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 ISSUE
지휘자 정치용 & 작곡가 장석진
창작곡의 생로병사
제12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지휘자 정치용·작곡가 장석진에게 묻고 듣다
정나라/경기필
한국에서 윤이상(1917~1995)의 작품 초연을 가장 많이 한 지휘자, 양악·국악관현악곡부터 현대음악의 최전선인 영화음악까지 두루 작곡하는 작곡가가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에서 만난다. 오는 2월 25일 정치용/코리안심포니는 장석진(1975~)의 생황 협주곡 ‘Alexander Friedmann: Expansion of space’를 초연한다.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는 많은 이들에게 ‘아창제’라는 축약된 브랜드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창작음악제추진위원회가 2007년부터 개최하는 기획연주회로, 공모를 통해 선정한 국내 작곡가의 창작관현악곡을 소개한다. 지금까지 아창제에서 선보인 작품은 총 141곡. 매회 열 곡 이상 악보 밖을 나와 관객과 만난 셈이다.
아창제 공식 유튜브 채널(@ARKO)에 접속하면 그간 연주된 창작관현악곡을 들어볼 수 있다. 서양 오케스트라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작품이 있고, 연주 길이는 20분 안팎이다.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폭과 너비가 놀랍다. 내로라하는 작곡가는 모두 한 번씩 아창제를 거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음악계의 주목을 받는 신진 작곡가 최재혁(1994~/제11회 양악부문)·장태평(1986~/제11회 국악부문), 활발한 창작을 펼치는 중견 작곡가 김대성(1967~/제5·6·8회 국악부문·제12회 양악부문(위촉))·민영치(1970~/제6회 국악부문), 한국창작음악에 획을 그은 원로 작곡가 박준상(1938~/제9·10회 양악부문·제12회 국악부문) 등이 포진해있다. 소재와 주제도 다종다양하다. 합창과 진도씻김굿을 한데 담거나 국악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펼쳐내고, 장구와 서양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는 식이다.
발표의 기회 제공이 먼저
아창제 실황 영상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시청이 가능하다. 창작 연주에 대한 아카이브도 탄탄한 편이다. 이를 통해 한국 관현악 변화의 지형도도 읽을 수 있다. 2013년부터 아창제에 연주자와 심의위원으로 참여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휘자 정치용(1957~)은 그 흐름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지금 만들어지고 연주되는 한국창작관현악곡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눠볼 수 있다. 한국적인 느낌을 표현하려는 첫 번째 유형이 있고, 그것과 무관하게 관현악 기법에 몰두하는 두 번째 유형이 있다. 그 중간에 위치하는 세 번째 유형은 한국적인 소재나 느낌에 현대음악의 어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때로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시 말해 획기적인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곡들도 보인다. 그렇다면 아창제는 무용한 것 아닌가? 정치용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작곡가, 특히 한국 작곡가는 ‘지금 시대에 내가 이런 곡을 써도 되는가’라는 자문은 물론이고 독일·미국·유럽의 경향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걸 쫓아가려는 작곡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방향성이란, 뛰어난 작곡가가 나왔을 때 그가 잡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창제를 통해서 하려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어떤 작곡가가 눈에 띌만한 작업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고전음악과 낭만음악의 구분은 베토벤이라는 걸출한 작곡가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아창제를 통해 발표되고 축적된 창작곡은 이 시대에 만들어지는 우리 음악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할 테다.
한국적 창작의 움직임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것은 기껏해야 백 년 전이다. 주로 서양에서 온 선교사를 통해 전파됐다. 창작음악의 역사는 보다 짧다. 20세기 초 서양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급급했던 탓에, 그 과정은 ‘수용’보다는 ‘수입’에 가까웠다. 지휘로 전공을 바꾸기 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정치용은 1970~80년대 당시 한국 작곡계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작곡과 교수들은 독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이 곡을 써 가면 독일에서는 지금 이러저러한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적 작곡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양 오케스트라가 1950년대부터 들어왔다. 이때부터 한국적인 작품이 발전했다면, 우리에게도 대한민국의 감성이 살아있는 작곡가가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 안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작곡 기조가 생겨난 것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용처럼 창작을 한국음악계의 견고한 토대로서 중요하게 인식한 세대가 교편을 잡으면서다.
작곡가 장석진(1975~)은 이러한 학풍이 점점 자리잡던 시기에 공부했다. 원래도 관심은 있었다. 외할머니 방에 놓여있던 가야금에 호기심이 일어 학부에서 부전공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한국적인 것이 꼭 전통적일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 아래 본격적으로 작곡에 한국적 요소를 대입하기 시작했다. 가야금을 통해 창작곡을 발표한 황병기(1936~2018)의 음반도 학생 시절 닳도록 들었다. 클래식 음악과 현대음악을 전공하고도 오늘날 국악 연주자들에게 사랑받는 국악관현악곡을 만드는 작곡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느 날 당시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황준연 단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위촉곡을 요청할 새로운 작곡가를 찾다가 내가 유튜브에 올려둔 영화음악 작품을 보고 연락하셨다고 했다. 액션영화 스타일에 쓰일 법한 음악이었다. 생전 국악 연주를 위한 곡은 써본 적이 없었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서적과 악보를 구입했다. 그렇게 공부해가며 완성한 작품이 국악관현악곡 ‘어느 날’(2017)이다. 당시 악보를 받아든 거문고 수석이 연주하기 어렵겠다고 했지만, 다음날 만나서 직접 설명하니 쉽게 수긍했다. 이처럼 작곡가가 연주자를 설득할 만큼 각각의 악기로만 낼 수 있는 표현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연주자들이 작품을 좋아해 준 덕분에 이 곡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열 곡 넘는 국악관현악곡을 쓸 수 있었다.”
아창제와 작곡 콩쿠르의 차이
장석진의 ‘어느 날’(2017)은 제10회 아창제 국악부문에서도 연주됐다. 이번 아창제에는 양악부문으로 지원해 당선됐다. 그의 창작욕은 소위 말하는 순수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석진은 런던음악과미디어대학에서 영화음악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다수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드라마 OST를 작곡했다. 인기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음악도 만들었다.
현시대에 영화와 게임 두 분야는 작곡가들이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장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두루 활동하기까지는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 어법을 만들 지난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터. 장석진은 연주를 통해 바탕을 다져나갔다. 작품이 ‘실제로 연주될 때’와 ‘악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의 차이를 체감하며, 발표된 작품을 수정해 완성도를 높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주를 하려고 했지만,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20여 년 전, 내가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던 때만 해도 아창제처럼 공모를 통한 창작곡 연주회가 드물었다. 즉, 순수예술로서의 음악을 음악적인 가치로 공정하게 평가받으며 세상에 내놓을 기회가 없었다. 작곡 콩쿠르는 있었지만, 내 음악은 소위 ‘콩쿠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정해진 틀대로 써야 했는데, 그보다 나만의 언어를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곡은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내게 글쓰기와 비슷한 행위다.”
작은 틈새라도 있는 길과 막다른 길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선택지다. 이 점에서 아창제는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통로이자 가능성을 제시한다. 재연작도 접수할 수 있게 열어둔 것은 아창제와 여타 작곡 콩쿠르를 가르는 또 다른 특징. 초연뿐 아니라 재연의 기회 또한 창작음악 발전에 필수적이다. 작곡가에겐 연주를 통해 작품을 다듬고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을 시간이, 청중에겐 작품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석진은 “초연이 창작곡을 쓸 수 있게 한다면, 재연은 작곡을 계속할 힘을 준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작품에 생명력 불어넣는 재연
아창제에서 선보인 141곡 중, 이후 한 번이라도 재연된 작품은 2019년 기준 39곡에 불과하다. 30%에도 채 못 미치는 수치다. 그만큼 초연 이후 대다수의 창작곡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한국 작곡가의 창작곡을 실연하는 연주단체에 연주비와 작품 사용료를 지원하는 지속연주지원 사업을 이어오고 있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향악단들의 축제인 교향악축제에서도 한국 작곡가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지점에서 정치용은 창작음악 활성화는 “연주자의 안목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강조한다.
결국 청중과 만나기 위해서는 연주자의 선택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 모든 곡이 직면한 운명이자 순리다. 수많은 창작곡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했을, 어쩌면 그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을 정치용은 살아남는 작품의 덕목은 ‘연주 효과’라고 말한다.
“청중이 듣기에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효과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살아남는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윤이상의 작품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자주 연주되진 않지만, 일단 연주했을 때 분명한 효과가 나타난다. 연주자가 선호하는 작품 역시 효과가 좋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효과만 노리는 가벼운 음악은 연주자가 다 알아차린다. 그 안에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추상적인 음악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노련한 작곡가에게도 난해한 작업이다. 이를 두고 장석진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시작한 작곡인데, 그게 청중에게까지 제대로 전해지는지 의문이었다. 음악계는 점점 관객에게 친절해지라고 요구하고, 음악에 감상을 돕는다는 명목하에 장황한 안내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한때 어떤 음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만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음악 외적인 이야기는 불필요하고, 부끄럽고, 진실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절대음악이 그러하듯 작품 제목도 단순하게 교향곡 1번, 2번 이렇게 붙이곤 했다. 최근에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쓰고 싶어서 조성 중심의 음악을 깊게 공부한 적도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지 기법의 표현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음악에서 기법은 하나의 요소이지, 중심은 아니다.”
결국엔 청중이다
이번 아창제 양악부문 연주회에서 초연되는 장석진의 생황 협주곡 ‘Alexander Friedmann: Expansion of space’는 환경오염에 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다. 제목의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은 우주의 확장성 이론을 제기한 우주학자다. 장석진은 우주를 부유하는 상상력을 곡에 녹여 넣었다. “폭발하고 생성하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
지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작품의 메시지를 전했다.
음악적으로는 생황과 오케스트라의 2중주 형식으로 음향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생황의 음색이 신시사이저와 닮았다는 데 착안해, 소리에 변화를 주는 신시사이저의 원리를 오케스트라와 생황의 조합에 대입시켰다. 정치용이 이끄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예정이다. 정치용은 “올해는 순수 관현악곡보다 협주곡이 많다. 협주적 양식의 음악적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석진 작곡가의 작품은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라며 기대감을 조성했다. 2018년부터 한국창작음악제추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 재임 중인 이건용의 저서 ‘현대음악강의’(2011)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있다. ‘음의 세계가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수성 또한 무한히 확장될 경우의 얘기다. 우리의 감수성은 어떠한가. 우리는 감수성을 통하여 음악을 경험할 수 있지만 감수성은 그냥 생기지 않고 음악의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다.’
객석에 새로운 음악에 귀 기울이는 청중이 자리할 때, 비로소 한국창작음악은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 제12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제12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국악 부문 | 원일/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2월 3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양악 부문 | 정치용/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2월 25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조은화 장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악학궤범 서문에서 언급된 ‘자연’에 관한 작품. ‘악(樂)’은 ‘허에서 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봤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진 장구와 서양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제6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양악부문
2018년 11월 17일 김경희/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장석진 ‘어느 날’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의해 위촉·초연된 작품. 어린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 거대한 도시를 경험하고 돌아온다는 줄거리의 동화 ‘어느 날’을 토대로 한다. 30분 분량의 원곡 중 일부를 발췌해 모음곡 형태로 재구성했다.
제 10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국악부문
2015년 1월 24일 최희준/KBS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