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1
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한국음악사에서 음악잡지는 단순한 역할을 벗어나 학술지와 자료집, 역사적 의미를 겸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객석’ 창간 기념호를 맞아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음악잡지의 100년사를 정리해본다
1910~1920년대 홍난파와 음악잡지의 출현
『음악계』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로 기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작곡가 홍난파(1897~1941)가 발행한 것으로 계간지였다가 월간지로 바뀌었다. 1918년에 도쿄로 유학을 떠난 홍난파는 1927년에 또 한번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이를 계기로 『음악계』는 7호를 끝으로 한다. 조선 음악계의 과거와 장래를 논하거나, 음악 해설과 평, 알기 쉬운 음악 상식 등이 실렸다. 홍난파가 『음악계』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광』➊의 발간 경력 덕분이었다. 1차 도쿄 유학(1918~1919) 시기에 도쿄의 조선유학생악우회가 발간한 잡지다. 음악에 집중한 『음악계』와 달리 『삼광』은 종합 예술지였다. 음악, 미술, 문학에 관한 기사를 취급했고, 제호인 ‘삼광(三光)’은 세 분야의 예술에서 빛이 되겠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일본을 통한 서구 문화의 세례를 잔뜩 받은 홍난파의 다종다양한 관심이 이 책의 구성과 목차를 만들었다. 홍난파와 시인 황석우가 주요 필진이었다. 근대 예술의 전문가가 극도로 빈약했던 당시, 홍난파는 여러 필명으로 지면을 채웠다. ‘ㅎ·ㄴ·ㅍ’, ‘H·Y·H’, ‘ㅎ·ㅇ·ㅎ’, ‘도·레·미’ 등이 그의 필명이었다. 『삼광』은 홍난파의 귀국으로 인해 2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최남선이 1908년에 발행한 『소년』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였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종합 예술지로서의 『삼광』의 출현은 매우 빠른 행보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음악과 시』➋는 1930년 8월에 창간됐다. 50쪽 분량의 잡지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문단에서 성행한 카프 열풍이 음악계에 준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카프는 1927년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정치 투쟁을 강조하는 신강령을 채택했는데, 『음악과 시』는 음악이야말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음악과 시』는 창간과 동시에 폐간됐다. 1934년에는 『음악』➌이 창간됐다. “조선에 서양음악이 수입된 지 60여 성상(星霜)”이 되었고, “남부끄럽지 아니한 연주가와 작곡가를 산출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음악에 대한 기관지와 전조선음악계를 대표할 조직체가 없음으로 전조선 내외 음악가의 후원으로 조선음악계를 대표할 기괸지 음악(音樂)을 창간코저 음악사(社)에서 준비 중”이라고 기록(조선일보 1934.5.26)되고 있다. 이를 발행한 최성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상과대학 재학 시절, 서클인 연희전문사중창단에서 테너로 활동했다. 중창단의 인기는 오늘날 팬텀싱어와도 같았다. 졸업 후 최성두는 경성 본정통(지금 충무로)에서 악기점과 음악사(音樂社)를 운영했다. 『음악』은 일본에서 초빙하는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1936년, 음악평론가 김관이 『음악평론』➍을 창간했다. “김관 씨의 편집에 의한 음악 전문잡지 ‘음악평론’이 4월 초에 창간되리라 하는데 사무소는 경성부 다옥정(茶屋町) 5”(동아일보 1936.3.24)이라는 기사가 잡지의 출간을 알렸다. 『음악』과 『음악평론』은 종합예술지가 아닌 음악에 중심을 두었다. 『음악』은 공연 보도를 중심으로 했다. 1936년 4·5월, 두 차례에 걸쳐 발행된 『음악평론』은 공연은 물론 방송과 음악, 교육, 음악과 시 등을 통해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살폈다. “음악평론의 1930년대를 추적한다는 것은 평론가 김관의 성장과 그 한계를 보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행인 김관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평론가였다. 특히 조선에 토착화되지 않는 서양음악을 물신(物神)하는 서구 중심적 사고관을 타파하고, 음악에 대한 민족적·민중적 입장을 수렴하고 이념화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1940년대 해방공간
1945년 광복 이전의 음악 출판물들은 음악교과서와 창가집이 주종을 이루었고, 창작가곡집, 동요집, 악전, 찬송가집 등이 소수를 이루었다. 그나마 대중적 수요가 거의 없는 전문 음악교재나 악보는 일본에서 출판된 것을 직수입하여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쓴 음악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나온 그 양은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것보다 많았고, 내용도 다양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우익의 대립과 논조는 이러한 잡지와 기사물들을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문학·미술·연극·영화 등에 비해 음악은 사회 참여적 자세보다 음악가 개개인이 추구하는 음악관에 따라 잡지들이 성향을 갖춰나갔다. 『예술통신』은 해방공간의 예술전문 일간지였다. 1945년 10월 2일 창간되어 1947년 3월 2일 412호까지 발행하고, 3월 11일부터는 문화일보(현 문화일보의 전신이 아님)로 제호를 바꿔서 발행되었다. 『예술통신』은 영화를 비롯하여 출판,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크다. 1946년에 창간된 『음악주보』➎도 『예술통신』과 같은 신문 모양새(8절지 1매)였다. 1946년 금수현(금난새 부친)이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경남음악협회가 발간한 『음악주보』는 해방 후 처음으로 나온 음악전문 간행물이다. 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상남도의 각 학교에 배부하였다. 월 3원의 유가지(有價紙)였음에도 인기가 많아 매주 2천부를 찍었다고 한다. 금수현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51년 부산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도서와 악보를 출판했고, 1970년 월간 『음악』을 창간했다. 1949년 9월, 서울교향악협회는 『필하아모니』➏를 발행했다. 서울교향악협회는 “정부 당국자와 민간 유지들이 대동단결하야 종전의 서울교향악단을 중심으로” 조직한 협회였다(조선일보 1948.11.16). 2년간 간행된 책의 발행인은 김생려(지휘), 주간은 김성태(작곡)였다. 서울교향악단은 1945년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이 재발족한 것이고, 현재 서울시교향악단의 전신이기도 하다.
1950년대 전쟁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음악계는 위축됐다. 음악가들은 흩어지거나 군대의 문화선전대 등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10월, 소속 대원 120명 전원을 해군문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정훈음악대도 재발족되었다. 오늘날 서울시향은 정훈음악대를 전신으로도 삼는다. 따라서 여기서 발행한 『정훈음악』➐은 오늘날 서울시향의 월간지 『SPO』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전쟁 후, 1955년 국민음악연구회가 『음악』을 발간했으나 2년 만에 폐간했다. 하지만 이강염이 운영한 국민음악연구회는 음악출판사로 『고등음악통론』(김형근·1957), 『한국음악연구』(이혜구·1957), 『초등화성학』(박태준·1958), 『세계음악사』(이강염·1959) 등을 발행하며 음악 출판을 선도해나갔다. 1958년 음악문화사(社)가 『음악문화』➑를 발간했고, 1959년 신문화사에서 『음악문화』를 창간했다.
1960년대 틀이 형성되는 음악계
1960년대는 현 분단체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지배 시스템이 비롯된 기원이며, 계급구조와 문화구조, 이데올로기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한국 사회 근대성의 구조가 형성되는 출발점이다. 지금의 음악계도 당시의 공연과 교육 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음악 천재의 등장에 환호하기 시작했고, 콩쿠르가 시작되고, 유학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명곡해설 전집류이다. 이강염 편저 『세계명곡해설대사전』(국민음악연구원), 김형주의 『명곡해설전서』(현대악보사), 나상신 편저 『명곡해설대사전』(호악사) 등이 이 시대에 쏟아져 나왔다. 교양인-되기의 유행 속에서 1964년 음악세계사에서 ‘음악인·음악 애호가를 위한 월간지’를 표방하며 월간 『음악세계』를 창간했다. 『음악세계』➒는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해외 음악가들의 소식을 발 빠르게 실어 날랐다. 1965년 국민음악연구회에서 『음악생활』➓을 발행했으나 1년 만에 폐간되었다.
1970년대 공연과 레코드 붐
창간과 폐간을 반복하던 음악잡지들이 체제를 갖추고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1970년 7월, 금수현이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월간음악』은 논문 형식의 글과 번역물도 실었고, 한국음악론에 관한 지면도 많이 할애했다. 1973년에 『월간FM』과 『월간 스테레오』가 창간되었다. 제호처럼 라디오와 오디오 기기를 통한 음악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둔 두 잡지는 1960년 초반부터 시작된 클래식 음반 판매와 대중매체를 통한 음악감상의 소비가 1970년대 들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국악 순수음악 대중음악 팝송을 망라하는 『월간FM』 (…) 창간호는 「작곡가가 말하는 우리 작곡계의 전망과 꿈」을 비롯해 「FM에 관한 기호 상식」 「세계 명연주가 소개」 등”(동아일보 1974.2.27)을 담았다. 『월간FM』은 1976년 12월 제호를 『음악세계』로 변경했고, 1984년 중앙일보사로 운영권이 넘어가며 대중음악지로 바뀌었다. 『월간 스테레오』는 『월간음악』의 자매지로, 신간 레코드와 오디오 기기 소개가 주를 이루었다. 1978년에 창간된 『레코드음악』도 ‘레코드·오디오·음악 전문지’를 표방하며, “창간호엔 「레코오드의 올바른 취급법」 「오디오란 무엇인가」 「마르타 아르게리치」 「라자르 베르만」 「레나드 번스타인」 등 세계 저명 음악가들의 활동상 등”(동아일보 1978.2.27)을 소개했다. 1972년 『오디오』가 창간되기도 했다.
1980년대 잡지 춘추전국시대와 음악잡지
“올 들어 1백80개 잡지가 새로 창간, 모두 1천 6백 24종의 정기간행물이 경합을 벌이고 있어 잡지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1백84종에 이어 쏟아진 잡지 창간은 레저, 과학기술, 경제, 음악, 건강, 미술 등 전문분야별로 폭넓게 확산돼 잡지 전문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경향신문 1984.12.25) “전문잡지가 늘고 있는 것은 우릭사회가 그만큼 지적,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줘 반가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매일경제 1984.4.4) 사람들의 다양해진 취향과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여유는 다종다양한 잡지 시대를 열었다. 1982년 9월 『피아노 음악』, 1984년 3월 『객석』, 같은 해 4월 『음악동아』가 창간됐다. “음악의 경우 종래의 『월간음악』 『피아노음악』 『음악세계』 등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가족 잡지 같은 성격을 띠어 왔다. 그러나 『객석』 『음악동아』 등은 일반 애호가들을 독자층으로 하고 있어, 예술가와 일반 독자들과의 사이에 보다 폭 넓은 교류 무대를 마련해 줄듯하다”(경향신문 1984.2.13). 『객석』은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적음으로써, 음악 전문잡지로서 초석을 다졌다. “‘사람의 겉을 다스리는 것은 예(禮)이고, 사람의 안을 다스리는 것은 樂(音樂)’이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이어오기까지 음악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 있읍니다. 많은 분들의 지도와 선각자들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 음악·공연예술지 ‘객석’을 창간하게 된 것도 예음이 지닌 뜻과 우리의 음악·공연문화와의 조화를 함께 살펴보고 싶은 의지입니다.” 창간호에는 윤이상, 윤정희와 바렌보임, 한국 최초의 중공 음악기행 등을 다루었고, 특별부록으로 오디오테스팅 테이프와 서울의 문화지도를 제공했다. 1985년 세광음악출판사에서 월간 『음악교육』을 창간했고, 1989년 『음악저널』이 창간되었다. 오디오의 보급과 유행은 1983년 10월 『오디오와 레코드』, 1987년 『스테레오 음악』으로 이어졌다. 오디오·레코드 전문잡지는 일종의 유행이 되어 “2만~3만부의 고정독자를 확보, 착실하게 부수를 늘”렸고, “이들 잡지의 성공에 힘입어 『계간 스테레오』 『프로사운드』 등 계간지와 『스테레오 가이드』 『오디오월드』 『하이비』 등 연간지”가 창간을 앞두기도 했다(경향신문 1989.3.2). 일간지는 ‘12월의 음악잡지’류의 기사(동아일보 1984.11.26)를 통해 그달에 발간되는 음악잡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1981년 서울대 음대에 이론전공이 신설되며 전문 평론가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잡지는 이들의 활동장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음악잡지 전성시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세계 여행자유화가 시작되고, 1990년대가 되어 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화의 문과 보폭이 커졌다. 해외 유학생과 내한하는 음악가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CD는 고가의 미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감상의 주요 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음악잡지의 부록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이러한 독자들의 성향에 맞춰 다종다양한 잡지가 발간되었다. 1994년 1월 『월간음악』이 복간(재창간)되고, 『레코드리뷰』가 창간되었다. 『월간음악』은 1970년에 창간됐으나 263호로 종간했다가 통권 제264호로 복간된 것. “잡지 한권 값은 6천 5백원으로 기존 잡지와 비슷하지만 부록으로 ‘도이치 그라모폰 콤팩트디스크’ 한 장을 끼워주”었는데, “음반의 국내 최저 보급가가 7천 5백원선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판매 방식”(한겨레 1994.1.16)이었다. 1995년 신년호에는 ‘재창간 1주년 특별부록’으로 30장의 CD를 제공하기도 했다. 악기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피아노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1995년 『리틀 피아노』가 발간되기도 했다. 1982년 발간된 『피아노음악』의 자매지로 음연(音硏)에서 발행했다. 1984년 창간한 『음악동아』는 판형을 바꾸어 1995년 1월호를 내어 제2창간을 단행했다. 이 호에는 영화예술 1백년을 기념해 최신 영화음악의 진수만을 골라 CD로 제작·배포했다. 1995년 『클래식 피플』, 『음악춘추』, 『레코드 포럼』이 창간되었다. 『레코드 포럼』은 레코드 전문지 디아파종(프랑스) 등과 계약을 맺고 각종 정보를 담았다. 1996년 『고전음악』이 창간됐다. 격월간 클래식음악 비평전문지를 표방했으나 창간호 이후에 발행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뮤지카 노바』가 창간되었다. 전문가들의 영역으로만 구축되다시피한 20세기 현대음악을 위한 격월간지로 존 케이지부터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를 다루기도 했다. 1997년 월간 『CD가이드』가 창간되었다. 오늘날 공연기획사로 잘 알려진 마스트미디어는 현악전문지 월간 『the Strad』 한국판을, 오순화(비올라·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비올라 전문지 『올라 비올라』를 창간하기도 했다.
2000~2010년대 달라진 음악정보 환경과 미래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문이 넓어지고, 소비의 방식도 다양해진 1990년대를 지나 2000년이 되면서 인터넷 문화는 강력한 정보의 홍수를 만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이 오갔다. 그동안 책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던 독자를 능동적 정보 탐색자와 편집자로 만들어주는 인터넷과 ‘검색 문화’ 등이 음악을 둘러싼 책과 읽기 문화에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2001년 영국의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의 한국판이 나왔다. 영어판 번역기사와 국내기사를 각각 섞은 비율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에듀클래식』은 2016년 월간 『REVIEW』로 재창간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으로 인한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잡지의 운명은 1980~90년대보다 폭과 양이 대폭 축소되었다. 과거에 전성기를 자랑하던 음악잡지들은 “최근 대형 음반사들이 새 음반 수입과 제작을 줄이면서 광고 수급의 차질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1.2.25). 2002년 『CODA』가 창간되었고, 월간 『the Strad』를 운영하던 마스트미디어는 2003년 『인터내셔널 피아노』과 『콰이어어&오르간』 한국판을 펴냈다. 이후 음악잡지의 창간은 뜸했고, 정보의 공백은 인터넷이 대신했다. 2015년 『La Musica』가 무가지로 창간되었고, 2016년 『월간 색소폰』, 2019년 『Classic J』가 세상에 나왔다. 오디오를 통한 음악감상의 환경도 인터넷과 유튜브,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한 가운데 2020년 일본 오디오 매거진 『Audio Accessory』 한국판, 무크지 『풍월한담』이 창간되었다. 잡지 속 종이에는 당대의 문화, 사람들의 취향,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스며있다. 지금 이 시대의 음악잡지는 녹록치 않은 걸음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시대의 빛을 받고 굴절하여 문화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빛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믿음 하에 『객석』은 미래를 책임질 한국의 젊은 음악가와 예술가들의 활동을 깊이 있게 기록하여 아카이브를 채우고, 글로벌 시대의 문화예술 전지기지가 되고자 전세계 음악가-기획자-공연장을 잇는 미래적 정보망으로 활약 중이다. 한국 음악잡지 100년의 전통과 역사를 껴안고, 도래할 미래를 예견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