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관악제
바람의 섬에는 평화의 팡파르가 제26회 제주국제관악제 8.8~15
코로나 시기, 다시금 초심으로
언젠가 음악평론가 이장직은 “제주도 섬 전체가 거대한 악기이자 무대”라고 했다. 제주 곳곳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돌담이 있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그 고망(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제주국제관악제의 ‘섬, 그 바람의 울림’이란 부제가 퍽 와닿는다.
제26회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원장 이상철)는 8월 8~15일까지 섬 곳곳에서 펼쳐졌다. 공연은 주로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문예회관과 제주아트센터, 서귀포시에 위치한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펼쳐졌다. 세 개의 주요 공연장에선 관악단·협연·실내악이 고루 나뉘어 올랐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해외 관악인들의 참여는 무산됐다. 이에 관악제는 해외 아티스트 대신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아가는 한국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로 무대를 꾸몄다. 올해 가장 큰 변화는 ‘시즌제’를 도입한 것. 관악제 측은 “여름에 열리던 축제가 프로그램 다양화로 포화상태에 이르러 분산 개최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문제로 통영국제음악제나 평창대관령음악제도 페스티벌을 시즌별로 분산해 운영 중이다. 고기석 집행위원장은 “여름 시즌이 ‘대중성’에 초점을 둔다면 겨울은 ‘전문성’에 무게를 둘 예정”이라고 밝혔다. 겨울 시즌은 12월 3~7일 제주아트센터에서 열리며, 제주국제관악콩쿠르 4개 부문(트럼펫·호른·테너트롬본·금란 5중주) 결선과 처음 시도되는 제주관악작곡콩쿠르의 실황 결선이 진행될 예정이다. 아울러 온라인 확산을 위해 영상물 제작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도입했다.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 제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상 공연을 촬영했고, 주요 공연은 유튜브(제주국제관악제·아르떼TV)와 네이버TV에 생중계됐다.
희망의 선율로 채워진 개막 공연
개막 공연은 8월 8일 저녁, 제주아트센터에서 펼쳐졌다. 이날 공연은 객석 500석이 사전예약으로 매진됐다. 휴가철을 맞아 제주도에 많은 인구가 몰려온 만큼 관악제는 방역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객석 거리두기 실천과 함께 관객 손목에는 일제히 체온 확인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지휘자 이동호가 이끄는 제주특별자치도립 서귀포관악단이 축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첫 곡은 지난해 관악제에서 초연된 작곡가 이문석(1960~)의 피아노와 관악 앙상블을 위한 ‘멜 후리는 소리’(협연 김지민). ‘멜’이란 ‘멸치’의 제주도 말이다. ‘멸치 후리는 소리’는 해안가에서 그물로 멸치를 후리면서 부르는 민요다. 밀물 때 그물을 넣고 줄곧 작업을 한 후 동이 틀 무렵 해안가에서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끌어당기는 작업을 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멜 후리는 소리’는 부지런히 그물질하는 어민들을 묘사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곡이 빨라지면서 그물 당기는 사람들의 단결된 힘이 오롯이 드러났다. 제주 민요를 담은 힘찬 첫 곡으로 공연장 분위기는 신명을 더했다.
이어서 플루티스트 최나경이 무대에 올라 도플러의 ‘헝가리 전원 환상곡’ Op.26을 협연했다. 지난 2011년 발매한 최나경의 소니 클래시컬 데뷔 앨범 ‘판타지’에 수록된 작품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이 곡은 플루트 주자이기도 했던 작곡가 도플러(1821~1883)가 유년기에 접했던 헝가리 민요 선율을 차용해 동양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곡 전체에 전원적인 정서가 풍부해 ‘멜 후리는 소리’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최나경은 풍부한 장식음을 자유롭게 연주했고 특히 3악장에서 리드미컬한 기교가 탁월했다.
보컬 박기영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My Heart Will Go On’, 영화 ‘미션’의 ‘넬라 판타지아’, 제주특별자치도립 제주합창단·서귀포합창단이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이 연달아 이어졌다. 희망의 노랫말은 코로나로 지친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특히 ‘합창’ 교향곡에선 제주특별자치도립 서귀포합창단의 저력을 확인했다. 피아니시모로 가라앉은 작은 음부터 기쁨에 찬 환희의 순간까지 오로지 관악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코로나로 부득이하게 함께하지 못한 영국 코리 밴드, 프랑스 생토 메르 하모니 오케스트라, 대만 국립사범대관악단 동우회 등 해외 관악단이 직접 한국에 보내는 메시지 영상을 개막 공연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한층 나아져 해외 아티스트들과 함께 즐기는 ‘국제 관악제’로 다시금 거듭나길 소망한다.
제주에 관악 숨결을 불어넣다
이번 관악제의 관전 포인트는 제주 자연에서 펼쳐지는 ‘우리동네관악제’. 9일 이른 시각, 세계자동차&피아노박물관(서귀포시)에서 첫 ‘우리동네관악제’가 펼쳐졌다. 이 안에 위치한 ‘피아노전시관’은 2019년 7월에 개관한 곳으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조각한 진귀한 피아노를 비롯해 3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예술품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은 순식간에 바로크 귀족의 살롱으로 변모했다. 최나경(플루트), 백승연(유포니움), 박종화(피아노) 외에도 배우 박정자가 데이비드 웨더포드의 시 ‘더 느리게 춤추라’를 선보여 색다른 주목을 받았다. 서울바로크앙상블은 바로크 오보에나 바로크 리코더 등 낯선 시대악기 음색을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해 인기를 끌었다. 특히 8월 9일, 서귀포예술의전당 대극장 공연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앙상블 브라스 피플이 제주농요보존회와 함께 협업 무대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밧볼리는 소리’ ‘망건짜는 소리’ ‘방아찧는 소리’ 등의 토속 노동요를 연달아 올렸는데, 관악 반주에 맞춰 제주농요보존회는 실제 농사를 재현하며 소리를 불렀다. 제주농요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물허벅과 같은 갖가지 소품을 가지고 올라와 박수 장단을 받았다.
우천으로 10·11일 ‘우리동네관악제’ 개최 장소는 제주해변공연장으로 변경됐다. 8월의 제주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해서인지 관악제 측은 공연장 이동에 능수능란했다. 10일 칠성로 특설무대(브라스피플 리사이틀)와 11일 사려니숲길 야외무대(광주 호른 사운드 리사이틀)는 우천에 적합하지 않은 공연장이다. 이에 제주시 북쪽인 탑동에 소재한 제주해변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겨 찬란한 제주해변 풍광, 바다 내음과 함께 연주를 관람할 수 있었다. 노천 객석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항공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여 운치 있었다.
1995년 이후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관악제는 다시금 초심의 모습이었다. 다만 코로나 가운데 관악제를 향한 도민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무심했다. 사반세기의 시간을 뒤로하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관악제. 이번 축제처럼 지역민들의 숨결까지 담고자 노력한다면 이 섬의 금빛 평화는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제주국제관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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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제주특별자치도립 서귀포관악단 지휘자 이동호
이번 관악제의 개막 공연에서 제주특별자치도립 서귀포관악단(이하 관악단)이 화려한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피아노, 플루트, 보컬, 트럼펫·트롬본, 합창 등 다양한 협연이 이뤄져 인상 깊었는데요. 축제의 오프닝에는 매년 제주를 소재로 한 창작곡을 선보였어요. 그래서 올해도 이문석 작곡가의 ‘멜 후리는 소리’를 선정했죠. 늘 개막 공연에선 유명 해외 아티스트가 협연을 선보였는데 올해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함께했어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익숙한데, 이번 공연에서 관악단 버전으로 들어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처럼 기존 오케스트라 곡을 편곡하여 진행할 때 난이도 측면에서 연주자들의 고충이 클 것 같은데요. 베토벤 ‘합창’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들으면 금관 악기 부분이 길지가 않아요. 그런데 관악 버전은 현악 부분을 관악기가 다 담당해야 하니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관악기 주자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호흡을 많이 해야 하니 숨이 차죠. 그래도 우리 관악단은 그런 훈련이 잘 되었어요. 관악단 자체 공연으로 ‘심포니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는데요. 보통 관악단이라고 하면 소품곡 위주로 선보이잖아요. ‘심포니 시리즈’에서는 관악단을 위해 작곡된 교향곡을 선보이는 공연이에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관악 교향곡이 제법 있는 편이죠.
관악단 연주를 보면 꼭 악기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실제로 관악 스코어를 보면 악기 목록이 엄청 많아요. 일반 교향곡보다 더 다양한 악기가 출현하죠. 예컨대 플루트만 하더라도 일반 플루트를 비롯하여 피콜로·알토플루트가 나옵니다. 타악기도 이름이 생소한 악기들이 많고요. 남미나 유럽, 미국은 물론, 제주 전통악기까지 소화합니다.
처음 제주국제관악제에 참여하셨던 때가 언제인가요?
1995년도였어요. 휴가차 제주도에 왔는데 마산의 관악 합주단에서 관악제에 참여한다고 하는 거예요. 저도 호른을 들고 함께 따라왔던 기억이 나네요.
제주특별자치도립 제주교향악단 지휘자로 있을 때에도 제주국제관악제와 인연이 깊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주국제관악제가 점점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콩쿠르를 유치하게 됐죠. ‘국제 콩쿠르’가 되려면 3차에 필수로 교향악단과 협연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요. 당시 이상철 위원장이 제주교향악단과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주셨죠.
관악제가 제주도민의 더 큰 자부심이 되려면 축제 측에서 무엇을 더 보완하면 좋을까요? 제주국제관악제를 위한 상설 공연장이 있으면 좋겠어요. 26년 역사가 쌓인 만큼 관악제의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도 중요해요. 기념박물관이 생겨 한정된 장소에 관악제의 아카이브를 쌓아두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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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관악제 신임 집행위원장 고기석
관악제의 시작부터 오늘까지 함께한 토박이 관악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임 집행위원장이 된 후 축제를 준비하면서 관악제에 대한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관악제가 처음 시작된 1995년에는 혈기 왕성했던 대학생이었습니다. 악기 나르는 것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일을 함께했죠. 집행위원장이 되니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힘든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되어서 부담을 느끼기도 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관악제를 ‘여름 시즌’ ‘겨울 시즌’으로 좀 더 세밀히 분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전부터 여름 시즌에 프로그램이 집중되어서 과중하다는 지적도 있어온 바 그 과중함을 분산시키고 시즌별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겨울 시즌(12월 3~7일)을 새롭게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올해도 해외 관악단 참여가 무산됐습니다. 향후 해외 공연단 참여는 언제쯤 가능하리라고 보나요?
빠르면 올겨울부터 해외 단체가 참가하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이 또한 코로나 상황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확답하기 어렵죠. 부디 내년에는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처한 이번 축제만의 변별성은 무엇인지요?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방역입니다. 타지에서 입도하는 모든 분이 PCR 검사를 의무화하도록 했어요. 각 공연장은 공연 전후 방역을 실시, 출연자들의 발열체크 및 마스크 착용, 체온스티커 부착, 좌석 간 거리두기 등 정부의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안전한 제주국제관악제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해외 아티스트 내한이 무산된 만큼, 제주도민과 호흡하려는 노력이 엿보였습니다.
제주농요보존회와 금관 앙상블의 협업 공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옛 조상들이 밭일 또는 집안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를 소개하게 되어 기뻤고요. 앞으로 제주를 소재로 한 공연과 제주관악작곡콩쿠르 등을 통해서 제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축제가 지닌 역할 중 지역의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도 있을 텐데요. 그동안 제주국제관악제가 지역 발전을 위한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해 왔는지 궁금합니다.
2005년 제주국제관악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관악부 창단을 각각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중학교와 초등학교에서 교악대 창설 붐이 일어나서 2005년 이전 15여 개의 관악부가 지금은 30여 개로 늘었지요. 아마추어 관악 앙상블도 2000년 이후, 20여 개 이상의 단체가 창단됐습니다. 그만큼 제주국제관악제가 제주 지역의 관악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지역 축제는 지역민들의 공감을 얻어야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죠. 예술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 잡기를 위해 앞으로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요?
소외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우리동네관악제’는 주민의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어요. 그 결과가 2018년도부터 꾸준히 진행해 온 해녀, 제주농요와의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