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레브레히트 칼럼 | 당신이 모르는 게르기예프에 대하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6월 20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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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게르기예프에 대하여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음악계에서 제재당하고 있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는 내게 밤의 사나이였다. 다른 이들은 꿈속에서 헤매는 시간, 그는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번은 게르기예프와 함께 그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포핸즈 연주를 위해 로테르담까지 데려온 두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그 후, 게르기예프는 대기실에 있는 두 피아니스트를 찾아갔다. 그는 무대 뒤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도 없이 두 손으로 그 곡을 다시 연주해 보였다.

보드카 한 병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근처를 산책하는 동안 그는 내게 지나치게 칭송받는 스트라빈스키보다 프로코피예프가 훨씬 ‘중요한’ 인물임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썩 정리되지 않은 소련의 선전으로, 스트라빈스키가 부패한 서구권에서 썩어가는 동안 프로코피예프는 1930년대 중반 러시아로 돌아온 이후 최고의 작품을 써냈다는 식이었다. 아내 리나 프로코피예프가 시베리아에 수감되고, 프로코피예프 자신은 스탈린의 두 번째 대공포(Second Terror) 시대에 극심한 만신창이로 전락한 사실은 휘발된 지 오래였다. 단호한 만족감을 보이며 게르기예프는 으쓱했다. “그는 생존자이죠.” 외딴 교외에 이르러, 나는 우리가 가망 없이 길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저는 로테르담에서는 호텔과 공연장을 오가는 길밖에 모릅니다.” 게르기예프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길을 찾아 돌아올 무렵에는 다시 해가 뜨고 있었다. 그는 호텔 프런트에 자신에게 온 팩스가 있는지 물었다. 로테르담은 게르기예프의 첫 해외 직장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고 리허설에 여러 번 불참하여 많은 연주자들을 격분케 하였지만, 강력한 애호가 층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매년 가을 로테르담에서 게르기예프 축제가 개최되곤 했다. 물론 아시다시피, 지금은 끝이 나 버렸지만.

 

탁월한 활약, 그리고 푸틴

내가 게르기예프를 처음 만난 건 그가 무조성과 성적 문란함으로 인해 오랜 기간 금지되었던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불의 천사(The Fiery Angel)’를 부활시킨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였다. 그는 ‘불의 천사’를 ‘보체크’, ‘룰루’와 맞먹을 모더니즘의 명작이라 보았다. 내가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 게르기예프는 리무진을 보내 나를 새벽 두 시까지 자신의 사무실에 가두곤 끝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사무실 밖에서는 영화 제작자 두 명이 자신들의 순번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무너져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오페라와 발레의 명맥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그의 에너지와 음악성, 놀랍도록 풍부한 재원은 분명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그의 누나 라리사 게르기예프는 동생을 위해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연주하며, 어머니는 북오세티야에서 게르기예프가 준비만 된다면 아이를 낳아줄 신부를 구해올 것이라고 한다. 게르기예프의 가족은 민족성은 제쳐둔 채 소련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 정부를 위해 탱크를 설계했던 그의 삼촌은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원의 저명한 일리야 무신(1903~1999) 교수와 게르기예프를 연결해주었다.

내가 블라디미르 푸틴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게르기예프와의 대화에서였다. 그는 러시아 은행에 마린스키 극장의 수익을 보관했으나 1990년대에 몰아친 공황으로 은행은 파산하고 만다. 빈털터리 신세가 된 그는 당시 부시장이던 푸틴에게 도움을 청했고, 푸틴은 급여 명세서를 처리해주었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그에게 칠면조 국영 독점 판매권을 넘겨주었으며, 게르기예프를 전용기는 물론, 소문에 따르자면 카프카스에 푸틴의 궁전같이 거대한 저택까지 소유한 집권층으로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의 역사는 퍽 깊다. 나는 핀란드인 평론가 세포 헤이킨헤이모를 통해 게르기예프를 처음 만났다. 세포는 내 평생에 만난 사람 중 지휘자에 대한 최고의 판단력을 보유한 친구다. 그는 핀란드 중부에서 게르기예프를 위한 축제를 준비했고, 우리는 게르기예프가 직접 러시아식 저택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며 함께 즐거운 일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 근처에 14세기에 지어진 사우나가 있었다. 게르기예프와 나는 그의 오래된 친우인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와 함께 그 사우나에서 백야를 지새우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서는 한때 인기를 누린 보이 밴드와 같은 치기 어린 모습이 일부분 보였다. 마추예프는 게르기예프가 중국, 일본 투어 도중 단기 체류할 수 있도록 자기 고향인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공연장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든 비용은 당연하게도 푸틴의 몫이었다.

핀란드 사우나만큼 비밀을 풀어놓기에 좋은 공간은 없다. 덕분에 나는 게르기예프에 대해 꽤 잘 알게 되었다. 수년간 게르기예프는 내가 쓴 글 중 일부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하며 연락을 끊었다가 변덕스럽게 다시금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2004년 그의 고향인 러시아 북오세티야 베슬란 학교 인질극 사건(체첸 독립운동가 내 과격파들이 주도한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 빈 필 공연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으로 곡목을 변경한 게르기예프는 오케스트라의 많은 이들이 이때를 여전히 소중한 공연으로 기억한다며 내게 전화로 전해주었다. 인기가 커지며 그는 더욱 부유해졌고 멀어졌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늘 탁월했다.

 

푸틴과 게르기예프

음악은 그를 구원했는가

우리 사이를 이어줬던 평론가 세포는 우울증을 앓았다. 어느 밤 자기 집 발코니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세포는 게르기예프가 전화로 진정시키려 하자 휴대폰을 꺼버린다. 그다음으로 내가 게르기예프와 만난 것은 코번트 가든에서 음울한 베르디의 ‘맥베스’가 막을 내리고 열린 출연진 정찬 자리에서였다. 나는 게르기예프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고, 내게 눈길을 준 그가 말한 것은 “세포”였다. 우리의 친구는 비극적이게도 다음 시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칠순에 가까워진 오늘날의 게르기예프는 악명 높은 푸틴 정권의 선전원이자 전쟁 범죄의 협력자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배제되고 해고당했다. 공연 대부분이 리허설 없이 진행되고, 고집스럽고 또 형식적이며, 대중에 대한 멸시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전시를 아끼지 않는 그의 공연이 그리울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까지 게르기예프는 오전에는 모스크바에서, 같은 날 오후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지휘했다. 마추예프와 내기라도 한 것인지, 물론 전용기가 있으면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지만 분명 예술가의 행보라 볼 수 없다. 게르기예프는 오래전부터 권력이라는 관념에 매진된 지휘자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보이콧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개인적인 추억을 꺼내 놓는 이유는 퇴출당한 예술가 속에 여전히 ‘예술을 통해 그 자신과 청중을 구원했을지도 모를’ 특별한 재능을 가진 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에게는 항상 좋은 면이 존재했다. 그도, 우리도, 다시 한번 그 모습을 찾아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번역 evener

 

노먼 레브레히트 칼럼의 영어 원문을 함께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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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new Valery Gergiev as a creature of the night. While others crashed out, he talked until dawn. Once, in Rotterdam, we listened to a pair of young pianists he had flown over to play the 4-hand version of Stravinsky’s Rite of Spring. Afterwards, with window panes still rattling, he visited the two kids in their green room, then sat down and played the whole thing again, two-handed from memory on a backstage upright.

We went on to dinner with a bottle of vodka, then for a walk around town while he tried to convince me that Prokofiev was more ‘important’ than the overpraised Stravinsky. Much of his argument was undigested Soviet propaganda – that Prokofiev wrote his best work after returning to Russia in the mid-1930s while his rival was constipated in the decadent West. Never mind that Lina Prokofiev was sent to Siberia and her ex was reduced to a quivering wreck in Stalin’s Second Terror. ‘He survived,’ shrugged Gergiev, with grim satisfaction.

In an outlying suburb, I realized we were hopelessly lost. ‘I know the way in Rotterdam across the road, from the hotel to the concert hall and back,’ said Gergiev, unbothered. The sun was rising as we got back. ‘Any faxes for me?’ he demanded at Reception. Rotterdam was his first foreign job. He learned no Dutch and outraged musicians by missing rehearsals, but he had a strong fan club and the city put on a Gergiev festival every autumn until – well, you know the end.

I first met him in St Petersburg where he was reviving The Fiery Angel at the Mariinsky, an opera long banned for its atonalities and sexual depravity. Gergiev considered it a modernist masterpiece, equivalent to Wozzeck and Lulu. Before my flight home he sent round a limo and locked me in conversation in his office until two in the morning. Outside, a pair of filmmakers awaited their turn.

It was impossible not to admire his energy, musicality and unbelievable resourcefulness in keeping opera and ballet alive in the crumbling Russian empire. His sister Larissa worked for him as a rehearsal pianist. His mother, he told me, would find him a bride back in North Ossetia when he was ready to procreate. Ethnicity aside, his family knew how to work the Soviet system. An uncle who designed tanks for Stalin placed Gergiev with the elusive Professor Ilya Musin at the Rimsky-Korsakov Conservatoire.

It was from Gergiev’s lips that I first heard the name Vladimir Putin. Gergiev kept the Mariinsky’s earnings in a Russian bank which, like many in the 1990s, went bust. Penniless, he turned to Putin, the city’s deputy mayor, who covered the wage bill. Later, as president, Putin gave Gergiev the national monopoly for selling turkey meat, turning him into a minigarch with a private jet and, reportedly, a Putin-like palace in the Caucasus. Those two, Putin and Gergiev, go back a long way.

I first met him through a Finnish friend, the critic Seppo Heikinheimo, the best judge of baton talent I ever knew. Seppo set up a festival for Gergiev in the middle of Finland and spent a cheery Sunday with me scouting sites where Valery could build himself a dacha. There was a 14th century sauna nearby. Gergiev and I spent a white night there with his all-time best friend, the pianist Denis Matsuev. There was something immature about them, part Boys Own, part Boyzone. Matsuev said he planned to build Gergiev a concert hall in his Siberian home town of Irkutsk, a stopover for him on tours to China and Japan. Putin, needless to say, would pay for it.

There are not many places in a Finnish sauna to keep secrets and I got to know Gergiev pretty well. Down the years he would object to something I had written and contact was lost, only to be renewed at his whim. After the 2004 school massacre in Beslan, north Ossetia, Gergiev phoned me to say he was changing that night’s Vienna Philharmonic concert to include Tchaikovsky’s Pathétique Symphony, giving a performance that many in the orchestra still cherish. Rich and remote as he grew, the human dimension was always paramount.

Our mutual friend Seppo suffered from depression. One evening on his balcony, preparing to jump, Seppo was switching off his cellphone when Gergiev rang and talked him down. The next time I saw Gergiev was at a cast dinner after a bleak Verdi Macbeth at Covent Garden. I waited for him to speak. He looked at me and said, ‘Seppo’. Our friend had tragically succeeded at his next attempt.

Today’s Gergiev, nearing 70, is a notorious propagandist for the Putin regime, ally of a war criminal, banned in most countries of the world. I shall not miss his conducting because his concerts are all too often unrehearsed, wayward and perfunctory, displaying contempt for the public and for the music he professes to serve. Not long ago, Gergiev conducted in Moscow in the morning and at Carnegie Hall the same night. You can do that with a private jet, perhaps on a bet with Matsuev, but this is not the act of an artist. Gergiev has sold out long ago to notions of power.

That said, however. I do not like boycotts. The reason I am sharing these personal memories is to show that within a proscribed artist there is still a person with a unique gift who may yet have the capacity to redeem himself, and his audience, through art. There was always some good in the Valery Gergiev I knew. I hope he, and we, can find it again.

 

 

노먼 레브레히트

영국의 음악·문화 평론가이자 소설가. ‘텔레그래프’지, ‘스탠더즈’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블로그(www.slippedisc.com)를 통해 음악계 뉴스를 발 빠르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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