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끝, 이브리 기틀리스 타계에 부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2월 1일 9:00 오전

한 시대의 끝
이브리 기틀리스1922~2020 타계에 부쳐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1922 팔레스타인 출생
1933 파리로 이주.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
1951 롱티보 콩쿠르 입상 후 파리 데뷔
1963 이스라엘 출신 최초로 소련에서 연주회 개최
1968 ‘롤링스톤즈 락앤롤 서커스’ 출연
1990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임명
2011 일본 고베 대지진 자선 연주회 개최
2014 92세 나이로 20년 만에 내한(LG아트센터)

 

2020년은 두려움과 절망이 지배한 한 해였다. 차단과 봉쇄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외부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게 되었으며 폭발적으로 범람한 부고 때문에 작년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간 음악가들의 소식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엔니오 모리코네, 기타리스트 줄리언 브림, 첼리스트 린 하렐, 성악가 미렐라 프레니, 지휘자 알렉산드르 베데르니코프, 호른 연주자 배리 터크웰,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이다 헨델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부고란의 목록은 안타까움과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주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익숙해진 추도사의 나열에 그 먹먹함은 예년보다 덜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지난 12월 24일 파리의 한 양로원에서 타계한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1922~2020)의 이름도 이 목록에 올라 있었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기틀리스는 2019년 이후에는 노령으로 인해 특별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갑작스러운 비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독특한 연주 이력과 예술관을 남긴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고 평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바이올린 잡은 소년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연주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브리 기틀리스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2014년 내한 연주회가 사실상 처음이었으며, 이 잠깐의 만남 이후로 그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음반 녹음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다가 리코딩에 소극적인 연주자들을 소개하는 유일한 통로인 실황 음반도 기틀리스의 경우엔 너무 적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이름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경우 1970년대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방문해 매우 높은 인기를 누렸던 것과 비교해, 우리에게는 너무 늦게 알려졌다.

기틀리스는 1922년 8월 25일, 당시에는 영국 보호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의 하이파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5세 때 부모는 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고 이 악기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된다. 2013년 AFP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냥 바이올린을 갖고 싶었어요. 제가 너무 작아서 연주할 수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바이올린을 골랐고 6세 때 시작했습니다”라며 이 선택이 그의 결정이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기틀리스가 9세가 되었을 때, 당시 그의 바이올린 선생이었던 미라벤-아미의 주선으로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에게 연주를 들려주게 되었다. 이에 감명받은 후베르만은 기틀리스에게 유학을 권했고 이를 위해 자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1933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한 기틀리스는 2년간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음악원 졸업 이후에도 파리에 머물며 마르셀 샤이에와 즬 부셰리, 조르지 에네스쿠,자크 티보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지난 세기 바이올린 연주법과 교습법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칼 플레시도 그의 스승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전시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처음 2년간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던 기틀리스는 이후 영국 육군의 예술가 분과로 자리를 옮겨 공장 노동자와 군인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가했고, 전쟁 후에는 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을 통해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독보적인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

1951년 롱티보 콩쿠르에서 5위에 입상한 기틀리스는 파리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50년에 성사된 미국 데뷔 무대 이후 1955년 조지셀/뉴욕 필과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1958년에는 리사이틀 투어를 돌며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 1980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의 음악 산업 전반을 혐오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그는 이를 구태여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던 이 시기의 기틀리스에 대한 평가는 ‘독보적인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로 수렴해, 베르크와 힌데미트, 버르토크와 같은 작곡가들의 난해한 작품을 손쉽게 연주해내는 비르투오소적인 측면이 부각되곤 했다. 기틀리스 자신은 테크닉만을 강조하는 이런 평가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공동 작업에는 언제나 열성적이었다. 지금은 지휘자로서 더 잘 알려진 작곡가, 르네 라이보비츠(1913~1972)는 기틀리스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했고, 브루노 마데르나(1920~1973)는 그를 위해 ‘이브리를 위한 작품(Piece pour Ivry)’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로만 하우벤스톡크 라마티 등도 그와 함께 작업했다.

기틀리스의 동시대 작곡가에 대한 관심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는데, 1968년 롤링스톤즈가 주최한 TV쇼 ‘롤링스톤즈 락앤롤 서커스’을위해 존 레넌, 에릭 클랩튼, 미치 미셀, 그리고 키스 리처즈를 멤버로 결성된 슈퍼 밴드 더티 맥과 협연하여 ‘Whole Lotta Yoko’를 녹화하기도 했다.

기틀리스는 1963년 소련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최초의 이스라엘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스라엘과 소련의 문화 교류 프로그램 일환으로 기획된 그의 순회 연주회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 5개 도시에서 열렸으며, 이 연주회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연주회는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끝없는 앙코르로 화답한 기념비적인 이벤트로 기억되고 있다.

기틀리스는 1970년대 이후 일본을 자주 방문하여 높은 인기를 얻었다. 80년대 중반 일본 EMI에서 몇 장의 소품집을 녹음해 출시하기도 했다. 이 음반들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정규 음반이다. 2011년 고베 대지진 때에는 쓰나미가 쓸고 간 목재를 사용해 악기를 만들어 자선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구호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기틀리스는 어린 세대의 교육을 위한 활발한 대외 활동과 평화를위한 자선 연주회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임명됐다. 평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협정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기틀리스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예술가로서의 책무도 매우 중요히 여긴 인물이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연주회를 이어갔던 기틀리스는 2014년 5월 내한 공연을 가졌다. 그의 마지막 공개 연주회 중 하나는 2018년 텔아비브에서 있었던 아르헤리치와의 무대였으며 이 연주회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헤리치는 2019년 1월, 파리 필하모니에서 그를 위한 헌정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니콜라스 안젤리히, 르노 카퓌송, 에벤 콰르텟 등 여러 저명한 연주자들이 참여해 노대가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 연주회역시 *유튜브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진면목은 유튜브에서
기틀리스는 그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극소수의 음반만을 녹음했다. 그가 처음부터 음반 녹음을 기피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50년대 중반 집중적으로 녹음된 몇 편의 바이올린 협주곡들과 60년대 중반에 녹음한 소량의 파가니니 작품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80년대 녹음한 몇 장의 소품집이 사실상 그의 정규 디스코그라피의 전부이다.

 

 

 

*파리 필하모니이브리 기틀리스 헌정 연주회

 

 

 

이 녹음들 가운데 그의 국제적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준 것은 1954년 Vox에서 발매한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이다. 미국 지휘자 윌리엄 스트릭랜드/빈 심포니(전 프로 무지카 오케스트라 비엔나)와의 협연으로 완성한 이 음반은 디스크 그랑프리 상을 받았으며, 당시 아직 생소한 레퍼토리였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리코딩으로는 처음 제대로 소개한 것이었다. 1959년 아이작 스턴과 번스타인의 낭만주의적 해석이 등장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레퍼런스로 여겨진 연주였지만, 60년대 후반 메뉴인(EMI), 헨리크셰링(DG) 등의 역사적 명반들이 등장하면서 추천 목록에서 사라졌다. 지금 듣기에는 시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높은 점수를 주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30대 초반의 기틀리스가 보여준 기술적 완성도는 매우 인상적이며 특히 2악장의 냉정할 정도로 침착한 코랄 변주곡 해석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성공 이후 기틀리스는 멘델스존과 브루흐,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 버르토크 등의 유명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역시 빈 심포니와 연달아 녹음했다. 한스 스바로프스키와 하인리히 홀라이저, 그리고 야샤 호렌슈타인 등의 지휘자와 함께했는데 기틀리스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기도, 어떤 면에서는 ‘괴작’에 해당할 수도 있는 연주들이다. 특히 호렌슈타인과 함께 한 시벨리우스의 협주곡과 버르토크의 협주곡 2번 녹음은 그 개성 덕분에아직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

Vox 레이블과의 계약이 끝나고 한동안 녹음 스튜디오에서 멀어졌던 기틀리스는 1960년대 중반 필립스와의 계약으로 리코딩 산업에돌아왔다. 카프리스와 협주곡 1·2번 등 파가니니 작품들을 주로 녹음한 기틀리스는 이 시기 평단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았던 셰링과 그뤼미오가 같은 음반사다 보니 홍보의 측면에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으며, 몇 장의 음반을 끝으로 다시 리코딩과 멀어지게 된다. 다행히 이 시기의 녹음들을 5장의 CD에 모두 담은 박스물(Decca)이 발매되어 있다. 예술가 기틀리스를 이해하는 데는 이렇듯 몇 개 되지 않는 음반들보다는 유튜브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들이 더 유용하다. 특히 토니 팔머 필름에서 제작한 다큐 필름은 그의 생애와 그의 예술관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이며 DVD로도 발매되어 있다.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외
이브리 기틀리스(바이올린)/윌리엄 스트릭랜드(지휘)/빈 심포니

VOX PL8660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피아노,
13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체임버 협주곡

 

 

시벨리우스·브루흐 외

이브리 기틀리스(바이올린)/
야샤 호렌슈타인(지휘)/빈 심포니
VOX PL9660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이브리 기틀리스 포트레이트

이브리 기틀리스(바이올린) 외
Decca 5346246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로즈마린’,
파야 ‘스페인 무곡’,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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