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ACY
그곳에, 우리음악이 있었다
서울돈화문국악당 일소당 음악회
종로에 스민 국악의 역사를 이야기와 음악으로 들춰 보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이하 국악당) 인근에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국악당과 마주한 창덕궁이 대표적인 유형유산이라면, 국악당이 위치한 종로에 흐르는 국악의 역사는 무형의 유산들이다. 국악당은 2016년 개관 이후 종로에 담긴 국악의 기억을 더듬어 기획공연으로 다듬어오고 있다.
올해 첫 기획공연으로 선보이는 ‘일소당 음악회’도 대표적인 경우다. 일소당(佾韶堂)은 창덕궁 인근에 위치했던 작은 국악공연장이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국악사(史)에 중요한 물줄기를 이뤄온 ‘종로 국악사(史)’에서 예인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운당여관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2019~2021년에 진행한 국악당의 ‘운당여관’ 시리즈는 올해 ‘일소당 음악회’로 이어진다.
2월 8~10일에는 최충웅(가야금)·아쟁(김영길)·김무길(거문고)이 출연하는 ‘현의 출현’이, 15~17일에는 김영기(정가)·한세현(피리)·원장현(대금)의 연주가 이어지는 ‘숨의 숨결’이 펼쳐진다. 여섯 명의 예인의 기억 속에 담긴 종로의 추억을 이야기와 음악으로 풀어내는 시간이다.
일소당에 담긴 궁중음악과 추억
국악당 옆에는 삼환빌딩이 있다. 예전에 일소당이 있던 자리다. 일소당은 과거 이왕직아악부의 하나였다. 오늘날 역사에 이왕직아악부는 조선 궁중음악을 보존·교육하던 기관으로 남아 있다. 아픈 역사도 스며 있다. ‘이왕직’(李王職)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인 전주 이씨를 지칭하고,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을, 직(職)은 업무를 담당하는 직관을 의미한다. 일제는 국권침탈 후 조선왕실 가족을 관리하는 이왕직을 천황 아래 궁내성 산하기관으로 두었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 음악을 관장하던 장악원(掌樂院)은 이왕직제가 공포된 1911년 이후 아악대(1925년 아악부로 개칭)라는 기관으로 격하된다.
당시 어린 아악부원들이 악기를 들고 매일 출퇴근했던 이왕직아악부는 오늘날 현대빌딩(종로구 계동)에서 비원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왕직아악부를 ‘일소당’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한국전쟁기인 1951년에 피란지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은 이왕직아악부를 전신으로 삼았다. 1953년 서울로 돌아온 국립국악원은 종로 운니동 비원 앞에 자리 잡았다. 그 안에 일소당이 있었다. 일반인들을 위한 월례국악강습회나 국악감상회가 열리기도 했다. 춤을 뜻하는 일(佾), 풍류를 일컫는 소(韶)처럼, 일소당(佾韶堂)에는 전통춤과 음악이 흘렀다.
국악사양성소 4기생 서한범(전 단국대 국악과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단골 프로그램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첫 곡은 ‘보허자’나 ‘수제천’ 같은 궁중 합주음악이었고, ‘춘앵무’나 ‘무고’ 같은 궁중무용이 이어졌다. 가곡이나 가사, 시조 같은 성악곡이 소개되기도 했다. 오늘날 ‘정악’으로 분류하는 음악들이다. 그러고 나면 민속악인들이 산조, 판소리, 민요 등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1955년 국립국악원은 국악사양성소를 개교하였다. ‘일소당 음악회’의 첫 무대를 장식(8일)하는 가야금연주자 최충웅(1941~)은 국악사양성소 1기 출신이다. 양성소는 지금으로 따지면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6년 과정이었다(현재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 양성소 학생들의 추억은 종로 곳곳에 묻어 있다. 양성소 출신으로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 윤미용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도 많았지만, 전교생이 매월 장학금 3백원을 받는 날이면 지금의 일본문화원 주차장에 있던 중국집 복승루에 모여 자장면을 실컷 먹었다”고 회고한다. 학생들은 졸업 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로 취직했다. 최충웅도 졸업 후 국립국악원에서 연구원·국악사·원로사범으로 재직하며 궁중음악의 법통을 이어왔다. 이번 무대에서 ‘영산회상’과 ‘천년만세’ 등을 직접 선보이며 궁중음악과 함께, 1955~61년의 국악사양성소에서의 기억과 추억을 더듬어볼 예정이다.
정월대보름인 15일에는 김영기(1958~)의 정가 공연이 오른다. 2001년 젊은 나이에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김영기는 1971년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하며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재학 시절의 스승 전효준, 김월하와의 인연과 일화를 가곡과 함께 풀어낼 예정이다.
종로에 흐른 민속악의 젖줄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음악을 유지한 것은 일소당만이 아니었다. 김영길(1962~)의 아쟁(9일), 김무길(1943~)의 거문고(10일), 한세현(1956~)의 피리(16일), 원장현(1950~)의 대금 공연(17일)은 일소당(佾韶堂)이 위치했던 종로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통 춤(佾)과 풍류(韶)가 흐르는 곳임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서울돈화문국악당과 마주한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이 문부터 종로 3가역에 이르는 긴 길(770m)은 ‘돈화문로’라 불린다. 조선시대에 왕이 행차하던 거리였다. 그로 인해 주변에 시전행랑과 피맛골, 순라길이 자연스레 생겼다. 관광객들은 인근 인사동과 익선동에서 한복과 개화기의 양장을 빌려 입고 지금의 이 길을 관광명소 삼아 걷곤 한다. 1994년 서울시는 이 길을 ‘국악로’로 지정했다. 길을 걷다보면 국악연구소, 악기사, 한복집이 몰려 있다. 돈화문로와 국악로가 포개질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국악의 역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예인들이 모여 만든 조선성악연구회가 있던 곳도 종로였다. 연구회 소속으로 당대 이름을 날리던 송만갑 명창은 인근 익선동에, 이동백 명창은 봉익동에 살았다. 돈화문에서 500여 미터 거리에는 운당(雲堂)여관이 있었다. 박귀희 명창이 양반 가옥을 사들여 31년간 여관으로 운영한 곳이다. 원래 제자를 가르치고 국악인의 교류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생계유지를 위해 여관으로 운영했다. 동아일보에서 1956년에 창설한 최초의 바둑 기전 국수전(國手戰)도 열리며, 대국장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무엇보다 ‘雲堂’이라는 이름처럼, 국악인들이 구름(雲)처럼 몰려들었다.
김영길·김무길·한세현·원장현의 기억 속 종로는 음악을 익히던 시절의 추억과 위대한 명인들의 음악과 가르침이 흐르던 곳이다.
“아버지는 전남 곡성군에서 나셨는데 나중에 서울로 이사하셨어요. 그래서 저의 본적지가 서울 종로구 돈의동 125번지이고, 살던 곳 위로 돈화문이 있었어요. 지금의 낙원동에 가야금병창하신 오태석 선생님 집이 있었고, 낙원시장 쪽에 우리집 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 집에 국악인들이 상당히 많이 다녔었죠. 그래서 나도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좋아하게 되었어. 부친은 햇님여성국극단 단장도 하셨는데, 주로 박귀희 선생님이 남자 역할을, 김소희 선생님이 여성 역할을 하셨어요.(김무길)”
삼청동으로 향하는 윤보선길에는 원장현이 운영하는 금현국악원이 위치해 있다. 원장현은 한세현의 부친 한일섭에게 대금을 배웠다. 한 명인이 말년에 입으로 가르쳐준 소리(口音)을 듣고 자신의 가락으로 체득하여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만들었다. 오늘날 이 산조는 대금 전공자와 취미생들이 가장 즐겨 연주한다. 그는 젊은 시절 운당여관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어느 고위 공직자의 눈에 띄고 적극적인 추천을 통해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현 민속악단)에 입단하여 28년간 재직했다. 음악을 평생 할 수 있는 좋은 직장과 인연이 닿은 곳이 종로인 것이다. ‘일소당 음악회’는 여섯 명인과 함께 하는 여섯 무대를 통해 종로에 스며 있는 이야기와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서울돈화문국악당
PERFORMANCE INFORMATION
서울돈화문국악당 ‘일소당 음악회’
오후 7시 30분 돈화문국악당
‘현의 출현’ 8일(가야금 최충웅), 9일(아쟁 김영길), 10일(거문고 김무길) ‘숨의 숨결’ 15일(정가 김영기), 16일(피리 한세현), 17일(대금 원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