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배우 김범진
더 많이, 더 넓게
국립극장의 무장애 기획공연
‘합★체’에는 김범진의 키 높은 꿈이 펼쳐진다
김범진(1991~)은 성실하게, 하지만 노련하게 극장을 누비는 배우다. 연극·무용·뮤지컬·전시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전까지는 몰랐던 세계들을 새로 열어젖힐 적마다 불거지는 ‘장벽’들이 있다. 김범진은 그 사이를 유쾌하게 탐험하면서, 때로는 수고로이 노력하면서, 자신의 몸을 통해, 그리고 그 몸이 경험하는 장애를 통해 장벽에게 대답한다. 반드시 그 세계를 건너리라고. 무장애(barrier-free) 음악극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배우 김범진을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개막이 머지않아서 몸도 마음도 분주하겠어요.
안무며 노래며 쉴 겨를 없이 준비하고 있어요. 지난해 국립극장의 무장애 공연 기획에 한차례 참여(소리극 ‘옥이’)한 적 있는 김지원 연출가에게 연락을 받고 참여하게 됐죠.
김지원 연출가 연락을 받고는 어떠한 기분이었어요?
사실 어떤 계기로 제게 연락을 주신 건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이전에 함께 작업해온 분도 아닌 데다가, 제가 아닌 다른 저신장 장애인 배우님과도 줄곧 일해 오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이전까지는 일상과 맞닿아 있지 않은 배역들도 곧잘 맡았죠. 무대 위에서 여러 시대와 국가를 오가는 모습도 자주 봤고요. 그에 비하면 ‘아버지’라는 배역은 범상한 축에 속하는 것도 같아 보입니다.
한때는 사람이 아닌 역할들도 곧잘 맡았으니 비교하자면 그런 편이죠.(웃음) 제가 가진 서른둘이라는 나이가 두 형제를 낳아 기르기에는 젊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버지라는 전형 안으로 들어가려다 도리어 그 안에 갇혀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어요. 막상 연습하면서부터는 그 이름에 연연하지 말고 나의 것대로 해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기하고 있는 아빠 역은 원작 소설에서도 키가 작은 사람인데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요. 내게 아들이 있다면 저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지거든요. 아빠로서의 고충이 절로 체감된다고 할까요…. 쌍둥이 형제를 연기하는 두 배우들에게도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그런 순간들을 양껏 느껴보고 있어요.
‘합★체’처럼 장애에 대해 말하려는 연극, 혹은 장애로써 말하려는 연극이 양적으로 외연을 넓히게 된 게 사실 우리나라 연극의 오랜 현상은 아니죠. 물론 장애연극을 이어온 창작자들은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요. 다만 국공립의 이름을 가진 극장에서 이처럼 장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만은 아주 근래의 일 같아요.
저는 ‘장애연극’이라고 불릴 만한 작업에 많이 참여한 배우는 아니에요. 그럼에도 간간이 그런 작품에 임하다 보면 장애연극은 여전히 생소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장애인 창작자들은 몇 년, 아니 어쩌면 몇 십 년씩 작업을 이어왔을 테죠. 그런데도 장애연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장애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태도나 관점도 개개인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공연계라는 공론의 장 안에서 하나의 명료하고 객관적인 형태로 합의된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제작되는 공연 하나하나가 모두 일종의 사례가 되어줄 수 있겠죠. ‘합★체’도 마찬가지고요.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우선은 신기하고도 반가운 현상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장애인 창작자들에게, 특히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셈이니까요. 비장애인 창작자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장애인 창작자들에게도 여태껏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계기라는 게 좋아요.
유유히 ‘여행’하면서, 더 잘 사라지기 위하여
그러고 보면 장애인 창작자들을 위주로 꾸려진 극단에 계신 배우는 아닙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곧장 극단 여행자에 들어가 올해로 7년째 함께하고 있죠?
입단 당시에 사실은 극단 시스템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 어떤 극단에서 무슨 공연을 하는지, 심지어는 ‘장애인 극단’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전까지 극단 여행자의 작품을 본 적도 없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던 거죠.
순전히 운이라기에는 완연한 여행자 배우인 것처럼 보이던걸요.
정작 제게는 그 스타일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오퍼레이팅부터 시작해서 극장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제게 전부 알려준 곳이죠. 그래서 이제는 가족 같은 곳이고요. 여행자만의 특징으로 꼽을 만한 것들이 있다면 먼저는 신체를 활용하는 연기를 많이 시도한다는 점, 그리고 즉흥을 통해 길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장면의 재료를 찾는다는 점 같아요. 그 두 가지가 저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과정인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작업 방식을 거치면서, 또 함께 연기 워크숍을 하면서 저한테도 점차로 극단 특유의 색이 묻어난 것 같아요. 하여간 무척 자유로우면서도 상당히 와일드한 곳입니다.(웃음)
‘올라운더’ 배우라는 점도 ‘김범진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연극이건 무용이건, 셰익스피어건 입센이건, 희극이건 비극이건 다 잘 해내는 배우, 경계를 누비길 즐기는 배우 같습니다.
이렇게 매번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도전을 위한 도전인 것만은 아니고, 이전까지 모르던 필드에 진입하면서 제 나름의 성취를 이뤄내는 게 즐거워서인 거죠. 이번 공연 ‘합★체’에서도 노래를 잘 불러야 해서 기쁘게 애를 먹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젊을 때 많이 해보자!(웃음) 그리고 오래 해보자! 전 이 일이 좋거든요. 여전히 못 해본 것도 있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앞으로 해야 할 것도 많으니까.
자기 몸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비쳐야 한다는 점에서 저는 배우라는 종족들을 모두 존경해요. 저신장 배우가 몸을 드러낼 때는, 당연하게도, 그 몸이 경험하는 장애로써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일 테죠. 몸으로, 장애로, 김범진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배우인가요?
이 일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을 적에는 무대에 선 제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수의 비장애인으로 이루어져 있을 관객이 일상생활 속에서 저와 같은 장애인을 만나기란 드문 일이잖아요. 장애인을 무대에서 본다는 것 자체로도 효과가 크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에 대해 더 고민해 보게 돼요. 드라마와 상관없이 배역 바깥의 배우를, 그러니까 김범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속에 선 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죠. 요즘은 공연이 끝나면 잘 없어지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환영 속에서,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잘 존재했다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거죠.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만 비치지 않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장애가 관객에게 신기하거나 낯선 것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제 몸으로 연기된 한 명의 배역이 그 공연 속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합★체’에서 희망하는 것은요.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겠죠.(웃음) 좋은 컨디션에서 올라가는 공연이니만큼 많은 장애인 관객이 오시면 더할 나위 없겠고요. 이후로도 이 공연의 취지를 닮은 작품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글 김현지(연극 칼럼니스트) 사진 국립극장
2022/23 시즌 국립극장 장벽 없는 극장 만들기
이번 시즌, 국립극장은 무장애 공연의 장르를 다양화하고 장애예술인이 주·조역으로 나서는 작품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음악극 ‘합★체’(9.15~18)는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의 유쾌한 성장담을 그린다. 김범진이 쌍둥이의 아버지 역을 맡아 무대 위 편견을 허문다. 연극 ‘틴에이지 딕’(11.17~20)은 셰익스피어 비극 ‘리처드 3세’를 뇌성마비 고등학생의 이야기로 각색한 마이크 루의 동명 희곡을 한국 초연하는 작품이다. 장애인·소외계층 학생으로 구성된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2023 함께, 봄’(23.4.15)으로 관객과 만난다. 연출가 임도완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연극 ‘우리 읍내’(23.6.22~25)에서는 극작가 손턴 와일더의 동명 희곡을 ‘장애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김범진(1991~) 2015년 연극 ‘페리클레스’를 시작으로 연극 ‘20세기 건담기’ ‘코리올라누스’ 등에 출연했다. ‘대심땐스’ ‘복bOK’ 등에서 무용가로도 활약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음악극 ‘합★체’
9월 15~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박지리(원작)/정준(극본)/김지원(연출)/강수빈(작곡·음악감독)/김명제(안무)/권지현(접근성 매니저)/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접근성 자문)/소리를보여주는사람들(수어통역용 대본번역)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