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수첩
삶은 음악으로 녹아들고
테디 파파브라미 바이올린 독주회
11월 4일 금호아트홀 연세
테디 파파브라미(1971~)는 모국 알바니아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더 넓은 음악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해 망명했다. 당시 엄격한 공산주의 국가였던 알바니아 정부는 그의 망명을 문제 삼으며, 모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 역시 정부의 은밀한 수색을 피해 몸을 숨겨야만 했다. 1991년 알바니아 정부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그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땐, 마치 자아를 찾아 돌아온 헤세의 소설 속 골드문트처럼 그의 음악은 어딘가 냉철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날카롭고 충실한 해석으로 유럽에서 인정받았다. 2014년 이자이의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 전곡을 담은 음반(Zigzag)은 ‘황금 디아파종 상’과 클라시카의 ‘올해의 음반상’을 휩쓸었다. 그의 세계는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알바니아 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자전적 이야기를 실은 책을 출간한 작가이다. 그가 프랑스 드라마 ‘위험한 관계’에 순진한 젊은 청년 당스니 역을 맡으며 배우로 변모했을 땐, 사람들은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음악으로 답한다.
음악은 연주자의 은밀한 곳을 들춘다. 어쩌면, 꼭꼭 숨겨두고 싶은 내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토해내게 한다. 음악은 이토록 잔인하다. 지난 11월 테디 파파브라미는 홀로 무대에 섰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파르티타 2번 중 ‘샤콘’,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버르토크의 무반주 소나타를 연주했다. 피아노와 보면대가 없는 무대는 광활했지만 그에게는 바이올린 한 대로 충분했다. 그는 이번 무대를 앞두고 “바흐와 그가 두 작곡가에게 끼친 음악적 유산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무표정한 그가 무대를 나섰다. 그는 바흐의 소나타 2번을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덤덤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러나 깊은 애수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이 아닌, 무정하리만큼 냉철한 자기성찰적인 연주에서 모순되어 나타났다. 숨겼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삶의 흔적은 활시위를 통해 펼쳐졌고, 그의 감정은 이자이와 버르토크로 동력을 이어받아 터져 나왔다.
끝은 바흐의 파르티타 2번 중 ‘샤콘’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에게 울어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지만, 절절한 선율 속 그가 울고자 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토록 독주곡에 담고자 했던 것은 그가 무대에서 독대한 11세의 자신이었고, 가족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막막함이고, 이념에 가로막힌 예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이번 내한이 처음 그를 만난 자리였지만, 또 다른 무대가 그를 부를 것을 확신한다. 세 작곡가의 선율을 빌려 그의 삶을 듣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더 솔직한 내면의 이야기를 어떤 이의 음악에 얹어 들려줄지 기다려진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더 나은 숲은 과연 존재할까
국립극단 ‘더 나은 숲’
10월 29일~11월 21일 백성희장민호극장
청소년기에 갖춰야 할 건강한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제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린 시절 배웠던 정체성 교육은 배타성이 짙었던 것 같다. 국가, 인종, 문화 심지어 성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오늘, 국립극단은 청소년극으로 독일의 극작가 마틴 발트샤이트(1965~)가 쓴 ‘더 나은 숲’을 올렸다. ‘타조 소년들’ ‘노란 달’ 등으로 여러 번 한국을 찾은 토니 그래함이 연출을 맡았다.
작품은 늑대로 태어나 양으로 자란 퍼디난드의 이야기를 담는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퍼디난드는 우연히 양을 만나 ‘양처럼’ 키워진다. 양의 세계에선 ‘울타리를 넘어가면 안 된다’라는 절대적 규칙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울타리 정도야 쉽게 뛰어넘는 퍼디난드이지만, 금지된 세상에 대한 열망을 애써 품지 않는다. 어느덧 퍼디난드는 지역사회에 가장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인상 깊었던 건, 퍼디난드가 본인이 늑대인 걸 ‘타인’에 의해 알아버렸다는 점이다. 잠시 일탈한 울타리 밖에서 우연히 만난 늑대는 퍼디난드에게 “너 양이 아니구나”라고 말한다. 늑대이지만 그 누구보다 양 같은 퍼디난드의 정체성은 붕괴된다. 그는 부모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육식보다 채식을 즐기는 퍼디난드는 늑대 무리에게도 ‘별 난 녀석’일 수밖에. 결국 소년은 늑대들에게도 버림받는다.
정체성의 모호함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듯이, 결말도 모호하다. 하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를 만드는 건 존재의 본성인지, 태어난 곳의 문화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 퍼디난드의 옆에 있는 건 늑대도 양도 아니다. 우연히 만난 곰과 거위가 그의 친구가 되어준다. 완벽한 타인만이 나를 온전히 나로 대해주는 것이다.
무대 위는 온통 메타포다. 주인공 퍼디난드는 남성 늑대이지만 여성 배우(김민주)가 연기한다. 덕분에 이중 정체성이라는 극의 핵심이 선명히 드러난다. 마틴 발트샤이트가 쓴 대사는 리듬을 강조하며 간결하게 진행된다. 네 명의 배우(김서연·황규찬·이동혁·황순미)는 모두 1인 3역 이상을 소화한다. 옷만 갈아입으면 ‘양이 되기도, 늑대가 되기도’ 하는 배우들 덕분에 ‘나는 네가 되고, 너도 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극단
춤으로 스며든 황혼적 사유
무용 ‘휨닝엔’
11월 11일~13일 문비화축기지 T4
황혼의 순간, 모든 것은 섞여든다. 빛과 그림자, 낮과 밤, 황홀과 침잠. 스웨덴어로 ‘황혼’을 뜻하는 ‘휨닝엔(Skymningen)’은 국제 오늘날의 동시대 예술이 펼쳐지는 옵신(obscene) 페스티벌(예술감독 김성희)에서 위촉하여 선보인 작품이다. 스웨덴 출신의 안무가 마텐 스팽베르크(1968~)가 서울의 무용수 7명과 함께 작업했다.
명상적이고 정적이었던 ‘휨닝엔’의 분위기는 안무가의 개인적 경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에게 황혼은 중간 지대이자, 흐르는 시간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어렸을 적, 나는 종종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갔다. 해가 질 때쯤 도착해서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우리는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파도가 어둠과 점점 하나가 되다가 어느새 소리로만 남게 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공연노트 참조)
관객은 스팽베르크의 기억 속 모습으로 황혼을 체험한다. 암전된 공연장, 관객은 카펫에 저마다 앉거나 누워 황혼을 닮은 어스름한 주홍빛 조명이 비치는 곳을 바라보게 된다. 거기에 일곱 명의 무용수가 있다. 이들의 천천한 움직임에 춤은 서서히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렇듯, 시간을 들여 바라보아야 완성되는 춤의 구조는 완벽히 의도된 것이다. 마치 낮과 밤 사이의 황혼처럼, “이 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오직 이전에 존재했던 춤과 앞으로 오게 될 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식별된다”고 설명한다.
‘휨닝엔’은 관람보다 체험의 영역에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무용 공연을 체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소적 특성이 큰 몫을 했다. 등유를 보관하던 철제 탱크 내부를 그대로 살린 문화비축기지의 T4는 원형의 공간으로, 불을 끄자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모닥불을 피워둔 듯한 조명, 걸개그림,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는 긴 막대 모빌,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멍하니 무용수의 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주술적 의식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주최 측에 아쉬운 점은 당초 180분으로 예정됐던 작품의 러닝 타임을 하루 전날 90분으로 변경되었다고 공지한 것이다. 공연 당일 실제 러닝 타임은 120분 안팎이었다. 문제는 주최 측의 공지대로 90분쯤 지났을 무렵, 황혼과 밤을 지나 아침이 온 장면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대다수의 관객이 이대로 공연이 끝난 줄 알고 일어나 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춤을 추던 무용수도, 관객석에 앉아 음악을 만지던 스팽베르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르(scene)에서 벗어난(ob)’ 낯선 예술을 선보이는 기획에 필요한 것은 세심한 안내이기도 하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옵신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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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숲
휨닝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