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예술 권력
한-러 수교 30주년,
러시아 문화 단지 조성 사업을 살피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대 러시아 외교에 공을 들였다. 문 대통령은 2017·2018년 거듭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기간에 만난 양 정상은 2020년을 ‘한-러 상호교류의 해’로 지정하고 수교 30주년 행사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지난해 9월 푸틴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러시아산 백신을 맞고 가겠다”고 방한 의사를 밝혔고올 상반기 내한도 관측된다.
러시아 측 프로그램 : 러시아 시즌스
정부는 2021년 1월 현재, 홍남기 경제 부총리를 준비위원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 연방 정부 간 수교 30주년 기
념사업 준비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규정’(대통령훈령 417호)을 마련했다.러시아는 푸틴 보좌관 출신의 유리 트루트녜프 극동관구 전권대표가 준비위원장이다. 러시아 정부는 대통령 국제문화협력 특별대표 미하일 슈비드코이를 한-러수교 30주년 사업 코디네이터로 임명했다. 미술평론가 경력의 슈비드코이는2010년대 러시아의 대외 예술 교류에서 러시아 내각의 정책 조정을 맡았다. 슈비드코이는 문화 교류 프로그램인 ‘러시아시즌스’를 감독하고 일본(2017), 이탈리아(2018), 독일(2019), 룩셈부르크(2020),한국(2021)을 상대한다.
국제 사회에서 문화 교류는 국가의 대외이미지를 순화하는 입증된 수단이다. 크렘린 궁은 2000년대부터 최고 지도자의
마초 캐릭터를 내정 안정에 활용했지만 공식 석상에서도 푸틴의 거친 언사는 러시아 외교의 유연성을 제한했다. 웃통 벗은 푸틴 달력 사진을 국가 브랜드 제고에쓰긴 곤란하다. 2014년 크림반도 분쟁이후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사실상 공공 외교(Public Diplomacy) 정책 수단으로 러시아 시즌스를 고안했다. 자국의 풍부한 예술 자산을 외교이익에 결부하는 용도다.
러시아 시즌스를 계기로 러시아 문화부는 전시·연극·클래식 음악·발레·영화·민속예술·서커스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러시아 진용을 상대국에 대량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2019년 독일 행사에선 파트너 의사를 경청하기보다 러시아 입장을 강권하는 일방통행 진행으로 독일 언론에 비판받았다. 정치적으론 갈등하나 경제적으론 협력 관계인 독-러 양국은 러시아 시즌스를 활용해 각자의 방식으로 불만을 풀며 선린을 쌓았다.
러시아는 남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문제로 대립하는 일본과 2017년 러시아시즌스를 통해 ‘프로그램화된 갈등 관리’
의 효용을 경험했다. 그해 2월 러시아가 쿠릴 무인도에 자국명을 부여하자 일본은 “매우 유감”을 표했다. 6월 볼쇼이 발레 수석 무용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러시아 시즌스 개막 직후 아베 신조일본 총리를 예방해 “총리와 일본 국민을
위해 공연할 수 있어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인사했다. 7월 아베는 G20정상회담에서 “러시아와 공동 활동 형태로 북방영토에서 협력을 발전할 준비가 됐다”고 화답했다.
한국 측 프로그램 : ‘한-러 상호교류의 해’
공식 인증 사업
무용평론가 이종호는 “B급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 발레가 러시아 발레와의 교류를 통해 결정적인 도약의 기회를
얻었다”고 수교 이후 성과를 평가했다. 동시에 “국교 수립 30주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러시아를 제대로 챙겨 볼 기회가 없었다”고 러시아산 우량 공연의 부재를 지적했다. 10년 단위 수교 기념 시점을 전후해 정부 차원 문화 교류에선 상호주의원칙이 거론된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문화 교류에서 등가성 원칙을 배려하는 자세와 거리를 뒀다. 상대국의 문화적 역량을 고려해 러시아 교환 공연을허용하는데 소극적이었다. 한국외대 연구산학협력단은 러시아 문화교류 기초조사(2009)에서 기존 한-러 문화교류의 일방적·획일적 진행을 지적했다.
정부가 ‘한-러 상호교류의 해’ 지원 사업결정한 행사는 다양한 층위의 수혜자로형성됐다. 정부는 2019년 12월, 2020년3월 두 차례에 걸쳐 29개 기관, 32개 사업을 공식 인증했다. 볼쇼이 보로딘 아이스 시어터, 브라이트 보우즈 체임버 앙상블, 에이프만 발레, 레드 토치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데믹 드라마 시어터 내한 공연, 에이콤 제작 뮤지컬 ‘영웅’ 모스크바공연(이상 1차), 전주세계소리축제 ‘러시아포커스’, 올가 페레트야트코-호세 쿠라듀오,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쇼팽 콩쿠르 준우승자 콘서트, 한·러 청소년 오케스트라 교류 연주회,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상트페테르부르크 핸드메이드 극단, 모스크바 방송오케스트라내한 공연(이상 2차)이 선정됐다.
선정 사업은 대부분 러시아 단체와 국내공연장 사이를 매개한 국내 사업자들이신청한 프로젝트다. 애초에 지역 축제와지방 아트센터 기획 프로그램 편입을 겨냥하거나 민간 흥행만으론 수익이 어려운 프로젝트가 다수다. 2020년 대부분의 공식 인증 사업 공연은 코로나로 취소됐고, 2021년 재추진 여부는 올해 1월현재 공식 홈페이지에 명시되지 않았다.
올해 ‘한-러 상호교류의 해’ 기념 공연의 난관도 출입국 시 2주 자가격리 규정이다. 러시아 정부는 PCR 음성확인서 제출
자에게도 14일 자가격리 명령을 발부하는 경우가 있어 정상적 공연 교류는 불가능하다. 외교 당국 간에 기념사업 참가자의 자가격리 면제를 협의할 수 있지만, 국제 공연 시장은 예술가 보호를 위해 집단면역 생성 이전에 국가 간 이동을 삼가는추세다. 비대면 공연의 스트리밍 중계로국교 수립 30주년을 기리는 모양새는 초라했다.
러시아가 문화 교류에서 기대하는 가치
우리가 러시아와 문화 교류를 통해 얻을 이익은 명백하다. 예술사를 통해 음악·무용·연극에서 러시아의 역량은 검증됐고 볼쇼이·마린스키·스타니슬라프 극단의 공연 예술은 러시아 소프트파워의 정수다.
한국과 러시아는 상호 안보 위협 수준이 낮아 문화 교류를 외교 국면에 활용할 여지는 넓은 편이다. 정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은 미중일 구도에서 벗어나 한-러가 전략적으로 소통을 유지할 창구 기능을 기대할만하다. 2017년 블라디보스토크동방경제포럼에서 “마린스키 극장에서발레를 관람하고 싶다”고 발언한 문 대통령 연설이 단적이다. 문 대통령은 볼쇼이발레 내한 관람을 언급하면서 “마린스키극동 극장을 통해 신동방정책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깊은 의지를 느낀다”고 러시아 정부의 문화 인프라 확충을 고무했다.러시아 외교부는 문 대통령이 제안한 ‘나인 브리지’ 개념을 존중해 올해 한-러 수교 프로그램을 구성할 것으로 밝혔다. 한-러 수교 행사의 절정은 올가을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문화포럼(Saint Petersburg International Cultural Forum)이다.
이제는 눈을 돌려 러시아는 왜 한국과 문화 예술을 교류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살필 때다. 러시아 측 기념 사업 최고 책
임자가 극동관구 전권대표다. 러시아 입장에서 한-러 수교 사업은 극동관구의 지역 어젠다 성향이 짙다. 푸틴은 2012년 극동개발부를 신설해 ‘동진 정책’을 본격추진했고 2013년 측근 트루트녜프를 최고 책임자에 기용했다. 트루트녜프는 극동 11개 지방정부를 감독하며 접경지 사안을 책임진다. 2019년 북-러 확대 정상회담에 배석했고 일본·몽골·인도 협력 과제도 담당한다.
러시아 문화 예술 사업과 정경유착
푸틴 정부의 극동 지역 문화 인프라 확충을 지지하고 소프트웨어 보강을 수행한 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다.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 APEC에서 푸틴이 ‘문명 간 실효적 대화의 발전’을 강조하자 게르기예프는 프리모르스키 극장(현 마린
스키 극장 연해주분관)을 중심으로 “유럽-아시아 경계를 허물겠다”고 선언하고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에 피아니스트 조성진, 발레리노 김기민을 불렀다. 푸틴은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나톨리솝차크 시장 밑에서 자문 역할을 하다가‘백야 축제’ 상담을 위해 들른 게르기예프와 만났다. 이후 30년 동안 두 사람은 서방 언론의 정경유착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린스키 극장의 현대화와 분점 확대에 힘을 합쳤다.
게르기예프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후 푸틴 정부가 집중하는 문화 분야 그랜드디자인에 조력한다. 러시아 정부는 2024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세바스토폴, 칼리닌그라드, 케메로보에 대단위 문화 단지를 건설한다. 연해주, 크림 반도, 발트해 연안, 서시베리아 중심지에 볼쇼이 극장, 마린스키 극장 분관을 추가하는 계획이다. 푸틴은 게르기예프와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미하일 피오트로프스키 감독에게 그랜드디자인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러시아 전국 투어를 다니며 파악한 개발 소외 지역이 포함됐다.일흔을 목전에 둔 게르기예프의 사명은 러시아 전역에 레닌그라드의 예술 수준을 보급하는 일이다.
네 곳의 문화 단지 건설에 한화 1조원 대를 초월하는 막대한 사업비가 소요된다. 단지 건설은 국가문화유산기금이 수행하고, 비용은 국가 예산 대신 러시아 에너지 기업 로스네프트가 부담하기로 했다. 그러나 2019년 향후 3년간48억 루블(약 716억 원)의 국고를 투입하기로 했다. 건설사는 대통령의 오랜 측근들로 채워졌다. 당초 푸틴의 소싯적 유도 파트너 아르카디 로텐베르그가 세운 스트로이가스몬타슈가 건설을 수주했다. 돈을 댄 로스네프트는 건설도 직접 이끌고 싶었지만 로텐베르그가 사업권을 따내자 불만을 표했다. 건설권은 또 다른푸틴의 최측근 겐나디 팀첸코의 스트로이트란스가스로 넘어갔다. 로텐베르그와 팀첸코 모두 국제사회에서 푸틴 친분으로 정부 계약을 따냈다는 특혜 시비에 오
랫동안 오른 인물들이다.
푸틴의 문화 단지 구축은 명분상으론 지역 균형 발전이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극장 리노베이션,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카프카즈 분관 건설을 이뤘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이 약 5억 유로(한화 약 6,500억
원)를 부담했다. 게르기예프가 소요를 제기하면 푸틴과 측근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자원 투입 모델이 문화 단지 조성에
도 적용된다.
그러나 단지 사업 초반부터 공연장 부지로 쓰일 토지가 궁극적으로 고급 주택 건설같이 수익성 높은 상업 용도로 전용될
우려가 제기된다. 부지 조성과 건축에 예상보다 월등히 많은 자금이 들어도 푸틴지인 그룹이 선뜻 나선 배경을 러시아 시
민 사회가 들추긴 어렵다. 음악가-정권-재벌 3박자로 마린스키가 세계 오페라-발레중심지로 웅비하는 과정이 이들의 발전
로드맵이다. 권위주의 정부의 행정력이 강제하는 형태로 그랜드디자인이 추진된다.
엘리트층의 비도덕적 특권이 만연해 문화 권력의 부패 의혹에만 공정의 날을 들이밀기 어렵다. 지난해 독극물 피습을 받은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처럼 러시아를 떠나야 목소리가 커진다. 나발니는 독일에서 “러시아 정권 기득권자의 유럽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을 강조했고 뮌헨 필 감독 게르기예프를 특정해독일 입국 불허를 주장했다. 예술적 유토피아건설을 미명으로 정치권과의 결탁을 불사한게르기예프 행보를 서방역시 ‘러시아적 정체성 보존’을 명분으로 방관한 건 아닌지, 대(對) 러시아 문화 예술 교류 사업을 앞두고 돌아봐야 한다.
투명성이 필요한 때
지난해 12월 트루트녜프 부총리는 블라디보스토크 문화 단지 조성 사업이 답보에 빠진 이유를 파악했다. 본토와 섬을 잇는 교량 건설이 지지부진하지만 건설사가 푸틴 측근 회사다. 어디서 돈이 새는지 확인할 사람도 푸틴 측근이고 푸틴의 토목 사업을 추진하는 이도 푸틴 측근이다. 어디에서나 장기 독재가 이어지면 건설 관련 복마전은 익숙한 풍경이 된다. 헌법 개정으로 건강이 허락한다면 푸틴은 이론상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21세기 러시아가 이룩한 소치 올림픽,러시아 월드컵 개최, 볼쇼이·마린스키극장의 현대화, 문화 단지 조성 사업 모두 기름과 가스 힘에서 비롯됐다. 문화단지 조성이 끝나면 각 지방정부는 세금으로 예술지구를 운영해야 한다. 푸틴 측근에서 나온 돈줄이 지방의 볼쇼이·마린스키 극장의 건사에도 쓰일지 전망은 어렵다.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이 끝나면 러시아 정부는 또 다른 러시아 시즌스 파트너를 찾을 것이다. 양질의 수교 기념 공연을 보는 동안 우리는 차이콥스키를 떠올리는 동시에 러시아 사회의 투명성을 촉구하는 세계 시민 의식도 함께 고취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글 한정호(에투알클래식 & 컨설팅 대표)
사진 러시아 시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