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새로움이 포개진 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7월 15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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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연주자 김일륜 & 대금연주자 임재원 부부

뿌리와 새로움이 포개진 길

황필주

한 평생 연주자와 교육자로 매진해왔다. 옛 음악의 뿌리를 다듬고, 창작국악과 앙상블 활동으로 한 시대와 호흡했고, 악기의 숨은 소리를 찾아 개량했다. 작년과 올해 임재원과 김일륜은 예술인생을 돌아보며 음반집을 냈다. 각각 4장과 12장 CD로 구성된 묵직하고 튼실한 결실이다. 각 음반의 개수를 두고 부부는 국악의 음계를 뜻하는 ‘12율 4청성’이라며 웃음꽃을 피운다. 임재원과 김일륜이 이렇게 빚은 음계는 새 시대의 소리를 위한, 또 하나의 상징적 음계가 될 것이다.

글 송현민(편집장·음악평론가)

사진 황필주(studio79) 의상 성익재한복아뜰리에 장소협조 국립국악원

 


황필주

무게와 뿌리. 예술의 세계에서 이 존재는 얼마나 중요한가. 무게가 있어야 중심을 잡고, 뿌리가 든든해야 변방으로 가지를 뻗는 실험도 가능하다. 불변의 법칙이다. 금방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노력한 순간과 시간이 결합했을 때야 이 묵직하고 깊은 것이 생겨난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는 평생의 숙제이고, 행하는 움직임의 강령이 된다. 하여 예술의 역사는 복잡한 듯 보이지만, 그 핵심이 무게와 뿌리라는 점에 있어서 단순하다.

임재원은 작년 4월, 김일륜은 올해 음반을 내놓았다. 각각 4장의 CD와 12장의 CD로 구성되었다. 손끝으로 다가오는 음반의 묵직함. 이어 오디오에 넣어 소리를 퍼트리면음악의 뿌리와 기원으로 듣는 이를 몰아가는 집중력이 있다.

임재원 “‘연주’와 ‘기록’은 음악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정년퇴직을 앞두고 지금까지 해온 공연의 실황 음원을 모아 음반으로 내면 좋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어요.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공연인데, ‘나를 기록한 족적’이고, 한편으로는 ‘녹음 당한 순간’이기도 하죠.”

김일륜 “예술 인생 60여 년을 되짚어보니 함께 한 예술가들과의 작업과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함께 그 순간을 만들고 기록해준 음악가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예전의 음원들을 정리하는 시간은 앞으로 걸어갈 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임재원은 중학교 시절에 대금과 처음 만났다. 국립국악원과 KBS국악관현악단 차석·수석을 거쳐 목원대와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지휘자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그리고 국립국악원장 등 요직도 두루 거쳤다. 음반에는 정악 대금의 ‘기품’, 그가 직접 복원하여 세상에 알린 산조의 ‘뿌리’, 기타·피아노와 만나는 ‘횡단’의 감각이 담겼다. 정악-산조-창작국악은 기원은 다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국음악가라면 응당 갖춰야 할 삼발이다. 걸음마와 함께 국악을 익힌 김일륜은 국립국악원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을 거쳐 숙명여대 교수를 역임 후 현재 중앙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실내악단 어울림,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과 함께 하였고, 숙명가야금연주단과 중앙가야스트라를 이끌며 가야금의 신대륙을 밟아왔다. 그런 그의 가야금전집 ‘길’에는 가야금산조 여섯 바탕(최옥삼·김죽파·성금연·황병기·신관용·김병호류)과 가야금 병창으로 만날 수 있는 ‘뿌리’, 박범훈·이건용·이병욱의 작품으로 대변되는 ‘창조’, 남편 임재원과 함께 한 가야금·대금 2중주곡으로 만나는 ‘인연’, 실내악단 어울림·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숙명가야금연주단·중앙가야스트라로 내다본 ‘미래’가 담겨 있다.

1985년 부부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동인(同人)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움직임과 흐름은 국악의 흐름을 바꾸는 동인(動因), 즉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 두 사람의 음악 활동은 실내악단 어울림으로 이어졌고, 김일륜의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은 파격의 행보를 보였다. 1990년대에는 각자의 악기를 개량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러한 이들의 활동은 2000년대가 되면서 ‘개인’을 넘어 여러 사람이 행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되었는데, 이들이 뿌린 씨앗과 다져온 토양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음악은 시대와 색다른 들숨과 날숨을 주고받고 있다. 이에 따라 ‘급’변화하고 ‘다’변화하고 있는 ‘지금의 국악’의 기원을 묻는 일들이 부지런히 행해지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대중과 옷깃을 잠깐이라도 스치며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의 국악’이 돌아보아야 할 무게와 뿌리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본다.

노래 대장 어린이와 전주의 풍류 부잣집 딸

임재원 “서울 은로초등학교에 재학 당시 노래를 잘 부르는 어린이였어요. 5학년 때는 학년 대표로 참가한 선명회어린이합창단원 선발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기도 했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풍금도 제법 잘 연주했어요. 사실 연주하는 것보다 건반마다 어울리는 화음을 찾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라디오에서 어린이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누가누가 잘하나’가 나오면 연필과 종이를 꺼내 심사위원이 된 듯 채점했어요. 대부분 잘 맞췄죠.”

초등학교 졸업 후 임재원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한다. 당시 6년 과정으로 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전공 악기를 익혀 입학하는 게 아니라, 입학 후 교과와 음악적인 기초를 공부한 후 악기를 배정받거나 선택하는 식이었다. ‘국립’이라 교육비가 지원되었기에 국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학교에 다니고 싶은 학생들도 입학했다. 노래 실력 좋기로 소문난 임재원은 동네 지인의 소개로 입학했다. 한편 전주 태생 김일륜의 집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국악과 풍류가 넘쳐 흘렀다.

김일륜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풍남초등학교에 입학하며 가야금을 처음 배웠어요. 아버지가 풍류와 서화를 즐기셨기에 본가 2~3층에 전주국악원이라는 명패를 달고 명인 명창분들을 초청하며 교류하셨죠. 소고춤도 잘 춰서 여성농악단의 애기 단원으로 합류하기도 했어요” 임재원은 국악사양성소의 고교 과정으로, 김일륜은 전주여자고등학교로 입학했다.

임재원 “평범한 학생이었고, 녹성 김성진 선생의 대금 소리를 들으며 ‘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라며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악기와의 만남이 음악에 진심으로 눈을 뜨게 만들었어요. 돈암동 근방의 대나무 가게에서 좋은 쌍골죽이 있어서 얼른 구입한 뒤, 스승(김성진)에게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린 것이 좋은 대를 구해왔구나’ 하면서, 당시 국립국악원에 재직 중이던 김응서(전 용인대 교수) 선배에게 대금을 만들어주라고 하시더라고요. 학교가 지금의 국립극장 옆에 있었는데, 아침에 연습하면 대금 소리가 그 일대로 퍼져나갔죠.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와 만나니 음악에 대한 애착심도 생기고 음악의 가치와 진가를 더욱 알게 되더군요.” 전주여고생 김일륜은 교내 ‘대스타’였다. 전주여고는 소설가 양귀자와 은희경, 현대무용가 육완순이 공부했던 곳이다. 1970년대 중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학풍은 자유로웠고 여학생들은 여러 클럽 활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했다.

김일륜 “당시 꿈이 약사였는데, 초등학교 때 고적대 악장, 중학교 때 테니스 선수, 고등학교 때 응원단장까지 도맡아 했어요. 국악사양성소는 예술중·고등학교 격이니 선배들과 정보가 많았을 테지만, 저는 그런 정보가 전혀 없었고, 있는 줄도 모를 때예요. 해마다 스무 명 남짓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하는 명문이었는데, 서울대에 국악과가 있다는 것도 3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호철)을 통해 알게 되었죠. 국악과보다 ‘서울대’라는 말에 귀가 더 솔깃했어요. 그러면서 이재숙 교수님(서울대)과 인연이 닿아 입시 준비를 위해 서울을 오갔습니다. 서울을 오가며 음악을 공부하는 저에게 친구들의 응원과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전통을 다지고 넓은 세상을 보다

1979년 임재원이 졸업반일 때, 김일륜은 입학 새내기였다. 졸업을 앞둔 임재원은 단단히 무장했다. 서울대는 1960년대부터 ‘신국악’이라는 표명 아래 새로이 창작한 국악의 원산지가 되었다. 그 과정에 전통과 현대를 두루 살피며 새로운 국악의 입지를 다졌다. 그 터에서 임재원은 정악-산조-창작국악의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한편 김일륜은 상경과 입학 후 사정이 달랐다. 잦은 휴교령으로 학교는 어수선했다. 어린 시절 전주에서 노래·춤·악기 등을 두루 즐긴 시간과 달리 가야금만 공부하듯 매진해야 했다. 그러던 중 2학년 때 고향 선배인 오용록(전 서울대 교수)과 함께 명고수 김명환(1913~1989)의 공부 모임에 합류한다. 당시 대학교와 대학생은 현대식 교육의 산물이었지만, 전통음악의 물줄기는 학교 밖에서도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학교 공부의 부족함을 느끼던 학생들은 이처럼 온전한 뿌리와 물줄기를 찾아 각자의 움직임을 행하던 때였다.

김일륜 “명인의 집에서 이뤄진 공부는 또 하나의 ‘음악 학교’ 구실을 했어요. 김명환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새끼 호랑이가 크고 있는 줄 아무도 모를 것이네”라며 저의 앞날을 격려해주셨죠. 그러던 중 4학년 때 ‘세상은 넓고 국악으로 할 일은 많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찾아왔어요. 한·미 수교100주년 기념으로 음대 국악과 학생들이 미국 15개 주요대학 순회공연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전통음악으로도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 음악의 쓰임새와 보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의 기사 한 조각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 학생 및 교수로 구성된 연주단은 미국 15개 주요대학에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강연회와 세미나 워크숍 그리고 연주회 등을 갖는다. 공연 내용은 대취타, 수제천, 춘향전, 검무, 시조, 영산회상, 시나위, 가야금산조, 승무 등이다.”(동아일보 1982년 9월 15일) 김일륜은 일원이 되어 가야금산조 독주를 선보였다. 임재원과 김일륜은 졸업 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다. 1984년, 임재원은 당시 내한한 존 케이지가 국악원을 방문했는데, 그에게 대금을 가르쳐준 것을 기억한다. “그 때의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아쉽지만, 그는 소리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어요. 특히 대금이 청을 울리며 내는 쩌렁쩌렁한 소리를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대중과 호흡하고 시대와 눈을 맞추며

두 사람은 1985년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상복이 없다”는 김일륜이 동아국악콩쿠르에 입상하던 해였다.

임재원 “이 사람과 함께 하면 음악에만 푹 빠져 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결혼 후 우리는 대금과 가야금을 위한 이중주곡을 가장 많이 초연한 음악가이자 부부가 되었어요.” 대금 협주곡 ‘대바람소리’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상규는 1988년 ‘사랑이어라’를 부부에게 헌정했다. 국악관현악이 함께 하는 ‘대바람소리’도 두 사람을 위해 2중주로 편곡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성실함은 일제강점기를 거쳐온 노장들의 음악을 빨아들였고, 대중의 호흡과도 부단히 마주했다. ‘여성동아’ ‘우먼센스’ 등 여성잡지 전성시대를 열었던 잡지에도 부부의 이야기와 활동은 단골 기사가 되었다.

1986년에 결성된 실내악단 ‘어울림’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지금이야 국악기가 서양악기는 물론 대중음악과 자유롭게 몸을 섞지만, 당시는 ‘연예가중계’에 나올 화제였다.

임재원 “창작국악을 하는 실내악단은 어울림과 슬기둥 뿐이었어요. 서로 결은 달랐지만, 각자의 관객을 형성 해가며 대중과 만났죠.” 대학에서 수학한 재원들이 국악계로 공급되며 보존과 계승에만 급급했던 때, 젊은 국악예술가들에 의해 국악실내악 운동과 국악가요 운동이 미세하게 세력을 확장하던 때였다. 어울림이나 슬기둥 등의 젊은 실내악단이 구성되어 이른바 ‘국악 가요’나 ‘국악 경음악’이라 할 수 있는 음악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대중은 ‘이런 국악도 있구나!’라며 놀랐고, 평론계나 방송계도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임재원 “어울림 결성에는 이병욱 선생(현 서원대 명예교수)의 귀국과 활동이 큰 역할을 했어요. 그가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음대로 유학 갔는데, 서양음악만 공부하던 중 ‘자신이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이었죠.” 김일륜 “마침 김용옥 선생이 이끌던 ‘악서고회’(樂書孤會)에 참여하면서 ‘우리 문화와 음악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하는 문제의식이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 공통의 과제는 김해숙(가야금), 주영위(해금), 김선옥(거문고)을 만나면서 구체성을 띠게 되었고, ‘어울림’이란 이름으로 탄생하게 되었죠.”

악서고회(樂書孤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다. 1980년대는 서울 아시안 게임(1986)과 서울 올림픽(1988)으로 인해 문화계 안팎으로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던 때였다(1980년대 ‘객석’도 이러한 문화 이벤트와 그 영향을 부지런히 다루었다). 우리 문화를 돌아보는 가운데 해외 유학을 마친 지식인들의 합류도 큰 역할을 했다. 유학을 통해 현지에서 부딪혀 보았지만 끝내 얻어지는 결론은 한국의 문화에 있다는 것. 하버드대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용옥도 귀국 후 한국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국악과 마당극 활동에 매진했다. 악서고회는 그런 예술가들과 함께 이론적 활동을 하던 그룹이었고,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울림이 창단되었다. 김일륜은 가야금 연주와 노래를 맡았다.

김일륜 “곡목들이 ‘처용가’ ‘쌍화점’ ‘어부사시사’ 등이었는데, 제목처럼 이병욱 선생이 옛 감수성으로 빚은 노래들이었어요. 이러한 노래들이 나의 감성을 일깨웠고, ‘검정 고무신’ ‘가시버시 사랑’ 등의 노래들은 전통의 감수성을 잊고 있던 대중의 마음에 가닿았죠.” 어울림의 인기는 대단했다. 1988년 1집 앨범을 시작으로 공연 실황, 노래 모음집 등 8종의 음반이 연이어 나왔다. 당시 국악으로 빚은 캐롤곡 ‘방울카드’도 선보였다. 1992년 4월 ‘객석’에도 이들의 활동에 대한 의미와 의의가 잘 담겨 있다. ‘실내악단 ‘어울림’의 신음악연주회는 연주회의 제목처럼 신음악을 향해 노력하는 ‘어울림’ 개개인의 의지를 나타낸 연주회였다.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라는 음악문화적 자각을 안고 국악과 양악, 그리고 대중화라는 한국음악계의 공통된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극복해 보고자 하는 ‘어울림’의 이날 연주회는 이 연주회의 의미만으로도 외국의 어느 유수 교향악단의 내한공연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김일륜 “어울림은 전통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여러 방편 중 하나였지, 우리가 도착해야 할 목적은 아니었어요.”

임재원 “저도 어울림은 우리 음악이 도달하는 종착역이 아니라, 시대와 어울리는 국악을 함께 듣고 즐기는 일종의 간이역이라 생각했어요.”

김일륜 “누군가는 ‘딴따라’라고 했고, 누군가는 ‘참신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저의 내면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뿌리로서의 전통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에요.”

김일륜은 1989년에 결성된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 동인으로도 합류한다. 창작국악을 연주한 3대의 가야금으로 이뤄진 앙상블로, 이후 유행하는 가야금 중주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이들의 등장은 당차고 파격적이었다. 김명환 명인과의 공부, 악서고회와 어울림 등으로 이어져 온 인연과 음악적 힘이 한데 모였다.

김일륜 “내 인생의 황금기를 이끈 이 길에서 대학시절 김명환 선생의 모임에서 만난 김해숙 선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국립국악원장 역임), 박현숙 선배(서원대 교수 역임)와 함께 의기투합해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을 만들었어요. 저음·중음·고음 가야금을 사용한 국내 최초 ‘가야금만의’ 중주단이었는데, 그때까지 없었던 가야금 중주단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를 새롭게 열어젖힌 그들은 젊었다. 백대웅은 상주에서 전승되는 모심기 노래를 가야금 3중주곡으로 만들었고, 한편 파헬벨의 ‘캐논’도 편곡하여 연주하도록 했다. 오늘날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캐논’의 시작은 이들이 끊은 것이다. 대중은 ‘캐논’을 통해 가야금 소리와 처음 만나는가 하면, 전통음악을 지켜온 노장들은 ‘캐논’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일륜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자신감이 넘친다. 전통음악에 대한 뿌리가 깊고, 무게가 든든하다면 무엇이든 못 하랴. 누군가에는 ‘외도’로 비치지만, 무게와 뿌리가 든든하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음악의 물꼬를 트는 ‘화려한 외출’일 테다. 어쨌든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1990년대 가야금 앙상블의 전성기를 만들었고, 이른바 ‘퓨전국악’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옛 소리를 정리하고 새로운 소리를 찾으며

19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국악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대학마다 음악대학 내에 국악과와 전공이 생겼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국악관현악단도 도립·시립의 명분으로 창단되고 있었다.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작곡가들도 국악기들이 모인 국악관현악을 통해 한국음악의 새로운 실험을 하던 때였다.

이처럼 확장과 시도를 거듭하면서 국악 예술가들은 하나둘 숙제를 안게 된다. 더 정확하게는 문제점이다. KBS국악관현악단에 재직 중이던 임재원도 그런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악기 개량이었다. 시대에 따라 새로 나오는 창작국악들은 더 많은 음과 음색을 필요로 했지만, 수백 년 이어져 온 대금으로는 이를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박성옥에 의해서 가야금의 개량이 이뤄지고, 산조 아쟁이 나오기도 했다.

임재원 “대금은 5음 음계에 익숙한데, 이러한 음계를 확장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정악 대금에 구멍을 3개 추가로 뚫고 버튼을 달았어요. 양손의 약지와 왼손의 검지로 즉, 아무 역할도 안 하고있던 세 손가락을 이용해 버튼을 여닫도록 하여 더 많은 음을 낼 수 있고, 음계를 확장하는 방식이었죠. 1990년 ‘대금의 구조와 활용 음계’를 신악회 세미나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당시 개인적인 시도였는데, 2002년 개량대금 독주회를 개최해 공론화하고, 2003년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이것이 ‘확장의 움직임’이었다면, 채보를 통한 ‘정리의 움직임’도 함께 행했다. 채보(採譜)란 곡조를 듣고 그것을 악보로 만드는 행위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심수로만 전승되던 민속음악과 산조의 곡조는 악보가 없었기에 현장에서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는 순간의 음악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록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언제 어떻게 변형되고 사라질지 모를 음악들이었다. 일례로 20세기 초에 수많은 명인들은 레코드에 자신의 가락을 담았지만, 그 음원이 손실됨에 따라 명인들의 가락도 사라졌다. 그러던 중 20세기 중후반부터 채보는 사라진 가락을 발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재원 “박종기, 한주환, 서용석,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채보하여 출판했습니다. 그중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채보해 분석하고 초연한 것이 의미 있다고 봅니다. 1959년 녹음된 음원을 제공받아 했어요.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대금산조의 표본이 되는 구성이고, 더불어 관악기 계통 산조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박종기류 대금산조도 최초로 채보(1991년 한국고음반연구회 배연형·양정환 회원이 음원 제공)하여 이 산조를 대금 전공자라면 누구나 배우고 알 수 있는 ‘보편적인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흩어진 옛 가락들을 악보로 옮길 때 객관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어요. 전통 기보법인 정간보(井間譜)가 아니라 오선보로 채보한 이유도 이 악보가 국경을 넘어 대금을 배우는 외국인이 연주할 때 그에게 얼마나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느냐였어요. 연주 때에는 분명 그 소리가 들리는데, 악보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음들이 많았고, 그런 부분들을 세세히 신경 썼습니다. 산조의 비망기라 생각하면서 임한 작업이었죠.”

그로 인해 대금산조의 계보는 정확성과 객관성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김일륜은 또 하나의 실험으로 나아갔다. 바로 25현 가야금이다. 가야금은 12현으로 태어났지만, 오늘날 창작국악에서 사용되는 가야금은 주로 25현의 개량 가야금이다. 1995년 박범훈이 초대단장이 되어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이끌던 때다. 제2회 정기연주회 ‘한·중·일 개량악기를 위한 협주곡의 밤’에서 김일륜은 개량된 22현 가야금 협연자로 올라 박범훈의 가야금 협주곡 ‘새산조’를 협연했다. 당시 프로그램북을 집필한 황병기는 “중국의 13현 고쟁(古爭)은 1950년대 중반에 21현으로 개량되었고, 일본의 13현 쟁(爭)도 1960년대 말에 20현으로 개량되었다”라고 했다. 두 배 이상 늘어난 가야금의 현에는 기존과 다른, 그러면서도 새로운 주법이 필요했다. 김일륜의 성공적인 연주는 그간 가능성으로만 머물러있던 가야금의 새로운 꿈을 입증했다.

김일륜 “1990년대에 가야금의 개량을 생각하다가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생각으로 대만에서 유학 온 학생에게 고쟁(古箏)을 배웠습니다. 이후 한·중·일이 합작한 ‘오케스트라 아시아’ 활동을 함께 하며, 기왕이면 가야금도 음계가 확장되어 정악부터 민요까지 아우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생각을 바탕으로, 현재는 연주법이 전승되지 않는 아악기 슬(瑟)을 재현하고자 25현으로 재구성해보니 많은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1995년에 25현 가야금을 만들게 되었고, 오늘날 많은 학교와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창작국악에 25현 가야금을 사용하고 있어 뿌듯합니다. 스승님(이재숙 서울대 명예교수)은 25현 가야금이 오늘날 동·서양음악의 만남과 국악의 저변확대와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며 무척 기뻐하셨어요.”

1990년대 초반에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으로 보여준 ‘음악의 확장’은,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악기의 확장’으로 나아갔다. 꿈만 꾸던 가야금들은 김일륜으로 인해 그 꿈들을 이루어 나갔다. 이후에도 가야금을 통한 실험은 지속되었다. 숙명여대 교수로 부임했을 적에는 30여 대의 가야금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가야금 앙상블 ‘숙명가야금연주단’을 탄생시켰다. ‘숙가연’은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에서의 경험이 담겼고, 시대의 감각과 음악적 보폭을 맞춰 나갔다. 현재는 중앙가야스트라를 통해 경험의 시간을 후학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뿌리와 깊이는 여전한 힘

국립국악원의 뒤뜰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다. 봄이 되면 벚꽃 이파리가 흩날리는 산책로에 여름의 녹음이 쨍하다. 40여 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그들에게 국립국악원은 첫 사회 활동지였으며, 임재원이 원장을 지낸 곳(2018~2021)이기도 하다.

음반 해설지 속 ‘음악가 김일륜과의 대화’를 집필한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김일륜의 입단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김일륜의 음악성을 알아본 이는 비단 김명환뿐이 아니었다. 가야금병창 명인 박귀희는 김일륜이 가야금 병창 전문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인편을 통해 ‘김일륜을 데려오라’하여 편애에 가까운 사랑으로 애지중지 노래를 가르치는 한편, 큰 무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옆에 세우길 좋아했다. 박귀희의 바람대로 김일륜은 1983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당대 최고의 민속악 명인들이 포진해 있던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에 가야금병창 단원으로 입단했다.”

임재원은 원장으로 재직하며 4개 예술단을 재정비하고, “국악에 대한 학문과 이론은 음악과 연주를 살찌우는 것”이라며 국악연구실의 학예활동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이를 통해 국악박물관과 아카이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본지(2018년 8월호)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립국악원의 방향을 그리기도 했다.

“국악인들의 직장 개념으로 인식되던 과거와 달리 관객과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만나는 플랫폼이 되었다고 느낀다. 국민의 정체성은 자국의 문화를 향유할 때 생긴다. 국악은 그동안 ‘보존’을 빌미로 사회에서 많은 지원과 보호를 받아왔다. 그에 대한 보은이라고나 해야 할까.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등장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시간도 가지며 국립국악원의 역할 중 사회적 책임을 인지하고 이끌어가려고 한다.”

오늘날 국악은 새로운 변화의 옷을, 부지런히 입고 있다. 음악과 음악가들의 변화는 물론 코로나 시대에 일어난 미디어의 변화로 관객에게 흐르는 물줄기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비단 ‘오늘’만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에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예술에 담긴 ‘무게’와 ‘뿌리’라는 것을, 두 사람의 묵직한 음반이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두 음반은 이들의 ‘개인적 기록’이자 후대를 향한 ‘전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푸른색 의상을 보며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푸른빛에서 나왔지만, 전세대의 업적을 갖고 후대가 더욱 노력하면 그 푸른빛은 더욱 푸르게 된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더욱더 푸르러질 전통을 위해 노력했고, 이제 다음 세대의 임재원과 김일륜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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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륜·임재원의 공연을 통한 성장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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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1975년 국립국악고(전 국악사양성소) 정기연주회(협연 임재원, 지휘 강사준, 국립극장 소극장)

➋ 1967년 가야금을 처음 시작하던 김일륜(병풍 글씨는 부친 김세영의 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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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1974년 고교 2학년 때의 임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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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륜 1960년 전북 전주 태생으로 서울대 음대 국악과 졸업 후 이화여대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국악원 및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을 역임했으며, 실내악단 어울림과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 동인으로 활동했다.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앙대 예술대 전통예술학부 교수, 중앙가야스트라 예술감독, 아시아琴교류회 회장, (사)가야금연주가협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➊ 2017년 이재숙 방일영국악상 수상 후

➋ 1982년 김일륜 서울대 졸업연주 후(가운데 김명환)

 

 

 

 

 

 

 

➌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미국 순회공연. 그레스 대사와 함께 한 김일륜

 

 

 

 

 

➍ 미국 순회공연

 

 

 

 

 

 

 

➎ 미국 순회공연(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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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1994년 임재원 독주회(국립국악원 소극장) ➋ 2007년 ‘달·빛 그리고 저녁노래’ 공연 후 ➌ 1996년 어울림 공연 ➍ 이병욱(기타)와 임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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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필주

 

임재원 1957년 충남 강경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와 한양대 대학원 졸업 후 한국외대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국악원 단원 및 KBS국악관현악단 차석·수석을 역임했으며, 실내악단 어울림 동인,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지휘자, 대금연구회 이사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국립국악원장 등을 역임했다. 목원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정농악회 회원과 서울대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➊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공연(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➋ 1994년 어울림 신음악연주회(문예회관 대극장)

 

 

 

 

 

 

 

 

 

➌ 1994년 어울림 신음악연주회(호암아트홀)

 

 

 

 

 

 

 

 

 

➍ 1992년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 포스터

 

 

 

 

 

 

➎ 1993년 임재원의 KBS국악관현악단 협연(객원지휘 김용만)

 

 

 

 

 

 

 

 

 

 

➏ 1999년 숙명가야금연주단 창단 공연(국립국악원)

 

 

 

 

 

➐ 1999년 대전 EXPO 아트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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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1995년 ‘새산조’ 초연 공연(국립국악관현악단)

 

 

 

 

 

 

➋ 1998년 김일륜의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독주회(국립국악원)

 

 

 

 

 

 

 

 

 

 

 

➌ 1983년 김일륜의 국립국악원 수험표

 

 

 

 

 

 

 

 

 

 

➍ 1985년 명인명창대공연(왼쪽부터 안숙선, 박귀희, 강정숙, 김일륜)

 

 

 

 

➎ 임재원과 장형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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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임재원 & 김일륜 음반

숨결과 현으로 빚은 금자탑

임재원 대금연주곡집

사운드프레스/2021/4CD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공연 실황을 모은 음반이다. 138쪽의 해설지에 각 곡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물론 평론가 윤중강의 인물론, 김명옥 연구자의 음반의 의미를 짚어보는 글이 담겼다. 영문 번역(김희선)도 수록되어 학술적 가치도 높다. 임재원의 학창 시절과 주요 공연 사진도 담겨 있다.

CD 01 정악독주·대금산조-춘(春) 청성곡, 상령산, 염양춘 등 정악 대금 독주곡이다. 임재원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린 한주환류 산조도 함께 실어 의미를 더했다. 장종민이 산조 장단을 맡았다.

CD 02 대금·가야금 2중주-하(夏) 아내 김일륜과 호흡을 맞춘 이중주곡 ‘사랑이어라’를 비롯하여 ‘메나리’(박범훈), ‘시곡’(서경선), ‘대바람소리’(이상규), ‘남려 사랑’(김용만)이 담겼다. ‘사랑이어라’는 김일륜의 음반에도 수록되어 있다.

CD 03 작곡-추(秋) 대금을 위한 창작곡으로 이병욱, 이강율, 이상규, 김정길, 문성희, 김대성, 송선형의 창작곡이 실렸다. 구노·카치니·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대금과 피아노(장형준)가 함께 하며, 임재원의 개량대금이 기타와 함께 ‘조화’를 연주하기도 한다.

CD 04 대금협주곡-동(冬) ‘대바람소리’(이상규), ‘녹아내리는 빙하’(강은구), ‘호접몽’(이준호) 등의 대금협주곡이 담겼다. 연주는 KBS국악관현악단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전 경기도립국악단)이 맡았다. 대금과 현을 위한 소협주곡(김용진)은 박영민의 지휘, 서울 모던 플레이어즈가 함께 한 한국과 서양의 만남이다.

 

 

 

 

김일륜 가야금전집 ‘길’

국설당/2022/12CD

12장 음반이 음악적 여정을 담은 ‘소리의 기록’이라면, 124쪽 해설지는 각 음악에 대한 김일륜의 생각이 담긴 소중한 ‘문자의 기록’이다. 해설지에는 산조는 물론 창작곡 해설과 작곡가들과의 인연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이 시대에 필요한 ‘가야금 음악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겠다. 서울대 명예교수 이재숙, 평론가 윤중강과 송혜진 등의 글이 김일륜의 음악세계를 대변하며, 김일륜의 성장에서 중요한 사진과 자료도 수록되어 한 음악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CD 01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최옥삼 명인의 월북 후, 그의 가락은 함동정월이 잘 보존하고 있었다. 김일륜이 국립국악원 재직 시 함동정월을 직접 사사하며 갈고닦은 산조다. 이태백이 북장단을 맡았다.

CD 02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서울대 4학년 때 스승(이재숙)을 통해 인연이 닿은 김죽파와 만나게 되었다. 이태백이 북장단을 맡았다.

CD 03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가야금에 입문한 일곱 살 무렵, 성금연류는 김일륜의 인생 첫 산조였다. 이태백이 북장단을 맡았다.

CD 04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산조 1993년 대학원을 준비하며 인연 맺은 황병기의 산조다. 장종민이 장구장단을 맡았다. CD 05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1983년, 릴테이프에 담겨 있던 신관용의 산조를 만나고 김일륜이 채보·복원하여 소리의 조각들을 맞춰나간 산조다. 장구 장단은 이태백이 맡았다.

CD 06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 고음반 복원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배움에 목말랐던 김일륜은 양연섭 교수를 통해 김병호류 산조와 만나며 갈증을 풀어나갔다. 장종민의 장구 장단이 함께 한다. 고음반 복원에도 힘써온 김일륜이 1996~2003년에 발굴·복원한 정남희 가야금산조, 초한가, 당악, 봉장취가 함께 수록되었다.

CD 07 가야금병창-흥과 시름 노래에도 능한 김일륜이 부르고 연주한 가야금병창들을 한데 모은 음반이다. 길닦음(진도씻김굿), 호남가, 천자뒷풀이·사랑가(춘향가), 육자백이, 흥타령, 고고천변(수궁가), 제비노정기(흥보가)가 수록되었다.

CD 08 박범훈 작품집-새산조 김일륜의 전속작곡가를 자처했던 박범훈이 김일륜의 연주와 목소리를 위해 지은 곡들이다. 22현과 25현 가야금 협주곡 세계를 개척한 ‘새산조’ ‘경드름’ ‘가야송’, 김일륜의 노래로 만나는 고려가요 ‘가시리’와 찬불가 ‘보리이루리’ ‘무상인’이 담겼다.

CD 09 이건용 작품집-달·빛 그리고 저녁노래 김일륜에게 현대음악의 감동과 새로움을 일깨워준 이건용의 창작곡이 수록된 음반이다. 25현 독주곡 ‘잎·물·빛’ ‘별과 詩’, 중주곡 ‘저녁노래Ⅳ’, 비올라와의 이중주 ‘저녁노래Ⅴ’, 가야금병창으로 부르는 ‘그렇지요’ ‘사랑’ ‘상한 영혼을 위하여’가 수록되었다.

CD 10 이병욱 작품집-노래하는 가야금 전통음악에 서구 양식을 수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한 실내악단 ‘어울림’ 시절에 이병욱이 지은 처용가, 쌍화점 등의 옛노래 5곡과 검정 고무신, 가시버시 사랑 등 국악가요 11곡이 수록되었다. 활동기인 1993·1994년의 음원을 리마스터링하여 국악가요에 앞장섰던 ‘어울림’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다.

CD 011 가야금·대금 중주-사랑이어라 남편 임재원(대금)과 함께 작곡가들의 요청으로 수많은 이중주 무대를 가졌다. 이를 위해 작곡된 ‘메나리’(박범훈), ‘南呂사랑’(김용만), ‘시곡’(서경선), ‘사랑이어라’(이상규), ‘대바람소리’(이상규), 그리고 ‘상령산’이 수록된 음반이다.

CD 12 가야금앙상블 김일륜이 창단한 가야금앙상블의 역사와 미래가 담긴 음반이다.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1989년 창단)이 연주한 백대웅 편곡의 ‘캐논’과 김희조·전순희의 작품, 숙명가야금연주단(1999년 창단)의 타령·군악과 최옥삼류 산조합주, 중앙가야스트라(2007년 창단)의 ‘새타령’(조원행) ‘신고산타령’(김은경) ‘좋구나 매화로다’(김성국)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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