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기억을 위한
음악과 예술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 특집
알츠하이머성 치매환자에게 기억은 바깥이 아닌 안으로부터 무너진다. 증상 초기에는 일상에서 사용하던 단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고, 중기에 접어들면서 정신행동 증상이 동반된다. 환자 스스로 내면에 갇혀 특정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심하면 자아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예술은 이렇게 망각과 싸우고 있는 환자를 위로하기도 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한다. 9월 21일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을 맞아 이번 호에는 알츠하이머와 예술의 관계를 살펴보고, 망각의 속도를 늦추고 기억력을 회복하기 위해 태어난 예술을 살펴본다. 더불어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되새겨본다
기획 임원빈 기자
의학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예술’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1933~)는 저서 ‘뮤지코필리아’(역 장호연)에서 한 피아니스트의 사연을 소개한다.
“여든여덟 살로 언어 능력을 잃었는데도 (···) 매일 연주합니다. 우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훑어볼 때면 그가 반복구 여기저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의견을 말합니다. 2년 전에 우리는 모차르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녹음했습니다. (···) 그는 1950년대에 이미 한 번 녹음을 한 적이 있어요.
비록 그의 언어 능력은 악화하였지만 나는 예전 녹음보다 그와 함께한 최근의 녹음이 훨씬 좋습니다.” 언어 상실과 감정 표현까지 앗아가는 알츠하이머이지만, 위 사례를 볼 때 알츠하이머가 예술 활동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 보인다.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 존재하는 예술 언어는 소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몸의 언어를 익힌 무용수에게도 알츠하이머의 영향이 닿지 않았다.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영상이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던 90대 발레리나 마르타 곤살레스 살다냐(1924~2019)의 영상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휠체어에 의지해 겨우 앉아 있던 그에게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려주자, 음악에 맞춰 안무를 펼쳐보인 것이다. 살다냐는 알츠하이머 발병 이전인 1960년, 로사문다 발레학교와 무용단을 설립하고 수석무용수를 지낸 바 있다. 알츠하이머 말기에 접어든 환자는 자신의 존재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무능력 상태에 이른다. 그런데도 왜 예술적 능력은 상실 되지 않는 걸까? 음악학자 클라이브 웨어링(1938~)은 헤르페스 뇌염에 감염되어 기억상실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오르간을 연주하고 합창단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음악을 만들어갈 정도로 음악적 능력은 손상되지 않았다.
올리버 색스는 의식적 기억이 저장되는 곳과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절차성 기억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릴 적 반복적인 연습으로 각인된 기억은 손상되지 않아 무의식에도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연습으로 습득한 것이 운동 패턴으로 암호화되어 나타나는 자동화 과정과 음악 규칙과 같은 고차적인 지각이 결합하는 외재적 기억이 기억상실증 환자가 음악을 연주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작품의 구조 안에서 기억상실증 환자는 마치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듯 음악의 위치를 찾아간다. 악절과 리듬, 조성이 그 맥락을 잡아준다. “음악은 개인의 정체성과 창조력을 자극해 한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라고 올리버는 강조했다.
알츠하이머 치료에 쓰이는 음악
이렇듯 음악은 알츠하이머 환자 내면 깊숙이 고립된 자아를 불러와 현재에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음악은 알츠하이머 치료에 적극적으로 쓰인다.
현재 치매 요양원에서는 음악 감상을 통해 스스로 갇혀있는 환자들과 소통의 창을 만들고 있다. 이 치료는 이들의 정서를 안정시킬 뿐만 아니라, 음악과 함께 묻혀있던 오랜 기억을 다시 불러온다. 메리 삼반담은 이와 관련해 실험을 진행했다. 알츠하이머 환자 19명을 대상으로 대상자의 가족이 선택한 선호 음악을 3주 동안 주 2회, 60분 동안 아침 시간에 들려주었다. 그 결과 이들에게 익숙한 음악 듣기가 기억력과 회상 능력에 효과적인 것을 확인했다(나혜원, ‘알츠하이머와 혈관성 치매 환자의 음악적 잔존능력 비교 연구’(2006) 참조).
모차르트의 음악이 뇌 기능 향상에 좋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를 ‘모차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음악 때문에 뇌의 각성이 높아져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경상북도의 한 노인 전문 요양 시설에서 치매 환자 3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한 그룹에는 ‘악기 연주를 하며 날짜 기억하기’ ‘노래에 맞추어 연주하며 주소 기억하기’ 등 음악과 연관 지어 정보를 기억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다른 그룹에는 ‘주소 이야기하기’ ‘물건 이름 대기’ 등 음악을 제외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악기 연주를 사용한 인지 훈련을 시행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언어적 반응, 주의집중 등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윤영지, ‘악기 연주를 사용한 인지 훈련이 치매 환자의 인지기능에 미치는 효과’(2008) 참조).
한편, 알츠하이머 치료에 쓰이는 음악은 정신적 기능 향상뿐만 아닌,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악기 연주를 통해 감정 표현 배출구를 마련해 외부와 소통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알츠하이머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고립되는 병이므로 소통의 통로를 음악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이들은 악기 연주를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리듬 악기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신체적 제약이나 언어 능력이 부족한 환자들도 신체 동작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리듬과 박에 맞추어 움직임으로써 창작력과 능동성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김혜경·최재성, ‘치매노인에 대한 음악치료 국내 연구동향 분석’(2017) 참조).
음악의 소재가 된 알츠하이머
더 케어테이커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 소멸은 약 8년에서 10년에 걸쳐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자의 기억은 내면에서 무너진다. 그렇게 굳게 닫힌 마음의 상태는 일반인은 알 길이 없다. 영국의 작곡가 레일런드 제임스 컬비(1974~)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환자의 가장 최근 기억부터 소멸해가는 기억상실과 감정의 변화를 음악으로 표현해 조금이나마 그들의 심리상태를 알아차릴 길을 마련했다.
그는 ‘더 케어테이커(The Caretaker)’라는 프로젝트명으로 기억상실을 주제로 한 ‘An Empty Bliss Beyond This World’(2011)를 처음 선보인 바 있다. 성공적인 첫 연주를 마친 그는 작품을 확장시켜 2016년부터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을 작곡하기 시작해 2019년에 완성했다. 이 프로젝트는 스티븐 킹(1947~) 원작의 스탠리 큐브릭(1928~1999) 영화 ‘더 샤이닝’의 주인공 잭 토렌스의 직업인 ‘호텔 관리인(The Caretaker)’에서 영감을 받았다. 호텔 관리인 직을 맡은 극 중 인물, 잭 토렌스가 악령에 빙의되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알츠하이머를 앓는 환자가 겪는 분노와 급변하는 감정의 상태와 닮았다. 총 6시간이 소요되는 이 곡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겪는 기억 상실을 총 여섯 단계로 나누어 음악으로 풀어낸다. 미니멀리즘 화가인 이반 실(1973~)이 그린 앨범 표지는 6단계의 기억상실을 표현했다.
작품에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음악은 영화 ‘더 샤이닝’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알 보올리(1899~1941)의 ‘Midnight Stars and You’이다. 각 스테이지를 거쳐 갈수록 음악은 뿌옇게 먼지가 낀 듯 먹먹해지고, 뜬금없이 다른 음악이 끼어들어 장면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마치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력이 서서히 소멸해가는 모습과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마음대로 중첩되는 모습이 닮았다.
그는 곡을 구성하는 작품의 개수에도 변형을 줬다. 1·2단계에서는 각 알파벳을 꼭지를 단 곡이 ‘A1 단지 불타는 기억일 뿐이야’ ‘A2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 많이 남지 않았어’ ‘A3 늦은 오후의 표류’ ‘A4 아이 같은 신선한 눈으로’ ‘A5 약간의 당혹스러운’ 등으로 5개와 6개로 일정하지만, 기억이 희미해지는 3단계부터는 E와 F의 꼭지를 단 작품의 개수가 7개에서 8개로 불규칙하게 팽창한다. ‘포스트어웨어니스’라고 이름 붙인 4단계, G에서 R까지는 단 한 개씩의 부제를 달고 단편적인 기억들이 나열된다.
글 임원빈 기자
영화의 소재가 된 알츠하이머 영화 ‘슈퍼노바’ ‘더 파더’ ‘아무르’
사건을 기록하는 이야기는 역사가 되지만, 사람을 기억하는 이야기는 예술이 된다. 예술 작품 중 영화는 필름을 통해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억하며 등장인물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을 이어준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과 닿아있는 만큼, 관객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일을 겪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영화는 조금 더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통증을 다뤄야 한다. 여기 신중한 목소리로 통증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영화가 있다.
아픔을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신중한 시선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병,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간 쌓아온 시간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볼 도리가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과거와 가족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앞으로 무엇을 더 잃어버리게 될지 결코 나 자신은 모른다는 것은 두렵고 잔인한 일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 어쩌면 나 자신도 함께 휘발되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해리 맥퀸(1984~) 감독의 ‘슈퍼노바’(Supernova, 2020)는 조발성 치매 판정을 받고 기억을 잃어가는 미래의 나를 버리고, 가장 빛나는 현재의 모습으로 사라지고 싶은 주인공 터스커를 통해 삶의 존엄성과 그 선택의 가치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본인의 희곡 ‘아버지(Le Père)’를 원작으로 한 플로리앙 젤레르(1979~) 감독의 ‘더 파더’(2020)는 기억의 혼란 속에서 자신이 보는 것이, 자신의 기억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주인공 안소니의 독백과 같은 영화다. 안소니는 얼핏 보면 치매에 걸린 고약한 노인처럼 보이는데, 안소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와 안소니의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카메라 워크를 통해 관객들이 치매라는 질병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닌 함께 느끼고 체험할 수 있게 만든다.
미카엘 하네케(1942~) 감독의 ‘아무르’(2012)는 노부부의 일상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조르주와 안느는 함께 제자의 콘서트에도 가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등 행복한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불청객처럼 느닷없이 안느에게 반신마비와 치매가 함께 찾아온다. 초반부 콘서트홀을 다녀오는 것 이외에, 모든 장면은 집안에서 벌어진다. 안느가 아픈 이후 조르주는 발이 묶인다. 두 사람의 평온한 삶은 지옥이 되고, 시간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더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느끼는 순간, 죽음은 삶보다 훨씬 더 친절한 표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음악이 표현한 기억의 몸부림
세 영화 모두 음악가가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이 음악 애호가로 등장하는 만큼 영화 속 음악은 주인공의 섬세하면서도 애처로운 마음과 닮았다. ‘슈퍼노바’는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이지만 주로 클래식 음악 대신 관객들의 귀에 익은 1970년대 팝 음악으로 로드 무비의 정취를 강화한다. 피아니스트 샘 역할의 콜린 퍼스(1960~)가 아주 오랜 기간 피아노를 연습해 직접 연주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연주한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작품 속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을 지지해 주며 들려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래서 총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겹치는 순간, 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정적과 함께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더 파더’ 속 안소니의 거실에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가 있다. 영화 속 안소니는 집안에서 계속 오페라를 듣는다. 평온한 삶 속에서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더 파더’는 안소니의 정서를 관객들이 얼마나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지가 중요한 영화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오페라 아리아를 통해 안소니의 감각을 관객들이 함께 느끼게 만든다. 비장하면서도 쓸쓸한 영화 속 오페라 아리아는 뒤엉킨 현재와 지워진 과거의 기억, 그 혼돈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 딸 앤과 아버지 안소니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는 헨리 퍼셀(1659~1695)의 오페라 ‘킹 아더’의 아리아 ‘너는 무슨 힘으로’가 흘러나오는데, 딸과 아버지의 만남에 묘한 두려움과 긴장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안소니와 앤이 각각 부엌에 있을 때 두 번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 흘러나온다.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귀에 남은 그대의 음성’은 영화의 테마곡처럼 쓰인다. 안소니가 혼자 헤드폰으로 듣기도 하고, 딸이 초조해하며 요양병원에 전화를 거는 장면에도 사용된다.
반면, 영화 ‘아무르’에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집안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안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피아니스트, 딸과 사위의 연주 여행 등으로 짐작해보자면 ‘아무르’ 속 조르주와 안느는 음악인 가족이다. 집안 가득 꽂힌 책과 CD, 그리고 품위 있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우아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르’는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서 음악을 지운다.
아주 잠깐 제자가 찾아왔을 때, 12살 때 시켰던 베토벤의 ‘바가텔’ 2번 Op.126을 연주하거나 안느가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 D899를 연주하는 장면 이외에 어떤 배경음악도 사용하지 않는다. 음악인 노부부의 삶 속에서 평생을 함께한 음악을 지우면서 지금 이들이 처한 현실이 과거와 얼마나 다른,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인지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처연한 삶 속에서 오직 들리는 것은 조르주와 안느가 살아있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 생활 소음뿐이다. 자신의 삶과 함께 세상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함도 지켜야 하는 순간, 비극적 선택은 격렬한 연주가 끝난 후의 침묵처럼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지시켜 버리는 것 같은 엔딩으로 이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주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알츠하이머를 다룬 영화라 세 작품 모두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인물을 들여다본다. 사람의 목숨이 존엄함에 앞서도 되는 건지, 가족이라면 당연히 아픈 가족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닌지, 같은 차가운 생각과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품어보려 하는데, 영화의 그 마음에 온기가 느껴져 더 아프게 느껴진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