 ‘춘향가’ 이본을 두루 반영하고, 6시간에 걸쳐 완창하는 공연이었다. 당시 두 소리꾼, 임진택과 김명곤에게 각각 연출과 대본을 맡겼다. 김명곤은 여러 바디(창자가 스승으로부터 전승받은 판소리 한 마당 전부를 가리키는 용어)의 가장 좋은 대목을 골라 균형 있게 배치했다. 이후 창작창극 ‘백범 김구’(1998)의 대본 작업과 연출에 참여한 그는 ‘심청전’(1999), ‘수궁가’(2000)를 완막장막창극으로 올리며 연이어 성공시켰다.
국립극장 70주년 기념작이자 2019/20 시즌 신작의 총대를 김명곤에게 쥐여준 데에는 유수정 예술감독이 갖고 있는 생각도 한몫했다. “창극의 뿌리인 판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당시 길이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그때 다들 미쳤다 그랬다. 두세 시간으로 줄여도 관객이 없는 판국에 누가 보러 오겠냐고. 그만큼 90년대는 창극의 쇠퇴기였다. 70년대까지 전성기였고, 80년대만 해도 조상현, 안숙선 등 기라성 같은 명창을 보러 온 팬들로 붐볐다. 누군가 창극 발전 기금으로 거액을 쾌척한 덕에 ‘완판창극’이라는 대작을 기획할 수 있었다.”
“야, 이거 ‘국악의 이해’도 좋지만, 5시간을 어떻게 견디냐” 직접 각본을 집필한 영화 ‘춘향뎐’(2000)은 이런 대사로 시작하던데. 전통도 좋지만, 6시간짜리 창극이라니. “영화에는 보성제라고 하는 특수한 바디만 있지만, 완판창극은 모든 바디의 가장 잘 짜인 백미였다. 걱정과 달리 연거푸 매진되며 연장 공연까지 했다. 관객들이 쉬는 시간에 도시락 까먹으면서 봤다. 그때 ‘춘향전’이 가진 이야기와 음악의 힘을 확인했다.”
결국 다시 소리라는 뿌리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전통의 보존’과 ‘현대화’는 창극사에 반복되어온 논의다. “전통과 현대화라는 절벽에서 줄타기할 때 중요한 것은 균형감이다. 창작된 소리만 하면, 창극을 하기 위한 판소리 명창으로서의 기량이 줄어든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는 당대 명인들의 음악성, 연극성이 함께 전해지는 법이다. 전대의 광대들이 갈고닦은 작품을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 완판 ‘춘향전’을 공연하면, 전 단원이 판소리 완판을 다 공부하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관객 입장에서 1998년과 2020년 춘향은 무엇이 다른가? “판소리에 중심을 두는 거지, 고전 ‘춘향전’을 그대로 복원하겠다는 게 아니다. 고전이 가진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관만큼은 재해석하고 싶었다. 지금은 여성들을 가둬두고 ‘얌전해야 해, 정절을 지켜야 해’하고 억압했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 같다.”

다시. 그는 광대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노는 똑똑한 광대다. 그의 똑똑함이 드러나는 순간은 춘향을 새롭게 해석하여 시대에 걸맞은 여성상을 제시할 줄 안다는 데에 있다. 김명곤은 1998년엔 전통 판소리에 충실했다. 그 시대의 고전적인 정서와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다. 의도적으로 춘향이 어머니 몰래 이몽룡과 정을 통하는 창본을 선택하지 않기도 했다. 춘향의 예의와 정절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사실 창극에서 대본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극적 구성과 캐릭터가 빈약하면, 소리경연대회에 그치고 만다. 동시대와의 시차를 줄이는 일 또한 작가의 몫인데. “현대 관객에게 공감되지 않는 스토리나 캐릭터는 이번에 싹 고쳤다. 전통은 오늘날에 살아있어야지, 300년 전 춘향전을 들이밀며 감동하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시대 정서에 맞게 작가의 눈으로 새로 풀었다.”
이른바 고전 비틀기인가? 창극 ‘수궁가’(2000)에서 토끼에게 용서를 비는 용왕을, 뮤지컬 ‘오필리어’(2014)에서는 햄릿을 향해 복수를 고뇌하는 오필리어를 보여줬다. “춘향의 캐릭터 설정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시대의 여인이 아닌, 그저 사랑에 충실한 여자로 그렸다. 이몽룡 캐릭터도 점잖은 양반 자제가 아니라, 춘향에게 넋이 나가 정열을 바치는 철부지 소년으로 설정했다.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전통은 살리되, 전통의 때깔을 확 빼버렸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은? “몇 년 전부터 말해온 것이긴 한데 영화 ‘동편제’를 만드는 것이다. 판소리에는 서편제와 동편제가 있는데, 사람들은 서편제만 안다. 동편제를 알리는 것이 내 인생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이미 시나리오는 다 써놓았다.”

전통과 현대 사이 양단의 균형이 절실한 지금, 국립창극단은 또다시 김명곤을 호출했다. ‘말괄량이’ 춘향이가 요즘 시대에 그리 새로울까 싶다가도, 슬며시 광대 김명곤이 만들어낼 춘향을 기대해본다. 김명곤의 균형 감각은 어떻게 빛을 발할까.

김명곤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이 ‘춘향전’을 계속 각색할까?”

“수백 년간 몇백 편의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다 사라지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그것이 가진 묘한 생명력이 있다. 사실 ‘춘향전’의 스토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하다. 마치 남원에 가면 월매와 춘향이 있을 것만 같다. 처음엔 누군가 ‘춘향전’을 썼겠지만, 그걸 노래한 광대마다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중에 관객의 반응이 좋은 것만 살아남았다. 이들이 다 극작가면서 작곡가가 된다. 서양의 극작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원본 그대로 내려오지 않나. 말하자면 ‘춘향전’엔 셰익스피어가 100명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캐릭터가 단순하지 않고, 변주의 폭이 넓다. 끊임없이 창작의 영감을 준다.”

춘향은 영원하리

현대의 춘향전 변천사

“고전은 잘하면 ‘창작의 수원지’요, 못하면 ‘고갈의 도피처’다”라는 무시무시한 비평이 있다. ‘춘향전’은 정말 오랜 세월, 수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춘향은 ‘변신’의 다른 말이 됐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대중문화 속 다양한 얼굴을 한 춘향이다. 한국 영화사는 춘향과 함께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시네마스코프 영화(홍성기, 1961)·70mm 필름 영화(이성구, 1971)·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임권택, 2000) 모두 ‘춘향전’이었다. 패러디 열풍이 불며 ‘춘향전’을 현대화한 드라마 ‘쾌걸춘향’(2005)과 방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방자전’(김대우, 2010)도 인기를 끌었다.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에도 춘향이 자리한다. 1948년 작곡된 현제명의 ‘춘향전’은 전통을 넘어 완성해낸 아름다운 아리아가 특징이다. 작곡가 장일남·박준상·김동진 등이 판소리를 재료로 과감한 해석을 이어갔다. 무용계에서 춘향은 파격과 변주의 아이콘이었다. 배정혜가 안무한 국립무용단 ‘춤·춘향’(2002)은 “우아한 전통미의 과시에서 벗어난, 역할에 필요한 해학적인 몸짓”으로 호평받았다. 안은미의 ‘춘향’(2003)은 맨가슴으로 원초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이몽룡과 변학도는 사랑을 나눈다.
손님맞이에도 춘향이 앞장섰다.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은 한국 문화를 알릴 홍보의 장이기도 했다. 국립극장은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 ‘춘향전’을 소재로 한 여러 장르의 공연을 선보이는 ‘사랑대축제’를 기획했다. 한·중·일의 전통극은 ‘춘향전’(2000)에서 만났다. 제1막 ‘사랑’은 낭만적인 미의식이 돋보이는 중극의 월극, 제2막 ‘수난’은 일본의 전통 공연 양식 가부키, 제3막 ‘재회’는 애절한 한국의 창극으로 꾸며졌다
세계적 거장에게도 ‘춘향전’은 탐나는 소재였다. ‘페트루슈카’ ‘레 실피드’ ‘장미의 정령’의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 그의 발레 ‘사랑의 시련’(1936)이 ‘춘향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이 최근 사료의 발굴로 알려졌다. 2007년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바 있다. 연극·오페라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1943~)의 선택도 ‘춘향전’. 2014년 ‘세계거장시리즈’의 주자로 그를 모셔 온 국립창극단은 처음에 ‘흥보가’를 제안했다. 그러나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에 흥미를 못 느낀 서반이 거절했다고.

주요 기념공연의 단골 레퍼토리 ‘춘향’
‘춘향’은 나라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무대로 불려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우리의 고전이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성 덕분이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국립극장

 

참고
백현미, ‘창극 <춘향전>의 공연사와 양식상의 특징’, 공연문화연구6, 한국공연문화학회, 2003
이진원, ‘판소리 <춘향가>의 현대적 재창조에 관한 연구’, 판소리연구19, 판소리학회, 2005

 

국립창극단 ‘춘향’을 보기 전에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몰라도 된다!
판소리에 쓰인 고어와 어려운 한자어를 모두 우리말로 풀었다. 뜻을 알아야 노래의 정서가 전달되기 때문. 대신 ‘소리맛’을 해치지 않게 ‘말맛’은 살렸다.

가장 맛있는 소리만 뽑았다
‘춘향가’는 바디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만정제는 애절하고 섬세하다. 보성제는 우렁차다. 작창을 맡은 유수정 예술감독은 판소리의 묘미를 살렸다. 만정제를 기본으로 하되, 장면에 어울리는 바디를 골라 판소리를 짰다. 원작에 없는 장면에 실리는 노래는 음악감독 김성국의 작품. 고전적이면서도 신선한 ‘농부가’를 들려줄 예정. 김명곤은 “공연실황을 그대로 녹음해도 훌륭한 음반이 나올 것”이라 자신했다.

보이지 않으니 더욱 생생하다
판소리는 귀로 보는 예술이다. 창자의 노래를 통해 인물이 그려지고, 무대장치가 세워진다. 이번 연출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리는 살리고, 거추장스러운 무대 연출은 없앴다. 간결하고 감각적인 무대로 관객의 상상을 돕는다. 무대디자인에 정승호, 조명에 구윤영, 영상에 조수현이 투입됐다.

‘유교걸’ 춘향은 가라
춘향이 어딘가 홀가분해 보인다. 열녀, 정절, 교훈이란 짐을 덜어서다. 김명곤은 고전적인 캐릭터성을 뒤집었다. 이제 춘향은 이몽룡의 말 한마디에 옷고름을 풀지 않는다. 정절에 목숨을 바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랑에 솔직한 말괄량이 소녀다.

춘향 대 춘향
김소희·안숙선·유수정·박애리… 당대 최고의 여성 소리꾼이 춘향 역을 거쳤다. 국립창극단은 2020년 춘향을 공개모집했다. 젊은 소리꾼 김우정이 국립창극단 이소연과 함께 더블 캐스팅됐다. 심사에 참여한 김명곤에 따르면 “풋풋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가진” 새로운 춘향이라고. 맑은 성음과 연기력을 갖춘 이소연은 창극 ‘춘향 2010’(2010)과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에 이어 이번에도 춘향으로 낙점됐다. 서로 다른 춘향의 매력에 사로잡힐 준비가 됐는지.

국립창극단 ‘춘향’

5월 14~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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