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그라모폰 수상작과 의미를 살펴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1월 26일 2:19 오후

RECORD COLUMN

스트리밍 시대, 그라모폰상의 위상
2021년 그라모폰상 수상작과 의미를 살펴보다

 

1923년 창간된 영국의 월간지 ‘그라모폰’은 클래식 음반계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잡지이다. ‘그라모폰’에서 1977년부터 제정한 그라모폰상 역시 상이 제정된 직후부터 비견될 만한 다른 음반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상작들은 발매 당시에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음반이었다 하더라도 추후 일정 정도 판매량이 상승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음반 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이기도 하다.
역사에 있어서는 미국의 ‘그래미상’이 그라모폰상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지나치게 미국 아티스트들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그래미상의 경향 때문에 클래식 음반상으로서의 권위는 그라모폰상이 훨씬 높다. 수상작 선정은 매년 그라모폰지의 평론가들과 업계 관계자, 방송국, 음악가들의 추천을 통해 분야별로 후보를 선별한 후, 9월에 수상작을 발표하며, 분야별 수상작 중 하나를 대상격인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한다.

 

2021년, 올해의 음반과 부문별 수상작

 

2021년 올해의 음반 & 오페라 부문

가드너/베르겐 필의 브리튼(1913~1976)의 ‘피터 그라임스’(Chandos CHSA5250)가 선정되었다. 발매 당시부터 평론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음반으로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1968~)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며, 작곡가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 가드너(1974~)의 지휘도 훌륭했다. 여기에다 SACD에 수록된 빼어난 다채널 음향의 화려함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라모폰지에서는 “우리 시대를 위한 흥분되고 강렬하며 필수적인, 그리고 멋지게 녹음된 버전”이라는 평을 해주었다.

 

 

 

 

 

관현악 부문


파보 예르비/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프란츠 슈미트(1874~1939) 교향곡 전집(DG 4838336)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말러(1860~1911)와 브루크너(1824~1896), 그리고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시대가 끝나고 더 들을 것이 없나 찾아다니고 있는 교향곡 마니아들은 최근 몇 년간 닐센(1865~1931)이나 바인베르크(1919~1996), 아이브스(1874~1954)의 교향곡들을 자신의 라이브러리에 힘들게 추가하고 있었는데, 이 슈미트 교향곡 전집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파보 예르비(1962~)는 슈미트의 이상적인 해석자다. 최종 후보에 오른 두다멜/LA 필의 아이브스 교향곡 전집(DG 4839502) 역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음반이었다.

 

 

 

협주곡 부문


이브라기모바(바이올린/1985~)와 유로프스키(지휘/1972~)의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집(Hyperion CDA68313)의 차지였다. 이 음반은 대부분의 평론가로부터 최고의 연주라는 찬사를 끌어냈던 연주이며 특히 1번 협주곡 해석은 이보다 더 나은 연주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실내악 부문


타카치 콰르텟(1975~)과 개릭 올슨(피아노/1948~)의 비치, 엘가의 피아노 5중주 음반(Hyperion CDA68295)이다. 20세기 피아노 5중주의 수작을 담은 이 매력적인 음반은 하이페리온으로 이적한 이후의 타카치 콰르텟의 연주들이 그러하듯 매우 단정한 해석과 해상도 높은 음질로 청자의 귀를 사로잡는다. 문제라면 작품들의 대중적 인지도가 너무 낮은 점일 것이다.

 

 

 

 

 

기악 부문


올해 기악 부문은 피아노 부문을 떼어내 따로 수상하고, 피아노 이외의 악기 연주에서 수상작을 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기악 부문을 계속해서 피아노 독주 음반이 독식해왔기 때문에 이는 합리적인 변화로 생각된다. 수상작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기타 연주자 숀 쉬브(1992~)의 바흐 류트 모음곡(Delphian DCD34233)이다. 쉬브는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는 젊은 기타리스트로 2019년에 ‘올해의 콘셉트 음반’ 부문에서 그라모폰상을 수상한 바 있다.

 

 

 

 

 

피아노 부문


그라모폰이 사랑하는 피오트르 안데르셰프스키(1969~)의 바흐의 평균율 2집의 발췌 음반(Warner 9029511875)이 선정되었다. 안데르셰프스키의 영국 모음곡 1·3·5번이 2015년에 기악곡 부문에서 그라모폰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므로. 그의 바흐는 그라모폰의 평론가들에게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창 부문


리처드 이가/고음악 아카데미가 연주한 두세크(1760~1812)의 ‘장엄 미사’(AAM Records AAM011)이다. 작년 말 발매된 이 신보는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중에서 안토니니 지휘의 하이든 ‘천지창조’(Alpha ALPHA567)가 탈락해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음악 부문


영국의 현대 작곡가 존 피카드(1963~)의 실내악 작품집(BIS BIS2461)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마틴 브래빈스/내쉬 앙상블의 연주로 작곡가의 30년에 걸친 경력을 개괄하는 7곡의 작품이 수록된 음반이다. 이 분야에서 최종 후보 중 하나였던 코파친스카야(바이올린)의 ‘밝혀진 기쁨’(Alpha ALPHA580)이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드는 음반이었다.

 

 

 

 

 

 

고음악 부문


영국의 아카펠라 앙상블 ‘탈리스 스콜라스’(1973~)가 부른 조스캥의 미사집(Gimell CDGIM051)이 선정되었다. 조스캥 데 프레(1440?~1521) 사후 500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음반으로, 탈리스 스콜라스는 이 음반으로 조스캥의 미사 전곡 녹음을 완성했다. 그 음반사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수상이라 하겠다.

 

 

 

 

 

 

보이스&앙상블 부문


뤼도비크 테지에(1968~)의 베르디 아리아집(Sony 19439753632)이 차지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출신의 바리톤 가수인 테지에는 수많은 영상물과 음반을 통해 그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의 단독 음반은 사실상 이것이 처음이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 버전을 따로 녹음해 수록한 베르디 ‘돈 카를로’ 중 ‘오 카를로, 들으시오(O Carlo, ascolta)’가 인상적인 음반이다.

 

 

 

 

 

가곡 부문


이집트 소프라노 파트마 사이드(1991~)의 ‘빛’(Warner 9029523360)이 선정되었다. 라벨의 ‘세헤라자데’, 파야의 ‘당신의 검은 눈’ 등의 아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수록한 음반이다.

 

 

 

 

 

 

 

특별상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1976~)가 올해의 아티스트상을, 독일의 전설적인 소프라노 군들라 야노비츠(1937~)가 평생공로상을, 소프라노 파트마 사이드가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의 오케스트라상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에게 수여되었으며, 보스턴 모던 오케스트라 프로젝트(1996~)가 특별상을 받았다.

 

그라모폰상=로컬 음반상?

그라모폰상이 발표될 때마다 올해의 음반상을 비롯해 각 부문 수상작 중에 영국인 음악가나 영국 레이블 음반이 많다는 비판은 빠지질 않는데, 올해도 역시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선정이 이루어졌다. 그 면면을 보면 그 경향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사실 이런 국수주의적 수상의 문제는 클래식 음반계만의 문제는 아니며, 문화 평론의 영역에서는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도 유독 그라모폰상을 문제 삼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클래식 음악업계에 있어서 ‘그라모폰’이라는 잡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와 클래식 음반 산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기존의 메이저 음반사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고 그 자리를 여러 마이너 레이블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영국 레이블들이 많았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적 이유를 고려하더라도, 그라모폰상의 자국 우선주의는 일반적인 음반 애호가들도 바로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그라모폰상을 영국의 로컬 음반상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이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이 상의 위상을 추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다. 1980년대 후반, 그라모폰상이 발표되면 국내의 음악 잡지들은 여러 페이지를 할애해 각 수상작에 대한 리뷰를 상세하게 싣곤 했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반업계의 쇠락과 함께 그라모폰상의 위상도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추락하게 되면서 이제 그런 관심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

 

스트리밍 시대, 그라모폰상의 미래

음반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필요성도 점차 사라지는 스트리밍 시대가 된 작금의 현실에서는 음반 평론의 존재 이유, 자체도 급격히 변모하게 되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라면 신보가 발매됨과 동시에 전 세계 어디에서나 바로 음원을 들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예전과 같이 음반 구매 이전에 평론을 읽고 구매 여부를 결정할 필요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따라서 이제 음반 평론, 그리고 이에 기반한 음반상 수상이라는 것은 평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플레이리스트가 하나 추가된 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제 음반상 수상이라는 것은 음원에 태그 하나가 덧붙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2021년 올해의 그라모폰 수상작 플레이리스트를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은가? 필자의 대답은 아직은 “Yes”이다. 영국인들의 스노비즘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국 우선주의도 별로지만, 올해 선정된 음반들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특히 ‘피터 그라임스’와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올타임 넘버원’이라 말해도 좋을 연주이다. 대신 몇몇 음반들은 리스트에서 삭제하고 싶긴 하다. 영국의 현대 작곡가는 내 취향이 아니며, 엘가의 피아노 5중주에 시간을 쓰고 싶지도 않다. 내년에 내놓을 그라모폰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런 편집이 필요 없는 수상작 선정이기를 바란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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