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대에 불어온 여풍 – 세계의 파워 여성 지휘자 16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1월 25일 9:00 오전

COVER STORY

지휘대에 불어온 여풍세계의 파워 여성 지휘자 16
History를 만드는 Herstory

여성 지휘자가 등장하고 100년이 넘어서야, 세상은 이들의 존재를 여성으로도, 지휘자로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1913년 영국의 헨리 우드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 여성 단원을 받아들였지만, 그가 만든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에서 여성 지휘자가 선 것은 1984년의 일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2013년에서야 프롬스의 폐막 무대를 장식한 첫 여성 지휘자가 나왔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두 번째 여성 지휘자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21년이었다.

여성 지휘자의 역사는 간간이, 그러나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어왔다. 지휘봉을 뜻하는 영어단어 ‘배턴(baton)’의 다른 뜻처럼, 이어달리기에서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듯 지휘봉은 한 여성의 손에서 다음 여성의 손으로 어렵게 쥐어져 왔다.

그러는 동안 이름을 잃은 이들이 많다. 요컨대, 2014년 “국내 국공립 교향악단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라는 타이틀을 안고 등장한 성시연이 나오기 전에 지휘자 박순덕(1954~)이 있었다. 서울대 음대를 거쳐 이탈리아 베르디 음악원과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으나, 30곳이 넘는 국내 대학과 교향악단 중 그의 이력서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번 특집을 통해 만난 한 지휘자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계에서 선구적인 여성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다시 파도처럼 휩쓸려가곤 했다. 그리고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다시 붙었다.”

이번 특집은 16인의 여성 지휘자들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과 성취를 정리하며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자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의 여성 지휘자들이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다. 이 특집을 통해 더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수월한 능선을 이루기를, 지름길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들의 행보를 위한 환경도 달라지기를 바란다. 이를 인식하기 위한 여러 정보도 담았다.

올해 프랑스에서 여성 지휘자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고자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를 주최한 필하모니 드 파리의 대표 로랑 벨은 이 콩쿠르가 존속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50년 역사의 매니지먼트 닥터 랍 & 닥터 뵘의 담당자 슈테판 프레그너는 여성 지휘자의 질적·수적인 향상에도 여성성을 강조하는 공연기획사의 불편한 요구가 있음을 털어놓았다.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의 변화를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읽었고, 전주시향의 상임지휘자이자 교육자인 김경희는 그 역시 여성 지휘자로서 체감한 학교 현장과 지휘계 현실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박서정 기자

CONTENTS

COLUMN 지휘대에 남녀는 없다

history 여성 지휘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연보

INTERVIEW 세계 여성 지휘자 16인 여성 지휘자를 보는 다양한 시각

REPORT 프랑스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

MOVIE & BOOK 영화와 책에 담긴 여성 음악가EPILOGUE 편집부 좌담

INTERVIEW
제인 글러버 Jane Glover 1949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 Odaline de la Martinez 1949

조앤 팔레타 JoAnn Falletta 1954

시언 에드워즈 Sian Edwards 1959

로랑스 에퀼베 Laurence Equilbey 1962

여자경 Jakyung Year 1970

앨리스 파넘 Alice Farnham 1970

캐런 카멘세크 Karen Kamensek 1970

아누 탈리 Anu Tali 1972

메이 앤 첸 Mei-Ann Chen 1973

시안 장 Xian Zhang 1973

사라 힉스 Sarah Hicks

성시연 Shi Yeon Sung 1975

김보미 Bomi Kim 1978

알론드라 데 라 파라 Alondra de la Parra 1980

기에드레 슬레키트 Giedre Slekyte 1989    (*출생연도 순, 기사 배열과는 무관)


INTERVIEW

제인 글러버(1949~)는 지휘자이자 음악학자이다. 옥스퍼드 대학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17세기 베네치아 오페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지휘자로 데뷔한 이후, 글라인드본 투어링 오페라 음악감독과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영국 왕립음악원 오페라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2003년에 대영제국 훈작(CBE) 작위를 받았다.

제인 글러버1949~모든 것은 순리대로

19세기 말, 영국은 남성 중심의 질서로 짜인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같은 선구적인 여성 작가가 탄생했을 터. 울프는 100년 전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이 온전하려면 혼자 있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그는 완고한 관습에 갇힌 영국을 지속적으로 도발했다. “나는 조국이 없다. 나란 여성의 조국은 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울프가 지나간 영국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울프가 타계한 8년 뒤, 영국 헴슬리에서 지휘자 제인 글러버(1949~)가 태어났다. 앞서 노력한 울프 덕일까. 제인 글러버는 학교 교육의 수혜를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고, 오보에를 불었으며, 마침내 지휘봉을 들었다. 한때 여성은 교내 잔디도 밟기 힘들다던 옥스퍼드 대학의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17세기 베네치아 오페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서 제인 글러버는 지휘자보다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3월, 헨델의 런던 시절을 조명한 ‘런던의 헨델’(제인 글러버 저·한기정 역)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런던의 무엇이 이국의 젊은 작곡가를 그토록 매료시켰을지, 제인 글러버는 헨델을 통해 18세기 영국 문화사를 조망했다. 그의 지적 열망은 음악에 깊이를 더한다. 덕분에 그는 ‘여성 지휘자’가 아닌 ‘학구적인 지휘자’로 불리게 됐다.
여성 지휘자로서 문을 열기 위하여 당신 역시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나? 

나 역시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나의 공간에서 공부를 했고, 책을 썼고, 악보를 분석했다. 이는 지금 내 세상을 갖추는 데 분명한 전환점이 됐다.

현재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지휘자들이 많을까?

예컨대 많은 여성 음악가들이 육아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 여전히 많은 지휘자들이 비행기 안에서 악보를 분석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이 쓴 책을 좋아한다. 올해 국내에 번역된 ‘런던의 헨델’을 재밌게 읽었다. 모차르트를 둘러싼 여성들에 관한 연구서인 ‘모차르트의 여인들(Mozart’s Women: His Family, His Friends, His Music)’도 어떤 내용일지 호기심이 든다. 

나는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첫 번째 책인 ‘카발리(cavalli)’는 1978년에 집필했는데,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후 모차르트와 헨델에 관한 책은 두 작곡가에 대한 관심 때문에 쓰게 됐다. 오랫동안 두 작곡가의 작품을 지휘했으며, 그들의 생각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모차르트와 헨델의 음악을 사랑하니, 그들의 인간성에게까지 관심이 닿았다. 그들의 음악에 특정한 맥락을 제공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모차르트의 삶엔 여성의 시선이 가득하고, 헨델의 삶엔 머물던 도시의 특성이 지배적이다.

‘학자로서의 정체성’과 ‘지휘자로서의 정체성’이 좀 다른가?

두 진영을 모두 좋아한다. 음악에 대한 배경을 알면, 어떻게 연주하면 좋을지 쉽게 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지휘자에게 음악 지식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 철저한 준비도 필요하다. 그런 후 연주자들과 공연하는 그 순간에 나를 맡겨야 한다.
제인 글러버는 옥스퍼드 대학 학부 시절부터 꾸준히 지휘를 해왔다. 첫 지휘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아탈리아’였고, 오페라 첫 지휘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그는 주로 오페라와 바로크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본격적인 데뷔는 1975년, 웩스퍼드 페스티벌에서 카발리의 오페라 ‘에리트레아(Eritrea)’를 지휘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오페라는 근대에 와서 제인 글러버의 지휘로 처음 연주된 것이다.

제인 글러버의 경력은 1980년대에 이르자 활개를 쳤다. 1979년 영국 글라인드본에 발을 들인 게 결정적 계기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글라인드본 투어링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이후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London Mozart Players)의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 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지휘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공부할 때는 장학금을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학계를 떠나 전업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전업 지휘자로서 첫 시작점에 섰을 때는 힘들었다. 글을 쓰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으니 말이다.

지휘자로서 인생의 전환점은?

글라인드본에서 일하게 된 것. 처음에는 스태프로 일하다가 객원 지휘자로 서게 됐다. 당시 음악감독이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1929~)가 내게 준 영향은 막대하다. 그를 도와 글라인드본은 물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일할 수 있었다. 글라인드본에선 사이먼 래틀(1955~)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우린 친구가 됐고, 그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도 당신의 이력에 중요한 단체일 텐데.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와 7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했다. 우리는 수백 개의 공연을 영국 곳곳에 올렸고, 다수의 음반을 남겼다. 단원들이 나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견뎠을 것 같기도 하지만, 참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다.

2002년부터는 시카고의 뮤직 오브 더 바로크(Music of the Baroque)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바로크 음악과 함께하고 있다는 건 음악가로서 아름다운 경험이다. 뮤직 오브 더 바로크 단원들은 시카고 최고의 연주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처럼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단체이지만, 당대연주가 지닌 역사성과 감각을 추구한다. 우리는 함께 레퍼토리에 적합한 연주 스타일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단원들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진다.

지휘자는 창작자가 아니라 통역사다. 통역사인 지휘자에겐 음악을 전달할 동료들이 필수적이다. 지휘자로서 필요한 능력은 음악을 속속들이 안 뒤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동료들에게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상호 간의 신뢰가 없는 낯선 단체에서 처음 지휘봉을 잡을 때에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가?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면?첫 리허설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꽤 오랫동안 그들의 연주를 경청한다. 그래야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첫 연주가 끝난 뒤에는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생각을 연주에 반영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인다.

‘여성’이란 수식어가 당신을 힘들게 한 적은 없었나? 

음악가를 묘사할 때 그런 수식어를 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음악 능력으로 모든 걸 평가받아야 한다.

경력 초창기에는 차별도 심했다고.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오래 활동하고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나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고용되지 않은 적도 있지만, 반대로 여자라는 이유로 무대에 선 사례도 있다. 둘 다 옳은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좋은 사람인지, 음악적 능력을 갖추었는가이다.

바로크 음악과 오페라에서 왕성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동시대 음악에 대한 관심은 어떠한가?

1977년엔 바티나뇨 페스티벌에서 영국의 작곡가 스티븐 올리버(1950~1992)의 오페라를 초연하기도 했다.  오페라와 교향악 연주에서 균형을 맞추고 싶다. 내가 18세기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다른 시기의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의 음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편인 것 같다.

맞다. 연주도 그러하다. 음악의 까다로운 패시지를 매끄럽게 소화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모든 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  코로나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러한가?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그저 지금이 우울할 뿐이다.

글 장혜선 기자

discography
모차르트 ‘그랑 파르티타’ 외 .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즈 윈드 앙상블Alto ALC 1208
헨델 ‘메시아’ . 허더스필드 코랄 소사이어티 외Signum Classics SIGCD246 (2CD)
엘마 도이처 ‘신데렐라’ . 바네사 베세라(소프라노)/조나스 해커(테너)/네이선 스타크(베이스바리톤)/오페라 산호세 외Sony Classical 19075895049 (DVD)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1949~)는 쿠바 서쪽의 마탄사스에서 태어났다. 미국 툴레인 대학에서 음악과 수학을 전공했다. 이후 영국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폴 패턴슨(작곡)·엘세 크로스(피아노)를 사사했다. 세 편의 오페라를 비롯해 교향악·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1976년 창단한 앙상블 론타노(Lontano)와 1992년 설립한 독립 레이블(LORELT)을 통해 여성·라틴 아메리카·동시대 음악 발굴에 힘쓰고 있다.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1949~작은 혁명을 위한 리듬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는 쿠바 태생의 작곡가 겸 지휘자다.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서쪽, 마탄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정체성은 ‘라틴 아메리카’와 ‘여성’ 그리고 ‘동시대성’으로 대표된다. 마르티네스가 작곡한 오페라 ‘노예 3부작’ 중 ‘Imoinda’(2005~2008)는 노예제도로 팔려간 아프리카 부족 공주의 이야기다. 여러 아리아를 탄력적이고 명료한 타악기 리듬 위에 얹었다. 지금도 마르티네스의 작업실 한켠에는 쿠바 타악기 여러 대가 자리한다.

마르티네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작은 마을에는 밤마다 아프리카를 건너온 북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쿠바의 음악은 그 역사만큼이나 복합적이다. 15세기 쿠바를 식민 지배한 스페인은 서구 유럽과 아프리카 문화를 동시에 들여왔다. 스페인의 정열적인 선율에 아프리카의 민속 리듬이 더해진 아바네라(habanera), 단손(danzon), 쏜(son)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그는 “아프로 쿠반(Afro Cuban) 음악의 주술적인 리듬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가, 그 리듬이 멈추면 다시 잠에서 깨곤 했다”고 회상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공부한 그는 현재 영국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유럽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이고자, 1976년 왕립음악원 재학 당시 앙상블 론타노(Lontano)를 창단했다. 같은 이유로 1992년 독립 레이블(LORELT)을 설립해 라틴 아메리카의 클래식 음악을 주로 발매했다.

언뜻 서구·백인·남성이 주류를 이뤄온 클래식 음악계에서 마르티네스의 존재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1984년 마르티네스가 클래식 음악의 대표적인 축제 BBC 프롬스 무대에 섰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성취는 곧, 클래식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실내악 앙상블 론타노(Lontano)와 독립 레이블(LORELT) 두 단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런던 왕립음악원에 진학하며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유럽에서 연주되는 작품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 작곡가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고, 미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론타노를 소개하는 문구는 ‘음악의 장래성(the future of music)’이다. 자작곡부터 브라질 작곡가 빌라로부스(1887~1959), 여성 작곡가 에설 스마이스(1858~1944)의 작품 등을 론타노와 연주했다. 에설 스마이스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며, ‘여성 행진곡(The March of the Women, 1911)’을 작곡한 바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1976년 런던 공연장에 좀 더 다양한 국가·민족·시대적 배경을 가진 작품을 선보이자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했다. 왕립음악원 재학 중에 플루티스트인 잉그리드 컬리포드와 론타노를 창단했다. 나는 앙상블의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는데, 지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론타노와 BBC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녹화를 하는데, 한 레퍼토리에 지휘자가 필요했다. 재빨리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날로 본격적으로 지휘를 했다. 사실 지휘자는 어릴 적 내 꿈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여자는 합창단 말고는 지휘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을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지만.

교향악단 데뷔는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고. 

그때도 BBC 라디오에서 프로듀서와 론타노의 연주 프로그램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BBC 벨파스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무대에 설 수 없으니, 당장 투입할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바로 다음 월요일에 리허설과 녹음이 있었다. BBC 도서관에는 연주에 필요한 악보가 모두 있었다. 주말 내내 쉬지도 않고 악보를 연구했다. 무사히 공연을 마무리하니, 곧 여러 BBC 오케스트라에서 지휘 요청이 들어왔다.

열 명의 실내악단과 대규모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일 것 같은데. 

론타노를 지휘한 지 몇 년쯤 지났을까. 제대로 지휘를 배우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얀 해링턴 교수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당대의 뛰어난 지휘자로 거론되는 피오라 콘티노(1925~2017), 율리우스 허퍼드(1901~1981)와 함께 수학한 분이다. 그에게서 지휘의 기본이 되는 지식과 테크닉을 익혔다.
마르티네스는 1984년, 34세의 나이에 BBC 프롬스 무대에 오르며 전도유망한 지휘자로 거듭난다. BBC 프롬스가 창립 90여 년 만에 맞은 여성 지휘자였다. 쿠바 출신의 마르티네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축제 무대를 자신의 앙상블 론타노와 함께 창작곡으로 꾸몄다. 같은 해에 자신의 첫 오페라 ‘시스터 에이미(Sister Aimee: An American Legend)’가 모교인 툴레인 대학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1992년 설립한 독립 레이블(LORELT· Lontano Records Limited)은 이렇게 창작·발굴한 작품을 대중에게 널리, 또 지속적으로 알리는 통로가 된다. LORELT 레이블 홈페이지(lorelt.co.uk)에 들어가 보니, 카테고리 구분이 흥미롭다. 라틴 아메리카 음악, 여성 작곡가, 20세기 그리고 살아있는 작곡가로 나뉘어 있다. 영국에서 음원 다운로드 기능을 갖춘 첫 독립 레이블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마르티네스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의미를 잘 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변화도 가치 있게 여긴다. 혁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한 번의 충격이 아닌, 지속적인 두드림이기에.

BBC 뮤직 매거진은 올해 프롬스 창립 125주년을 맞아 ‘축제를 움직이고, 뒤흔든’ 인물 중 한 명으로 당신을 소개했다.

그 사건은 분명 여성 지휘자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다만, 내 음악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1994년 7월 31일 BBC 프롬스에서 에설 스마이스의 오페라 ‘더 레커스(The Wreckers)’를 지휘한 것을 꼽겠다. BBC 필하모닉과 허더즈필드 합창단이 함께했고, 주요 독창자로 메조소프라노 앤 마리 오웬스(1955~), 테너 저스틴 라벤더(1951~)가 참여했다. 이 공연은 실황 음반(Retrospect Opera)으로도 발매되어, 에설 스마이스의 음악적 위대함이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여러 레이블에서 그의 오페라 3편과 몇 곡의 관현악·실내악 작품을 녹음할 수 있었다. 파묻혀있던 작품이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LORELT 레이블은 주류 음악 시장에서 소외됐던 음악을 주로 발매한다. 1992년 레이블을 차릴 때 상업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당시 음반 산업에는 CD가 보급되고 있었는데, 새로운 음악을 위한 레이블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음악은 LP로 녹음됐고, 큰 비용을 들여야 했으며, 소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CD가 등장하면서, 적은 비용으로도 좋은 품질의 리코딩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적게라도 음반을 출시한 뒤,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고.

당신이 작곡한 음악도 자체 레이블을 통해 여러 장 발표했다. 생동감 넘치는 쿠바 음악의 색채가 배어있는 곡들이다. 작곡을 맡은 창작 오페라 ‘Imoinda’(2005~2008/조안 아님 아도 대본)는 아프리카계 카리비안 여성이 쓴 첫 오페라 각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하지만, 사실 여성들은 어떤 방면으로든 음악에 존재해왔다. 단지 그 ‘선구적인 여성들’은 나타났다가, 다시 파도처럼 휩쓸려갔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드디어 문을 열었나 싶으면, 곧 닫혀버린다. 계속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변화의 흐름을 지지하는 단체가 있어 희망적이다. 앞서 말한 오페라 ‘Imoinda’는 뉴욕의 비영리단체 오페라 아메리카에서 기금을 지원받았고, 버지니아 툴민 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변화는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클래식 음악은 앞으로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글 박서정 기자

discography
스마이스 ‘더 레커스(The Wreckers)’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지휘)/BBC 필하모닉/허더즈필드 합창단 외Retrospect Opera RO004
빌라로부스 실내악과 합창음악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론타노/BBC 싱어스Lontano LNT102SIGCD246 (2CD)
‘유운(Asonancias)’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 실내악 작품집
오달리네 드 라 마르티네스/론타노Lontano LNT130Sony Classical 19075895049 (DVD)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1984 BBC 프롬스(로열 앨버트 홀)에서 전체 프로그램 지휘

 

조앤 팔레타(1954~)는 매네스 음대에서 기타를 전공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기타리스트이자 류트 연주자로 음악계에 처음 발을 디뎠고, 자메이카 심포니 음악감독(1977~1989)으로 지휘계에 입문했다. 이후 덴버 체임버 오케스트라(1983~1992), 밀와키 심포니 부지휘자(1985~1988), 샌프란시스코 우먼스 필하모닉 음악감독(1986~1996), 롱비치 심포니 음악감독(1989~2000), 얼스터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2011~2014)를 역임했다. 현재 버펄로 필하모닉 음악감독(1998~)이자 버지니아 심포니(1991~)의 종신 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2009년과 2019년 그래미상을 받았다.

조앤 팔레타1954~최초의 발자국

조앤 팔레타(1954~)에게 일곱 번째 생일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물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작은 클래식 기타. 팔레타와 음악의 동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로부터 4년 뒤, 열 한 살이 되던 해에 경험한 음악적 ‘사건’은 그에게 또 다른 비전을 안겨주었다. 카네기홀에서 만난 인생 첫 교향악 무대에 단숨에 사로잡혀 버린 것.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듣고, 팔레타는 지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후 지휘자가 되기 위한 발판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10대 시절부터 지휘와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매네스 음대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기타와 지휘를 배웠다. 전형적인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지휘계에 팔레타는 새로운 발자국을 남겼다. 그가 쌓는 기록에는 ‘최초의 여성’보다 ‘최초의 미국인’ 혹은 ‘전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더 많다. 수많은 악단과, 수많은 곡을 초연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기록을 깨고 있는 그는, 단연코 “우리 시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이다”(‘뉴욕 타임스’)
기타리스트이자 류트 연주자로 메트 오페라와 뉴욕 필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매력적인 소리와 견줄 순 없지만, 클래식 기타는 여전히 내 음악 창구다. 매일 기타를 연습하며 연주자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닫곤 한다.

기타와 류트를 공부한 경험이 지휘자로 성장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주었나? 

반주 악기로서 기타는 다른 음악가와 협업하는 과정, 내 소리를 집중해서 듣는 법을 배우게 했고, 지속음을 낼 수 없다는 악기의 특성은 멜로디 라인과 프레이즈, 레가토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던져주었다. 반면, 독주 악기로서의 기타는 음악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는 더 큰 오케스트라 작품의 구조와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대위법적 구성의 음악이 주를 이루는 류트는 악보의 수평적·수직적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연주자가 아닌 지휘자로 만난 첫 무대는 무엇이었나? 

객원 지휘와 오디션을 통해 덴버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임명됐다. 처음으로 전문 음악 단체를 이끌게 된 것이었다. 1983년 3월, 악단과 함께 로시니, 모차르트, 라벨,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지휘했다. 마치 첫사랑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휘자로 데뷔한 후 조앤 팔레타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넘나들며 100여 개의 오케스트라와 만나왔다. 그의 홈페이지(www.joannfalletta.com)에 기재된 지난 다섯 시즌의 기록을 보면, 현재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버펄로 심포니와의 미국 공연을 제외하고서도 네덜란드·폴란드·캐나다·스웨덴·아이슬란드를 비롯해 중국·일본 등 여러 나라에 초청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는 2008년과 2011년, 각각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 지휘를 위해 방문했다.
데뷔 후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다. 

주로 전통적인 교향악단에 중심을 두고 활동했지만, 체임버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현대음악이나 고음악 등 특정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한 단체와도 함께했다, 특히 20세기 전반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 오케스트라가 확장되고, 악기가 추가되며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색깔이 더욱 풍부해졌는데, 덕분에 지휘자는 마치 화가가 된 것처럼 여러 색깔의 소리를 섞어 새롭고 특별한 음색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20세기 초반은 변화와 두려움,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한 격동의 시기였다. 이러한 장면이 당시 작곡가들의 작품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100여 개의 악단과 만나며 느낀 문화적 특징이 있을 것 같다. 

문화는 각 음악가와 단체들이 속한 지역사회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많은 오케스트라는 다국적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라별 차이보다는 사회적 분위기나 오케스트라의 기풍이 공연과 연습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그러한 분위기가 지휘자에게도 영향을 줄 텐데.

서양의 사고방식은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만약 여기에 동양적 사고와 철학을 접목한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을 재해석한 존 하이더의 ‘지도자의 도(The Tao of Leadership)’에는 “현명한 지도자는 일련의 성공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리더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성공을 찾도록 돕는다. 성공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휘자에게 꼭 필요한 지혜다.
토스카니니(1867~1957)와 같은 전형적인 남성 마에스트로의 이미지가 지휘자의 이상적 모습으로 자리 잡았던 19세기 후반, 지휘자는 전지전능한 위치에 올라섰다. 그러나 본래 지휘자는 실용적인 시간 관리자에 불과했다. 오케스트라의 확장으로 불어난 덩치를 감당하지 못해 생긴, ‘모든 연주자를 하나로 유지할’ 별도의 사람이 바로 지휘자였다.
지휘자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을 꼽았다. 

매네스 음대에서 만난 첫 지휘 스승인 곽승(1941~)을 비롯해, 식스텐 에를링(1918~2005), 조지 메스터(1936~)와도 많은 추억이 있지만, 줄리아드 음악원 재학 당시 만난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솔직하고 날카로운 비평으로 소문난 그였지만, 젊은 지휘자들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인내심을 지닌 분이셨다. 테크닉적인 이야기보다는 음악의 내적 의미에 몰두하도록 도와주었고, 음악적 아이디어와 열정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면 노래·춤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 그는 내게 영감 그 자체였다.

이 외에도 본인에게 영감이 된 여성 지휘자들이 있다면. 

나디아 불랑제(1887~1979), 에설 스마이스(1858 ~1944), 마거릿 힐리스(1921~1998), 마거릿 호킨스(1937~1993), 사라 콜드웰(1924~2006), 이브 퀠러(1931~),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 그리고 1921년에 시애틀 시빅 심포니를 설립해 이끌었던 메리 데이븐포트 엔버그(1880~1951)를 존경한다. 모두 선구자적 인물들이다.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성별’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내가 지휘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할 당시 성별에 대한 이슈가 눈에 띄게 적어졌고, 현재 미국 내 음대나 오케스트라를 보면 남녀의 비율이 상당히 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저명한 여성 작곡가와 지휘자가 많기도 하고.

여러 스승의 가르침과 경험을 거치며 ‘좋은 지휘자’에 대한 기준이 생겼을 것 같다. 

지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만드는 주체가 ‘지휘봉’이 아닌, ‘오케스트라’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모든 공연은 음악가의 마음과 정신에서 비롯되며, 이로부터 개성 있는 무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곡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이해를 바탕으로 임하되, ‘오케스트라의 해석’을 위한 공간은 남겨두어야 한다. 먼저 자신의 개성과 음악적 아이디어가 존중받을 때, 악단은 새롭고 실험적인 아이디어에 마음을 연다. 지휘자는 그저 단원들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고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 된다. 지휘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정반대다. 반전된 피라미드에서 지휘자는 모든 단원을 받쳐주며, 그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휘자의 가장 큰 역할은 역시 리허설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 리허설에서는 되도록 중단 없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끝까지 들어보려 한다. 악단의 음색과 음질, 그리고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나서 이후의 리허설 방향을 설정한다. 단원들에게는 예술적 책임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서로 열심히 듣고, 반응하고, 연주하며, 그에 따른 위험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역할은 모두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단체의 음악적 성향을 이해하고, 예술적 정신을 지지하며, 뛰어난 역량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 가려 한다.
조앤 팔레타의 행보에는 ‘새로움’과 ‘소통’이란 키워드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미국 작곡가의 작품을 500여 곡 이상 소개했고, 그중 100여 곡을 세계 초연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무려 120장(이중 Naxos에서 115장을 발매했다)에 달하는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무척이나 화려하다. 이중 존 코릴리아노(1938~)의 ‘미스터 탬버린 맨’을 담은 음반(2008)과 케네스 푹스(1956~)의 작품을 전 세계 최초로 녹음한 앨범(2018)은 그에게 2009년과 2019년 그래미상을 안겨줬다.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것만 해도 열 번에 달한다.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버펄로 필의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오케스트라의 유튜브는 그의 인터뷰 영상으로 가득하다. 그의 걸음에는 항상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휘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현대 음악은 고전 음악과 달리 지휘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매력이 있다면?        

지난 10년간 샌프란시스코 우먼스 필하모닉과 함께하며 여성 작곡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레퍼토리를 탐구했다. 과거의 보물부터 강렬한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곡을 발견하며, 레퍼토리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곡을 찾아 배우고, 현존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좋아졌다. 작곡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단 점이 가장 흥미롭다.

클리블랜드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예술 고문으로 활동하고, 여성 지휘자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다음 세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를 이끄는 리더의 입장에서, 다음 세대를 어떻게 예측하는가? 

음악적 통찰력과 안정적인 테크닉, 체계적인 리허설, 오케스트라와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등 지휘자에게 필수적인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단체의 재정적인 생존을 위해 지휘자가 직접 홍보에 나서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지역 사회와의 협력도 중요하다. 음악감독으로서 청중이 되는 지역 사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지역 경제와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도 참여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열망을 가진 공동체가 있어야 공연예술도 힘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누구도 처음부터 완벽한 능력과 기술을 가질 순 없다. 그러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재능과 개성,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글 이미라 기자

discography
리처드 대니얼푸어 ‘예수아의 수난(The Passion of Yeshua)’
힐라 플리트만(소프라노)/티모시 팔론(테너)/매튜 워스·케네스 오버톤(바리톤)/제임스 K. 바스(베이스)/조앤 팔레타(지휘)/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합창단Naxos 8.559885-86
케네스 푹스 피아노 협주곡 ‘심령술사’ 외
제프리 비겔(피아노)/아리에 누스바움 코헨(카운터테너)/D.J.스파(일렉트릭 기타)/티모시 맥알리스터(색소폰)/조앤 팔레타(지휘)/런던 심포니Naxos 8.559824
존 코릴리아노 ‘미스터 탬버린 맨’ 외
힐라 플리트만(소프라노)/조앤 팔레타(지휘)/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Naxos 8.559331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1992 만하임 오케스트라 지휘

1989 롱 비치 심포니 음악감독 임명

2011 얼스터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임명

하반기 연주 일정
레타/버펄로 필 ‘현의 세레나데’11월 10일 클라인한스 음악 홀(미국)
팔레타/버펄로 필 ‘바흐, 베토벤 & 그 너머’ 11월 24일 클라인한스 음악 홀(미국)
팔레타/버펄로 필 ‘바로크 불꽃축제’12월 8일 클라인한스 음악 홀(미국)
조앤’s 클래시컬 크리스마스12월 15일 클라인한스 음악 홀(미국)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캐런 카멘세크(1970~)는 인디애나 음대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와 피아노를 전공했다. 빈 폴크스 오퍼의 제1카펠마이스터(2000~2002)를 시작으로, 프라이부르크 극장 음악감독(2003~2006), 슬로베니안 내셔널 시어터 수석지휘자(2007~2008),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부지휘자(2008~2011)를 역임했고, 최근까지 하노버 슈타츠오퍼 음악감독(2011~2016)으로 활동했다.

캐런 카멘세크1970~살아있는 음악과 함께 걷다

1999년, 캐런 카멘세크(1970~)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학교를 떠나 마주한 음악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무대에서 거절당하며 음악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고 있었다. 몇 해 동안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던 그는 결국 음악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음을 다 내려놓아서였을까. 긴 시간 동안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빈 폴크스 오퍼의 제1카펠마이스터 자리에 발탁된 것. 음악을 포기하려 마음먹은 지 불과 8개월 만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마쳤다. 미국 현지에서도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데, 유럽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을 이어갔다. 활동지역을 유럽으로 삼았던 이유가 있나?  

부모님이 모두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내가 태어나기 직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내 뿌리는 유럽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여름의 대부분을 슬로베니아에서 보내며 두 가지 문화와 언어를 익혔다. 그러면서 언젠가 유럽으로 돌아가 이곳의 다채롭고 풍부한 문화에 빠져보고 싶단 꿈을 꿨다. 물론 지휘자로서 이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의 발전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열리지 않았던 기회의 문이 유럽에서 먼저 열렸던 것도 하나의 이유다. 삶이 나를 유럽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전문 지휘자의 세계에 들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휘자가 된 것이 마치 숙명 같기도 하다. 그 시작점에는 ‘엘 시스테마’가 놓여 있다.  

인디애나 남부에 있는 뉴 알바니-플로이드 카운티 공립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내 첫 바이올린 선생님인 루빈 셔(1917~2013)를 만났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학교에서 ‘엘 시스테마’를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여덟 살에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현악 수업은 물론, 학교 오케스트라, 합창, 뮤지컬, 연극, 청소년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주 다채롭고 풍성한 음악적 첫 경험을 안겨준 활동이었다.

지휘자의 길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꿈인가?  

내 잠재력을 처음 알아본 분이 루빈 셔이다. 선생님은 내가 같은 반 친구들에게 정확히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틀렸는지 지적하는 것을 보며 내게 타고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성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시고자 노력했다. 하루는 내 손에 드럼 스틱을 쥐여주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자를 맞춰보라고 하셨다. 그러곤 ‘그래, 넌 언제가 지휘자가 될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여덟, 아홉 살 때였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우연히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게 되었는데, 그 뒤로 오케스트라가 나의 ‘최애 악기’가 되었다.

스승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금의 삶으로 증명하고 있다. 처음 지휘대에 오른 순간을 기억하는가? 

열세 살 무렵, 처음으로 중학교 오케스트라와 비발디의 ‘봄’을 지휘했다, 유년기와 대학생 시절에 많은 무대를 경험했고, 운이 좋게도 전문적인 음악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지휘자로서 전문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고 나서의 첫 무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인디애나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고, 유럽 무대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캐런 카멘세크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부모님을 포함한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그는 “멘토란 지금 현재에도 필요한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음악가이자 인간으로서 넓은 시야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그에게 수많은 멘토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 오늘도 그는 배움의 자세로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마주하고 있다.
지휘자는 마치 대기업의 CEO 같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집단을 이끄는 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리더의 자리에 선 지휘자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지휘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가시적인 ‘자격’은 없다. 음악적 특성 외의 나머지 부분은 매우 주관적이며, 개인의 성격과 리더십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모든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용기’다. 엄청난 지휘 테크닉을 연마한다 해도 실제로 지휘대에 올라 눈앞에 놓인 거대한 그룹을 이끌 용기기 없다면,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첫인상은 대체로 처음 만난 5분 안에 결정된다고 한다. 새로운 오케스트라와의 만남에서도 첫 5분이 중요할 것 같은데, 

나는 야생동물을 보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친 아주 짧은 순간에 서로의 영역을 탐색하고 누가 리더인지를 알아차린다. 첫 리허설은 최대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들의 음악적 생각을 들어보려 노력한다. 포디엄 위에서의 자세와 리더십을 암시하는 말의 톤에도 신경을 쓰지만, 무엇보다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자신 있게 리허설에 들어서는 게 중요하다.

이후의 리허설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가?  

리허설과 공연에서 종종 ‘무사히 비행기를 착륙시켰다’는 농담을 한다. 오케스트라를 이끌 때 무대 안팎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허설은 내가 의도하는 바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지,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 어떤 감정의 온도가 존재하는지,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준 새로움은 무엇인지 등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가고 있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무대를 넘나들며 활동 중인 캐런 카멘세크는 특히 현대 음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이뤄왔다. 1996년 미국 스폴레토 페스티벌에서 필립 글래스의 오페라 ‘무서운 아이들’을 세계 초연한 것을 시작으로, ‘사티아그하라’ ‘오르페’ ‘아크나텐’ 등 글래스의 여러 작품을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와 함께 선보였다.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무대에서도 새로운 프로덕션의 ‘아크나텐’(펠림 맥더못 연출)을 지휘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데뷔 무대를 플로이드(1926~)의 ‘수잔나’로 장식하고, 로열 스웨덴 오페라에서 빅토리아 보리소바 올라스(1969~)의 ‘드라큘라’를 지휘한 것도 그의 음악적 관심사를 잘 대변한다. 현대음악에 대한 사랑은 오케스트라 무대로도 이어졌다. 오는 11월에는 티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파질 사이(1970~)의 ‘교향적 무곡’을 오스트리아 초연으로 선보인다.
현존하는 작곡가와 수많은 협업을 이뤄가고 있다. 지휘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인만의 전략인가? 

지휘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지휘자가 되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많은 현대 작곡가들이 작품을 맡겨주어 고맙게 생각하며 모든 작품에 헌신적인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현재 속해있는 에이전시(ARSIS)에는 시몬 영, 김은선, 요아나 말비츠도 함께 활동 중이다. 모두 수많은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이들이다.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는 좋은 동료다. 특히 지휘계의 개척자인 시몬 영의 음악성과 리더십을 존경한다. 1999년과 2000년에 잠시 그의 조수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더 큰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내가 지닌 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보여준 그에게 항상 고맙다.

시대가 바뀌었다곤 하나, 음악계 내에는 여전히 성별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특히 지휘계는 더 그러하고.   

인류는 탄생하면서부터 사회적인 부조리와 함께 역사해왔다. 그래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나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돕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회가 낳은 부정적인 면을 비껴가려고 노력 중이다.

음악 안에서도 ‘여성적’ ‘남성적’ 등 성별과 관련된 표현과 자주 맞닥뜨리곤 한다. 

꽤 많은 언어에서 ‘음악’은 여성 명사로 쓰인다.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에서는 ‘죽음’이란 단어도 여성 명사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소리, 감정과 같은 무형의 존재를 남성적 혹은 여성적 요소로 인식하고 한정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복잡해진다. 예술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집중해서 작품을 공부하고 해석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공간도 필요할 것 같은데. 

집중력을 가지고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 음악이다. 하지만, 난 ‘음악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려 노력한다. 어떤 특정 공간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은 없지만, 어디에 가든 나만을 위한 공간은 만들려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 년의 대부분을 공연 투어로 보냈는데, 그 안에서도 항상 쉼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독서와 뜨개질, 수영, 걷기 등 나만의 메커니즘으로 투어의 여독을 풀어냈다. 이 네 가지 모두 명상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금세 균형감과 평온함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글 이미라 기자

discography
필립 글래스 오페라 ‘무서운 아이들’
크리스틴 아란드(소프라노)/필립 커틀리프(베이스바리톤)/할 카잘렛(테너)/발레리 코마(메조소프라노)/필립 글래스·넬슨 파제트·일리너 산드레스키(피아노)/캐런 카멘세크(지휘)/Orange Mountain OMM0019 (2CD)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1996 필립 글래스의 ‘무서운 아이들’ 세계 초연

2003 프라이부르크 시어터 음악감독 취임

2011 하노버 슈타츠오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취임

2020 파질 사이 ‘교향적 무곡’ 오스트리아 초연

하반기 연주 일정
카멘세크/인스부르크 티롤 심포니 오케스트라  11월 18~20일 티롤 홀(오스트리아)
카멘세크/몽펠리에 내셔널 오케스트라 11월 27일 오페라 베를리오즈(프랑스)

 

 

아누 탈리(1972~)는 에스토니아 음악원을 졸업하고 핀란드와 러시아에서 각각 요르마 파눌라와 일리야 무신을 사사했다. 24세 때 에스토니아-핀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오늘날 15개국 연주자들이 참여하는 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2013~2019년 미국 사라소타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지냈고 뮌헨 방송교향악단,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다.

아누 탈리1972~차이를 넘어 본질에 다가서다

최근 프란체스코 교황이 발표한 새 회칙에 논란이 일었다. ‘모든 형제’라는 단어로 세계인을 지칭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언어에 나타나는 성차별적 요소는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지휘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마에스트로’와 ‘마에스트라’도 하나의 예다. 남성형인 마에스트로가 ‘기본값’을 차지하거나, 남성 지휘자와 여성 지휘자를 구분해 불러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에 대한 고민이 하필, 아누 탈리(1972~)와의 첫 만남의 순간에 찾아왔다. 코리안심포니와의 공연(10·14, 예술의전당)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자가격리로 답답한 2주를 보냈을 그에게, ‘아누 탈리 지휘자님!’하고 힘차게 환영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막상 그의 앞에 서니 입이 재빨리 떨어지지 않았다. ‘마에스트로’와 ‘마에스트라’ 사이, 그 틈에 빠져버린 탓이다.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솔직히 털어놨다.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고. 아누 탈리는 답했다. “‘지휘자’의 타이틀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타이틀은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당신만 괜찮다면, 그냥 ‘아누!’라고 불러 달라!” 그는 성별의 구분은 물론, 오랜 세월 동안 공고해진 지휘자의 권위의식 따위도 가볍게 초월했다. 인간 아누 탈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순간이다.

이런 그의 태도는 많은 연주자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다. 1997년, 스물넷의 나이에 창단한 에스토니아-핀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현 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연주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핀란드 독립기념일 축하 공연을 위해 일회성으로 만든 단체였지만, 단원들은 그 후로도 아누 탈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시즌을 더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나선 것도 단원들이었다.

한국에 온 것을 정말 환영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무엇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나?

마지막으로 지휘를 한 게 올해 3월이다. 무려 6개월 동안 음악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실, 2주간의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했다. 보통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편이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혼자 오게 되어 아쉽지만,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한국의 악단과 연주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 새로운 악단과 관계를 맺는 당신의 방법이 궁금하다.

자가격리 기간에 한국의 인사, 식사 예절 등을 찾아봤다.(웃음) 본래 친화적인 성격이라 새로운 악단과 만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친근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일’을 시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진짜 지휘자의 역할은 리허설 중 드러난다. 리허설에 들어가는 당신의 자세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단원들은 모두 각 악기별 전문가다. 따라서 작품을 풀어나갈 길에 대해 이미 생각해두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지휘자로서 해야 하는 일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개선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큰 그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연주 상의 작은 실수는 언급하지 않아도 단원들이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고쳐 나간다.
아누 탈리는 코리안심포니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선보였다. 이틀 반에 걸친 리허설에 참관해 이 작품에 대한 아누 탈리의 ‘큰 그림’을 엿보았다. “명확한 그림과 비전을 가지고 있을수록 리허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던 그는 말과 제스처, 노래로 자기 뜻을 전달했다. 화려하고 울림이 긴소리보다는 실내악에서와 같은 또렷한 사운드를 주문했고, 화려한 행진의 악상이 최고조에 달하는 4악장에서는 그 ‘기쁨joy’의 감정이 처지지 않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마치 노래하는 듯한 제스처와 몸짓도 눈에 띄었는데, 이는 아누 탈리가 ‘합창의 나라’ 에스토니아에서 나고 자라며 지휘를 배웠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는 합창 문화의 전통이 깊다. 이것이 당신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나?

5년마다 개최되는 에스토니아의 합창 축제에서는 무려 3천 명의 성악가가 한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마을과 학교에도 합창 문화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합창단을 이끄는 경험을 자주 할 수 있었다. 다성부 합창 악보를 공부하며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일찍부터 지휘자의 세계를 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맞다. 그런데, 한 선생님이 그 ‘지휘자의 세계’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재능은 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에스토니아 음악원을 졸업한 후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계속 지휘 공부를 이어가며, 선생님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해 보였다.

각각 러시아와 핀란드를 대표하는 명지휘자이자 교육자인 일리야 무신, 요르마 파눌라를 사사했다. 특별한 인연의 시작이 궁금하다.

에스토니아에서 지휘를 배울 때, 개인적으로 러시아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학생이었던 199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가 러시아로부터 막 독립한 지라, 자유롭게 유학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요르마 파눌라(1930~)가 에스토니아 음악원에 방문해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그가 나를 발견해 핀란드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일리야 무신(1903~1999)이 핀란드를 방문해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웃음) 그때 무신과 인연을 맺고 러시아로 옮겨가 좋아하던 음악을 더 깊이 공부했다.

러시아와 핀란드의 지휘 교육이나 방식에 있어서 느낀 차이는 무엇이었나.

핀란드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자유의 나라’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성격이나 스타일을 결정하는 데 전적인 자유가 보장된다. 요르마 파눌라는 이를 바탕으로 지휘자의 역할에 대해 폭넓은 가르침을 주었다. 러시아에는 오랫동안 굳어져 내려온 전통이 있어, 매뉴얼화 된 지휘 테크닉을 훈련받을 수 있다. 무신이 직접 만든 매뉴얼 악보도 있었다! 이런 훈련은 지휘학도에게 꼭 필요하다. 오케스트라와 연습하면서 두 번 이상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손에 익힌 테크닉을 바탕으로 빠르게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아누 탈리가 처음 지휘 무대에 오른 것은 1996년이다. 좋아하던 라흐마니노프의 ‘더 벨(The Bells)’을 연주곡으로 선정했다. 기악 앙상블은 물론, 합창단과 성악 솔로이스트까지 등장하는 대규모의 작품이다. 연주에 참여한 대다수가 러시아 출신이었던 터라, 아누 탈리는 러시아에서 쌓은 내공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리허설과 공연을 이끌었다. 그런데 하나 잊은 게 있었다. 공연을 마친 후 언제, 어떻게 관객에게 인사하고, 누구와 악수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귀여운(?) 에피소드를 남긴 첫 무대경험 이후 20여 년이 흘렀다. 40대를 관통해가고 있는 지금, ‘음악’과 ‘지휘자’에 대한 아누 탈리의 철학은 깊고 성숙한 내음을 풍긴다.

에스토니아-핀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모체로 한 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공연은 그 철학의 집적체다. 북유럽 출신의 연주자들이 모여 창단된 노르딕 심포니는 곧 세계 각지의 음악가들을 포용하며 다국적 악단이 됐다. 이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개최해 성별·인종·출신 등에 상관없이 누구든 음악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특히, 의사가 참여하는 ‘다르게 태어나다(Born Different)’ 프로그램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그들의 특별한 재능(신체적 장애)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나누었다. “누구에게나 결함이나 약점이 있다. 진짜 음악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 아누 탈리가 말하는, 좋은 지휘자의 음악이다.

좋은 지휘자와 좋은 음악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악보에 있는 음표를 정해진 박자대로 연주한다고 해서 음악이 ‘리드미컬’해지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고려하고서라도, 자신의 인생에 비추어 내면의 소리를 풀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아직 지휘자를 그 ‘내면의 이야기’가 아닌, 외모와 성별 등으로 바라보려는 습관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듯 하다.

내 이름은 성별을 판단하기가 모호하다. 지휘 경력 초반에 몇몇 악단은 쉽게 내가 남성일 것이라 추측했고, 실제로 만났을 때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 세대가 비교적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은 맞다. 지금의 젊은 지휘자나 우리의 딸들은 더욱 평등한 기회의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후 세대의 지휘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솔직히 커리어 초반에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냥 손에 잡히는 것으로 입었지만.(웃음) 고민하거나 걱정해도 괜찮다. 이런 사소한 문제에도 ‘누구나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 때문에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의심이 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은 그것보다 훨씬 넓다.

역으로, 앞선 세대의 지휘자 중 꼭 기억하고 싶은 인물이 있나?

모든 여성 지휘자가 자신의 경력을 이어나가면서도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중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해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은 굉장한 위안이 된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글 쓰는 여성에게 필요한 건 돈(경제력)과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했다. 여성을 독립하게 하는 두 가지 요소라는 뜻일 거다. 이 밖에 여성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꿈을 위해 성취를 해나가는 여성은 모두 독립적이다. 당신을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은 당신의 ‘재능’과 ‘노력’이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discography
백조 비행
아누 탈리(지휘)/에스토니안-핀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Finlandia Records 8573 89876-2
액션 패션 일루젼
아누 탈리(지휘)/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Warner Classics 2564 61992-2
스트라타아누 탈리(지휘)/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ECM LC 02516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1 사라소타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

하반기 연주 일정

아누 탈리/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12월 17~19일 바네무이제 콘서트홀·에스토니아 콘서트홀·파르누 콘서트홀

 

시안 장(1973~)은 베이징 중앙 음악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마젤-빌라 콩쿠르 우승 후 뉴욕필 부지휘자를 역임했으며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오케스트라 신포니카, 네덜란드 오케스트라-앙상블 아카데미 등을 거쳐 현재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과 호주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를 맡고 있다.

시안 장1973~매일의 변화를 만들다

시안 장(1973~)의 잠재력을 처음 알아본 악단은 뉴욕 필이었다. 2002년 카네기홀, 마젤-빌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부상으로 로린 마젤의 멘토링 기회를 얻었다. 마젤이 뉴욕 필을 이끌 때였다. 시안 장을 눈여겨본 마젤은 해가 바뀌기도 전에 뉴욕 필의 보조지휘자로 영입했고, 2년 뒤 부지휘자로 승격시켰다. 악단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지휘 직급을 얻은 사건이었다.

뉴욕필이 보증한 그의 리더십과 음악성에 세계의 기대가 모였다. 시안 장은 리카르도 샤이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오케스트라 신포니카의 음악감독(2009~2016)으로 발탁됐고, BBC 웨일스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수석객원지휘자(2016~2019)로 임명됐다. 현재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과 호주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 등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시안 장은 남녀에게 평등한 사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 중국에서 자라며, 두 명의 여성 지휘자를 통해 음악을 배웠다. 그렇기에 ‘여성’ 지휘자란 자연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당연히 여겼던 평등의 가치가 도전에 직면한 시절도 있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더 넓은 사회에 막 발을 디뎠을 때다.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해 지휘로 전향했다.

지휘자로 섰던 첫 무대가 기억나는가.스무 살 때, 사사하던 교수님이 지휘하는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피아노 반주를 했다. 총 리허설을 하루 앞두고, 교수님이 내 기숙사를 찾아와 청천벽력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내일 리허설에서 네가 지휘를 해주었으면 한다.” 당시 나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본 경험도 없었다!

잘 해낼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텐데.

오케스트라 총보를 읽고 음악을 듣는 데 능숙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리허설 당일, 교수님은 프로덕션 매니저에게 전화해 “오늘 아파서 못가니 시안 장을 무대에 세우라”고 하셨다. 매니저는 불같이 화를 냈다. 경험도 없는 학생을 지휘 대타로 보낸 게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허설이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교수님은 다시 매니저에 전화해 진행 상황을 물었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오늘 오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답했다. 교수님은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3일간 이어지는 전 공연을 모두 내가 지휘했다.(웃음) 내 앞에 새로운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시안 장은 베이징 중앙음악원에서 두 명의 스승과 함께 수학했다. 첫 번째는 중국의 1대 여성 지휘자로 불리는 쩡 시야오잉(1929~). 20세기에 세계 곳곳의 오케스트라와 무대에 서고, 베이징 국립오페라단 음악감독을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스무 살의 시안 장을 처음 지휘대에 세운 인물은 우 링펀으로, 쩡 시야오잉의 제자다. 말하자면 시안 장은, 이 계보의 ‘손녀’다. 두 스승은 1960~70년대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러시아 지휘법의 전통을 중국에 들여온 것이 바로 이 세대다. 청음 훈련과 악보 분석, 초견 연주 등 지휘자가 되기 위한 훈련법을 중국에 정착시켰고 시안 장은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두 스승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휘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두 명의 스승 모두 여성이었다. 지휘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휘하는 여성’을 특별히 여겨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늘 접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음악계 내 만연한 성차별을 인지한 것은,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서다. 당시 미국에서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중국만큼 활발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두 스승에게 더욱 감사하다. 정체성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나이에 ‘여성=비주류’의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중국에서 여성 지휘자 양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을까?

중국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 이후, 공산주의 사회는 남녀 모두가 경제활동을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런 구조는 여성을 ‘집’이라는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누구나 자유롭게 교육을 받고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중국 출신의 많은 여성 지휘자는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있다. 해외에서 소수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질지라도, 그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아시아 출신 여성을 향한 차별이 없지 않았다는 뜻인가.

기억에 남을 정도의 차별적 발언을 들은 것은 두세 번 정도. 리허설 중 단원으로부터 음악과 전혀 관련되지 않은 질문 받았다. ‘프로’답지 못한 태도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발언이 차별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건 사실이다.

이런 차별에 어떻게 대응해왔나.

나는 여성이 그 누구와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맞닥뜨리는 상황을 잘 조절해나가면서 꾸준한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움직임들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다양한 인종, 성별, 출신 등을 포용하는 음악계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뉴욕 필도 그 측면에서 굉장히 열린 태도를 보인다.

최고경영자인 데버라 보르다(1949~)가 그런 환경을 만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한 여성 지휘자 1세대이기도 하다. 보르다가 LA 필의 경영진으로 활약했을 때는 ‘구스타보 두다멜 펠로우십’을 통해 최근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1986~)를 양성했다.

여성 지휘자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꼽자면.

2016년을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한다. 최소 3명의 여성이 세계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해다. 그중 한 명이 앞서 말한 미르가다.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CBSO)의 상임지휘자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수잔나 멜키(1969~)는 헬싱키 필 상임지휘자가 됐다. 같은 해에 나는 BBC 웨일스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수석객원지휘자와 뉴저지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됐다. 변화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걸 느낀 해였다.
이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세계 여러 오케스트라가 여성 지휘자를 더욱 자주 초청해 무대에 세웠다. 2018년에는 김은선(1980~)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미국의 마린 올솝(1956~)이 빈 방송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시안 장은 “이제 변화의 물꼬를 튼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세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의 성 비율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

중국의 전통무술인 쿵푸에서는 한 스승이 제자를 낳고 그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길러낸다. 그 흐름에 끊김이 없다. 브루크너와 말러는 선후배 사이였고, 말러는 자신의 후배인 쇤베르크와 관계를 쌓아가며 새 시대의 창작을 격려했다. 여성 지휘자 계보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100년 전쯤 주목할 만한 여성 지휘자가 반짝 등장했다가, 한참 뒤 또 다른 인물이 나오는 식이다.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해결하는데, 너무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비된다. 꾸준한 흐름이 형성돼야 한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는 차세대 지휘자가 있나?

2014년 런던 도나텔라 플릭 지휘 콩쿠르에서 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우승한 엘림 찬(1986~)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2015/16 시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활약하고, 2018/19 시즌에는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를 맡는 등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시안 장은 악보 공부에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비행기 기내”를 꼽았다. 미 대륙과 세계 각지를 자주 오가는 그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그간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디트로이트 심포니, LA 필 등 미주의 오케스트라는 물론 프랑스 라디오 필, 리옹 국립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등의 초청을 받아왔다. 다가오는 시즌에는 런던 심포니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바르샤바 필, MDR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 등과 연주할 예정이다.
세계 수많은 악단을 만나고 있다. 리허설을 이끌어나가는 본인만의 전략이 있나.

보통 이틀 반의 시간이 주어진다. 첫날에는 처음 만난 악단을 알아가야 한다. 그들의 음색과 특성을 파악한다. 그러면 하나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제 어떤 점을 개선해나가야 하는지 보인다. 둘째 날에는 그 지도를 바탕으로 음악을 조금씩 정제해 나간다. 제한된 시간 안에 최선의 결과물을 끌어내기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명확한 제스처를 통해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음악에 있어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게 중요하다.

좋은 지휘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강한 정신력도 요구된다. 하지만 좋은 리더와 좋은 지휘자는 다르다. 가끔은 음악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다. 모든 디테일을 손보려고 하는 경직된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결국 리더십에 선행하는 것은 ‘음악인의 자세’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곧 최선의 선택으로 이어진다.글 박찬미 기자 사진 IMG 아티스트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2~2005 뉴욕 필하모닉 보조/부지휘자

2008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상주홀에서 지휘

2009~2016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오케스트라 신포니카 음악감독

2016~2019 BBC 웨일스 내셔널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

하반기 연주 일정시안

장/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 로런 파간 외)11월 19일 멜버른 아트센터(호주)

 

메이 앤 첸(1973~)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지휘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했고, 미시간 대학에서 지휘과 박사를 졸업했다. 2002년 포틀랜드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시작한 그는 2005년 말코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다. 애틀랜타 심포니 부지휘자(2007~2009), 볼티모어 심포니 부지휘자(2009~2010), 멤피스 심포니 음악감독(2010~2011), 대만 내셔널 심포니 여름 축제 예술감독 겸 지휘자(2016)를 역임했고, 현재 시카고 신포니에타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메이 앤 첸1973~음악이 던진 메시지

메이 앤 첸(1973~)이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건 부모의 바람 때문이었다. 피아노로 시작해 바이올린을 전공하여 오케스트라 입단까지 했지만, 그의 열정은 지휘대에 닿아 있었다. 열 살 때 오케스트라 첫 리허설에서 본 지휘자의 모습이 늘 운명처럼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첸은 2011년부터 시카고 신포니에타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대만계 미국인 지휘자로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에서 태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해간 그는 여성 지휘자 최초로 말코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후 애틀랜타 심포니 부지휘자(2007~2009), 볼티모어 심포니 부지휘자(2009~2010), 멤피스 심포니 음악감독(2010~2011)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 2015년에는 ‘뮤지컬 아메리카’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30인’에 선정됐다.

2011년부터 시카고 신포니에타와 함께하고 있는 첸은 우리에게 낯선 음악을 찾아 꾸준히 소개하는 한편,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전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악단은 그가 보여준 그간의 활약에 박수를 보내며 지난 5월, 메이 앤 첸의 임기를 2024년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지휘자를 꿈꾸게 된 때는 언제였나?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건 부모님의 바람 때문이었다. 언니는 바이올린, 나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이후 언니가 미술을 선택하며 내가 그 몫까지 악기를 더 해야 했다. 지휘자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 건 열 살 때부터였다. 처음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본 포디엄 위의 지휘자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오로지 몸짓을 통해 거대한 소리를 만들어 내다니! 그날 집으로 달려와 부모님께 지휘자가 되고 싶다 이야기했다.

1980년대의 대만은 지휘를 배우기에 어떤 환경이었나?

선생님도 찾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교육 환경도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 마음먹었다. 지휘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전부였다. 그래서 내 바이올린 파트를 다 외운 후, 악보를 보는 대신 지휘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휘자를 꿈꾼 메이 앤 첸에게 첫 번째 멘토가 된 사람은 헨리 메이저(1918~2002)였다. 첸이 가오슝 시티 심포니 단원으로 활동할 당시 객원 지휘자로 초청된 그는 첸을 제2바이올린 부수석 자리에 앉혔고, 현악 4중주 음반과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총보를 주었다. 그가 음악을 만들어 가는 방식과 리허설 하는 모습만으로도 첸에겐 충분한 영감이 되었다. 미국으로의 길을 이끈 것은 벤저민 잰더(1939~)였다. 1989년,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대만을 찾은 그는 첸에게 장학금을 주며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자 제안했다.
부모님을 속여 미국행 티켓을 받아냈다고.(웃음) 

부모님은 내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은 달랐지만.(웃음) 미국에 온 이후에도 정말 좋은 멘토들을 만났다. 마린 알솝(1596~)은 여성 지휘자를 지원하는 ‘타키 알솝 펠로우십’을 통해 많은 기회를 주었고, 2005년 말코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쿠르트 잔덜링(1912~2011)은 1965년 콩쿠르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인 내게 우승을 쥐여주며 내가 감히 꿈꾸지 못했던 유럽 활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애틀랜타 심포니의 음악감독인 로버트 스파노(1961~)와 객원수석지휘자였던 도널드 러니클스(1954~)에게는 틀을 깨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항상 좋은 기회만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위기의 시간은 없었나?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 졸업을 앞두고 지휘자로서의 내 꿈을 계속 좇을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의 오랜 바람대로 대만에서 바이올린 선생님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주 40명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상대적으로 지휘를 공부할 시간은 줄었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지휘자로 무대에 오를 기회도 없어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공연장을 찾았다. 음악이 주는 힘이 필요했던 것 같다. 때마침 학교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고,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연주됐다. 이미 여러 차례 그 곡을 지휘해봤지만, 바순 솔로에 그토록 크게 감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다시 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인가?

그때 처음으로, 작곡가가 모든 음표를 통해 표현한 절망을 이해했고,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지휘한 수많은 음표보다 더 많은 거절 편지를 받으며 절망에 빠진 그때, 음악은 내게 확실한 깨달음을 주었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기회는 없지만, 언젠가 포디엄에 서게 된다면, 항상 그 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다시 한번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나는 또다시 음악가의 길을 걸을 것이다.
자신이 음악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음악이 그를 부른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메이 앤 첸은 더욱 단단해졌다. 콩쿠르 우승과 다양한 팰로우십을 통해 기회를 만들어 간 그는 지금까지 애틀랜타·볼티모어·시카고·시애틀·샌프란시스코·휴스턴 등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는 물론, 네덜란드 필, 말뫼 심포니, 덴마크 심포니, BBC 스코티시 심포니, 대만 내셔널 심포니 등을 객원 지휘하며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11년부터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시카고 신포니에타는 ‘이 지역의 가장 힙한 오케스트라’(‘시카고 트리뷴’)로 불린다.
시카고 신포니에타와 함께하며 내외부적으로 좋은 성과들을 보여줬다. 혁신적인 프로그램 구성으로 미국 작곡가·작가·출판인 협회(ASCAP)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무엇이 좋은 지휘자를 만든다고 보는가?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음악성을 보고 그를 존경하며 따른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를 ‘그들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은 엄청난 존경의 표시다.

리허설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소리를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두 번째는 오케스트라의 입장에 서서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가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음악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연주자들을 북돋는다. 오케스트라가 리허설을 즐길수록, 더 좋은 무대가 만들어진다.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나 작품이 있다면. 

바이올린을 공부할 당시엔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을 가장 좋아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음악, 특히 색채감 있는 작곡가와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좋다.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시카고 신포니에타와 작업하면서부터 생긴 것 같다. 지금까지 총 3장의 음반을 작업했는데, 모두 현대 작곡가의 곡을 담고 있다. 특히 시카고 신포니에타와 함께한 ‘프로젝트 W’는 미국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으로만 구성해 전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했다.
‘차별’을 지양하고 ‘평등’을 외치는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클래식 음악계에도 다양한 움직임이 일었다. 메이 앤 첸이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인 시카고 신포니에타는 올해 초 흑인 작곡가 조엘 톰슨(1988~)의 ‘Seven Last Words of the Unarmed’을 연주했다.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이어진 인종 차별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이 곡을 통해 음악으로 사회에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올해 초 ‘Seven Last Words of the Unarmed’를 연주했다. 시카고 신포니에타가의 비전과도 맞물리는 행보인가?

시카고 신포니에타는 설립 초기부터 유색 인종 음악가들과 함께하며 다양성을 선도해왔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몇 년 전 이 곡을 알게 된 후, 시기적절한 사회적 문제를 반영하는 이 작품을 연주하는 데는 시카고 신포니에타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을 지휘한 암스트롱은 시카고 신포니에타의 창립자 폴 프리먼(1936~2015)이 만든 ‘프리먼 지휘 펠로우십’의 멤버였다. 몇 년 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데뷔한 경력도 있었고, 마침 성악곡 지휘에 초점을 두고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이 곡을 잘 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간 대만의 음악계, 특히 여성 지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지휘 전공 학위가 생긴 이후 최근 수십 년 간 여성 지휘자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실제 프로 무대에서 서는 여성 지휘자의 수는 여전히 매우 낮다. 상임지휘자의 여성 비율도 현저히 낮고. 마린 알솝이 설립한 ‘타키 알솝 지휘 팰로우십’이나 댈러스 오페라의 ‘린다 앤 미치 하트 인스티튜트’ 등의 여성 지휘자 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꿈꿀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헬렌 콰(1940~2013)는 1970년대 뉴욕 필에서 번스타인의 조수로 일하며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첫 번째 아시아 여성 지휘자다. 1970년에 한국의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한 기록도 있다. 여성 지휘자, 특히 ‘동양계 여성 지휘자’로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젊은 지휘자에게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는 일은 어렵다.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경험이 없는 이들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여성은 지휘계에서 평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더 많은 악단에서 기꺼이 여성 지휘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음악은 세계 공용어로 성별과 나이, 문화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뛰어넘는다. 성별의 차이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바꾸지 않는다. 글 이미라 기자

discography
프로젝트 W
메이 앤 첸(지휘)/시카고 신포니에타 *전곡 세계 최초 녹음Cedille Records CDR 90000 185
ROCO: Visions Take Flight
메이 앤 첸(지휘)/리버 옥스 체임버 오케스트라Innova Recordings 1 016
딜라이트 & 댄스
메이 앤 첸(지휘)/시카고 신포니에타/할렘 콰르텟Cedille Records CDR 90000 141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5 말코 콩쿠르 우승

2010 멤피스 심포니 음악감독 취임

2019 그라츠 그로제스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 선정 , 리버 옥스 체임버 오케스트라 ‘예술 파트너’ 선정

하반기 연주 일정

첸/그라츠 그로제스 오케스트라(협연 크리스티나 밀러)11월 16·17일 슈테파니엔 홀(오스트리아)
첸/오슬로 필하모닉·합창단 ‘크리스마스 콘서트’12월 17·18일 오슬로 콘서트 홀(노르웨이)

 

사라 힉스는 하버드대에서 작곡을,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2009년부터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활동하며 다채로운 기획의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도쿄 필하모닉, 덴마크 국립교향악단 등을 객원 지휘했으며 20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초청으로 세계 경제포럼의 개막 무대를 꾸몄다.

사라 힉스더욱 단단한 내가 되다

슈만이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연주보다 작곡과 평론 분야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손가락 힘을 강화하기 위해 억지로 기계를 쓰다가 다쳤다는 설도 있고, 과도한 연습으로 인해 손 전체에 만성 장애가 발생한 것이라는 설이 주목받기도 했다.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슈만이 피아노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슈만에 버금가는 치열함을 보였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지휘자 사라 힉스다.

그가 처음 피아노를 만져본 건 다섯 살 때 일이다. 어린 나이에도 음악에 진지하게 몰입한 사라 힉스는 여러 콩쿠르에서 수상 기록을 세우고 성장기를 보낸 하와이의 호놀룰루 심포니와 협연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10대 후반, 피아니스트로서의 취약점을 발견했다. 손이 옥타브도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는 것. 이에 질 수 없었던 그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반복 작업에 의한 스트레스성 장애’였다. 결국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다. 며칠 내내 방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에게 아버지가 슬며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만 울렴. 그래도 스틱은 잡을 수 있잖니.”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열일곱의 사라 힉스가 지휘자의 꿈을 품은 그날, 아마 다음에 맞닥뜨릴 장애물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휘자로서 초반 커리어를 쌓던 그는 ‘아시아계 여성’을 향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직면해야 했다. 외모와 옷차림에 대한 지적부터 ‘남편이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을 허락해주느냐’ ‘아시아 사람은 표현력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질문들까지…. 그러나 사라 힉스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이미 능한 인물이었다. 이내 자신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을 깨고, 클래식 음악은 물론 영화음악, 팝 음악 등을 다루는 전문 지휘자로 우뚝 섰다.
팝 음악이나 영화음악 등을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개성 있는 커리어를 쌓아왔다. 이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늘 또 다른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둔다. 다른 음악으로 내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었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관중에게 관현악을 소개할 방법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주로 다루는 게 지휘자의 ‘정도(正道)’로 여겨지곤 한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게 두렵지는 않았나.

순간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2006년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벤 폴즈의 음악을 지휘한 적이 있는데, 록과 클래식 음악을 한 데 어우르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처음 깨달았다. 그때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지휘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 고민의 시간에 보상이라도 받듯, 굵직한 이름의 아티스트들과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 나가고 있다.

2011년에는 세계적인 록그룹 스팅과 두 달에 걸쳐 유럽 순회공연을 했다. 래퍼 데사(DESSA)와 함께한 공연의 실황을 담은 음반(‘Sound the Bells: Recorded Live at Orchestra Hall’/Doomtree Records)이 지난해 발매되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동안 셰프가 요리를 하는 콘서트를 여는 등 전혀 음악적이지 않은 요소를 아우르기도 했다.

영화음악과 관련한 공연 이력들도 화려한데.

2015년, 도쿄 필하모닉을 포함한 일본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영화 ‘판타지아’(1940, 월트디즈니)의 음악을 연주하는 순회공연을 가졌다. 2018년 덴마크 국립교향악단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을 연주했었는데 실황 영상이 유튜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총합 7천만 이상의 조회 수를 자랑한다! 지난해 LA 할리우드볼에서 영화 ‘코코’(2017, 픽사) 음악을 연주하는 대규모 프로덕션도 맡았다. 당시 공연의 실황 영상은 OTT(Over The Top)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라 힉스의 개성 있는 삶의 궤적을 보던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통 클래식 음악은?’ 피아노와 비올라 모두 수준급으로 연주했던 사라 힉스는 하버드대 작곡 전공을 상위 10% 성적으로 졸업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 공부를 이어갔다. 그 어떤 음악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본기’를 다진 시간이다.

그 탄탄한 기본기를 알아본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는 2009년 사라 힉스를 수석지휘자로 영입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이외에도 필라델피아·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시카고·샌프란시스코 심포니, LA 필하모닉 등의 미국 단체들부터 덴마크 국립교향악단, 체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등 세계 각지의 악단들까지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첫 전문 지휘자로서 섰던 무대를 기억하는가?

커티스 음악원을 다니며 학교 근처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초반 경력을 쌓았다.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첫 순간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워싱턴DC에서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자기 소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휘자의 제스처에 빠르게 반응하는 앙상블과 작업하는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좋은 오케스트라는 젊은 지휘자에게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악단에 둘러싸여 내 세상에 눈을 떴다.

지휘자로 성장하며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커티스 음악원에서 사사한 오토 베르너 뮬러(1926~2016)는 내게 정말 큰 존재였다. 실제로 키가 2미터나 되는 인물이었다.(웃음) 음악 연구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굉장히 치밀했다. 악보의 모든 디테일을 완전히 이해하고 작곡가의 스타일을 간파하는 것을 중요히 여겼다. 이런 훈련을 거듭한 끝에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효율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교육과 무대 경험을 통해 ‘지휘자’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이 세워졌을 것 같은데.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세세히, 동시에 포괄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능숙한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적 아이디어를 오케스트라에 명확하고 힘 있게 전달해야 한다. 여기에 지휘 제스처와 언어 모두 적극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오케스트라와 소통하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단원들을 처음 만나면 우선 연주할 작품에 관해 개략적으로 논의한다. 그리고 리허설 계획에 대해 전달해, 단원들이 매일 어떤 일을 할 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까지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음악에 관해서는 우선 전체 악장이나 곡을 연주해본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물꼬를 트는 과정이다. 오케스트라는 내가 어떤 움직임을 만들고자 하는지, 나는 오케스트라가 어떤 특징의 사운드를 지니고 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든 디테일에 작업을 지시하는 것은 피한다.

수석지휘자로 약 10년째 함께하고 있는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에서는 음악과 관객을 잇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마이크로 펀딩 프로젝트다. 소수가 거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적은 금액을 모으는 것이 핵심이다. 이미 전 세계에서 활용되고 있던 마이크로 펀딩에 관해 조사하면서, 이를 클래식 음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새 작품을 위촉하는 것이다. 400여 명의 참여로 작곡가 저드 그린스타인의 대규모 신작을 초연했다.

개인이 혼자 성취할 수 없는 거대한 목표도, 다수가 모이면 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 힉스는 “내 모든 활동은 결국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늘 단원들과 효과적으로 호흡할 방법을 고민하고, 오케스트라와 관중을 연결하기 위해 다채로운 테마의 공연을 기획한다. 소셜 미디어는 그렇게 빚어진 공연과 관중을 잇는 교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소통을 향한 그의 열린 마음에도 생채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다.
지휘대 위에 서 있는 당신을, 음악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려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지휘대 위로 걸어 들어가는 나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전히 내 옷차림, 특히 하이힐을 신는 것에 관해 언급하는 이들이 있다.

팝 음악과 영화음악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여성 지휘자의 입지가 어떠한지 궁금하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지휘하는 분야보다 확실히 다른 여성 지휘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드물다. 최소한 미국 내에서는 팝 음악 연주 분야가 남성 지휘자의 세계로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연주를 위해 일본도 종종 방문하고 있다. 여성 지휘자를 바라보는 미국과 일본의 시선에 차이가 있나?

일본의 악단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데에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3~4년 전 일본에는 영화음악 연주 사례가 많지 않았고, 나는 이 분야 전문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차별의 상황에 놓일 때마다 당신을 위로해준 인물이 있다면.

나디아 불랑제(1887~1979). 1938년 보스턴 심포니 역사상 최초로 지휘대에 선 여성 지휘자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당시 공연을 마친 소회를 “50년이 조금 넘게 여성으로 살아왔는데, 이제야 첫 성취의 기쁨을 맛보았다”라고 적었다. 당시 미국 여성에겐 투표권조차 없었다. 그 옛날에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 있었다는 걸 되새긴다. 최근 지휘 분야에서 여성의 활약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한 명으로서, 이런 변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글 박찬미 기자

discography
모리코네 듀엘: 가장 위험한 콘서트
사라 힉스(지휘)/덴마크 국립교향악단 Euroarts 2064888
사운드 더 벨스
사라 힉스(지휘)/미네소타 오케스트라(협연 데사)Doomtree Records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9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라이브홀 수석지휘자

 

성시연(1975~)은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롤프 로이터를, 스톡홀름 왕립음악원에서 요르마 파눌라를 사사했다. 게오르크 숄티 지휘 콩쿠르(2006)에서 우승하고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2007)에서 1위 없는 2위에 올랐다. 보스턴 심포니에서 제임스 러바인의 부지휘자(2007~2010)로, 서울시향에서 정명훈의 부지휘자(2009~2013)로 활동했으며,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2014~2017)를 역임했다.

성시연1975~파격이었고 파급이었다

2014년, 경기필 취임을 앞두고 ‘국내 국공립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류의 수식어가 기사마다 제목을 장식했다.

정명훈이 이끌던 서울시향의 부지휘자(2009~ 2013)를 거쳐 경기필의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성시연은 2017년까지 악단을 이끌며 ‘말’보다는 ‘음악’으로 대화했다. 4관 편성을 갖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화력을 내뿜기보다 기본에 충실하며 내실을 다졌다. 원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행으로 옮기던 시간이었다.

국내에서 성시연 이전에 여성 지휘자의 무대는 간헐적으로 있었다. 아주 느리고, 조금씩 있는 그들의 무대를 통해 사람들은 국내에도 여성 지휘자들의 활동이 있음을 알곤 했다. 그러던 중 성시연의 등장은 그 분위기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여성 지휘자’라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설득당하고 감동해 돌아갔다. 경기필의 변화뿐만 아니라 각지의 교향악단은 외국 유학 중인 여성 지휘자를 호출하며 새 얼굴과 새 해석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성시연의 ‘존재감’이 그 물꼬를 텄다. 그의 존재는 보수적인 지휘계의 파격이었고, 새로운 파급이었다.

많은 지휘자의 첫 시작이 그러하듯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시작했다. 취리히 음대와 베를린 예술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피아노는 한 악기로 다성부를 다루는 ‘작은 오케스트라’다. 피아니스트는 포괄적으로 악보를 본다. 다양한 악기와의 협주를 통해 음악적 교감을 폭넓게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장점이 지휘를 위한 밑바탕이 된다.

원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지휘를 시작한 이유도 피아노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다 지휘자로 선회한 데는 결정적 계기가 작용했을 텐데.

확신에 차서 지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2년 정도 공부하면서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정하려고 했다. 첫 학기, 첫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 연주에 도전했다. 업비트를 주고 첫마디를 지휘하자, 응집된 오케스트라 소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가 이 길을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성시연은 2001년 지휘를 시작해 2006년에 열린 제3회 게오르크 숄티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결선에서는 차이콥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을 연주했다. 그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이듬해. 미국 주요 악단인 보스턴 심포니의 137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다. 세계 유명 지휘자의 리허설과 연주를 원 없이 보며 현장을 익혔고, 보스턴 심포니의 부지휘자라는 보증 수표를 얻었다. 지휘에 몸담고 얼마 되지 않아 이뤄낸 성과였다. 그럼에도 성시연은 “내 음악 인생에 중대한 사건은 아직 없었다”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정식 지휘자로 오른 첫 무대가 기억나는가?

2007년 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에서 뮤지엄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 게오르크 숄티 지휘 콩쿠르 우승으로 인연이 닿아 서게 된 큰 무대였다.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아, 당시 진땀을 흘리면서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아직 생생하다.

홀로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대면하면 무척 긴장될 것 같다. 이제는 현장에서 긴장을 푸는 방법을 찾았나. 

첫인사는 아주 짧게 하는 편이다. 처음 주어진 리허설 시간 동안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가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향후 리허설 방법과 시간을 계획하기 위해서다. 가능하면 1악장, 적어도 제시부까지는 한 번에 연주하려고 한다. 그래야 오케스트라도 지휘자의 스타일을 알 수 있다. ‘지휘’로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다.

보스턴 심포니에서 부지휘자로 보낸 3년은 경험을 쌓는 시간이었겠다.

부지휘자는 연간 2회의 연주 외에도, 음악감독이나 객원 지휘자가 예기치 않게 무대에 설 수 없을 때 즉시 대신해야 한다. 엄청난 예습은 물론, 담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세계 유명 지휘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어느 정도까지는 ‘보스턴 심포니의 부지휘자’라는 보증 수표가 따르니 경력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됐다. 그 후에 지휘자로서 홀로서기라는 숙제는 스스로 풀어야 했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지휘자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한다. 좋은 귀와 음악적 재능, 단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음악적 표현력과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고 진심이 담긴 네트워킹은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된다. 과감하게 관계 쌓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 지휘자라면, 음악에 집중할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겠지.

돌이켜봤을 때 자신의 지휘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처음 지휘를 시작했을 땐 감성적인 긴 호흡의 음악을 중시했다. 반면 지금은 음표 하나, 리듬 하나, 다이내믹 하나, 음악을 만드는 모든 요소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의 스승이기도 한 롤프 로이터 교수님을 사사한 블라디미르 유롭스키(1972~/런던 필 수석지휘자)가 “10년이 지나도 학창 시절 스승님의 가르침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여전히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현장에서 내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도해 보지만, 결국 그때의 말씀으로 돌아간다.
어느덧 그가 지휘봉을 잡은 지도 20년을 향해간다. 성시연은 지휘에 대해 알아갈수록, 어떤 지휘자가 ‘좋은 지휘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음악을 잘하는 지휘자, 업계에서 성공한 지휘자를 꼽으라면 차라리 쉽겠는데 좋은 지휘자는 막연하다. 그만큼 지휘자에게는 요구되는 역할도, 충족시켜야 할 기대도 여러 가지 따른다. 때론 “예쁘게 꾸미고 연주하면 좋겠다”는 기대까지도.
프로필 사진 속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지만, 관객에겐 머리를 질끈 묶거나 단발을 한 성시연의 모습이 익숙하다.

연주 중에 머리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 묶곤 한다. 그런데 “머리를 예쁘게 하고 연주하면 좋겠다”는 조언이나 “연주복으로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정작 나는 내 연주 영상을 보면 부족한 지휘가 민망해서 연주복이나 머리 스타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간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다. 국가별로 여성 지휘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느낀 적이 있는가.

국가별 차이를 꼽긴 어렵다. 하지만 내가 막 활동을 시작한 십여 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지휘자에게 기회를 주고, 상임지휘자로 기용하고 있다. 그만큼 성별을 떠나 지휘 실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됐다.

후배들의 롤모델이다. 성시연이 존경하는 여성 음악가가 궁금하다.

여성 지휘자는 1970년대에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처음 올랐다. 그가 바로 세라 콜드웰(1924~2006)이다. 오케스트라에 여성 연주자조차 드물던 시절에 그는 보스턴에서 직접 오페라 제작사를 차려 지휘와 연출을 겸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다. 힘든 길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이뤄낸 그의 의지와 열정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수사로 ‘여성적’ ‘남성적’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흔하게 쓰인다.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대개 아름답고 세밀한 것은 ‘여성적’, 강렬하고 파워풀한 것은 ‘남성적’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사람은 ‘남성적 남성’ ‘여성적 남성’ ‘여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푸르트뱅글러(1886~1954)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물론 인간의 내면은 훨씬 다양한 정서가 얽혀있으리라. 그 복잡한 사람의 마음이 음악이 주는 감동으로 열린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단순히 여성적이어서, 남성적이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 내면이 다양하듯, 음악도 마찬가지다. 어떤 구분에도 국한되지 않고 음악을 듣게 된다면 좋겠다.

올해 코로나19로 클래식 음악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비대면 온라인 공연이 각광받고 있는데, 앞으로를 전망한다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오히려 기자와 공연 기획자에게 묻고 싶다. 공연할 수 없는 이 시기를 예술가들이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금전적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까지 위협받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창의적인 생각의 전환이 절실하다. 글 박서정 기자

discography
파데레프스키 & 쇼팽 피아노 협주곡
클레어 황치(피아노)/성시연(지휘)/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닉 Berlin Classics B07T4RYMLT
말러 교향곡 5번
성시연(지휘)/경기필Decca DD41140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1 롤프 로이터(1926~2007) 사사

2006 게오르크 숄티 지휘 콩쿠르 우승

2007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 취임

2014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취임

 

 

알론드라 데 라 파라(1980~)는 뉴욕에서 태어나 부모의 고향인 멕시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멕시코 시티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다. 호주 퀸즐랜드 심포니 음악감독을 역임(2017~2019)했고, 2019/20 시즌 빈 방송교향악단을 이끌며 무지크페라인에 데뷔했다. 라틴 아메리카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2004년 아메리카 오케스트라(POA)를 창단했다. 2020년 14개국에서 모인 예술가로 구성된 임파서블 오케스트라의 온라인 연주회를 기획했다.

알론드라 데 라 파라1980~나의 음악, 나의 영혼

알론드라 데 라 파라(1980~)가 리드미컬한 곡을 지휘하는 모습은 지휘라기보다 흥겨운 춤사위에 가깝다. 흘러가는 마디마다 변해가는 풍부한 표정만 봐도 곡의 정서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지휘대에서 느껴지는 낙천적인 정열, 어쩐지 느긋하고 낭만적인 태도에서 그가 멕시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한다.

미국 뉴욕 태생의 데 라 파라는 부모님의 고향 멕시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클래식 음악을 위해 다시 찾은 뉴욕의 맨해튼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그러나 자신의 멕시코 영혼을 숨기지 않았고, 일찍부터 개성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이는 2010년 발매한 ‘나의 멕시코 영혼(Mi Alma Mexicana)’(Sony Classical)에서 잘 드러난다.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음반으로 멕시코 작곡가의 작품으로만 구성됐다. 함께 연주한 아메리카 오케스트라는 그가 23세 때인 2004년에 창단한 것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젊은 음악인을 위해 만든 단체였다. 음반은 미국 빌보드 클래식 음악 차트 상위 10위권에 올랐고, 멕시코에서 클래식 음반 최초로 백만 장이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 그의 나이는 고작 30세 때였다.

신예의 등장은 늘 갑작스럽게 여겨지지만, 데 라 파라는 19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클래식 음악의 산실인 콜론 극장에서 데뷔한 이래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왔다. 2005년부터 뉴욕의 젊은 음악가로 구성된 뉴 암스테르담 심포니와 모교인 맨해튼 음대 심포니에서 객원 및 커버 담당 지휘자로 활동했고, 2004년 직접 창단한 아메리카 오케스트라에서 여러 지휘 현장을 경험했다. 201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며,  호주 교향악단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장으로 주목받았다.
당신이 주축이 되어 만든 프로젝트성 오케스트라 ‘임파서블 오케스트라’가 최근 온라인 무대에서 데뷔했다. 무엇을 위한 단체이며 어떤 활동을 하는가?

나의 나라 멕시코에는 불행히도 많은 수의 여성과 어린이가 고통받는다. 코로나는 취약계층인 이들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보건이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이들의 엄마이자,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음악가들이 이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멕시코의 여성과 어린이를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마련해 동료 예술가들을 초대했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28명의 음악가와 안무가가 모였다.

그 초대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단원과 독주자가 화답했다. 막심 벤게로프·가이 브라운슈타인(바이올린), 아미하이 그로츠(비올라), 앨리사 와이러스타인(첼로), 에마뉘엘 파위(플루트), 알브레흐트 마이어(오보에), 파키토 드 리베라(클라리넷), 엘리사 카릴로 카브레라(무용) 등이 참여했고, 당신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우리는 비대면으로 온라인을 통해 연주 영상을 만들었다. 프로젝트를 통해 발생한 수익 전액은 멕시코 여성을 위한 비영리단체 씨앗 자금(Fondo Semillas)과 세이브 더 칠드런 멕시코(Save the Children)에 기부하고 있다. 코로나 취약계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임파서블 오케스트라의 영상은 한 달 만에 50만 조회수를 넘었고, 27만5천 유로(한화 약 3억7천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프로젝트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준 모두에게 감사하다. 음악이 갖는 힘인 것 같다. 인종이나 국적 같은 차이에도 음악은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이라는 세계 공용어를 만들어낸다.
임파서블 오케스트라는 첫 곡으로 멕시코 출신의 아르투로 마르케스(1950~)가 작곡한 ‘단손’ 2번을 선택했다. 단손(Danzon)은 쿠바 음악의 한 장르로, 스페인 춤곡에 아프리카적인 리듬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1994년 초연된 ‘단손’ 2번은 마르케스가 작곡한 9곡의 단손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데 라 파라의 음반 ‘나의 멕시코 영혼(Mi Alma Mexicana)’에도 이 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작곡가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추천 목록 가장 앞에 아르투로 마르케스의 이름이 있었다. 그밖에 현존하는 동시대 작곡가 몇몇을 더 소개한다면.

브라질 태생의 리카르도 카스트로(1964~), 멕시코의 엔리코 샤펠라(1974~)와 가브리엘라 오르티즈(1964~), 마리오 라비스타(1943~) 등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멕시코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음악가이자 한 사람으로서 나의 일부를 구성한다. 멕시코 사람들은 리드미컬한 음악에 익숙하다. 타고난 리듬 감각은 내가 어떤 작품을 지휘하든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의 음악이 자랑스럽다.

직접 창립한 아메리카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나의 멕시코 영혼(Mi Alma Mexicana)’ 음반은 백만 장 넘게 팔리며 멕시코 음악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그 덕에 멕시코의 공식 문화 대사도 맡았다. 

그렇다고 멕시코,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지휘하기 좋아하는 장르도 특별히 없다. 나는 내가 지휘하는 모든 작품을 즐긴다. 아메리카 오케스트라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작곡가와 연주자의 활동을 고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우리는 거의 11년 동안 함께하면서, 정말 굉장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현재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새빨간 립스틱에 살갗이 비치는 시스루 의상, 데 라 파라의 화려한 외모는 이제 하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성 위주였던 지휘계에서 그의 ‘여성성’은 때론 약점이 되기도 했을 터. 그는 “내 성별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 항상 어려움은 있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2019년 그는 매년 1월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모차르트 주간 페스티벌에 모차르트의 ‘이집트 왕, 타모스’ 새 프로덕션에 초청받았다. 카메라타 잘츠부르크는 물론 실험적 극단인 ‘라 푸라 델 바우스’와 함께 작업했다. 성공적인 연주로 인해 현재 거주하는 독일에서 베를린 슈타츠오퍼와의 협연을 비롯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기반이 됐다. 지난 5월에는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인 IMG아티스트가 그를 영입하기도 했다.
현재 두 아이의 엄마다. 많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을 고민한다. 어쩌면 당신의 행보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2015년 퀸즐랜드 심포니 취임 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지휘할 때, 첫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다. 본래 강렬했던 말러의 음악이 더욱 강렬하게 와닿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영적인 경험이었다.

음악에 대한 사랑 덕에 지휘자로 활동하며 부딪힌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어렸을 때 음악을 들으며, 매일매일 음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지휘는 모든 방면에서 나를 음악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지휘에 대한 모든 것은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나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케네스 키슬러(1953~)로부터 배웠다. 처음으로 전문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의 주신 분은 샤를 뒤투아(1936~)였다. 1999년 콜론 극장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악보를 처음 펼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공연을 준비하는가.

악보의 무엇을 어떻게 연주할지 원점에서 생각한다. ‘무엇’은 이미 악보에 정해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는 리허설에서 정하는 것이다. 이때 오케스트라와의 궁합은 연주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모든 것은 항상 사람 간의 관계 달려 있다.

온라인 공연이 주를 이루는 지금 시대에는 ‘사람’보다 ‘기술’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분명 기술은 예술을 더 많은 관객에게 도달하게 한다. 멀리서도 관객은 유럽 오케스트라의 온라인 공연에 접속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인간적’으로도 연결되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집단이다. 악기를 다루는 손, 숨소리 하나, 성공적인 연주를 위한 우리의 상상은 모두 타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 콘서트홀을 찾게 될 것이다.

온라인 공연이나 연주 영상에 익숙한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지휘하는 영상을 거의 보지 않는다. 자꾸 모자란 점만 보여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연주하는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글 박서정 기자

discography
‘나의 멕시코 영혼(Mi Alma Mexicana)’
알론드라 데 라 파라(지휘)/아메리카 오케스트라(Philharmonic Orchestra Of The Americas)Sony Classical 88697755552 (2CD)
지우베르투 멘지스 90
알론드라 데 라 파라(지휘)/상파울루 심포니 오케스트라디지털 발매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17 퀸즐랜드 심포니 음악감독 취임

하반기 연주 일정

알론드라 데 라 파라/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오케스트라(협연 줄리안 프레가 디앙)  11월 12~15일 밀라노 극장
알론드라 데 라 파라/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협연 엘리자베트 브라우스)12월 6·7일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 베토벤 홀

 

 

시언 에드워즈(1959~)는 영국 로열 노던 음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러시아의 저명한 지휘자인 일리야 무신의 제자이다. 1984년 리즈 지휘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했다. 1986년 스코틀랜드 오페라에서 쿠르트 바일(1900~1950)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를 지휘하며 데뷔했다.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음악감독(1993~1994)으로 근무했고, 런던의 왕립음악원(2013~)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언 에드워즈1959~조금씩 변하는 것만으로도

‘차이’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 될 수 있다. 시언 에드워즈(1959~)는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구별’일지 늘 궁금했다. 간단하게 ‘남성 지휘자’ ‘여성 지휘자’로 나누는 것일 텐데, 이 구분은 늘 복잡하고 때로는 불편했다. 그저 지휘는 남녀 모두에게 까다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8년, 그는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작곡가 마이클 티펫(1905~1998)의 오페라 ‘매듭 정원(The Knot Garden)’을 지휘했다. 이는 20세기 영국 여성사의 상징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선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선 지휘자 제인 글러버(1949~) 이후 가장 주목받는 여성 지휘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무명 시절 에드워즈에게도 굴욕(?)은 있었다.

한 번은 미국에서의 일이다. ‘Sian’이라는 발음이 미국의 남자 이름인 ‘Sean’과 혼동된 모양이다. 미국의 한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을 때, 단원들은 이름만 듣고 남성 지휘자를 기대했다. 첫 리허설, 포디엄에 선 시언 에드워즈를 향해 한 단원은 “지휘자는 언제 오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작은 사건들이 모여 포디엄 위 여성 경험이 축적된 것”이라고 한다. 역사에 기록할만한 큰 사건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지금에 이르렀다.
1988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 지휘를 했을 때,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텐데. 

큰 사건이긴 했다. 내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오른 첫 번째 여성 지휘자가 되었을 때, 다른 여성들에게는 ‘드디어 문이 열렸다’라는 의미였을 테다.

영국의 여성 지휘 역사를 설명해 줄 수 있나?

영국에서 그 문은 제인 글러버에 의해 열렸다. 그는 처음으로 엄청난 일들을 해낸 사람이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첫 지휘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여성에게 존재하는 장벽은 무엇일까?

여성은 가정을 꾸리면 아이를 돌봐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좀 더 확실히 준비하려면 중단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현재 남쪽의 영국 시골에서 멋진 풍경을 보며 공부하고 있지만, 집안일도 많이 해야만 한다.
어린 시절, 시언 에드워즈는 호른을 부는 소녀였다. 10대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연주회를 기획하곤 했다. 단지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지휘는 그 일부분이었다. 호른을 불던 소녀가 오페라에 관심을 돌린 건 대학 입학 후, 친구의 추천으로 오페라를 관람하게 되면서다. 휴먼 드라마를 풀어내는 오페라의 힘이 놀라웠고, 그는 비로소 관현악 중심의 삶에서 벗어났다.

로열 노던 음대(Royal Northern College of Music)에서 공부를 마친 에드워즈는 이후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만난 일리야 무신(1903~1999)과 함께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영국에서 공부한 후 러시아 유학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한데.

1991년 여름, 네메 예르비(1937~)가 개최한 여름 지휘 코스에 합격했다. 당시 겨우 21세였다. 예르비의 레슨 난이도가 높다는 건 잘 알았지만, 마치 누군가 나에게 불을 지핀 느낌이었다. 그는 나에게 러시아에 갈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로 발걸음을 옮긴 결정적 이유는 내가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지휘 방식을 찾기 위해서였다.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늘 일리야 무신을 꼽더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일리야 무신을 만났다. 당시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도 그의 제자였다. 무신은 따뜻하고 겸손한 성품이었는데, 수업 시간에는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테크닉과 음악을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이미 그는 50년간 교편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학생들을 잘 이해했고 자연스러운 음악 교육 방법을 개발한 상태여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첫 지휘 경험이 아직도 강렬하다고.

1984년 가을, 비 오는 수요일이었다. 서튼 콜드필드 타운 홀에서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CBSO)와 함께 모차르트 교향곡 40·41번, 오보에 협주곡을 연주했다. 당시 일리야 무신이 없었다면 두 개의 모차르트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러시아 유학 경험이 러시아 레퍼토리를 사랑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나?

러시아로 유학 가기 전부터 나는 러시아 음악에 빠져 있었다. 지금도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작품을 지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리야 무신의 가르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음악적 생각을 오케스트라에서 자신감 있고 또렷하게 표현하는 것. 이는 다른 모든 것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무신 외에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사이먼 래틀은 그와 인연이 깊은 지휘자이다. 그는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번스타인이나 카라얀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기에 래틀은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깨워주었고, 하이팅크는 포디엄에서의 독재는 권위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유학을 마친 후, 에드워즈는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았다. 1984년 리즈 지휘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1986년 스코틀랜드 오페라에서 쿠르트 바일(1900~1950)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를 지휘하며 데뷔했다. 이듬해 ‘라 트라비아타’로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후 1993~1994년에는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근무했다. 그는 2013년부터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좋은 지휘자’는 무엇일까?

학생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는지 궁금하다.지휘자들의 흥미로운 점은 모두가 같지 않다는 것. 지휘자마다 실력과 개성이 다르고, 오케스트라마다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휘자를 성공하게 하는 요인을 딱 꼬집긴 어렵다. 하지만 지휘자의 밑바탕에는 항상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학생 시절과 비교했을 때,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feminine)에 불쾌함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하는, 놀랍도록 깨어있는 학생들…. 나는 평생 이런 용어를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글 장혜선 기자

discography
차이콥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외
시언 에드워즈(지휘)/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EMI 7632622
‘블론드 에크베르트’
시언 에드워즈(지휘)/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합창단 외Collins Classics 14612
프로코피예프 ‘피터와 늑대’ 외
시언 에드워즈(지휘)/런던 필하모닉EMI 8484345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1988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휘(마이클 티펫 ‘매듭 정원’)

 

 

로랑스 에퀼베(1962~)는 파리·빈·런던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에릭 에릭슨·요르마 파눌라·데니즈 햄·콜린 메터스를 사사했다. 합창음악과 당대연주 전문 지휘자다. 1991년 프랑스에서 40여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 ‘악상투스’를 창단해 음악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2012년부터 파리 센 강에 위치한 문화센터 ‘라 센 무지칼레’를 상주홀로 삼는 시대악기 연주단체 인슐라 오케스트라를 설립해 이끌고 있다.

로랑스 에퀼베1962~시대를 가로지르며

시대악기부터 목소리까지 그의 지휘봉 끝에서 움직인다. 로랑스 에퀼베(1962~)는 직접 창단한 인슐라 오케스트라와 악상투스 실내 합창단을 중심으로 프랑스 음악계에서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있다.

1991년부터 함께한 악상투스 실내합창단은 하이든의 미사 음악부터 프랑스 작곡가 파스칼 뒤사팽(1955~)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한다. 파리국립음악원(CRR)과 협력해 교육·전승에도 힘쓴다. 시대악기로 구성된 인슐라 오케스트라는 2012년 ‘라 센 무지칼레’라는 이름의 공연장 상주단체로 설립됐다. 당대연주라는 일관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극장을 찾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단체와 혁신적인 무대를 만든다.

그의 활발한 행보는 많은 여성 음악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만하다. 프랑스의 작가·작곡가 단체인 SACD(Société des Auteurs et Compositeurs Dramatiques)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2012/13 시즌 프랑스에서 열린 공연의 3%만이 여성에 의해 제작되었다. 여성 음악감독으로서 에퀼베는 공연계의 불평등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현재 연주되는 작품 중 여성 작곡가의 곡은 15%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에게 양성평등은 중요한 주제다. 에퀼베는 오늘날 더 많은 여성이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는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단언한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만드는 쪽인 것 같다. 29세에 자신의 앙상블인 악상투스 실내합창단을 창단했다.

1990년대에 파리에는 전문 합창단이 거의 없었다. 합창 레퍼토리를 지휘하려면 앙상블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예술단체를 설립하려면 예술적인 노력은 물론, 행정상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적인 파트너십을 맺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합창음악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 마을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소리가 자연스레 나를 합창음악으로 이끌었다. 빈으로 가서 지휘를 배우며, 2년간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와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의 지휘 아래 노래 불렀다.

음악의 재료로써 목소리는 어떤 매력을 지녔는가?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색깔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아주 친밀하고 인간적인 소리, 정반대로 추상적이고 악기 같은 소리도 낼 수 있다. 합창단은 사랑을 위해 노래할 수도, 추모나 혁명을 위해 노래할 수도 있다.

가수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어, 지휘봉으로 노래 부르고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하모니와 대위법, 작품의 분석 등 음악의 기초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스무 살이었는데, 지휘를 하기로 결심했다. 악보와 작품의 맥락을 분석하는 작업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지휘할 때 음악이 내 팔과 몸을 통해 흐르는 듯한 그 느낌이 좋았다.
로랑스 에퀼베는 여러 스승으로부터 음악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스웨덴 출신으로 합창음악에 큰 족적을 남긴 에리크 에릭슨(1918~2013) 문하에서 현대 레퍼토리를 익혔다. 요르마 파눌라(1930~)의 완전무결한 동작과 영국 왕립음악원 데니즈 햄의 구체적인 지휘 테크닉, 여러 박자를 넘나드는 콜린 메터스(1948~)의 가르침을 익혔다. 그중 당대연주에 관한 탐구 정신은 아르농쿠르가 뿌린 씨앗이다. 아르농쿠르는 1970년대에 작곡 당시를 재현하는 역사주의 연주를 주창하며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끈 선구자다.
두 번째로 창단한 앙상블로 시대악기 연주단체를 택했다. 2012년 설립한 인슐라 오케스트라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에서 아르농쿠르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영감을 받았다. 그는 시대악기를 활용한 당대연주가 단순히 작곡가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 이상임을 깨닫게 했다. 우리가 연주하는 작품은 1730년부터 1850년까지의 소위 바로크 음악이다. 당대연주를 통해 작곡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알아낼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접근법은 오래 전의 음악이 지금에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것을 위해 인슐라 오케스트라는 음악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부서도 갖추고 있다.

당대연주를 지향하면 보수적일 것 같은데, 인슐라 오케스트라는 음악 외 장르와의 협업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예컨대 공연을 앞둔 콘서트 ‘마법의 모차르트’(Magic Mozart)에서는 안무가이자 연출가 필립 드쿠플레(1961~), 조명 디자이너 베호냐 가르시아 나바스와 함께한다.

장르를 넘나드는 것은 인슐라 오케스트라의 핵심이다. 시각예술·연극·영화·무용·마술·서커스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하는 무대를 늘 그리고 있다. 전위적인 무대 연출로 유명한 스페인의 극단 ‘라 푸라 델 바우스’와 협업해 선보였던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음악적 우수성·개방성·혁신이라는 나의 예술적 가치관을 대변한다(연출가 카를루스 파드리사·극단 라 푸라 델 바우스가 함께 한 ‘천지창조’는 국내 음악가들과 함께 2019년 3월 아트센터 인천에서 공연된 바 있다).

음반·영상물을 왕성하게 만들고 있다. 악상투스 실내합창단은 40여 장의 음반과 DVD를 발매했다. 설립 후 매년 한 장 이상 녹음한 셈이다. 인슐라 오케스트라는 지난 9월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를 모은 신보(Erato)를 내기도 했다. 

애초 앙상블을 만들 때부터 녹음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다. 음반 작업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갖고 있다. 인슐라 오케스트라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라는 양대산맥을 두 축으로 삼는다. 베토벤은 꾸준히 탐구할 대상이며, 희소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찾고 있다. 링컨센터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 오른 모차르트의 미사곡과 레퀴엠을 녹음하기도 했다. 앞으로 베토벤 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여성 작곡가 루이즈 파렝(1804~1875)의 교향곡을 녹음할 계획이다. 여성의 유산을 지지하는 의미에서다.
“지휘자란 심리학자인 동시에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전자는 인간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음악을 다뤄야 하는 까다로움을 강조한 표현이다. 후자는 음악적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단원들과의 긴밀한 소통, 공연 관계자들과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필요함을 뜻한다. 이를 위해 로랑스 에퀼베는 리허설 현장에서 단원들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대화를 지양한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는 “너무 여성적”이라고 하지만, 에퀼베는 “오늘날 괴팍한 지휘자는 더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로 응수한다.
지휘자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이 어떻게 현실의 음악으로 구체화되는지 늘 궁금했다.

먼저 큰 그림을 그리고 나서, 밸런스·프레이징·스트로크 등 디테일에 초점을 맞춰나간다. 단원들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음악을 이미지로 표현하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각적으로 이야기한다. ‘꽁꽁 언 혹은 표면만 살짝 언 것 같은’ 소리라든지, ‘서걱거리는 모래’ 혹은 ‘가벼운 눈가루’ 소리 등등.

여성으로서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쉽지만은 않았겠다.

고군분투했다.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렇더라. 몇몇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특히 여성 지휘자의 삶을 얼마든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성 지휘자에게는 전문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는 정기적인 무대가 필요하다. 지휘자·작곡가·연출가 등 관리직에 더 많은 여성 예술가가 앉을 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지휘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연구와 공부를 즐겨라. 예술적으로 용감해져라. 그리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익혀라!글 박서정 기자

discography
마법의 모차르트(Magic Mozart)
상드린 피우(소프라노)/레아 데장드르(메조소프라노)/로랑스 에퀼베(지휘)/인슐라 오케스트라 외Erato 9029526197
베토벤 3중 협주곡 & 합창 환상곡
베르트랑 샤마유(피아노)/알렉산드라 코누노바(바이올린)/내털리 클레인(첼로)/로랑스 에퀼베(지휘)/악상투스(합창)/인슐라 오케스트라 외Erato 9029550573
하이든 ‘천지창조’
카를루스 파트리사(연출)/라 푸라 델 바우스(공중곡예)/로랑스 에퀼베(지휘)/악상투스(합창)/인슐라 오케스트라1DVD/Naxos 2.110581/2017

하반기 연주 일정콘서트

‘마법의 모차르트’(Magic Mozart)11월 15일 라 센 무지칼레(프랑스)12월 31일~1월 3일 룩셈부르크 대극장(룩셈부르크)로랑스 에퀼베/인슐라 오케스트라 외
베토벤 교향곡 9번12월 3·4일 라 센 무지칼레(프랑스)로랑스 에퀼베/인슐라 오케스트라·악상투스·NDR 방송교향악단 합창단 외
콘서트 ‘바흐 크리스마스’12월 17·20일 세실리아 교구 성당(미국)로랑스 에퀼베/헨델과 하이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H+H Orchestra and Chorus)

 

 

여자경(1970~)은 한양대 음대, 동대학원을 거쳐 빈 국립음대에서 레오폴트 하거와 고트프리드 슐츠를 사사했다. 2005년 수원 지휘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 2008년 프로코피예프 지휘 콩쿠르에서 3위 했다.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전임 지휘자(2010~2014)로 활동했으며, 현재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2020~)로 활약하고 있다.

여자경1970~진심은 통한다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

빈에서 활동하던 여자경이 지겹게도 듣던 말이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성’과 ‘동양인’이라는 편견은 오랜 시간 여자경을 지독히도 공격했지만, 모든 일은 “감당하는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굳건히 믿었다. 진심은 통하리라.

여자경이 지휘봉을 손에 쥔 건 오페라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한양대 작곡과에서 공부했지만 작곡에는 도통 흥미가 없었다. 음악의 길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던 무렵, 우연한 기회로 학교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곡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곡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지휘가 자신에게 더 맞는 걸 깨달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진학해 레오폴트 하거(1935~)의 가르침을 받는다. 여성 지휘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한국은 물론 오스트리아에서도 여자경에게 낯선 시선을 던졌다.

사실 ‘여성 지휘자’보다 더 듣기 싫던 건 ‘준비되지 않은 지휘자’라는 말이었다. 곡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도 분명 마음을 열 것이라. 여자경은 스스로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째, 충분히 준비한 뒤 포디엄에 설 것. 둘째, 인간을 사랑할 것. 셋째, 연주자들에게 예의를 다할 것. 넷째, 지루하지 않은 리허설을 할 것. 마지막으로, 실제 연주에서 뒤에 있는 객석보다 앞에 앉은 연주자들에게 감동을 줄 것. 모든 것은 연주자들을 향해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규칙들 덕인지 연주자들은 여자경에게 금세 마음을 열었다.

2005년, 여자경은 빈 필의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무지크페어아인 골든홀에서 ORF 빈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석사학위를 획득했다. 이후 고트프리드 슐츠(1936~)를 사사하면서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20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프로코피예프 지휘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 지휘 콩쿠르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뽑은 지휘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장송 지휘 콩쿠르에서 받은 ‘오케스트라가 뽑은 지휘자상’이 특히 인상 깊다. 연주자들과의 교감 능력이 탁월한 듯한데, 정말이지 진심은 통하는 걸까?

지금까지 지휘를 하면서 느낀 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지휘자와 연주자는 악보를 사이에 두고 대화한다. 서로 간에 진심을 알아주는 배려가 중요하다.

지휘자가 가져야 할 필수 조건은 ‘교감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언제까지 지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지휘를 하던, 아니면 취미 생활로 빵을 굽던, 모든 것에서 헛된 교감을 주고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그저 음정과 박자만 계산해 의미 없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 좋겠고, 내가 구운 빵을 먹는 사람들은 깊은 풍미를 느끼며 먹으면 좋겠다. 무엇을 하고 살든 간에 좋은 교감이 가장 중요하다.

빈에서 만난 스승 레오폴트 하거도 교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나?

학교에서는 엄격하고 차가운 편이었지만 나에게만은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선생님 덕에 빈 정통 음악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지휘자로서 여러 자질을 알 수 있었다.

리허설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작곡가가 악보에 적은 걸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편이다. 때로는 연주자들에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색깔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오케스트라나 연주회 성격에 따라서 늘 유연하고자 한다.

선호하는 작곡가는?

어느 작품이건 연주를 준비하면 그 작품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공부하다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그 작곡가의 감정선을 알곤 한다. 지나간 시대의 모든 작곡가를 존경하지만, 특히 말러와 베토벤을 좋아한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언론에서 함께 연주하고 싶은 지휘자로 소개됐던 여자경은 현재 국내에서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9~2014년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전임지휘자로 활동했고. 한양대와 단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년 7월부터는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위촉받아 더 다양한 형태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판교에 보금자리를 꾸린 그는 일과 동시에 육아와 살림을 감당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방’에서 실컷 악보를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싶지만, 때로는 엄마의 역할이 더 큰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고. 따라서 “지휘자에겐 모든 상황을 책임질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하다”고 전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고단하진 않은가?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애를 키우는 것보다 외국어로 논문 몇 편을 더 쓰고 말지.(웃음) 그저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바른 성품을 키워내야 하니 육아가 참 어렵다. 주변을 보면 가정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엄마의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의 삶에서 지극히 평범한 모습인 것 같다. 하지만 지휘자로서의 일이 내 삶에 좋은 에너지를 더해주기에 몸이 부서질 만큼 고단해도 모든 환경을 최대한 즐기려 노력한다.

성별에 관한 질문은 썩 좋아하진 않는다고.

모든 일은 남자와 여자를 떠나 일을 감당하는 사람 나름이라고 본다. 보통의 가정에서 요리는 여자인 아내가 하지만, 일류 요리사들은 남자가 많다. 어린 시절, 남자보다 여자아이들이 피아노나 플루트를 배우는 비율이 높은데, 세계적으로 피아니스트나 플루티스트는 남성이 더 많지 않나. 성별을 떠나 모든 것은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달린 것 같다.

지난 7월부터 강남심포니와 함께하게 됐다. 임기 동안 이루고 싶은 것들은?

강남심포니가 “강남구의 문화예술 저변을 효과적으로 잘 확대했다” “다른 시립교향악단과 비교했을 때 음악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등 이전보다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노력하고 싶다. 내부적으로는 단원을 충원하고 연습실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강남심포니를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이 또한 용기 내어 최선을 다할 것이다.글 장혜선 기자

여성 지휘자로서 최초의 기록 

2008 프로코피예프 지휘 콩쿠르 3위

2009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지휘

 

 

앨리스 파넘(1970~)은 옥스퍼드 대학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오르간을 전공했다.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일리야 무신과 레너드 코치마르를 사사했다. 2005~2016년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객원 스태프로 다수의 제작에 참여했으며, 2001~2004년에는 스웨덴 예테보리 오페라에서 부지휘자로 일했다. 2014~2016년에는 몰리 칼리지 오페라 스쿨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앨리스 파넘1970~가르침을 남김없이

앨리스 파넘(1970~)은 전설적인 러시아 지휘자 일리야 무신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져 있다. 파넘은 인터뷰 내내 무신(1903~1999)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쳤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오르간을 전공한 파넘은 지휘봉을 들고 무작정 러시아로 향했다. 무신에게 지휘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유럽에선 무신이 지휘 교육자로 유명세를 떨쳤고, 1980년대에 그에게 지휘를 배운 여성 지휘자 시언 에드워즈는 영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무신의 제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1938~), 세묜 비치코프(1952~),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 등이 세계를 활보하고 있었다.

마침내 파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무신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 시기 러시아에는 양성평등에 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모호했다. 공학이나 건축 분야에서도 여성이 일할 기회가 열렸으나 대다수 여성은 퇴근 후 집에 와서 모든 요리와 청소를 도맡아야 했다.

파넘은 러시아에서 들었던 노골적인 성차별 발언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구는 “여성은 남성만큼 뛰어나지 않다”고 했으며, 지휘에 소질을 보이는 파넘에게는 “그저 이상한 예외”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꿋꿋이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무신의 보살핌 덕이다.
앞서 무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당신의 선배 시언 에드워즈(1959~)도 무신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보였다.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는 지휘자로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 1980년대에 시언 에드워즈는 무신에게 교육을 받았고, 영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신에게 마스터클래스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모든 답을 얻은 듯했다. 고작 며칠의 공부로는 아쉽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3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무신은 꽤 엄격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범했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처럼 기술을 가르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 기술이 단순히 기술만을 위한 기술은 아니었다. 음악과 예술을 섬기는 기술이라고나 할까. 그는 가끔 화를 냈지만, 그것은 오직 제자들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때로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와 함께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의 생활은 늘 마음이 편안했다.

무신은 여성과 남성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일관됐나?

진솔한 태도를 보였다. 일부 사람들은 여성들이 강하고 단호하지 못해 지휘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무신은 단호한 여성이 많다고 얘기했으며,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연주자들에게 음악적 의도를 전달하는 거라고 했다.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1999년, 무신이 별세했을 때는 말로 표현 못 할 슬픔을 느꼈을 듯한데.

그가 타계한 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레너드 코치마르와 함께 공부했다. 이후에는 특별한 멘토가 없어서 슬프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나는 여학생들을 도우려 한다. 공부하던 시절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늘 불안했고, 용기 내어 도움을 구해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지휘자는 실제 연주 경험이 매우 중요한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무엇인가?

종종 오페라 제작에 참여했다. 오페라 지휘자들을 가까이에서 보조하며 좋은 지휘자와 나쁜 지휘자를 알았다. 오페라와 교향악에서 쓰는 힘의 에너지는 너무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러시아에서는 학생 신분에도 전문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경험이 많았다. 2002년 스웨덴에서 정식 데뷔를 했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스웨덴 보로스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았다.
모든 공연은 파넘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귀한 기회들이었다. 파넘은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으로 마린스키 극장 경험을 꼽는다. 2013년,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초청으로 마린스키 극장에 올랐다. 그때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을 지휘했는데, 스승(레너드 코치마르)의 칭찬에 그는 교육자로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게 된다.

교육자 파넘이 집중한 키워드는 ‘오페라’와 ‘여성’이다. 그는 먼저 젊은 성악가와 연주자 개발에 몰두했다. 길드홀 음악연극 학교와 로열 웰시 음악연극 학교에서 제작한 오페라를 지휘했고, 웰시 내셔널 유스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2014~2016년에는 몰리 칼리지 오페라 스쿨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여성 지휘자들을 위해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여성 지휘를 장려하는 ‘여성 지휘자(Women Conductors)’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2017년부터는 아일랜드의 내셔널 콘서트홀에서 ‘여성 지휘자 프로그램(Female Conductor Programme)’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해왔다. 또한 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포디엄 위 여성들(Women on the Podium)’ 프로그램 설립을 도왔으며 정기적으로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도 그는 교육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 강의를 고안해 지속적으로 수업을 올리는 중이다.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무엇이 그리 감명 깊었나?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은 아주 영국적인 작품이다. 이를 러시아어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러시아 가수들은 훌륭했다. 당시 공연을 마치고 스승(레너드 코치마르)이 나에게 다가와 웃으며 “무신이 가르쳐 준 것을 하나도 잊지 않았구나. 너는 정말 음악을 노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무신에게 배운 지휘 테크닉을 널리 전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이는 내가 몇 달 후 여성 지휘자 프로그램을 창설하게 만드는 결정적 동기가 됐다.

오페라에 대한 애정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늘 좋아했다. 헨리 퍼셀(1659~1695)의 작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 오페라를 경험했다. 특히 이탈리아 레퍼토리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약 10년 동안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 스타들 발굴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이 참 흐뭇하다. 여성 지휘자를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4~2016년에는 영국 몰리 칼리지 오페라 스쿨에서 여성 지휘자들이 듣는 수업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더 많은 여성이 지휘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워크숍을 개최하고 다른 단체와도 호흡을 맞추며 거의 500명의 여성들과 연을 맺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한 여성 지휘자도 있을 것 같은데.

영국 지휘자 이모겐 홀스트(1907~1984)가 그러하다. 지휘자 거스테이브 홀스트(1874~1934)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많은 아마추어 단체를 지휘했다. 작곡가 브리튼도 그녀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이모겐 홀스트는 주목받지 못한 영웅이다.

여성 지휘자가 수적으로 늘어나면 차별이 좀 줄어들까?

당연하다. 나는 오랜 기간 동은 많은 종류의 차별을 경험했다. 여성 지휘자 프로그램을 기획한 주요 이유는, 여성 지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 힘들 거란 생각에서다. 아직까지도 현저히 여성 지휘자 수가 적으며, 그저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일의 전문성을 보면 성별을 인지하지 못하는 의사처럼 지휘자도 인식되길 바란다.

코로나19 이후로 다수 프로그램이 중단됐을 것 같은데.

2020년 3월부터 많은 일정이 취소됐지만 여전히 바쁘다. 강연 영상을 개발하고 있으며, 여가 시간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글 장혜선 기자

 

김보미(1978~)는 연세대 교회음악과에서 박종원·윤의중을 사사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과 빈 국립음대에서 합창지휘와 오르간을 전공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 부지휘자(2007)와 빈 소년 합창단 모차르트반 지휘자(2012~2016)를 역임했다. 귀국 후 2018년부터 월드비전 합창단을 이끌며, 앙상블 무지카 미아의 예술감독과 앙상블 더 싱어즈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 연세대 교회음악과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김보미1978~음악 안에서 숨 쉬는 법

합창음악의 역사는 유구하다. 인간의 ‘목소리’가 ‘악기’가 되는 가장 원초적인 음악인 까닭이다. 혹자는 인류는 말문보다 노래를 먼저 텄으리라 추측하기도 한다. 유서 깊은 합창단도 많다. 6세기에 교황청 전속 합창단으로 조직된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은 그 역사가 1천 5백여 년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으로 알려진 덴마크 로열 오케스트라보다도 1천년가량 앞서있다.

합창이 교회음악의 중요한 축을 지탱했던 서구 유럽과 달리, 국내에 합창지휘가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1990년대의 일이다. 김보미는 연세대 교회음악과에 합창지휘 전공이 신설된 직후 들어간 초창기 입학생이다. 합창음악의 숨결을 깊이 느끼기 위해 바흐의 나라 독일에 있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과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음대에서 수학했다. 줄곧 합창지휘에 전념해온 것이다.

김보미(1978~)가 이름 석 자를 알린 것은 2012년, 빈 소년 합창단 50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이자 아시아 출신 지휘자가 되면서부터다. 그간 빈 소년 합창단은 이곳 단원 출신, 즉 남성이 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0여 명의 소년이 기숙 생활을 하는 합창단의 가족 같은 분위기에 익숙한 지휘자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오랜 전통에 한 번, 또 꿈쩍 않던 그 관행을 깨뜨린 주체가 ‘동양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 배경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빈 국립음대 지도교수였던 에르빈 오트너(1947~/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 예술감독)다. 역시 빈 소년 합창단 출신인 그는, 피아노를 치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불러야 하는 자리에 제자인 김보미가 적임자임을 알아봤다. 오트너는 김보미에게 오디션 응시를 권유했고, 그를 위한 추천서를 써줬다.

지휘자가 되기 전, 아주 어릴 적부터 합창 활동을 즐겼다고 들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와 성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처음 합창단에 들어갔는데, 지금껏 합창 활동을 그만둔 적이 없는 것 같다. 중학 시절에는 찬양대 반주를 도맡기도 했다. 좋아하는 두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연스레 합창지휘자가 되었다.

국내 음대에 합창지휘 전공이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깊이 공부하려면 해외 유학이 필요했다. 그중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유학지로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대학에 진학한 1998년 무렵 한국의 몇몇 음대에 합창지휘가 세부 전공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연세대 음대는 교회음악과에, 중앙대는 작곡과에 신설됐다. 연대 재학시절 스승이신 박종원 교수님께서 창단하신 ‘JW 코럴’ 합창단 단원으로 미국 순회 연주를 했다. 당시 미국의 합창음악에 크게 감명받아 잠시 미국 유학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독일에서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에 참여한 뒤, 바흐의 나라 독일에 완전히 매료됐다. 독일어를 공부해놓은 것도 독일 유학을 결정하는 데 한몫했다.

바흐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나 보다.

바흐를 특히 좋아한다. 바흐의 종교음악 중에 ‘b단조 미사’는 선호하는 레퍼토리다. 바로크 음악과 잘 맞는다. 가사가 가진 의미와 내용이 음악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흔히 음악에서 수사학이라 일컫는 부분이다. 특히 독일어 가사를 가진 작품을 살펴보면 그 음악적 표현이 어찌 그리 가사와 딱 맞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다.

김보미는 빈 국립음대에서 수학하며, 전문 합창지휘자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박사과정 재학 중 지도교수 에르빈 오트너(1947~/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 예술감독)의 추천으로 빈 소년 합창단 지휘자로 발탁되며,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했다.

김보미가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스승”으로 꼽는 에르빈 오트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을 만든 인물이다. 단원 대대수가 빈 국립음대 재학생으로 이뤄진 이 단체는 1972년 창단 이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와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 등 거장 지휘자와 긴밀히 협업하며, 빈 페스티벌·잘츠부르크 페스티벌·빈 모던 페스티벌 등 주요 무대에 오르고 있다.

스승인 에르빈 오트너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말해달라.

무엇보다 음악 안에서 긴장·이완하며 숨 쉬는 법을 배웠다. 합창단 운영 방법부터 다른 음악가, 나아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와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등 음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배웠다. 또 기회를 주신 덕분에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오페라 합창단을 지휘하는 귀중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선생님과는 여전히 일 년에 한 번씩 오스트리아에서 만나 ICAK(Internationale Chorakademie Krems)라는 합창 축제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200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감명 깊은 순간이 여럿 있었을 텐데, 그중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코 마에스트로 아바도와의 만남이다! 아바도가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 있을 때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베토벤 ‘피델리오’, 슈베르트의 미사 6번 D.950,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이 연주곡목이었다. 연습실에서 곡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그가 원하는 음악적 지시를 받아 적기도 했다. 당시 아바도는 지병으로 인해 많이 야위고 힘들어 보였는데,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느 젊은 지휘자보다 뜨거웠다. 동양에서 온 나를 참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바도는 인간적이고 민주적이었던 지휘자로 평가된다. 그와 같은 리더십을 추구하는가?

지휘자는 연습실로 들어오는 짧은 순간의 걸음걸이나 걸음의 속도, 표정까지 당당해야 한다. 그 당당함이 그날을 위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편,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도 안 된다. 함께하는 연주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태도에서 충분히 드러나야 한다. 스스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려 하지만, 막상 리허설이 시작되면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다. 흥분감에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해에 30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하는 빈 소년 합창단과 세계를 누빈 김보미는 2016년 귀국해 모교인 연세대 교단에 서고 있다. 합창지휘로 쌓은 지식과 경험이 모국의 후학들에게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좋은 합창지휘자는 “호흡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2018년부터는 8~16세의 아동·청소년 단원들로 구성된 월드비전 합창단의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어린 시절 음악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김보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람들과 음악을 만드는 일이 무척 즐거웠던 합창 활동이 원체험(原體驗)으로 깊숙이 남아, 지금 행복한 음악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원들을 지도할 때면 이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음악을 지속할 수 있도록 고민한다. 어떤 어려움은 없는지 가능한 눈을 맞추고, 교감한다.
다른 음악에 비해 합창음악을 지휘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은?

합창은 몸을 악기로 사용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장르이다 보니,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체 내부의 구조를 설명할 때 특히 그렇다. 원하는 음악적 요소를 말로 전달할 때는 음악 외적인 요소로 설명하는 편이다.

그럴 때 적절한 말을 고르느라 고민에 빠지기도 하겠다. 

음악적으로 서정적이거나 부드러운 선율을 그에 맞게 적절히 표현하라고 요구할 때 ‘여성적으로’, 씩씩하고 힘차게 연주를 부탁할 때는 ‘남성적으로’ 연주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두 표현은 되도록 사용을 피하려고 한다. 불가피하게 쓰더라도,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요”라고 덧붙인다. 음악을 단편적으로 정의하지 않도록, 말과 손 둘 다 효과적인 표현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호흡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단원과의 호흡은 물론, 음악의 구조와 프레이즈 안의 긴장과 이완을 호흡을 통해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 호흡의 길이와 속도, 타이밍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지휘자는 절대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유럽 활동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이루기 위해 음악을 한 적은 없다. 단지 순간순간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 나와 함께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단원들과 제자들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글 박서정 기자

여성 지휘자로서최초의 기록

2012 빈 소년 합창단 지휘자 취임

하반기 연주 일정

김보미/더 싱어즈11월 중 온라인 공연
월드비전 합창단 창단 60주년 기념 음악전시회 12월 중 갤러리 라메르

 

기에드레 슬레키트(1989~)는 리투아니아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우를리오니스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그라츠 예술대, 라이프치히 음악원, 취리히 예술대에서 수학했다. 2015년 코펜하겐 말코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젊은 지휘자 어워드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 지휘했다.

슬레키트1989~오늘을 만든 어제

첫 번째 경험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기에드레 슬레키트(1989~)에게 한국은 그런 특별함으로 기억된다. 그의 공식적인 첫 번째 지휘 무대가 주어졌던 까닭이다.

2009년 루마니아에서 열린 지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슬레키트는 버르토크의 ‘현악 앙상블을 위한 디베르티멘토’를 선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 춘천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2009~2015)로 예정된 백정현이었다. 슬레키트의 잠재성을 발견한 그는 “조만간 함께하게 될 한국의 악단에 당신을 객원지휘자로 꼭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뒤인 2011년, 그 약속이 지켜지며 한국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지휘 무대였다.

기에드레 슬레키트는 전 세계에 유망 지휘자로 이름을 알려가고 있다. 이러한 성취가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 젊은 지휘자는 알고 있다.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지난 100년간의 지난한 움직임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잊지 않고 전했다. 이전 세대가 닦아온 길을 조금 더 넓히는 것, 슬레키트가 오늘의 젠더 이슈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데뷔한 후, 촘촘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최근 어떤 무대에 올랐나.

지난 9월,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어 콘세르트헤바우 데뷔 무대를 가졌다. 특히 오페라에 관심이 많아, 라이프치히 오퍼에서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의 새 프로덕션(연출 롤란도 비야손)을, 벨기에 플랑드르 오페라발레에서 드보르자크 ‘루살카’를 지휘했다. 이외에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등과 연주했다.

매번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을 텐데.

지휘자의 역할은 테크닉과 음악의 양면에서 통일성을 이뤄내는 것이다. 아이디어의 방향성을 확고히 한 뒤, 실질적인 테크닉 요소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처음 만난 단원들과 우선 ‘음악’으로 소통한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 특색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언어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런 지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스승이 있다면.

이반 피셔(1951~)와 블라디미르 유롭스키(1972~). 원래 그들의 열혈 팬이었는데, 이후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활동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어시스턴트로 일해 보라고, 지휘학도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슬레키트가 나고 자란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린다. 세 나라는 많은 것을 공유한다. 구소련의 무력 통치라는 그림자 진 역사도 그중 하나다. 1989년,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삼국의 국민은 손을 모았다. 실제로 손에 손을 잡고 에스토니아 탈린-라트비아 리가-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이르는 약 600km의 인간띠를 만들었다. ‘비폭력’의 뜻을 품은 200만의 사람들은 거친 구호가 아닌, 발트 3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합창’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날의 ‘노래 혁명’은 발트 3국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합창은 이토록 발트 3국의 역사에 깊이 녹아 있다. 기에드레 슬레키트의 음악 인생에도 마찬가지다.

처음 지휘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때를 기억하는가.

열세 살 때부터 학교에서 합창 지휘를 배웠다. 사실 당시에는 지휘자보다 성악가나 음악평론가를 꿈꿨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우연히 지휘 콩쿠르에 참가했는데, 그 경험이 나를 끌어당겼다. 오스트리아에서 지휘를 공부하기로 결정했고, 점차 내가 원하는 길을 밟아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휘의 맛을 보게 해준 게 ‘합창’인 셈이다.

맞다. 합창음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기악곡에서도 사람의 음성을 느낄 정도다. 음악을 하는 데 있어 좋은 요소라고 생각한다. 오페라에 대한 큰 애정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음악문화는 한국에 낯설게 다가온다. 작곡가와 작품을 추천하자면?

2019년 11월,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또 다른 리투아니아 출신 지휘자인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1986~)와 협업한 음반을 발매했다. 리투아니아 국립교향악단과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연주로 작곡가 라민타 세르크스니테(1975~)의 작품을 담았다. 또, 개인적으로 브로니우스 쿠타비시우스(1932~)의 엄청난 팬이다. 바클로바스 아우구스티나스(1959~)의 합창음악도 모두가 좋아할 것이다!
“아직 탐험해야 할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슬레키트는 그간 브람스나 슈만 같은 독일 낭만시대 작품들에 열성을 쏟아 왔다. 레오 야나체크의 깊이를 발견한 올해 초부터는 그의 작품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조만간 브루크너와 말러를 지휘할 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슬레키트는 “한 세기 전에 태어났다면 사랑하는 작품을 이토록 마음껏 연주할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한다. 지금 누리는 자유가 허락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터다.
100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는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많은 여성이 지휘계에서 활동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

한 세기를 거쳐 많은 것이 변화했다. 나는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그 어떤 문제 없이 지휘를 배울 수 있었다. 여성을 위한 교육이 훨씬 폭넓어졌다는 것은 그간의 주된 성취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다. ‘좋은 리더십과 성별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실력에서 비롯된다.

음악을 묘사하는 표현에도 성별의 고정관념이 투영된 것이 많다. 언어는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우려되는 지점인데.

여전히 ‘남성적인’ ‘여성적인’ 등과 같은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자주 쓰인다는 것은 큰 문제다. 특히 ‘여성 지휘자’라는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성’ 지휘자가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무언가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표현은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과거 그런 고정관념을 깨거나 여성의 제한된 활동반경을 넓힌 인물을 손꼽자면.

1887년, 여성이 최초로 베를린 필을 향해 지휘봉을 들었다.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였던 매리 부름(1860~1938)이다. 당시 27세였던 매리 부름은 이미 유럽 내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였고, 그의 대단한 음악성은 작곡에까지 닿아 여러 피아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베를린 필과의 공연은 자신의 작품을 초연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작품 초연 목적의 악단 고용은 당시 악단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베를린 필이 여성에게 기회를 준 게 아니라, 부름이 베를린 필을 ‘고용’했다는 사실이다. 매리 부름은 클라라 슈만(1819~1896)의 제자이기도 했다. 매리 부름, 클라라 슈만, 루이스 파랭 등 19세기 음악가들의 역사가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게 정말 안타깝다. 우리가 오늘날의 젠더 이슈에 관해 계속 이야기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그 흐름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지만, 최근 여성들이 세계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고 있는 현황은 긍정적이다.

유리 천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전통과 역사의 음악 페스티벌에도 여성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지난 8월, 요아나 말비츠가 10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했고, 내년에 우크라이나 출신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1978~)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청된 최초의 여성 지휘자가 된다. 이러한 성취들로 보건대,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 박찬미 기자

discography

라민타 세르크스니테 작품집
기에드레 슬레키트,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지휘)/리투아니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크레메라타 발티카Deutsche Grammophon 483 7761

하반기 연주 일정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탈출12월 4~31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독일)기에드레 슬레키트(지휘)/프랑크푸르트 오퍼 무제움 오케스트라
라이네케 하프 협주곡 op.182 외12월 14~15일 린츠 슈테파니엔홀(오스트리아)기에드레 슬레키트(지휘)/리크레이션 그로세스 오케스트라 그라츠(recreation – Grosses Orchester Gr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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