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국악관현악단의 ‘부지휘자’들을 만나다
국악관현악단의 ‘부지휘자’들을 만나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이승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장태평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박상현
지휘자들의 꿈, 국악관현악단의 미래
세 지휘자는 각자 다른 이유로 꿈을 택했다. 박상현은 대학교 3학년 때를 떠올린다. 거문고 전공자였던 그는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연습하다가 왠지 지휘를 하면 큰 연습실을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피리 전공자였던 이승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연주자 체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져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장태평이 지휘자를 꿈꾼 건 좀 더 어린 나이였다. 열두 살, 협연하던 중 지휘자에게 지휘를 하려면 무엇을 공부하냐고 물었다. 지휘자는 껄껄 웃으며 작곡 공부부터 시작하라고 알려주었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이들은 지금 한 궤도에 있다. 세 지휘자는 현재 주요 국악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활약 중이다. 서양음악에서 ‘부지휘자’라는 직함은 친숙하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1943년 뉴욕 필의 부지휘자에 임명된 직후 브루노 발터의 대체 지휘자로 무대에 올라 스타덤을 누렸다. 에도 데 바르트는 뉴욕 필에서 번스타인의 부지휘자로 일하던 중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처럼 ‘부지휘자 시절’은 한 악단을 온전히 이끌기 위한 힘을 축적하는 시기다.
서양 오케스트라의 많은 것을 차용한 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 역시 그러할까 궁금하여 세 명의 지휘자를 모았다. 시즌 준비에 한창인 이들은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다.
작곡도 ‘국악작곡’이 있듯이, 지휘에도 ‘국악지휘’라는 명칭이 붙곤 한다. ‘지휘’와 ‘국악지휘’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박상현 ‘국악’에 특화된, ‘국악’을 더 잘 아는 지휘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승훤 ‘지휘’의 사전적 정의는 ‘2인 이상 연주자의 앙상블을 정돈하고 해석을 통일하는 행위’다. 장르마다 음악의 미학이 다르더라도 관현악이라는 형태를 지녔다는 점에서 지휘가 갖는 의미는 동일하다. 국악은 전공악기, 장구 반주, 정악과 민속악에 대한 폭 넓은 공부 후 지휘의 길로 들어선다. 국악관현악은 초연 무대가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따라서 지휘자 해석과 연주자 노력이 결합된 공동창작 행위라 볼 수 있겠다.
장태평 나는 지휘와 함께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곡이 그러하듯 지휘 또한 우리 고유 방식이 아니다. 국악관현악 역사가 짧은 만큼 답을 내리기에 주저함이 들지만, 확실한 것은 작곡도 지휘도 양악과 국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김순남(1917~1983)이 그러했듯, 또 윤이상(1917~1995)이 그러했듯 이같은 현상은 근현대사 안에서 이어져 왔다. ‘다름’을 명확히 인지하되, ‘경계’를 아우르는 감각이 필요하다.
현재 ‘부지휘자’로 몸 담고 있는 악단과의 첫 인연은?
박상현 2013년에 교류음악회에 선 것이 첫 인연이다. 오디션은 1차 서류와 2차 면접 전형을 통해 이루어졌고, 3차 최종 면접을 통해 합격했다.
이승훤 2019년 9월 국립국악관현악단 ‘정오의 음악회’를 지휘했다. 경찰국악대의 대장(지휘자)을 그만두려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먼저 부지휘자에 관한 의향을 물었다. 김성진 예술감독 부임 후 부지휘자 인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연주 성과, 단원과의 교감 능력 등이 시험대에 올랐던 거 같다.
장태평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는 2020년 2월 부지휘자 공모를 거쳐 함께하고 있다. 면접이 기억에 남는다. 원일 예술감독과는 일면식이 없었는데도 편안하게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결혼식 이틀 전에 부지휘자 공모 발표가 나서 겹경사였다.
부지휘자 시스템을 살피다
현재 각 국악관현악단에서 부지휘자 시스템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궁금하다. 사실 부지휘자의 노출 빈도는 서양음악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편인데.
박상현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초연 작품이 많이 오르는 악단이다. 그래서 연습에선 단원들의 악보 리딩을 담당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획 공연을 지휘한다.
이승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예술감독을 보좌하여 ‘청소년 음악회’ ‘정오의 음악회’ 등을 지휘한다. 리허설에는 음향 모니터링을 통해 지휘자에게 악단 사운드나 강약에 대해 조언한다. 예술감독, 객원 지휘자의 연습에 참관해 음악 해석을 기록하여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도 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1년 단위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기획 단계 초반부터 작품과 작곡가 선정 등 제작 PD와 유기적으로 협업하며 프로그래밍에 참여한다.
장태평 지난 2월 아세안문화원과 기획한 ‘국악으로 듣는 아세안음악회’에서는 작·편곡가로 참여했다. 이외 다양한 정기연주회를 책임지며 자주 노출될 기회를 얻는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지휘자상(像)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서양음악 양식에 맞춰진 지휘자’에 대한 관념의 틀을 깬 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커리어를 쌓는 데에 있어서 현재 ‘부지휘자’라는 위치가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움을 주고 있나?
이승훤 국악계 중심에 있는 악단에서 지휘자라는 직함으로 활동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더구나 거장 지휘자들이 자주 오르는 악단이기에 직접 보고 들으며 공부할 수 있는 것 또한 내실을 다지기에 좋다.
박상현 부지휘자는 악단 경험이 부족한 지휘자가 경험을 쌓는 공식적인 자리라고 생각한다. 음악적으로는 상임 지휘자를 보며 공부할 수 있고, 외적인 부분에서는 악단 운영과 공연 준비 과정을 배울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장태평 오케스트라는 결국은 사람이다. 지금 부지휘자로서의 경험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악단이 ‘이것만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 즉 몸담은 악단에 관한 자랑을 한다면?
장태평 2020년, 경기도립국악단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새로운 공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국악관현악이라는 이름에서 해체된, 눈부신 가능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음악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이승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늘의 신작이 내일의 레퍼토리가 되리라는 신념으로 꾸준히 작품 개발에 힘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악단의 경우 대중성보다 예술성에 치중하면 부담을 느낀다. 우리 악단은 이러한 부담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품 개발의 선두에 서 있다. 이는 국가에 소속된 국립 단체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박상현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서울 시민에게 다채로운 공연을 선사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우리 악단은 정말 연주를 잘한다. 구체적으로 자랑한다면 음악적인 앙상블, 즉 단원 간의 호흡이 잘 맞는 악단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악단의 힘인 것 같다.
이번 부지휘자 임기 중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박상현 ‘정기연주회에 한 번쯤은 서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는데. 오는 4월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신춘음악회-만나다, 봄’(4.1/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 갑자기 오르게 되어 설렌다.
이승훤 올해 9월 재개관을 앞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관현악단이 자연음향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많은 공을 들인 공간이다. 해오름극장 리모델링 기간 동안 주로 공연해 온 롯데콘서트홀에서도 자연음향으로 연주해왔기에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국악관현악은 편성에 대한 음향 모니터링과 연구가 중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재직 기간 동안 자연음향 연주에 대한 토대가 두터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태평 임기 중 이루고 싶은 것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움직임에 든든한 축이 되어 나의 음악적인 해답도 찾아가고 싶다.
국악관현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정치용 지휘자는 지금 만들어지고, 연주되고 있는 창작 관현악곡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누었다. 첫째는 한국적인 느낌을 표현하려는 유형, 둘째는 그것과 무관하게 관현악 기법에 몰두하는 유형, 셋째는 한국적인 소재에 현대음악의 어법을 적용하는 유형이다.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나?
박상현 정치용 지휘자는 나의 스승이다. 스승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개인적인 소견을 더하자면, 어떤 장르의 음악에도 독특한 음악어법이 있다. 앞으로 나오는 창작곡들이 작곡가 개인의 표출이 아닌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길 기대한다.
이승훤 국악관현악이 앞으로 수백 년을 지속하려면 더 많은 창작곡이 나와야 한다. 다만 그러한 시도는 우리의 미학을 단순한 표현 소재로 쓰는 것을 지양하고 본연의 소리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문학과 철학이 결여된 창작음악은 종래에는 단순히 서양음악 형태를 모방하는 음악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장태평 아울러 기존 형태를 과감하게 ‘어지르는’ 작품들도 끊임없이 필요하다. 오케스트라의 형태 또한 여러 모습으로 해체되고 재정립되는 시도가 병행돼야 한다. 그중에는 기존 구성에서 변주하는 타계법, 융합관현악 연구 등 다양한 방향으로 궁극적인 ‘향악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다양한 단체에서 젊은 국악인을 위한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를 꿈꾸는 젊은 음악가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제한되어 있다. 지휘자로 도약하는 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도움받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장태평 2014년 서울시청소년국악단 ‘청춘가악’ 지휘 부문, 2017년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젊은 국악’ 지휘 부문, 2019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청춘, 청어람’ 신진 지휘자 공모에 선정되어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몇 안 되는 기회인만큼 추천이나 특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특히 ‘청춘, 청어람’은 심사 과정부터 오케스트라와 직접 리허설을 진행하며 단원들의 손으로 선정됐다. 당시 나는 이규서 지휘자와 같은 날 연주했다. 리허설을 거치며 단원들은 물론이고 관객에게까지 두 지휘자는 지속적으로 비교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많은 혹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이승훤 도움받은 프로그램으로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정오의 음악회’와 국립부산국악원의 목요상설 연주회가 떠오른다. 전자는 예술감독 부재로 인해 진행한 거였고, 후자는 예술감독의 기획으로 한시적 운영됐다. 개인적인 바람은 공신력 있는 악단의 주최로 국악지휘 콩쿠르가 활성화되고 입상에 따라 정식 데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박상현 나 역시 지휘 콩쿠르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올해 시도한 워크숍이 눈길을 끈다. 자체적으로 공연이 없는 시기를 선택해 원영석 상임 지휘자가 젊은 지휘자들에게 악단과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김성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은 지난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작곡가들을 보면 내 생각과 달라서 속이 터지기도 한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 한 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본다. 국악계에 세대교체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사회 통념상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의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그래야지만 정반합의 발전이 이루어질 테니.
이승훤 고 황병기 명인께서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고 계실 당시 임준희 작곡가에게 “듣기 좋고 어렵지 않지만, 우리의 감성이 녹아있는 수준 있는 음악”이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셨다. 작곡가의 열정과 예술감독의 소신이 만나 ‘어부사시사’라는 대곡이 나온 걸 보면 ‘음악은 기술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기성세대를 통해 배운다.
장태평 나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로 나뉘는 구분이 잘 와닿지 않는다. 현재 세대교체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어중간한 지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 구분보다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받은 영감을 이야기하고 싶다. 경기도립국악단 시절의 체계에 익숙한 단원들은 현재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다. 부지휘자로 들어오기 전 여러 걱정이 있었는데 단원들은 나이·지위를 막론하고 젊은 지휘자를 존중해 준다.
지휘자, 나아가 음악인으로서 앞으로의 꿈은?
이승훤 김춘수 ‘꽃’의 한 구절처럼 누군가에게 특별한 이름으로 기억되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
장태평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실 된 작품을 쓰고, 진실 된 무대를 만들고자 한다.
박상현 80세 정도에 80명 정도가 정단원인 국악관현악단에서 객원 지휘하는 것이 꿈이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극장·경기아트센터·세종문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