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 ‘투란도트’ 황제로 즉위한 두다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2월 14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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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페라 ‘투란도트’ 2021.12.1~30

황제로 즉위한 두다멜

납작한 연출에 부조감을 더한 음악

투란도트 ©Charles-Duprat/OnP

로버트 윌슨(1941~) 연출의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가 파리 오페라에 올랐다. 2018년 스페인 마드리드 테아트르 레알에서 초연된 이 프로덕션은 윌슨 팬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은 구스타보 두다멜(1981~)이 파리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서는 첫 무대라 화제가 됐다.

두다멜

오프닝 공연은 물론, 필자가 지켜본 19일 공연은 쏟아지는 기립박수와 함께 막을 내렸다. 현지 언론은 “구스타보 두다멜과 로버트 윌슨, ‘투란도트’의 신성한 즉위를 선보이다”(르 몽드), “두다멜, 신성한 황제”(르 피가로), “두다멜의 파리지앵적인 신성한 즉위”(르 탕) 등을 헤드라인으로 내걸며 이 지휘자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한목소리로 칭송했다.

 

주인공을 압도한 신스틸러

조명과 무대연출을 직접 맡은 윌슨은 미니멀리즘적인 전략을 취했다. 제비꽃 성벽을 세우는 대신, 인형처럼 서 있는 갑옷 차림 병사들로 공간을 은유했다. 성벽 앞에 선 한 시민은 ‘어느 왕자가 투란도트 공주와 결혼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군중은 사형 집행인을 찾는다. 투란도트에게 결혼을 신청했으나, 그녀가 던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페르시아 왕자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군중을 가르고 칼라프가 등장한다. 그는 전쟁으로 나라를 잃으면서 헤어진 아버지 티무르 왕과 시종 류를 극적으로 다시 만난다. 기쁨에 찬 이들이 두른 흰 의상은, 해가 뜨면 처형당할 페르시아 왕자의 어둠과 대조를 이룬다. 이 왕자의 운명에 연민을 보내는 군중들 가운데, 한 아이는 ‘백조가 지나간다’라고 말한다. 흰 새의 모형이 공중을 가르고 지나간다.

검푸른 밤, 둥근달이 떠 있다. 페르시아 왕자는 쇠줄에 매여 있고, 공중에 투란도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윌슨은 공중에서 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다리를 놓았다. 그 위로 사형 집행인이 한 손에는 처형한 왕자의 머리를, 다른 한 손에는 피의 상징이자 투란도트의 색깔이기도 한 붉은 비단 가운을 들고 있다. 투란도트의 이미지에 매혹된 칼라프는 ‘삶은 여기에 있다’라며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해 징을 울린다. 여기까지 경직된 제스처와 단절된 동선 등으로 심리적 효과가 제한됐다면, 두다멜의 음악은 각 등장인물의 동요와 두려움, 희망과 절망을 긴박감 넘치게 표출했다.

징 소리를 듣고 핑·팡·퐁 세 명의 재상이 현대식 검은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다. 핑 역의 이탈리아 테너 알레지오 아르뒤니(1987~), 팡 역의 중국 테너 진수 시아후(1990~), 그리고 미국 테너 매튜 뉴라인이다. 이들은 류 역의 소프라노 관쿤 유(1982~)와 더불어 성악과 연기 면에서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사했다. 평평하고 납작한 윌슨의 연출에 놀라운 부조감을 형성했다.

1막 2장, 무대 중앙에 칼라프가 서 있고 그 양쪽으로 티무르 왕과 류가 서 있다. 그 사이에서 재상들은 이들의 삶을 되새겨본다. 나라의 재상이라지만, 이들의 본업은 청혼자들을 처형하는 ‘투란도트 뒤처리’다. 이들은 때로 익살 가득한 대화로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풍자한다. 3막 1장에서는 투란도트의 명령에 따라 칼라프의 마음을 돌리고자 그에게 여자를 소개하는 중매 역도 맡는다. 이들의 3중창은 현란한 윌슨의 조명이 표출할 수 없는 색채감을 선사했다. 반면 칼라프 역의 테너 귄 휴스 존스(1969~)와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엘레나 판크라토바는 ‘수준 이하의 캐스팅’이란 평을 샀다. 테너의 경우, 태양처럼 찬란한 음색 대신 카랑카랑한 고음이 지배적이었다. 두다멜의 오케스트레이션에 비길만한 음폭도 아니었고, 심리적 효과가 부재한 윌슨의 연출 동선 때문인지 캐릭터가 지닌 감정의 변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투란도트 역의 판크라토바는 기교와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으나 악보를 부르는 것과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의 차이를 상기시켰다.

성악가의 연기에 관해서는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1925~2016)와 연출가 파트리스 세로(1944~2013)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링 사이클’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판에 박힌 바그네리안적 제스처와 무대 연출을 버리고 연기 지도에 철저히 임한 세로는 바그네리안 성악가들도 뛰어난 연기자가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윌슨은 일명 ‘동양 연극적 코드’라며 자신만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오페라 예술에서 감지할 수 있는 연금술적인 감정의 반응은 제한돼 있었다.

이 점에서 2막 2장은 유감이었다. 칼라프가 황제 앞에서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에 도전을 선포한다. 황제는 “죽음에 취한 이국인. 운명을 따르라!”며 청을 승낙한다.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칼라프와, 덫에 걸린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 투란도트의 대립은 냉랭하기만 했다.

다행히 두다멜의 음악이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미완성작이라, 고치고 고친 푸치니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다”며 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주역과 연출이 표출하지 못한 감정의 팔레트를 두다멜은 충만하게 메꾸어갔다.

 

후광의 주인은 누구?

황제의 등장은 알레고리의 연속이었다. 하늘이 내린 권력을 표상하기라도 하듯, 황제는 공중에서 줄에 매달린 의자를 타고 내려왔다. 군병들과 두 샤먼, 그리고 투란도트가 등장하자, 수직으로 흰 조명이 바닥을 비추고 땅과 하늘의 만남을 암시한다. 유럽 절대 왕정기에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연출을 왕권신수설에 대한 은유로 자주 사용했다. 동양에서 ‘하늘과 땅의 만남’이 꼭 절대왕권을 상징하지는 않았지만, 윌슨의 연출은 효과적으로 거대한 바스티유 무대를 채웠다.

©Charles-Duprat/OnP

3막은 투란도트의 명령으로 누구도 잠잘 수 없는 밤이다. 연출은 이 긴장감을 검은 숲에서 처리했다. 칼라프는 그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다. 예의상의 ‘브라보’를 받을 뿐이었다. 반면, 칼라프를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류 역의 관쿤 유는 1막의 ‘주인님 들어주세요’에서부터 고운 고음, 그리고 고음과 저음을 급히 오가면서도 음색의 변화를 포착하는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임을 과시했다. 죽음을 앞두고 불리는 마지막 아리아 ‘나는 그의 이름을 안다’ 이후에는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기에서 진 투란도트는 황제에게 이 이국인에게 시집보내지 말라고 투쟁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밝힌 칼라프에게 감동한 투란도트 역시 사랑을 맹세한다. 유명한 듀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아오’를 노래하는데, 투란도트 뒤로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흰 조명이 비친다. 이 빛은 깨달음의 광명일까?

©Charles-Duprat/OnP

이 빛이 절대성을 의미한다면, 이 후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구스타보 두다멜뿐이었다. 언론들이 그를 향해 쓴 갈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음악사에 남을 그의 빛나는 행보를 기대해 본다.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파리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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