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은 필요한가? 음악학 김희선, 대금 유흥 외 4인 대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7월 11일 9:00 오전

국악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해외 유학은 무엇일까

해외 유학 ‘필요설’부터 한 번 정도의 유학을 시도해도 좋다는 ‘실험설’과 ‘체험설’까지 이들의 유학 전후의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국악은 ‘한국’이 원산지인 음악이다. 그래서 한국음악가들의 성장과 활약이 국내 공부와 활동만으로 족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시선과 시야가 넓고 남달랐던 이들은 해외 유학을 통해 자신의 전공을 발전시켰고, 유학 이후의 귀국은 국악계에 새로운 힘과 지렛대가 되기도 했다. 그들에 의한 새로운 음악과 지식의 ‘이동’은 국악계를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운동’이 되곤 했다.
음악학자 김희선은 가야금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음악인류학을 공부했다. 당시 습득한 언어 능력, 지식, 인적 네트워크는 오늘날 한국음악학계를 국제적인 장과 연결하는 중요한 자원이 되고 있다. 작곡가 윤혜진은 국악작곡을 전공한 후 예나 지금이나 유학지로는 다소 낯선 인도에서 유학했다. 유학을 통해 그들의 전통과 철학을 깊이있게 들여다본 순간은 지금의 작업에 직·간접적인 공기가 되고 있다. 지휘자 원영석은 국악작곡 전공 후 독일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국악관현악은 많지만, 체계화된 지휘법과 훈련된 지휘자가 부족한 지금. 그의 행보와 지휘법은 많은 젊은 지휘자와 악단에 귀감이 되고 있다. 대금연주자 유홍은 영국에서 민족음악학을 공부한 뒤, 새로운 현대음악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물론 그의 소리를 통해 아시아 컨템퍼러리 음악의 새 장을 쓰며 유럽과 한국을 오가고 있다.


새로운 환경과 속도로 국악계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 기획 기사의 대상자로 참여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희선 ‘국악의 세계화’라는 구호와 담론이 있었는데, 이제 한국음악도 인정받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때마침 국악을 둘러싼 시선도 변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에는 미디어와 관객의 변화하는 시선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에서 한국음악을 바라보는 시선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주제다.

윤혜진 기획 기사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놀랍고 신선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국악인들의 유학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새로운 공부를 위해, 국내에서의 공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유학길에 오른 경우가 많다.

원영석 25년 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한국음악 전공생들에게 유학은 굉장히 낯설었고, 전공을 바꿔 유학 가기도 했다. 요즘은 자신의 전공과의 관련성을 파악하여 유학 간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이러한 변화와 상황이 중요하기에 이 기사가 많이 공유되었으면 한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 유학지 선택의 이유는?

김희선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원어민(당시는 미인회화라 했다) 중심의 영어학원과 토플 시험도 준비했고, 방학 때는 영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오며 유학을 준비했다. 우습게도 당시 정보가 부족했던 나는 음악을 공부하려면 무조건 유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비록 오해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이였지만, 이런 나를 지켜보던 은사들(이성천·한만영·이혜구)이 도리어 유학을 권하셨다. 한만영 교수님은 민족음악학을 공부하여 국제학계에서 활동하라는 꿈을 심어주셨고, 국제 음악학계의 정세를 잘 아셨던 이혜구 교수님도 응원해주셨다. 국제학계에서 활동하려면 영어가 중요해서 당연히 미국으로 갔다.

윤혜진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배우나 음악을 맡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누렸다. 학과 공부로부터 겉돌았지만, 내심 창작에 대한 갈망이 많았다.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나를 위한 긴 여행을 준비하곤 했다. 물색한 결과 인도가 최적이었다. 나만의 생각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많았고, 익숙했던 서구권과 달리 모든 게 생소하여 자극이 될 것 같았다. 석사 과정 동안 방학 때마다 인도로 떠났다. 뉴델리, 뭄베이, 마두라이, 캘커타 등지를 떠돌았고 학교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긴 여행의 시작과 머묾이 유학으로 이어진 셈이다.

원영석 지휘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국악과는 물론 서양음악과에도 지휘 전공이 드물던 때였다. 전문적인 공부와 유학을 위해 미국의 학교들을 물색했는데, 그러던 중 독일에 유학하던 친척으로부터 독일 유학을추천 받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일어나 등록금이 높은 미국보다 무료거나 저렴한 독일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유 홍 연주자로 살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싶은 꿈이 늘 있었다. 내가 재밌게 할만한 작업들을 찾아보던 중 문득 해외에서 대금연주자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이 자연스레 유학으로 이어진 셈이다. 유럽에 연주차 들를 일도 많았기에 자주 가보면서 마음이 더 커진 것도 있는 것 같다. 영어 공부도 할겸 영국(리버풀)을 택했고, 현지서 지인에게 키스 하워드 런던대(SOAS) 교수를 소개받으며 유학의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민족음악학과에 퍼포먼스 전공이 신설되었는데, 각 나라의 전통악기과 음악을 공부한 이들이 모여 실질적인 연주자와 창작자로 성장하고 연구하며 교류할 수 있게 만든 학과였다.


유학 전의 준비과정이 궁금하다.

원영석 국악작곡 전공으로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작곡 공부를 이어가며 지휘 공부도 겸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그런데 유학지가 미국에서 독일로 바뀌면서 준비과정도 달라졌다. 처음 접한 독일어는 영어보다 낯설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학생의 성향과 공부 방향을 어느 정도 존중하여 입학의 기회를 내주는 반면, 독일의 지휘 과정은 피아노 실기, 음악분석 등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결국 원하던 해에 입학하지 못해 독일에서 준비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유 홍 영국 현지에서 학교와 학과를 추천받아, 현지에서 준비했다. 2007년에 준비하여 2008년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는데, 입학을 위해 서울대 교수들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김희선 1996년에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전공 관련 유학원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충 이름이라도 들어본 대학교로 편지를 보냈고, 한두 달 지나면 두툼한 입학 서류와 소개 책자가 왔다. 유학준비를 하던 서양음악 전공 선후배들이나 조교와도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미국 피츠버그대학에 지원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다. 벨 융(Bell Yung) 교수가 재직 중인데, 아시아음악학으로 가장 유명한 분이라며 이병원 교수님(하와이대)께서 추천해주셨다.

윤혜진 여행도 할 겸 인도에 들를 때마다 학교에 직접 들러 안내 책자를 얻고, 수업 광경도 슬며시 지켜봤다. 그러던 중 국립비스바바라티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타고르가 설립한 학교였는데, 인도 속의 학교지만, 인도 같지 않은 분위기가 묘했다. 인도는 영국의 오랜 식민지를 거쳤기에 학제도 영국과 비슷했다. 여행 시에는 일상어인 벵골어를 사용했는데, 교내 공문서에는 영어를 사용했고, 인도 영어(IndianEnglish)로 수업과 대화가 오갔다.


유학 준비가 잘 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했나?

원영석 독일은 어느 지역이나 한인 교회 등의 집단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정보를 나누며 돕고, 유학 전부터 한국에서 행해 오던 문화를 공유하곤 한다. 그래서 유학 가면 나의 전공으로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한곤 했다. 비록 원하던 해에 입학하진 못 했지만 현지에서 준비에 임하기로 했다. 한인 교회와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와 음식, 문화적인 도움을 받으며 현지 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휘 전공 유학생이 많지 않던
당시에 국악을 전공한 유학생이라는 게 신기했는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유학 중이던 오르간 전공생에게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 랄프 오토 교수를 소개 받았다. 오토 교수는 내가 입시에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 피아노 실기처럼 부족한 과목을 잘 지적해주었고, 자신의 수업을 청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유학을 결심했을 때, 주위 학우나 교수의 반응은 어떠했나?

김희선 20대였지만 두 번의 가야금 독주회, KBS 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 음반취입, 서울대 조교, 대학 강의 등 이른 나이에 좋은 경력이 많이 쌓였을 때였다. 주위에서는 굳이 유학 가야 하냐, 귀국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경력이 아깝지 않느냐는 걱정도 있었다.

윤혜진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익숙했는지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았다. 교수와 선배들이 도움을 주었다. 지도교수님(이성천)은 ‘역시 너다!’라며 격려해주셨고, 춤을 모티프로 작품 쓰기를 즐기던 이해식 교수님은 인도춤에 관한 자료를 많이 주셨다.

원영석 국악과에 재학 중이었지만 음대 내 서양음악 전공 관련 수업인 음악분석, 화성법, 대위법, 관현악법 등을 부지런히 들었다. 성악과 피아노도 부전공으로 삼아 공부했다. 국내에서 국악 지휘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박범훈, 이상규 교수처럼 작곡을 공부하다가 지휘로 나아가는 방향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런 나를 보면 주위와 교수들이 지휘를 열심히 공부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유 홍 국악 연주자의 유학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가 생소해하며,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상상하지 못 했다.


그렇다면 유학지에서는 그 나라에 없는 ‘국악’을 전공하고 온 유학생을 학생과 교수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나? 더불어 공부의 방향은 어떤 것으로 잡았나?

김희선(1969~)
서울대와 대학원 졸업 후 1996년 미국유학.
피츠버그대학에서 음악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싱가포르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2016-2020)을
역임했다.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인류학자 로버트가피아스와 함께

김희선 아시아학(Asian Studies Program)을 부전공(Certificate Program)처럼 공부했는데, 한국음악 전공자라는 게 알려지면서 인근 초·중·고교에 아시아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다른 유학생보다 동네 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경력(가야금 독주회, 음반 발매, 대학 강의 등)으로 현지서 ‘전문가’ 대접을 받은 것이다. 학교측의 권유로 독주회도 했는데,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 독주회와 특강의 기회가 많아졌다. 내가 재학한 민족음악학과는 홍콩·싱가포르·중국·일본·가나·나이지리아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기에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아시아음악학을 전공한 교수들을 통해 한국음악을 새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윤혜진 인도에서 ‘음악’이라고 하면 그들은 자연스레 자국의 전통음악을 떠올린다. 전통이 일상화된 문화권이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공부했다고 하니 신기해하기보다 자연스러워하며 관심을 보였다. 인도에서는 ‘음악’이라는 개념 안에 노래, 춤, 기악이 한데 녹아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려면 자연스럽게 춤과 노래를 배워 몸에 익혀야 한다.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구두(口頭)로 전승되는 문화가 독특했다. 악보같은 시각적 기호물보다 구술(口述)과 청각을 통해 배우는 음악문화가 독특해 눈 여겨 보았다.

원영석 국내에서 지휘 경험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배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도 교수가 랄프 오토(1956~)였다.(1990년부터 2006년까지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에 재직했고, 이후 마인츠 대학으로 옮겼다) 지휘법은 물론 지휘자의 역할과 임무 등을 알려주시면서 내가 체계적으로 지휘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오토 교수는 리허설 때 지휘자들이 설명보다 지휘,움직임, 표정으로 음악을 만들고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독일어가 부족했던 나는 지휘 수업에 필요한 말만 익혀 수업에 임했는데, 그럴수록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지휘 모습을 보면서 “원(영석)은 지휘할 때 에너지가 있어서 참 좋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유 홍 입학한 민족음악학과에는 연주자보다 이론분야 연구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실질적인 음악과 연주에 관심을 보였고, 여러 나라의 음악과 악기 소리를 들어보길 원했다. 누구는 연구 서적을 가져와 적힌 내용이 맞냐고 확인하기도 했다.

브리트시도서관에서


국악은 해외에 없는 학문이다. 따라서 외국에서는 공부를 목적으로 한 유학생이라 할지라도 ‘국악’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공부했던 ‘국악’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배운 ‘공부’를 스스로 접목해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희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학문적 깊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박사 논문 주제도 미리 선정하여 유학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인류학, 문화인류학, 음악사학 등의 과목을 통해 공부해온 한국음악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마련했다. 당시

윤혜진(1970~)
서울대와 대학원 졸업 후 1996년 인도유학.
국립비스바바라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동양음악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고,
전남대 국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갖게된 질문들은 지금까지 연구하는 방향과 자연스레 연결되곤 한다.

윤혜진국악에 대한 것이 어느 정도 체화된 상태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 시작인만큼 새로운 지식을 통해 활발히 자극을받아 나갔다. 그러던 중 유독 관심가거나 자신과 잘 맞는 분야와 학과를 만나니 훨씬 집중하게 되었다. 물론 자극이 되어도 기존의 생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다만 새로운 자극 속에서 기존 지식과 전공의 활용도 생각해보게 되더라. 인도 음악에 익숙해지면서 국악을 통해 체험하고 교육받았던 사고의 근육이 자연스레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나를 이끄는 게 좋았다. 한편 음악 공부와 동시에 종교철학에도 깊이 파고들기도 했다. 유학 전에도 인도철학, 종교, 사상
서적 등을 읽곤 했다. 음악과 종교적인 것, 과학적인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영적인 것을 상상하고, 일상적인 것과 신성한 것 즉 성과 속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 공존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이러한 관심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종교철학이었다. 박사 논문(Gazing at Energy Circulation and Indian Music)은 인도음악에 담긴 에너지 순환을 연구한 것이었다. 인도철학에는 반복과 순환이 만드는 세상의 창조와 파괴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자연의 섭리도 이와 같다. 같은 것이 반복되지만 끊임없이 상승과 생산을 위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순환적 체계와 인도음악 속의 순환적 체계를 접목하고 적용해보았다.

2021년 정가악회 명상콘서트 ‘풍류재-침묵을 위한 노래’
(작곡 윤혜진)

2021년 정가악회 명상콘서트 ‘풍류재-침묵을 위한 노래’
(작곡 윤혜진)

 

원영석 한국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배운 것을 응용하고 정립하면서 공부해나갔다. 국악작곡 전공이었지만,
국내의 지휘를 배울 수 있는 곳에서 틈틈이 배웠다. 합창 심포지움 같은 곳에서 지휘 테크닉이나 음악 분석법도 배우고 학교에선 김덕기, 임헌정 교수의 수업도 들었다. 학교 공연을 통해 현장과 공연의 분위기를 익힘과 동시에 배운 것을 활용해보기도 했다. 사실 한국에서 쌓은 경험은 독일에서의 공부에 비하면 미비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 유학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이 경험과 지식들을 체계화된 공부를 통해 돌아보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선별할 수 있었다. 그때 응용하고 적용해본 습관들이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다. 서양음악을 지휘하는 것과 달리 국악관현악은 분명 ‘국악’만의 특화된 기법과 기술을 요한다. 따라서 이러저런 것을 접목하며 나만의 한국음악 지휘법을 연구해본다. 그렇게 본다면 유학 이후에도 공부와 연구는 꾸준히 지속되는 것 같다.

유 홍 입학한 민족음악학과는 1년과 2년 과정이 있었는데, 나는 1년 과정을 택했다. 나 외에도 학위를 신속히 받고자 하는 학생이 많았다. 유학생 수와 나라에 따라 중동음악, 아프리카음악, 동아시아음악 등으로 학과 내 분위기가 달라졌고, 때로는 특정 지역 음악으로의 쏠림현상도 있었다. 내가 재학중에는 아프리카 음악이 강세였고, 그 다음이 동아시아음악이었다. 민족음악학과는 자기 주전공 지역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공부를 갑자기 시작한 경우니까 일단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를 전공 지역으로 정했고, 다른 지역의 악기도 배우려고 했다. 터키의 관악기를 하고 싶었는데, 학과장이 그런 경우가 없었다며 한국의 전통악기와 터키의 악기가 함께 하는 협업 작업을 권장했다. 결국 터키의 타악기 다부카와 함께 하는 것으로 졸업 공연을 올렸다. 전공자뿐만 아니라 경제학 전공생 등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뮤직 비즈니스’라는 과목이 흥미로웠는데, 세계적인 기업들이 상품과 제품의 광고 속에 민족음악을 어떻게 사용하며, 이를 통해 이미지를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내용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모델로 하고 그들의 문화를 사용함으로써 본토의 관심도 끌고, 경제적인 침략도 순화시키고 하는 데에 민족음악과 문화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유학 생활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언어, 현지 생활, 외로움, 음식, 기후 등.

원영석(1972~)
서울대 졸업 후 1998년 독일유학.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를 역임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교수와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원영석 역시 언어였다. 공부한 단어들이 머리에 한가득한데, 입만 열면 연결이 안 되었다. 말이 안 통하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언어의 경우 한국에서 1년 준비하는 것보다 현지서 단기간 준비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가서 부딪혀보면 실감할 것이다. 일단 무조건 현지로 가서 부딪히고 또 부딪혀야 한다.

유 홍 일상어보다 학문을 위한 언어는 더 어렵다. 실기 중심의 교육이어도 기본적인 에세이 작성을 위한 언어는 어렵다. 그만큼 읽어야 하는 양도 많고.

김희선 언어 문제였다. 한국에서 원서보다 토플만 준비했으므로, 현지에서 매주 읽어야 하는 엄청난 양의 책과 강의마다 발제와 토론을 영어로 하는 일이 힘들었다. 언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겪는 망신이 오히려 인생 최대의 공부가 되었고, 공부가 너무 힘들다 보니 오히려 나머지가 편할 지경이었다. 생활 속의 언어를 늘리기 위해 공부만큼이나 그들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들에게 받는 도움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영
어 공부와 학습들이 지금의 내게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유학 중 가장 보람이 있었던 적은 언제였나?

김희선 1년이 지나면 학교측에서 박사과정 진학 예정자를 통보했는데, 그 안에 들어 매우 기뻤다. 그때부터 슬슬 공부가 재밌기 시작했다. 영어도 조금씩 자신이 붙었다. 그래서 가야금 공연을 초청한 학교에서 일종의 렉쳐 콘서트로 진행하기도 했다. 미시건대의 스턴스 음악박물관(Stearns Collection of Musical Instruments)에서 전문가 특강을 초청받고, 이후로도 캠브리지대 등에서 특강을 맡았다. 학생이 아니라 전문가 대우를 받으니 내심 기뻤다. 그때 20대였는데 한국이었다면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사실 공부만 빼면 매우 행복한 시간들이다. 다시 그 시간으로 가도 나는 역시 유학길에 오를 것이다.

윤혜진 여행하고 싶은 곳에서의 유학이었으니 삶에서 오는 기쁨이 컸다.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강변을 달릴 때, 눈앞에 논과 밭이 펼쳐질 때, 머리속에선 집에 가서 무슨 음식을 해먹을지, 오늘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떠올려 보곤 했다. 또래 친구들이 한국에서 학업과 생활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누릴 수 있는 남다른 즐거움이었다. 인도에서 불편하지 않았냐고 묻는 이들이 많지만 유학 초기에는 2년 동안 냉장고 없이 살아도 큰 문제 없었다. 방학 때마다 여행도 신나게 다녔다.
유 홍 학우들이 책으로만 접하던 음악을 내가 직접 연주하고 들려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꼈다. 학과 특성상 공연이 꽤 많았는데, 내게 많은 기회가 왔다. 학생이었지만, 공연 수당도 제법 나왔다.

2022년 KBS국악관현악단 ‘라이징스타II’
(이희문&놈놈)

2022년 KBS국악관현악단 제258회 정기연주회
(비파 협연 박장원)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개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국제교류 지원사업도 많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레지던스와 유학의 차이, 각각이 지닌 일장일단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김희선 유학이나 레지던스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가장 중요하다. 가끔 유학에 대해 문의하는 국악 전공생들이 있는데, 유학을 막연히 동경하는 학생들도 있다. 유학은 실제로 엄청난 결심과 인내가 없이는 결실을 맺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단기간의 해외 경험이나 외국 음악가·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원한다면 유학보다 레지던스를 추천한다. 국립국악원에서 출간한 ‘세계를 향한 한국음악학 핸드북’(2017)을 보면 유학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윤혜진 여행이라면 한 달 이상을 권유한다. 개인적으로 여행 시 3주까지는 한국에서의 관성이 남아 있는데, 그 이상이 되면 변화가 생기며 현지에서의 새로운 감각이 들어온다. 레지던스라면 6~7개월이 좋을것이다. 유학과 레지던스의 차이점은 시간 사용에 있다. 물론 유학도 귀국이 전제되어 있지만, 장기간 새로운 공간에서 학업과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학은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레지던스가 자신의 고민을 연장하는 것이라면, 유학은 새로운 고민과 문제를 만들면서 긴 시간 동안 직면하며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현지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사용법이 다르다.

원영석 유학과 레지던스는 공통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편 유학은 새 문화를 접하면서 동시에 지니고 있던 가치관과 생각의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독일에 도착해 그들의 문화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한국에서 배운 바흐나 모차르트 등이 현지에서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며 보이지 않던 것
이 보이곤 했다. 유학과 레지던스 중 시간적으로 계산해보았을 적에 어떤 게 더 도움이 되는지 고려해보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전공이 유학이든 레지던스 이후든 어떻게 발전시킬지 이용 가치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제대로 된 공부를 원한다면 유학을 추천한다. 하지만 아직도 외국에 나가 한국의 문화나 예술과 관련하여 전공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레지던스를 추천하기도 한다.

유홍(1979~)
서울대 졸업 후 2008년 영국유학.
런던대 민족음악학과에서
연주학을 전공했다. 현재 다국적
음악가들로 구성된 현대음악 단체
아시안아트앙상블 동인, 왓와이아트
멤버로 활동 중이다.

유 홍 레지던스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목적을 갖고 협력하며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든다. 유학은 장기간 머무르며 학문적인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고, 장기간 동안 관련 계통의 성향과 분위기를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최근 국악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스도 많아졌고, 이를 잘 활용하고 있다. 분명한 목적도 있고, 네트워킹과 생산도 예술 현장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레지던스가 분명 실용적이다. 하지만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용성을 고려한다면 레지던스를, 깊이 있는 공부를 원한다면 유학을 추천한다.


귀국 후에 어떤 일들을 했나?

김희선 글로벌한 맥락으로 국악을 바라보게 되었다. 박사 후 과정으로 국립 싱가포르대학교 아시아 연구소(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Asia Research Institute) 연구원이 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학자들이 전세계에서 모여 한류 연구를 시작했던 시기였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국음악을 연구할 수 있었다. 지금 관심사(글로벌 차원의 한국음악 연구, 인터 아시아, 인터 코리아 연구,
문화냉전, 세계화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함께 했던 연구원들과 지금도 국경 너머 교류한다. 유학과 공부를 통해 만난 인연도 중요하다. 2007년 귀국 시에는 해외에서 활동하며 만난 외국 작곡가들이 준 가야금곡들을 국내에서 초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 국제학계와의 관계도 놓지 않았다. 계속 국제학회에 참가하고, 영어로 논문도 쓰곤 했다. 국내 대학에서는 영어로 진행하는 한국음악 강의를 개설하고, 한국음악 관련 글들을 번역했다. 해외에서 연주와 공연기획 경험도 도움이 되어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음악 해외 진출 업무를 돕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한국음악가들과 함께 해외 월드뮤직 마켓을 둘러보기도 했고, ‘저니 투 코리안 뮤직’ 프로그램에 어드바이저로 참여하며 한국음악가들과 해외 월드뮤직 마켓에 함께 나가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윤혜진 귀국 후 2~3년 동안 계획보다 주어지는 것에 성실하게 임했다. 주로 대학 강의와 작곡이었다. 귀국하는 데에는 남편의 “우리에게 가장 도전적인 곳은 바로 한국 같다”라는 말이 큰 역할을 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은 현실의 공간이기에 빠져나갈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곳이다.

원영석 독일에서 박사과정에 준하는 코스에 합격했는데, 오용록 서울대 교수님이 귀국을 권하셨다. 당시 서울대 국악과의 관현악 수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런 권유가 없었다면 독일에 계속 남았을 것이다. 좋은 공부도 좋지만, 좋은 지휘자가 되고픈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실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한국으로 돌아왔다. 교회 성가대 지휘도 맡으며 유급 지휘자가 되었다. 모교 강사로 강단에 서면서 대학교 국악관현악단을 이끌었다. 2003년 서울대 정기연주회가 일종의 신고식이었는데, 이후 학교마다 객원지휘를 제안이 들어왔다.

유 홍 졸업이 다가올수록 귀국에 대한 계획이 필요했다.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외국에서 잡지 못한다면 귀국하려고 했다. 유학만큼이나 귀국을 위한 계획이 필요했고, 현지에 음악가로서 정착하고 싶어 바로 귀국한다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운이 좋게 졸업 전에 독일에서 활동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공부를 더 이어나갈볼까 살짝 고민도 했지만, 연주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다.


유학을 통해 공부하고 온 것이 국악계나 자신의 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나.

김희선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 ‘국악의 세계화’라는 담론을 지나 월드뮤직 무엇보다 국제적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지금인데, 귀국 뒤에 국악계에 “실용적”이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유용했던 일은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재직 시절(2016~2020) 해외 자료를 가져오거나(‘기사진표리진찬의궤’ 영인본 출판, 영국국립도서관), 국악 해외전시(스페인 바로셀로나), 국제학회 국내유치, 국악박물관 재개관 등 해외 인맥, 영어, 글로벌 감각, 국제학계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MEA(유네스코 산하 국제전통음악학회의 동아시아 음악연구학회) 회장을 맡게 된 일도 궁극적으로는 국제학계의 활동에서 비롯된 일이다.

윤혜진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실크로드,서아시아 지역의 음악도 연구했다. 2009년 ‘인도음악’(일조각)을 내기도 했다.

원영석 한국적 지휘를 서양음악 전공자들이 묻고 한다. 서양악기로 연주하는 민요에서 한국적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지휘다. 장단이 서양음악식으로 표기되었어도 지휘를 통해 우리 음악식의 표현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것들을 정립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유 홍 전통악기 연주자로서 유럽에서의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데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들이 대금을 알게 되고, 새로운 음악이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후배와 제자들에게 유학을 권하고 싶나.

윤혜진 나라가 중요한 것 같진 않다. 본인의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 다만 이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지를 미리 둘러보고, 가면 좋겠다.

원영석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공부의 방향도 바뀌지만 사람도 바뀐다. 유학은 새로운 문화의 만남과 변화의 계기가 된다. 유학에 대한 꿈도 좋지만, 현지에 정착할지, 귀국할지 등의 계획도 생각해봐야한다.

유 홍 문의를 많이 들어온다. 대부분 외국에 나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유학이 목적이고 이를 위한 공부를 방법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일단 그곳에서 공부할 학문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유학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희선 꿈이 있는 곳에는 늘 길이 있다. 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2022년 왓와이아트와 황환희(무용)가
함께 한 ‘영원한 순간’ 공연

 

2022년 왓와이아트와 황환희(무용)가
함께 한 ‘영원한 순간’ 공연

 

 

 

 

 

 

 

 

 

 

 


송현민(편집장·음악평론가)
사진 김희선·윤혜진·KBS국악관현악단·왓와이아트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