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감독 윤가은)의 오프닝은 유년시절 놀이의 잔혹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피구 경기에서 각 팀의 리더가 가위바위보를 통해 한 명씩 팀원을 충원해간다. 한 명씩 뽑힐 때마다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던 소녀가 마지막까지 남겨질 때, 그리고 소녀를 떠안게 된 리더가 날카로운 푸념을 내뱉을 때, 우리는 소녀의 수치심과 당혹감을 마주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놀이는 잔인했고 우리는 놀이를 핑계로 날 선 공격성을 분출했다.
오는 10월 선보이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정기공연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유희를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여러 무용수가 신나게 노는 중에 하나 둘 제거되다가 결국 한 명이 남는다는 설정이다. 길에서 춤추던 한 사람이 갑작스레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제거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모든 장면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끝맺는다. 흰옷을 입은 이들이 사라져가는 동안 검은 옷의 감시자는 한 명으로 시작해 점점 불어나며 선명한 흑백 대비를 이룬다. ‘우리들’이 한 명씩 선발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이의 수치심을 보여줬다면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한 명씩 제거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자 안무를 맡은 남정호(1952~)는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를 ‘경쟁사회의 우화’(2020년 안무노트)라 일컫는다.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벌이는 끝없는 생존경쟁.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선 긋기와 서슴없는 가해. 하지만 무대 위의 풍경은 의외로 한가롭고 유쾌하다. 초록색 댄스 플로어가 깔린 무대는 드넓은 풀밭처럼 푸르고, 무용수들은 강강술래, 어깨 짚고 뛰기, 멀리뛰기 등 익숙한 놀이를 하며 뛰논다. 박자를 쪼개며 빠른 움직임을 전개하는 요즘 트렌드에서 보면 외려 헐렁해 보인다. 그러나 목가적인 평화는 이내 깨진다. 유희는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고, 패자를 낙오자로 만들며, 낙오자를 제거한다. 폭력의 흔적 위에서 새로운 유희가 시작된다. 이는 동물의 세계요 현대인의 세계이다. 흰 내복을 입고 무해한 존재들은 한 떼의 양들처럼 그저 평화롭고 순진하게 유희에 몰두하는 것 같지만 낙오된 이를 밀어내며 서둘러 선을 그어버린다. 순진하게 남아있다는 건 권력인 셈이다.
작품에 밀도와 객관성을 더하다
유희는 안무가 남정호의 안무적 시그니처다. 그의 춤은 엄숙한 태도와 진지한 기교에서 벗어나 느슨하게 웃으며 삶을 관통해왔다. 그런데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후 첫 안무작으로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세우다니, 이것 역시 관객과 벌이는 유희의 일부일지 모른다. 명백하게 파이프를 그려두고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인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유희를 부정함으로써 그 아래 펼쳐지는 낯설고 서늘한 풍경을 볼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초연이 아니다. 지난해 코로나의 패닉이 휩쓸던 4월에 오디션을 하고 5개월간 작업하여 10월에 공연이 예정되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며 네이버TV와 유튜브 생중계로 전환되었다. 매끄러운 영상중계로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을 감상할 수 있었고 실시간 댓글 창에서 관객과 무용단 관계자가 질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감상하는 묘미가 있었다. 하지만 잔디밭 같은 초록색 댄스플로어의 싱그러움과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한 무리의 풀썩거림, 그리고 누군가가 제거되고 유서처럼 남겨진 알쏭달쏭한 글귀는 화면을 통해 감지하기 힘들었다.
초연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일 년 만에 대면공연으로 돌아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작품의 디테일을 바꾸고 다듬었다. 초연 버전에서 이태섭의 무대디자인·벤야민 셸리케의 조명디자인·권자영의 의상디자인·김장연의 영상디자인을 살렸다. 여기에 남정호 예술감독과 작업해 온 유태선이 작곡 및 음악감독으로 새로 합류하고 국립현대무용단의 지난 작업에 참여해 온 장수미와 김희옥이 작품의 방향성에 의견을 더하는 ‘아웃사이드 아이’로 역할을 한다. 무용수로는 지난해 출연한 김건중·알레산드로 나바로 바르베이토·홍지현이 올해도 무대에 서고, 김승해·김지형·김효신·송윤주·와타나베 에리·윤혁중·정다래 등이 새롭게 출연진에 합류한다. 아울러 남정호 예술감독이 안무와 연출은 물론 특별출연까지 할 예정이라고 하니 힘들게 관객 앞에 선보이는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난다.
무용수가 무대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무대에 남기 위해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되고 공모자가 되며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와닿는 우화이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설정을 통해 춤에 대한 장벽을 낮추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이게 그저 즐거운 유희 같나요?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INTERVIEW
예술감독 남정호
남정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 몰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엄마의 화장대 거울 앞에서, 그리고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서. 춤을 출 때는 안에 숨어 있던 다른 이가 나와서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춤을 따라 흘러간 그녀의 어린 시절은 결국 이화여대 졸업 후 프랑스 유학행 비행기에 오르도록 했다. 현대무용전공생들이 대개 미국을 유학지로 택하던 시기였다. 귀국 후에는 부산 경성대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로 위촉됐다. 이후 2018년 퇴임까지 현대무용 인재를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2020년 2월, 남 몰래 춤추던 소녀는 어느덧 국립현대무용단을 이끄는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포부를 다시 한번 들춰보았다.
# 오늘날의 안무가 “우리 리플릿을 보면 다양한 안무가가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무가들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본다. 좋은 안무가가 나올 수 있는 터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사회 분위기, 즉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예술성은 안무가의 콘셉트에 달렸다. 현대무용의 주류는 피나 바우슈 혹은 머스 커닝햄 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다. 각각은 삶의 일상을 춤에 끌어들여 고찰했고, 무용의 움직임 자체를 강조했다. 자신의 철학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나에게 국립현대무용단이란 “섬 같은 무용단이 아니라 항구 같은 단체가 되길. 국내 많은 무용가가 ‘국립현대무용단이 있어서 다행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나를 더욱 성장시킨다’는 느낌을 받도록 이끌고 싶다.”
글 장혜선 기자 (‘객석’ 2021년 3월호에서 발췌·요약)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10월 22~24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남정호(안무·출연)/안영준(조안무)/김건중·김승해·김지형·김효신·송윤주· 알레산드로 나바로 바르베이토·와타나베 에리·윤혁중·정다래·조준홍·하지혜· 홍지현(출연·움직임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