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500주년 맞은 조스캥 데프레, 바흐에 앞선 역사, 베일을 벗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6월 21일 9:00 오전

“RECORD COLUMN
서거 500주년 맞은 조스캥 데프레”

서거 500주년 맞은 조스캥 데프레 1440?~1521

바흐에 앞선 역사, 베일을 벗다

브라반트 앙상블

 

 

 

 

 

 

미국의 음악사학자 리처드 태러스킨은 그가 집대성한 ‘옥스퍼드 서양음악사’(2005)에서 작곡가 조스캥 데프레(이하 조스캥)의 영향력을 베토벤과 견줬다. 베토벤 사후 21세기까지가 베토벤의 시대였다면, 이 이전은 조스캥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지난해가 베토벤 탄생 250주년, 올해가 조스캥 사후 500주년이니, 클래식 음악 전후반을 양분한 두 악성이 연달아 기년을 맞은 셈이다.

굳이 베토벤과 비교하지 않아도 오늘날 조스캥의 위상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조스캥의 음악을 잘 몰라도 그가 바로크 이전에 가장 중요한 작곡가란 사실을 잘 안다. 음악사마다 그를 르네상스의 ‘슈퍼스타’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조스캥의 영향력은 그의 음악에서 나올까, 아니면 책에서 나올까. 어느 작곡가나 후대엔 그 자신(삶과 작품), 그리고 평판과 영향, 양 갈래로 설명되기 마련이다. 조스캥은 그 괴리가 누구보다 크다.

 

베일에 싸인 작곡가

조스캥의 삶은 음악을 제외하곤 베일에 가려져 있다. 띄엄띄엄 발견되는 기록의 편린을 얼기설기 엮은 것이 오늘날 그의 전기다. 사실만 나열하면 두세 페이지 분량에 불과하다. 중요 신상정보인 이름, 출생지, 출생연도부터 수수께끼다.

심지어 출생연도는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왔다. 1999년 이전 출판된 책과 음반을 꺼내면 조스캥이 ‘1440년경’ 태어났다고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밀라노 학자 클라우디오 사르토리의 논문(1956)에 근거한 것인데 1998년 미국의 로라 매튜스와 폴 머클리가 반증을 제시하면서 하루아침에 ‘1450년경’으로 뒤집혔다. 일부 학자는 조스캥이 1470년 중반 이후에나 첫 직업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1455년까지 늦춰 잡는다.

출생지도 불명이다.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 지대, 당시 부르고뉴 공국령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오늘날 프랑스 북부 콩데쉬르레스코(작곡가의 사망지)와 50km 떨어진 벨기에 남부 에노 사이 어디쯤이다. 양국이 서로 조스캥을 자국 위인으로 주장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작곡가의 전체 이름은 대체로 프랑스식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prez)로 쓴다. 이름 부분인 조스캥은 여러 문헌에 다양한 철자로 표기되지만 자필 사인을 근거로 ‘Josquin’으로 통일된 상태. 하지만 실제 성은 매튜스-머클리 논문을 통해 르블로이트(Lebloitte)란 사실이 밝혀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조스캥에겐 질(Gilles)이란 아버지 형제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던 질은 1483년 작성한 유언장에 조스캥을 상속인으로 지명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Gilles Lebloitte dit Desprez’로 표기했다. 뒤에 붙은 ‘데프레’(떼어서 ‘데 프레’라고도 씀)는 조부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강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보고 있다.

 

그가 쓴 ‘최초’의 역사

미국 이스트만 음대 교수이자 음악학자인 패트릭 마시는 조스캥의 이력을 다음 여섯 시기로 나눴다. 르네 당주 엑상프로방스 백작령→파리 왕실 성가대(1475경~83)→밀라노 에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가(1484~89)→교황청 성가대(1489~94)→프랑스 왕실(추정)과 이탈리아(1494~1503)→밀라노 페라라 궁정 악장(1503~4)→콩데쉬르레스코의 노트르담 성당(1504~21).

1475년 이전 기록은 전무하기에 그가 어떻게 작곡을 익혔는지 알 수 없다. “조스캥은 요하네스 오케겜(?~1497)의 제자였다”는 16세기 이론가 차를리노를 따라 오케겜에게 직접 배웠거나 그의 악보를 보고 공부했을 것으로 본다. 오케겜이 1497년 사망하자 프랑스 시인 장 몰리네(1435~1507)가 찬미시를 썼고, 조스캥이 여기에 곡을 붙여 그 유명한 애도곡 ‘숲속의 정령이여’를 만든 것으로 미뤄볼 때 둘의 인연이 각별했음은 분명하다. 이 시엔 오케겜의 후계자로서 조스캥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력에 따라 작곡 시기는 초기 견습기(~1483), 중기 성숙기(~1502), 후기 완숙기(~1521)로 거칠게 나뉜다. 견습기의 출발은 샹송으로 여겨진다. 초기 3성부 샹송은 바로 직전 세대인 오케겜과 앙투안 뷔스누아 등 소위 부르고뉴 악파로부터 만개했으니 그들의 영향권 아래 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시대의 정형화된 틀을 깼다.

* 아이소리듬 14∼15세기 초 다성악곡에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을 위해 악곡의 테너 성부 또는 모든 성부가 같은 리듬형을 반복한 작곡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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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성음악을 발전시키고, 음표와 가사의 조화를 이루어

성숙기와 완숙기를 거치면서 조스캥은 다성음악의 성부를 직조하는 방법과 가사와 음표를 연결하는 방법에서 기존 작법들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그 바탕은 당대 작곡 기법을 이해하고 발전시킨 데 있다. 오케겜 시대 일반화된 여러 모방(카논) 기법을 완벽한 정량 카논(3~4성부가 같은 선율에 의거해 서로 다른 빠르기와 화성으로 진행하는 방식)으로까지 활용하는가 하면(미사 ‘무장한 병사’), 모테트에 한물간 포부르동(‘당신 안에서만이’)과 아이소리듬*(‘여성들 속에서 축복받은 당신’)을 사용하기도 했다.

표제의 모음을 추출해 계이름과 대응시켜 정선율을 만드는 ‘소제토 카바토’ 기법(미사 ‘페라라의 헤라클레스’)은 바흐, 슈만, 쇼스타코비치까지 이어진 ‘음악 암호’의 시초가 됐다. 미사 ‘라솔파레미’에서 그 정선율 계이름도 스포르차 추기경에게 한 말 “나를 좀 내버려 두세요(laisse faire moy)”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를 보면 조스캥은 장난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조스캥은 여러 기법을 바탕으로 정선율을 활용한 선율과 선율 간 조화를 극대화했다. 전시대 테너 성부만 부르던 정선율을 다른 성부에도 배당했고, 나아가 원곡으로부터 하나 이상의 선율과 리듬, 심지어 형식까지 차용했다. 다음 세대 주류가 된 패러디 미사를 정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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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성음악에서 작곡가들이 정선율을 사용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작곡가는 곡에 통일성을 부여할 선율이 필요했다. 수용자 측면에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선율을 새 미사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속된 가사의 세속 음악 선율이 성스러운 통상 미사와 연결될 때 그것을 알아차린 청중이 느꼈을 반전의 쾌감은 실제 당대 문헌에도 나타나 있다.

조스캥은 가사와 멜로디 관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각성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승천하는”이란 가사엔 상승 음형, “땅에는 평화”엔 하강 음형을 배치하는 식이다. 또 AB, 대비되는 내용의 가사가 이어질 때 A와 B를 서로 다른 성부에 배치해 극적 효과를 높이고 가사를 더 돋보이게 했다. 라수스가 16세기 후반 완성한 ‘무지카 레제르바타’ 양식의 선구자인 셈이다.

작곡가이기도 했던 종교개혁가 루터는 1538년 글에서 “조스캥이야말로 음표의 주인이다. 다른 작곡가들은 음표가 시키는 대로 따른다”라고 극찬했는데, 오늘날 조스캥의 위대함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말이 됐다. 독일의 저명한 조스캥 학자인 헬무트 오스트호프는 “조스캥은 기욤 뒤파이에서 오케겜으로 이어지는 북부 유럽의 다성음악과, 트레첸토를 지나 발전한 이탈리아의 호모포니, 두 전통을 융합한 작곡가”라고 평가했다. 음표와 음표, 가사와 음표의 융화, 그를 통한 세속과 종교의 융화는 르네상스 시대정신의 구현이기도 했다. 이 같은 특징은 한 세대 이전의 오케겜이나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야코프 오브레히트, 하인리히 이삭의 작품에도 나타나지만 조스캥만큼 일관성 있고 집약적이며 양적으로 풍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짝퉁’까지 양산한 인기

이탈리아의 페트루치가 1501년 최초로 상업적인 악보 출판을 시작했을 때, 가장 혜택을 본 작곡가도 조스캥이었다. 페트루치는 연달아 발간한 샹송집, 미사집의 첫 장을 조스캥의 작품으로 장식함으로써 조스캥이 당대를 대표하고 작곡가란 점을 인정했다.

1502년 발간한 조스캥 미사집은 처음으로 한 명의 작곡가만을 위한 악보집인데 하도 잘 팔려서 이후 2권이 더 나왔다. 유명세 탓인지 조스캥 사후 그를 사칭한 작품이 양산돼서 진품의 3배가 넘는다는 말도 나왔다. 루터가 “조스캥은 그가 죽은 뒤에 더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비아냥거렸을 정도다. 네덜란드 음악협회가 최근 개정한 ‘뉴 조스캥 에디션’에 따르면 진품은 미사 18편, 모테트 53편, 샹송 72편이다. 미사 단악장이나 기존 작품에 다른 가사를 붙인 작품(콘트라팍툼)은 뺀 숫자다.

그의 유산은 16~17세기 유럽 음악을 그의 영향권 아래 두게 했다. 그의 모테트와 샹송은 다음 세대 무려 24개의 패러디 미사에 모티브가 됐다. 가까이는 동시대 장 무통(1459~1522), 자크 아르카델트(1507~1568), 직계 제자인 아드리안 빌라르트(1480~1562)서부터 치프리아노 데 로레(1516~1565), 올란드 데 라수스(1532~1594), 팔레스트리나(1525~1594)를 거쳐 멀게는 스페인의 토마스 루이 데 빅토리아(1548~1611)까지, 조스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작곡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음반으로 부활한 조스캥 미사 음악

음악은 계속 진보했다. 바로크, 고전파, 낭만파를 거치면서 훨씬 인간 친화적인 선율과 화성이 나왔다. 르네상스 음악은 상대적으로 재미가 없다. 조스캥도 책 안에서만 추앙받는 인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음악을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조스캥이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음악으로 재탄생한 것은 순전히 연주자의 노력 덕분이다.

그중 지휘자 피터 필립스(1953~)와 아카펠라 그룹 탈리스 스콜라스의 공이 가장 크다. 1980년 르네상스 전문 레이블 기멜(Gimell)을 설립한 필립스는 1987년 9번째 음반으로 조스캥의 미사 ‘혓바닥이여 노래하라(Pange lingua)’➊를 선보였다. 이 음반이 영국 그라모폰상 대상인 ‘올해의 음반’에 선정되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상의 권위와 제목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음반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음반은 아직도 조스캥을 처음 듣는 애호가에게 추천 1순위로 꼽힌다. 어떤 해설보다 연주가 음악을 쉽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LP시대부터 같은 곡을 담은 음반이 꽤 많이 발매됐지만, 같은 곡이 맞나 싶을 정도다. 4성부 사운드는 눈부실 만큼 윤기가 흐르며 모든 프레이즈가 한순간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모든 성부에 스며든 정선율 윤곽이 명확해 모방과 변주도 쉽게 이해된다.

이후 조스캥은 말 그대로 ‘르네상스’를 맞았다. 영국 고음악 협회가 정리한 디스코그래피에 따르면 조스캥을 메인 타이틀로 내세운 음반은 1987년을 기준으로 7배가 늘었다. 시대의 흐름을 고려해도 대단한 수치다. 필립스의 철학도 바뀌었다. 그는 줄곧 “아무리 훌륭한 르네상스 작곡가라도 전곡을 소개할 가치는 없다”고 말해왔는데 2000년 들어 조스캥 미사 18곡을 모두 녹음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미사 ‘헤라클레스’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D’ung aultre amer)’를 끝으로 33년의 대장정을 마쳤다. 9장의 CD에 담긴 미사 18편은 르네상스 음악 팬이라면 모두 수집하고 싶은 로망일 것이다. 작품의 대중성에 따라 일부를 고른다면 두 편의 ‘무장한 병사’➋와 ‘아베 마리스 스텔라’➌, 마지막 녹음인 ‘헤라클레스’➍를 권한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파브레 가뤼(1944~)와 그룹 아 세이 보치는 미사 장르에서 필립스의 라이벌로 인식돼 왔다. 이들은 80년대 후반부터 아스트레 레이블(현 Naive)에서 비교적 유명한 7편의 미사를 녹음➎➏했는데 필립스와 완전히 다른 창법과 해석으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소프라노를 여성에, 알토를 카운터테너에 맡긴 점은 같지만 음고가 낮고 다이내믹의 진폭이 작아 수수하다. 거친 평성가(반주 없이 부르는 단선율 음악) 창법을 구사하는 남성 덕분에 고아한 멋을 안기는데 실제 조스캥 시대엔 이처럼 연주했을 것 같기도 하다. ‘혓바닥이여 노래하라’만 보면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 마르셀 페레스(1956~)와 클레망 잔느캥 앙상블(HMF)➐과 비슷한데 프랑스풍 해석으로 추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오케겜 해석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위컴과 클럭스 그룹은 ASV에서 역시 7편을 녹음했다. 소리의 미감은 위의 두 단체보다 떨어지지만, 가장 완성도 높은 ‘불운이 나를 덮치네(Malheur me bat)’➑에서 보듯 말쑥한 모방의 진행은 최신 트렌드를 유지한다.

비교적 최근 녹음 중엔 지휘자 없이 활동하는 스틸레 안티코(Decca)➒와 그레이엄 로스와 케임브리지 클레어 합창단(HMF)➓을 들 수 있다. 이들은 21세기에 가장 돋보이는 ‘혓바닥이여 노래하라’를 내놓았다. 전자는 탈리스 스콜라스의 합주력과 비견할 만하다. 성부당 가수가 한두 명 더 많아 소리가 더 두텁다. 템포를 느리게 잡고 부점음 도약과 템포 변화를 과감하게 펼쳤다. 다소 과장된 느낌은 있지만, 극적인 재미가 쏠쏠하다.

후자는 현대 합창단 편성으로 원전 단체의 해석을 닮았다. 성부당 5~6명이 엮는 화성은 풍성하면서도 강약 조절로 전개가 전혀 무겁지 않다. 미국의 류트 주자 제이콥 헤링맨이 녹음한 미사 ‘축복받은 성모’의 류트 버전(INVENTA)도 필청을 권한다. 무다라 등 16세기 유명 류트 작곡가들이 연주를 위해 편곡한 조스캥의 미사와 모테트를 담았다. 낱낱의 성부를 류트의 6코스 현에 풀어낸 조스캥은 좀처럼 듣기 힘들다. 유려한 편곡과 연주 솜씨 덕분에 애호가에게 별미가 될 것이다.

 

음반으로 부활한 조스캥 모테트와 세속곡

조스캥의 모테트는 보통 미사나 샹송과 함께 커플링되는데 모테트만 모은 앨범도 적지는 않다. 그중 필리프 헤레베허(1947~)와 라 샤펠 루아얄(HMF), 오를란도 콘소트(Archiv)의 연주는 신구를 대표한다. 86년 녹음된 전자는 최근 연주에 비하면 투박하게 들리지만 표현력은 흠잡을 데 없다. 하이라이트인 5성 ‘스타바트 마테르’는 뱅쇼아의 샹송에서 가져온 정선율이 테너에 의해 유난히 또렷이 들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부당 1명을 배치한 오를란도 콘소트는 대척점에 있다. 좀 더 축약되고 정제된 버전이다.

스틸레 안티코와 함께 주목받는 신진그룹 브라반트 앙상블도 모테트와 미사 단악장을 묶어 호평을 받았다. 성부끼리 어울림을 중시하기보다 개성을 뚜렷하게 새기는 특징이 있다. 물론 성부마다의 앙상블이 최상급이다. 덕분에 각 선율의 움직임이 명확하고 수직적 화성 구조도 뚜렷하다. ‘존귀하신 성모(Alma redemptoris Mater)’에서 절정을 향한 빌드업 과정이 이처럼 설득력 있는 연주도 드물 것이다.

샹송과 같은 세속곡은 이 분야의 대가인 킹스싱어스(RCA)와 명카운터테너 도미니크 비세가 지휘하는 클레망 잔느캥 앙상블(HMF)을 추천한다. 전자는 모테트와 커플링돼 있고, 후자엔 작곡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귀뚜라미(El Grillo)’가 수록돼 있다. 저속하지도, 점잖지도 않은 중도적인 해석이 좋다. 이 곡에서 마드리갈 같은 질펀한 느낌을 원한다면 힐리어드 앙상블(Erato)이 제격이다.

글 이재준(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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