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국립창극단
김준수·유태평양
21세기 소리꾼의 변증법
두둥, 탁! 기자의 글 반주에 맞춰 두 소리꾼의 인터뷰가 판소리처럼 흐른다.
그것을 ‘김준수가(歌)’ ‘유태평양가(歌)’라 하자!
Chapter1.
시始, 첫 만남
유태평양 “어릴 때부터 형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어요. 처음 만난 건 2012년 동아국악콩쿠르였던 것 같은데? 인사만 나눴는데 사실 첫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습니다.(웃음) 형이 좀… 차가운 도시 남자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김준수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웃음) 저는 어린 시절부터 평양이의 이름을 자주 들었죠. 평양이가 국악 신동이기도 해서 스승님께서도 얘기를 많이 하셨고요. 경연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차갑게 느껴졌던 이유는 긴장해서였을 거예요. 그 시기에 품고 있던 큰 목표는 콩쿠르 입상이잖아요. 경쟁자와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시간적·감정적 여유가 없었던 거죠.”
때는 2012년 6월 초여름,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제28회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 일반부 경연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전북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태평양이 금상, 중앙대3학년 재학 중이던 김준수가 은상을 받았다(김준수는 이듬해 제29회 동아국악콩쿠르에서 판소리 일반부 금상을 수상했다). 우리 음악계는 국악이든, 양악이든 상관없이, 자라나는 음악학도를 경쟁의 장으로 내몬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 대학교 때는 콩쿠르…. 지독한 경쟁 속에서 라이벌로 만난 어리고 여린 둘에게 다정한 인사를 나눌 여유는 당연히 없었을 터. 거친 세상에서 ‘소리’를 하기 위해 둘은 마치 경주마처럼 앞만보며 달려야 했다. 안온하게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건, ‘국립창극단’이란 안전한 울타리에 들어온 후였다.
유태평양 “콩쿠르 때는 몇 마디 못 나눴어요. 준수 형 말처럼 경쟁자이기도 했으니까.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후 유일한 또래인 형과 급속도로 친해졌는데요. 알고 보니 순박한 청년이더라고요! 순수하고 마음도 여리고….”
김준수 “평양이는 푸근한 이미지예요. 또래와 맞지 않는 성숙미가 있죠. 어릴 때부터 활발하게 사회 경험을 해서 그런가 봐요.”
Chapter2.
정正, 올곧은 소리의 길
예로부터 ‘호남은 소리’라 했다. 둘 다 소리의 고장인 전라도 태생이지만, 대학 진학 전까지 둘의 소리길은 완전히 달랐다. 김준수는 스스로 소리에게 다가갔다. 전라도 명창들이 대를 이어 소리를 이어나가는 것과 달리, 김준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판소리를 만났다. 국악동요대회에 출전했다가 중학생 누나가 부르는 판소리 ‘춘향가’ 대목에 푹 빠져든 것이다. 그의 가족들에게 판소리는 별세계였다.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시작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하염없이 작아져야만 했다. 레슨비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전남예술고 자퇴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한편, 유태평양에게는 소리가 먼저 다가왔다. 그는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들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2011년 지병으로 작고 한 소리꾼 유준열이 바로 유태평양의 아버지이다. 34세 늦깎이로 국악을 시작한 부친은 한 인터뷰에서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자식에게도 국악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덕분에 유태평양은 아버지의 스승인 조통달 명인을 “할아버지”라 부르며따랐고, 북과 꽹과리를 장난감 삼아 성장했다. “첫돌을 갓 지난 아이가 냄비뚜껑으로 장단을 맞추는 것을 보고 놀랐다”라고 얘기한 유준열의 회고를 주목하자. 유태평양은 코흘리개 여섯 살 때 전북대에서 ‘흥보가’를 완창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앙코르 요청에 따라 ‘사랑가’ ‘춘향가’ 등 단가를 부르기도 했다고.
김준수 “평양이와 친해진 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평양이의 든든한 버팀목이었 던 것 같습니다. 교육열도 대단하셨던 것 같고요. 아들에게 다양한 음악 경험을 시키셨고, 해외 유학 발판을 만들어주신 게 멋있어요.”
유태평양 “아버지가 늦게 국악을 시작한 편이시거든요. 그 영향이 저에게까지 내려온 거죠.”
김준수 “저는 완전히 반대였어요. 우리 집에서 음악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부모님께서 농사 일구시면서 힘겹게 뒷바라지해 주셨습니다. 타악기라든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공부해온 평양이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죠.”
유태평양 “그래도 형의 기억 안에는 친구들과 함께 했던, 여느 초등학생들이 느끼는 따뜻한 경험들이 자리 잡아 있을 텐데, 저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어릴 때부터 항상 공연하러 다니고…. 형에게는 제가 못해 본 경험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에서 우리의 차이가 있겠죠?”
옛적부터 이름난 소리꾼들은 득음하기 위해 ‘산(山)’으로 들어갔다. 이를 ‘산공부’라 한다. 길게는 여름 한철을 꼬박 산에서 보낸다. 명창 권삼득은 완주의 위봉폭포, 명창 이중선은 부안의 직소폭포, 명창 정정렬은 익산 심곡사를 ‘득음터’로 정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함께 훈련하기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산과 계곡에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소리만 내지른다. 제자들은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숨소리와 몸짓, 버릇까지 고스란히 흡수한다.
그런데 ‘요즘 소리꾼’들은 대학에서 소리 공부를 한다. ‘국악(國樂)’이 이름 그대로 ‘나라의 음악’이 되면서 전문 교육기관이 생긴 것. 김준수는 국내 최초로 ‘국악대학’을 설립한 중앙대에서 공부했고, 유태평양은 전북대 한국음악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주목을 받았다. 한편 ‘더 요즘 소리꾼’들은 꼭 국악 전공만을 고집하진 않는 듯하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의 발걸음을 보면 그렇다. 유태평양은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아프리카 타악을 배우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났
다. 어릴 때 방문한 인도에서 전통 타악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아버지가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김준수는 국립창극단에서 한창 활동하던 중 중앙대 연극영화과 석사 과정에 입학해 이목을 끌었다.
김준수 “연극영화과를 진학한 건 창극 영향이 커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창극을 접하곤 창극배우라는 꿈이 생긴 건데요. 대학에서도 화술 수업이 있었지만, 막상 창극단에 입단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연기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연기 전공하는 친구들의 연습 과정을 보면 좀 달라요. 덕분에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유태평양 “전 학부 시절 때 클래식 음악 지휘로 유학까지 가려고 준비했었죠. 대학을 1년 정도 휴학하고 토플 시험까지 본 뒤, 지휘과 지원을 앞두고 있었는데요. 그 시기에 갑자기 국립창극단에 곧 자리가 날 것 같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오래 활동했던 선배님들이 은퇴하시고 빈자리가 있었나 봐요. 창극단은 어릴 때부터 들어가고 싶던 단체였기에 우선 학사부터 잘 마쳤죠. 시기 좋게 창극단 오디션에 참여해 입단하게 됐습니다.”
Chapter3.
반反, 이것 또한 소리의 길
김준수 “외부 활동을 조율할 때 국립창극단이 무조건 1순위예요.”
유태평양 “창극단은 공연 전 연습 단계도 매우 중요하거든요. 기본 두 달 정도는 연습하고 무대에 서니 그 스케줄에 피해가 안 가도록 해야죠.”
둘의 직장인 국립창극단에 대한 얘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하고, 잠시 김준수와 유태평양의 바깥 활동(?)을 엿보고자 한다. 창극단 무대에서 종종 봐오던 김준수가 날카롭게 대중에게 꽂혔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2016년,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3’에 ‘인간문화재 수제자 속사포JS’라는 닉네임으로 출연한 김준수. 그는 버건디 슈트를 입고 ‘어사출두’를 맛깔나게 불렀다. 밴드 두번째달의 지원 사격으로 무대를 꽉 채운 김준수는 이후 “판소리계의 프린스”로 대중에게 불렸다. 이후에도 KBS2 ‘불후의 명곡’이나 JTBC ‘풍류대장’에 출연하며 적극적으로 방송 활동을 해오고 있다. 사실 지난해 ‘풍류대장’은 어머니의 유방암 판정 때문에 방송을 나가지 않으려 했는데, 어머니 만류로 출연하게 됐다. “어머니가 항암치료를 받고 계셨는데 그동안 방송이 방영되는 화요일 밤마다 텔레비전에서 아들을 보는 게 기쁨이셨다”고 한다.
김준수 “초등학교 학예회 때 판소리 한 대목을 하면 감정이 몰입되면서 막 눈물이 나왔어요. 그런데 친구들은 전혀 이해를 못 하면서 ‘너 왜 울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음악이 공감받지 못하는구나 소외감이 들었죠. 저는 대중과 맞닿아 있는 소리꾼이 되고 싶습니다. 방송에서 국악의 매력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나로 인해 누군가 국악이 좋아질까 싶어서 적극 임해요.”
유태평양의 첫 방송 출연은 아주 먼 옛날. 그는 1996년 MBC ‘기인열전’에 판소리 신동으로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귀여운 꼬마가 흥겹게 판소리를 하는 모습은 퍽 사랑스러웠다. 1999년에는 몇몇 CF에도 출연할 정도로 전 국민에게 따뜻한 관심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그는 남아공 유학 시절, 전북대 재학 시절, 국립창극단 입단 초기까지 방송출연을 대부분 단호히 거절했다. 유태평양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서도록 한 프로그램은 ‘불후의 명곡2’이다. 작년에는 MBN ‘조선판스타’에 출연해 “국악계의 BTS”라고 소개된 바 있다.
유태평양 “저는 어릴 때 방송 매체에 많이 나갔잖아요. 국립창극단 입단 전에는 매체에서 연락이 와도 출연을 거절했어요.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거면 음악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변에서 제가 방송 출연을 안 하니까 요즘 활동을 잘 안 한다는 얘기도 하더라고요.(웃음) ‘불후의 명곡2’에서 섭외 연락이 와서 그때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음악적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여서 선택한 거예요.”
최근 둘은 활동 영역을 조금씩 넓히고 있다. 김준수는 2021년 창작뮤지컬 ‘곤 투모로우’에 출연하며 뮤지컬 데뷔했고, 지난 8월부터는 10여 년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창작뮤지컬 ‘서편제’의 동호 역으로 캐스팅되어 무대에 선다. 뮤지컬과 창극의 발성이 완전히 달라서 새로운 훈련을 하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유태평양은 OST 녹음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MBN 퓨전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사운드트랙을 녹음했고, 얼마 전에는 드라마 KBS ‘미남당’의 ‘부채춤을 춘다’를 불러 화제를 모았다. 밴드 고니아와 함께한 작업에서 이런저런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쓰며 즐겁게 음원 작업을 했다고 한다. 오히려 “판소리스러운 소리”를 내달라는 제작사 요청에 큰 부담 없이 참여했다고.
김준수 “뮤지컬은 들었을 때 좀 더 편안한 느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창극은 어려운 시김새가 많아서 따라하기 힘드니까요. 저는 ‘서편제’와 같은 뮤지컬이 참 좋아요. 한국적인 소재로 우리 소리를 뮤지컬로 소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잖아요. 특히 소리꾼의 삶을 다루고 있으니 저에겐 더 특별하죠.
유태평양 “드라마 ‘미남당’ 곡은 처음 받았을 때부터 내 옷으로 맞춰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냈어요! 음악 반응이 좋으니까 제작사 측에서 뮤직비디오도 선보였
죠. 국악적인 느낌을 많이 넣어서 부르다 보니 반응이 재밌더라고요. 댓글을 보니 ‘어떻게 따라 하느냐’ ‘이렇게 따라 한다’ 등 다양한 감상평이 달려서 즐거워요. 점점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도 좋더
라고요.(웃음) 매일 조회수 확인하는 게 소소한 재미예요!”
국악계가 보수적이고 또 보수적이란 사실은 두 번 설명하면 입만 아프다. 그렇다면 이토록 보수적인 집단에서 이 시대의 소리꾼, 김준수와 유태평양을 보는 시선이 불편하진 않을까? 혹은 국립창극단의 뛰어난 선배들은 어떠한 조언을 할까? 조심스레 둘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준수 “박금희(1949~) 선생님께서 처음에 걱정을 많이 하셨죠. 실제로 제가 입은 옷까지 피드백을 주실 정도로 우려가 많으셨어요. 지금은 제 활동을 전폭적으로 응원해 주세요. 저의 뿌리가 소리에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잃고 싶지 않은 소리를 묵묵히 붙들면서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유태평양 “제가 처음 판소리를 배웠던 조통달(1945~) 선생님은 모든 활동을 지지해 주고 계세요. 뭘 하든 제 편에 서주시고요. 국립창극단 선배들도 사실 지금 우리와 같은 때를 다 지나가신 거잖아요.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무엇보다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아, 국립창극단 내부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막내라고 밥도 많이 사주셨고!(웃음) 선배님들 경우에는 30년 넘게 서로 얼굴 보면서 함께 활동하신 분들도 계시고요. 안 좋은 일로 다투더라도 함께 창을 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관계가 다시 부드러워져요. 신기하죠? 함께하는 소리의 힘인 것 같아요.”
Chapter4.
합合, 전통과 변화
이제 둘의 직장인 국립창극단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겠다. 김준수는 2013년 창극단에 들어갔다. 1983년 왕기석(1963~)명창 이후 30년 만의 최연소 입단이었다. 2016년에 유태평양이 새로운 막내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김준수는 막내를 벗어났고, 지난 해 국립창극단이 5년 만에 신입 단원을 모집하며 유태평양 역시 드디어 막내 자리에서 탈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막내라인”이라면서 이들은 호탕하게 웃는다. 창극단에서의 모든 순간, 모든 위치, 모든 역할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둘은 김성녀 감독(재임기간 2012~2019) 시기에 창극단에 입단했다. 현대 창극사에서 김성녀 감독 시기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추구하며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창극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국립창극단(창단 1962년)은 긴 기간 동안 레퍼토리의 변화, 서양음악극 형식 도입, 타 장르의 제작진이 투입되며 변화를 모색해왔다. 창극 레퍼토리가 점차 늘어가고, 다양한 제작진들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할수록 창극의 존재론에 관한 물음은 더욱 거세졌다.
김준수 “제가 입단했을 때 국립창극단은 격변의 시기였어요. 새로운 스타일의 창극에 대한 찬반 논란이 내부적으로도 좀 있었고… 오래 계셨던 선배님들이 특히 혼란스러워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대중 반응이 너무 좋고 이제 젊은층도 창극을 보러 오기 시작하면서 새 시도를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었죠.”
유태평양 “그래서 그런지 제가 입단했을 당시에는 안정화된 분위기였어요. 사실 저는 격변하는 창극
단의 모습이 좋아서 들어온 케이스이고요. 저 역시 학생 시절 ‘변강쇠 점 찍고 옹녀’(초연 2014년) 얼마나 재밌게 봤는지 모릅니다. 한 일곱 번은 본 것 같은데요? 앞으로 제가 들어올 직장이니까 열심히 창극단 작품을 봤거든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보면서 국립창극단에 들어오면 이렇게 재밌는 공연을 하겠구나 기대감에 부풀었어요. 입단 후 이 공연의 주역을 맡았을 때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어요.”
김준수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국립창극단 대표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죠. 판소리 역사에서 유실된
작품을 새롭게 창극으로 만든 거니까 기획 의도도 좋고요. 고선웅 연출가는 ‘과거에 변강쇠타령이 이
러진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주셨어요. ‘흥보씨’도 인상 깊었던 작품인데요. 이렇듯 고선웅 연출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익혀온 오대가(춘향가·흥보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에 대한 생각을
열리게 해줘요.”
창극을 창작하는 방식에 관해선 주로 두 입장이 대치된다. 하나는 창극에서의 판소리를 강조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극인 창극의 변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창극은 형성기였던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외부 환경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왔다. 그러나 판소리 창자(唱子)에 의해 연행되어왔기에 창극의 근저에는 늘 판소리가 있었다. 창극의 전형화에 대한 논의는 대개 창극에서 ‘판소리조’를 중심으로 하는지가 주요 논점이다.
김준수 “저는 새롭게 재창작한 오대가가 흥미로워요. 그리고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작품이 창극화됐을 때에도 재밌고요. 예컨대 올해 초연한 ‘리어’가 저에겐 그런 작품이었죠. 서양의 작품을 ‘우리화’ 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배삼식 극작가가 정말 우리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하셨죠.”
유태평양 “국립창극단이 전통성이 있는 단체이다보니 끊임없이 해나가야 되는 숙제가 많은 것 같아요. 고전 판소리에 충실한 작품도 만들어야 하고, 준수 형이 말한 것처럼 해외 이야기들을 작품화 시키는 과정도 중요하고요. 더불어 창극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창극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귀로도 듣는 장르입니다. 귀로 받는 쾌감도 분명 창극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죠. 안숙선·한승석·이자람 음악감독님들의 성향이 창극단에서 표출되고 멋진 연출력이 더해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습니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국립창극단의 거의 모든 작품의 주역을 꿰차고 있다. 그리고 쉬는 날이 되면 함께 출사를 나가는 등 ‘워라밸’을 함께 채운다. 이들의 ‘브로맨스’를 보다 보면, 국립창극단에서 ‘형제 명창’으로 활약한 왕기철과 왕기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얼마나 바쁜지 이번
표지 촬영 역시 겨우 시간을 맞췄다. 국립창극단 ‘귀토’ 부산 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밤기차를 타고 서울에 온 둘. 다음날 이른 시간에 ‘객석’ 표지 촬영을 마치고 다시 창극 연습을 위해 국립극장으로 분주히 떠났다. 매 시즌마다 어마어마한 연습량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배역을 물었다.
유태평양 “다 힘들었는데… 그래도 제일 힘든 건 ‘심청가’에서의 심봉사 역할이었어요. 준수 형이 얼마 전 맡았던 리어 역처럼 젊은 배우가 맡는 역은 아니었거든요. 당시 그 역할을 했을 때 제가 20대였습니다. 심봉사를 소화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컸어요.”
김준수 “제가 내년에 국립창극단 입단 10년 차가 되는데요.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리어
역할이 가장 강렬해요.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내공이 있잖아요. 그게 배우에게 잘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역할을 연기한다는게 참 어렵더군요. 작품 준비하면서 겁난 부분은 이미 연극에서 명작이니까, 제가 그만큼 해낼 수 있을까 부담이 컸습니다. 막상 무대에 오르니 우리 소리가 중심이어서 그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저에게 뿌듯한 기억을 준 역할이에요.”
유태평양 “아, 그리고 제일 기억에 남는 배역은 ‘흥보씨’의 제비! 많은 분들에게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역할이죠.(웃음) 짧게 나오는데 임팩트가 있었다면서…”
김준수 “평양이가 배역 복이 좋아요.(웃음) 저는 주인공을 맡아도 막 무대에서 구르고, 무대 위에 있는 시간이 긴 배역이 오거든요. 그런데 평양이는 짧게 무대에 나와도 임팩트가 강한 역할로 많이 등장하죠!”
아직 국립창극단에서 김준수, 유태평양의 연기를 못 본 사람이라면 이 공연을 주목하기 바란다. 지난해 8월, 해오름극장 재개관 공연으로 선보인 창극 ‘귀토’가 앙코르 공연(8.31~9.4)으로 다시 찾아온다. 국립창극단의 메가 히트작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만든 고선웅·한승석 콤비가 의기투합한 작품으로, 판소리 ‘수궁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내 호평을 얻었다. 토끼의 아들 토자 역에는 김준수, 자라 역에는 유태평양이 선다.
김준수 “고선웅 연출가는 배우들을 열린 시선으로 풀어주세요. 자유로운 움직임 속에서 편한 걸 찾아주시고요. 배우에게 자유로움을 열어주시는 분이죠.”
유태평양 “창극에 대한 이해도가 경지에 오르신 것 같아요. 특히 해학적인 면을 잘 살리시죠. ‘수궁
가’는 재담이 많은 판소리 중 하나인데요. 슬픔조차 슬픔으로 표현을 안 하고, 생뚱맞지만 그 슬픔을 너무 재밌게 풀어내는 연출에 놀랐습니다.”
김준수 “개인적으로 고선웅 연출가가 판소리 오대가를 모두 재해석해 창극으로 발표하시면 좋겠어
요. 심청의 이야기도 어떻게 신선하게 풀어내실지 기대감이 커요! 창극단에서 총 세 작품을 함께 했는데 늘 새로웠거든요.”
Chapter5.
창創, 새로운 전통을 빚으며
작년 봄에는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프로젝트인 ‘절창’의 첫 장을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열었다. 둘은 함께 무대에 서서 각자 가장 자신 있는 판소리 대목을 뽑아 부르며, 판소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감각할 수 있는 무대를 펼쳐 보였다. ‘완창(完唱)’보다는 ‘분창(分唱)’의 성격이 짙은 이 공연에서 목의 핏줄이 팽팽하게 일어서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는 둘의 무대는 또 다른 울림을 줬다.
김준수 “국립극장 ‘완창판소리’의 젊은 소리꾼 버전으로 기획된 건데요. 우리가 첫 문을 여는 것이어서 공연 담당 PD와 많은 소통을 나눴어요. 다행히 저와 평양이가 부르는 ‘수궁가’의 ‘제(틀)’가 같아서 결정하는 과정이 무난했어요. 장면 만드는 과정은 재밌었고요!”
유태평양 “너무 재밌었죠! 사실 과정은 조금 스트레스였어요. 대본 작업도 해야 했고…. 결과는 좋았어요! 객관적인 평을 제쳐 두고 우리끼리는 보람있었죠. 사실 처음 ‘절창’ 제안을 받았을 때 담당PD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준수 씨와 평양 씨가 잘 못하면 다음 회차 못 갑니다”라고 얘기하더군요. 은근 부담됐던 거 있죠.(웃음) 얼마 전 민은경과 이소연 단원이 2회를 잘 마무리했어요. 내년에 3회도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니 뿌듯해요. 아마 40년 정도 지나서 우리가 할아버지가 되면 “야 저거 1회 우리가 했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을까요?”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국립창극단 외에도 외부 창극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한다. 2019년에는 ‘내 이름은 사방지’(사방지 역김준수/화쟁선비 역 유태평양), 2022년에는 창극 연출가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주호종(1966~2021) 연출가를 기리는 ‘모돌전’(모돌 역 유태평양/최자 역 김준수)에 함께했다. 국립창극단의 두 주역이 민간 창극작업에도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이유는 딱하나. 창극이 좀 더 대중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유태평양 “현재 국립창극단이 창극에서의 메인무대를 장악하고 있잖아요. 이 영향으로 민간에서도 창극 작업이 늘어나고 있어요. 사실 이전부터 몇몇 민간 창극단도 다양하게 활동해왔는데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홍보가 잘 안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대학 시절 인연을 맺었던 주호종 선생님께서 만드신 민간단체가 확장해서 ‘내 이름은 사방지’ 같은 작품이 나왔어요. 준수 형도 함께하게되어 기쁘고요. 민간에서도 다채로운 창극 작품이 나와 줘야지 창극의 전반적인 힘이 실릴 것 같아요. 이런 민간 작업들을 지지해 주고 싶어요.”
김준수 “제가 최근에 뮤지컬을 하고 있잖아요. 길을 걷다 보면 뮤지컬은 공연장도 많고, 홍보물도 많이 부착되어 있다는 걸 느끼죠. 그러면서 창극도 여러 공연장에 다양한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봤어요. 앞으로 창극도 뮤지컬처럼 더 대중화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올해부터 국립창극단은 차세대 유망 작창가를 발굴 및 육성하는 ‘작창가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유태평양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 의지를 밝혔다. 국립창극단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작창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언젠가는 무대 위 창극배우들에게 창작자로서 알맞은 옷을 입혀주는 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전했다. 김준수 역시 작창과 창작판소리에 대한 짙은 소망이 있다. 지금도 가사가 떠오르면 휴대폰 메모장이나 공책에 끄적이면서 생각을 맞춰가는 중이라고. 다만 서두르지 않고 ‘오늘의 속도’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예정이다.
Chapter6.
종終.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
‘산공부’도 종종 다니신다면서요?
김준수 “중고생 시절에는 방학 때마다 20일 정도 산공부를 갔었는데….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계속 연습하면 목이 확 쉬어요. 그때 목을 낮게 하고 힘을 빼서 연습하면 며칠 지나 목이 풀려요. 목이 쉬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면 목이 단단해지죠.”
유태평양 “매년 국립창극단에서 기량 향상 휴가를 줘요. 저는 그 시간에 산공부를 해요. 어느 산을 지정하지 않고 유유히 이산 저산 여행하듯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훈련하죠. 이번 여름에도 다녀왔는걸요.
요즘도 같이 사진 찍으러 다녀요?
유태평양 “어릴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아버지가 일상의 기록을 남기라면서 사진기를 선물해 주셨는데 그 이후 습관처럼 사진을 찍어왔어요.”
김준수 “사실 저는 요즘 너무 바빠서… 모든 취미 생활을 중단했죠. 쉼이 좀 필요해요.”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는요?
유태평양 “이제는 사진에 좀 진지해졌어요. 얼마 전에 중형 카메라도 새로 장만했고, 이태원에 위치한 작업실에 사진 촬영을 위한 공간도 마련해 놨어요.”
김준수 “전 방송연기요.”
완창은 또 언제 할 계획이에요?
(유태평양은 2016년 국립창극단 입단하자마자 ‘흥보가’를 완창으로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김준수는 2018년 ‘수궁가’를 완창으로 올렸다.)
유태평양 “오는 10월에 전주에 위치한 우진문화 공간에서 완창판소리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우진 문화공간은 전라도의 완창판소리 메카거든요. 소규모 극장이지만 소리꾼들에게 아주 좋은 자연음향이에요. 대학 때도 완창을 보러 자주 갔었고요. 전라도에서는 어릴 때 ‘흥보가’ 이후 완창은 처음이어서 감회가 새로워요.”
김준수 “저도 2018년에 첫 완창을 했는데요. 준비하면서 다시는 안 해야지 싶다가, 막상 끝내고 나니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때 무대를 끝내고 2년 뒤 또다시 완창으로 인사드리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못 지키고 있어서 마음속에 숙제로 남아있어요.”
유태평양 “클래식 음악으로 따지면 완창은 독주회이고, 창극은 오케스트라이죠. 완창은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부담감이 커요. 북 하나 밖에 의지할 곳이 없거든요. 혼자만의 싸움은 정말 어렵죠.”
김준수 “그래서 선생님들이 계속 완창을 하셨던 것 같아요. 한번 할 때마다 큰 공부가 되니까.”
이번 인터뷰 주제가 ‘21세기 소리꾼’이잖아요. 두 분은 롤모델이 있어요? 지금 딱 생각나는 분들은 이자람, 이희문, 추다혜, 송가인, 이날치…?
김준수 “저는 이자람 소리꾼의 공연을 많이 봤어요. 대학 때에도 LG아트센터에서 ‘사천가’ ‘억척가’ 를 재밌게 봤는데요. 당시 여러 국악인이 창작 판소리 작업을 하던 시기였어요. 이자람 님은 브레히트 작품으로 본인만의 결과물을 낸 걸 보면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창작판소리도 저의 또 하나의 꿈이죠. 한승석 선생님이 낸 크로스오버 음반도 인상 깊었고요.”
유태평양 “지금 세대 국악인들이 시기를 잘 타고 났다고 생각해요. 안숙선, 조통달 선생님과 같은 윗세대 소리꾼들이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하셨잖아요. 당시에도 국악인들이 꼭 국악만 고집하진 않았어요. 국악인들이 발매한 다양한 트로트 음반도 있고요. 다들 그 시대 유행하던 색깔에 맞춰서 여러 활동을 보였죠. 특히 1980년대에는 국악 스타가 많았잖아요. 저는 지금 우리 세대가 아주 대단한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 옛날 선생님들이 해왔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각광받고 있는 거예요.”
인터뷰 부제는 ‘브로맨스’인데, 서로에게 한 마디씩 해준다면?
김준수 “같은 길을 걷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야 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
니까, 혹 다른 길로 빠지려고 할 때 서로 잘 잡아주면 좋을 것 같아.”
유태평양 “준수 형은 많은 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핫한’ 국악인 중 한 명인데, 우리의 음악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그런 자리에 혼자만 서지 말고 같이 열심히 하자!(웃음) 계속 친하게 지내면서 10~20년 뒤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인으로 같이 자리 잡으면 좋겠어!”
이들이 소리를 하든, 창극을 하든, 밴드를 하든, 뮤지컬을 하든… 혹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든, 방송에 나와 연기를 하든 무엇이든 다 잘할 거라는 확신이 선다. 득음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소리꾼 정신’이라면 뭘 하든 성실하게 임하지 않겠는가. 김준수, 유태평양이 어떤 소리꾼인지는 굳이 애써 한마디로 정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후일 국악사(史)에는 그저 ‘21세기 소리꾼의 형상’으로 기록될 터이니.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창극단 ‘귀토’ (출연 김준수·유태평양)
8월 31일~9월 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뮤지컬 ‘서편제’ (출연 김준수)
8월 12일~10월 23일 광림아트센터 BBCH홀
전주세계소리축제 ‘흥보가’ (출연 유태평양)
9월 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야외공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