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스웨덴 음악창고
푸른 하늘, 금빛 연주자들
위대한 성악가와 관악기 연주자를 다수 배출한 나라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사회를 강타한 민족주의 열풍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도 어김없이 들어왔다. 노르웨이에서는 그리그(1843~1907),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1865~1957), 덴마크에서는 닐센(1865~1931)이 자신의 조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했던 스웨덴은 끝끝내 이 정도 반열에 오른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슈베르트라 불린 프란츠 베르발트(1796~1868),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석을 쌓았던 빌헬름 스텐함마르(1871~1927) 등이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으나, 이들의 작품은 스웨덴 이외 지역에서는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지 못했다. 19세기 스웨덴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차지했던 문화적 위상을 고려한다면, 왜 유명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는지는 미스터리다.
18세기 후반 문예 부흥 정책을 펼친 스웨덴은 19세기 내내 자국 작곡가들의 활동을 장려했고 모국어 오페라에도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인상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다. ‘체코의 드보르자크’ ‘헝가리의 버르토크’와 같은 국민악파 작곡가들이 조국과 한 묶음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스웨덴이 이름 있는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심각한 약점이다. 하지만 명망 높은 작곡가의 부재가 스웨덴 음악의 모든 것은 아니다. 스웨덴은 위대한 성악가와 연주자, 세계적인 수준의 악단을 다수 배출했다.
스웨덴은 성악가의 나라!
우선 스웨덴 출신의 위대한 성악가들을 살펴보자. 리릭 스핀토 계열을 대표하는 테너 유시 비욜링(1911~1960), 팔방미인형 테너인 니콜라이 게다(1925~)를 비롯해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불멸의 이름을 남긴 비르기트 닐손(1918~2005). 스웨덴은 문자 그대로 ‘성악가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뒤를 잇는 안네 소피 폰 오터(1955~), 니나 스템메(1963~), 카타리나 카르네우스(1965~), 피터 마테이(1965~), 안나 라르손(1966~)까지 스웨덴 성악가들은 해외 오페라 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스웨덴이 성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던 건 스톡홀름에 위치한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이 한몫했다. 계몽 군주이자 극작가였던 구스타브 3세는 스웨덴 문예 사업을 장려했으며, 로열 오페라 극장도 그의 주도로 설립됐다. 구스타브 3세는 스웨덴 출신으로 구성된 앙상블을 만들기 위해 1771년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오페라단을 해고했다. 이후 왕립 오페라를 조직해 1773년 첫 공연을 선보였다. 1782년 현재 위치에 오페라 극장을 건립하고 개관 기념으로 스웨덴 작곡가 요한 고틀리브 나우만(1741~1801)의 ‘코라와 알론조’를 올렸다. 구스타브 3세는 개인 금고를 털어 극장 운영비로 충당할 만큼 오페라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이 극장에서 그는 최후를 맞았다. 1792년 3월, 극장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는데 입구에 가득한 참석자들 때문에 잠시 행렬이 지체됐고, 이틈에 그는 저격을 당했다. 총상 자체는 심각하진 않았지만 상처로 인한 감염으로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가면무도회에서의 암살은 유럽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여러 음모론이 더해진 이야기가 연극이나 오페라로 각색될 정도였다. 베르디의 ‘가면무도회’가 바로 이 사건을 오페라로 만든 대표작이다. 원제가 ‘구스타브 3세’였을 만큼 처음에는 사건과 관련된 왕실 사람들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검열 당국의 강력한 제재로 제목을 ‘가면무도회’로 바꾸고, 배경을 영국 식민지 지하의 보스톤으로 변경했다. 구스타브 3세를 보스톤 총독 리카르도로 바꾸었는데, 사실 보스톤에는 총독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은 베르디 ‘가면무도회’를 빈번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베르디 원작 그대로 구스타브 3세를 비롯한 등장인물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구스타브 3세 암살 사건 이후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은 잠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1803~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빠르게 명성을 찾아 북유럽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 됐다. 이와 별개로 세월의 흐름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건물은 빠르게 낡아갔고 화재의 위험성도 커졌다. 결국 1892년에 건물을 헐고 이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오페라 극장이다.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은 스웨덴 성악가들이 경력을 쌓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성악가들은 이 극장의 앙상블 멤버를 거쳤다. 극장과 가까운 공원인 ‘왕의 정원’의 양옆 도로명은 스웨덴 출신의 가수 ‘비리기트 닐손’ ‘유시 비욜링’의 이름을 따왔다.
예테보리 심포니, 스웨덴을 대표하다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이 오페라를 대표한다면, 오케스트라 최전선에는 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다. 스웨덴 제2의 도시인 예테보리에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빌헬름 스텐함마르(1871~1927)는 1905년에 예테보리 심포니를 창설했다.
스웨덴 최초의 직업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예테보리 심포니는 스텐함마르의 지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여러 저명한 지휘자들을 거치며 스웨덴 대표 오케스트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예테보리 심포니가 지금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1982년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 네메 예르비(1937~)가 부임한 이후다. 예르비는 전임자들과 달리 녹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마침 스웨덴 클래식 음반 레이블 BIS가 설립되어 예르비와 예테보리 심포니는 콤비를 이뤄 시벨리우스 교향곡을 녹음했다. 또한 스웨덴을 비롯한 동구권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녹음을 진행했다. BIS 레이블과의 공동 작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에는 1980년대 후반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계약도 성사시켰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집 재녹음을 비롯해 그리그의 관현악 작품,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보로딘의 교향곡 전집 등 수많은 명반을 출시했다. 예테보리 심포니는 오로지 음반만으로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과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같은 쟁쟁한 악단을 제치고 입지를 확고히 했다. 네메 예르비는 2004년 예테보리 심포니 수석지휘자에서 내려왔지만, 오케스트라는 그에게 명예 수석지휘자 칭호를 부여해 매해 초청하고 있다. 여러 지휘자가 그의 뒤를 이어 예테보리 심포니를 맡았지만, 예르비와의 신보가 현재도 끊임없이 발매되고 있다. 아마 아직도 예르비가 예테보리 심포니의 수석지휘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스톡홀름의 자랑, 두 오케스트라
스톡홀름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는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이 있다.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02년 스톡홀름연주협회 부설 관현악단으로 시작됐으나,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1914년부터 재단장했다. 1926년부터 스톡홀름 콘서트홀을 상주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은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은 노벨상 시상식의 축하 연주회를 맡는데, 시상식 실황이 영상으로 소개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앤드류 데이비스(1944~)와 파보 예르비(1962~) 두 지휘자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공동 수석지휘자 자리를 맡았다. 이들의 후임으로 앨런 길버트(1967~)가 8년간 수석지휘자로 재직하며 스톡홀름 시민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2021년 시즌부터 스웨덴 로열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게 됐다.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은 스웨덴 방송국 소속 오케스트라다. 1965년 방송국 산하 두 개의 오케스트라를 합병해 창설된 단체다. 창설 첫해는 상임지휘자로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를 초빙해 유명세를 얻었고 이후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1927~),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1928~2002), 에사 페카 살로넨(1958~), 만프레드 호넥(1958~), 대니얼 하딩(1975~)으로 이어지는 상임지휘자 라인은 호화롭기까지 하다. 살로넨이 재임하던 시절 CBS 레이블을 통해 많은 음반을 선보여 애호가 사이에서도 꽤 이름을 알렸다. 최근에도 대니얼 하딩과 아르모니아 문디 레이블에서 베를리오즈·말러 등 낭만주의 관현악 작품을 출시하고 있다.
말뫼 심포니와 지휘자 블롬슈테트
남부에 위치한 스웨덴 제3의 도시 말뫼에는 말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자리하고 있다. 1925년 창립된 말뫼 심포니는 창단 초부터 말뫼 오페라 반주를 맡았지만, 1991년부터는 콘서트 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있다. 음반 녹음 활동이 많지 않아 국제적인 명성은 없지만, 버논 핸들리(1930~2008), 제임스 드프리스트(1936~2013), 파보 예르비 등 이름 있는 중견 지휘자들이 경력을 쌓기 위해 거쳐 간 매력적인 악단이다.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도 젊은 시절 상임지휘자로 잠시 활동한 적이 있다.
올해 93세가 된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는 스웨덴이 낳은 가장 유명한 지휘자일 것이다. 그는 1927년 미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했고,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을 졸업해 이후 파울 자허(1906~1999), 이고르 마르케비치(1912~1983),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등에게 사사했다. 이후 오슬로 필하모닉·덴마크 방송교향악단·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수석 지휘자로 활약했다. 1985년부터는 10년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로 추앙받게 됐다. 블롬슈테트는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R. 슈트라우스 등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권위자이면서, 그리그·닐센·시벨리우스·스텐함마르 등 북유럽 작곡가들의 해석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의 닐센 교향곡 해석은 많은 이들의 레퍼런스로 여겨진다. 9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블롬슈테트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동시대 관악 연주자들의 산실
스웨덴은 훌륭한 관악 연주자를 다수 배출했다.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두 연주자 크리스티안 린드베리(1958~)와 마르틴 프뢰스트(1970~)는 꼭 기억해야 한다. 트롬본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인 린드베리는 트롬본이 지닌 독주 악기로서의 가능성을 실제로 증명해냈다. 또한 트롬본 협주곡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는데, 그를 위해 작곡된 트롬본 작품만 80곡이 넘는다. 자신이 직접 작곡한 트롬본 작품도 다수이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대 트롬본 레퍼토리가 크게 확장됐다.
클라리넷 연주자 프뢰스트는 초절적 기교와 아름다운 음색으로 유명하다. 바로크부터 현대 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앤더스 힐보르크(1954~),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1933~2020) 등 수많은 현대 작곡가들의 신작을 초연한 명실상부 동시대 최고의 클라리네티스트다. BIS 레이블을 통해 음반 작업을 해오던 프뢰스트는 최근 소니 레이블로 둥지를 옮겨 이전에 발표한 레퍼토리를 재녹음하고 있다. 그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최근 출시된 비발디 협주곡집은 클라리넷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권하고 싶은 음반이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