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에세이_신혜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5월 4일 12:00 오후

ARTIST’S ESSAY

 

일상에 마법을 허하라!

Bar Zum schmutzigen Hobby ©justapack.com/gay-berlin-guide

일상에서 마주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있다. 오랜만에 간 단골 카페 점원이 아직 나를 알아볼 때, 여행 중 마침 영화제가 열려 좋아하는 영화를 광장에서 볼 때, 예의상 참석한 친구의 졸업연주회에서 온 마음을 담은 친구의 연주를 듣게 될 때…. 이런 예기치 않은 순간들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곤 한다.

지금 살고 있는 베를린은 이러한 작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 도시이다. 자유로운 실험 정신이 깃든 도시의 분위기는 내게 매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음악으로만 가득 차 있던 나의 세계가 이곳 베를린에서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베를린에서 본 드랙쇼

한번은 베를린에서 만난 친구들과 드랙쇼를 관람한 적이 있다. 드랙쇼는 ‘드랙퀸’으로 불리며 하이힐이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여성성을 과장되게 연기하는 남성이 진행하는 쇼이다. 쇼는 베를린에 위치한 바에서 열렸다. ‘나의 외설적인 취미를 위한 바(Bar Zum schmutizigen Hobby)’라는 너무나도 ‘베를린’다운 이름을 가진 바였다.

아담한 크기의 내부에는 의자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는데 먼저 온 관객의 차지였다. 나의 일행은 무대 옆쪽에 자리한 길쭉한 벤치를 확보하려고 다른 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무대라고는 했지만, 겨우 두세 사람이 설 수 있는 단상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음료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며 불평했고, 뉴욕에서 온 친구는 미국에 비하면 너무나 싼 가격이라며 놀라워했다. 이 아수라장에 쇼 타임이 시작됐다. 조명이 바뀌고 오늘의 퀸, 주디 라 디비나가 나타났다. 자리를 구하느라 어쩔 줄 몰라 하던 관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와 의자 사이, 벤치 틈새,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Say HALLO, Say YASSSSS MAMA~~”

과장된 화장, 옷차림, 목소리와 몸짓의 그녀(?)는 청중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음악에 맞춰 춤추고 립싱크-자신은 세계 어느 언어의 가사든지 립싱크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하며,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실없는 농담을 했고, 관객을 무대로 초대해 춤을 추게 하고 보상으로 공짜 술을 주었다. 작은 공간 덕인지, 그녀가 능숙하게 쇼를 이끈 덕인지 어느새 관객은 하나가 되어 그녀와 소통했다. 쇼는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진행됐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그녀는 무대에 오른 관객 중 수상자를 선정하여 선물을 주었다. 어느덧 그녀의 마지막 무대만이 남아있었다.

 

오롯이 감정으로 채운 무대

©주디 라 디비나 인스타그램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아주 애절한 선율,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그 노래에 맞춰 립싱크하는 그녀의 모습. 나는 어려서부터 비올라를 켰고, 그간 크고 작은 연주회에 서 왔다. 그런 내가 ‘연주하는 것’과 ‘테크닉’을 별개로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아마 장르를 막론하고 공연예술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연기든지, 노래든지, 춤이든지 간에 항상 테크닉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관객 앞에서 공연할 때 테크닉과 감정, 그리고 지성을 조율하는 것은 숙제와도 같다.

하지만 가창이라는 테크닉에서 자유로운 그녀의 립싱크는 순수한 감정만으로 채워졌다. 순도 100%의 에너지. 공연은 충격적일 만큼 감동적이었다. 립싱크 무대가 이리도 아름다울 줄이야. 쇼가 끝난 뒤 그녀를 찾아가 내가 느낀 감동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깊은 포옹으로 나의 인사에 답례했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은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 내 안에 쌓였다. 지금 이 순간의 보석 같은 경험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며 나를 비출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크고 굵직한 것을 위해서 살아간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 꿈에 그리던 직장을 잡는 것, 마음에 품은 사람과의 결혼 등등. 더 윤택한 삶과 보장된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원하는 것을 달성하려 정신없이 달려나간다. 하지만 가끔은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며, 기대치 못한 마법이 일어날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녹아든 보석이 형형색색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채워 나가도록.

 

신혜리
비올리스트 신혜리(1989~)는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커티스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최승용·김상진·라이너 무그·로베르토 디아즈·마이클 트리를 사사했다. 소년한국일보 콩쿠르와 세계일보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베를린 코미쉐오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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