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첼리스트 피터 그렉슨, 다재다능한 그가 꿈꾸는 고전의 내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9월 5일 9:00 오전

©Paul Husband

 

 

 

 

 

 


작곡가·첼리스트 피터 그렉슨

고전의 내일을 꿈꾸다

바흐를 마주한 현대 작곡가의 도전과 용기, 자유에 관하여


“이 DJ들은 평소와 다른 근육을 써야 했을겁니다. 신선한 경험이었을 거예요. 클래식 음악계에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장르 음악가가 이 세계에 무엇을 들여올 수 있는지 볼 기회였지요.” 지난 7월 말, 도이치 그라모폰(이하 DG)이 발매한 ‘여름 이야기(Summer Tales)’는 최근 클래식음악 트렌드가 집약된 음반이다. 작곡가·프로듀서·DJ 10인이 일렉트로닉 음악·힙합·테크노 등을 접목해 클래식 음악의 명곡들을 재해석했다. 예컨대, 라벨의 ‘물의 유희’를 택한 프로듀서 루스벨트는 원곡의 작은 조각을 떼어 반복(loop)하고, 댄스 그루브를 입혔다. 여러 소품을 엮어 ‘스토리텔링’해 음반을 매듭지은 점도 그렇다. 10곡에서 각기 묻어 나오는 나른함, 생기, 열기가 여름 풍경을 완성했다. 음반 커버를 장식한 일러스트레이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DG는 뮤직비디오도 세계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의뢰하며 예술 간 실험과 협업에 박차를 가했다. 피터 그렉슨(1987~)은 첼리스트이자 작곡가, DG 전속 아티스트로, 이번 음반에서 바흐 첼로 모음곡 6번 중 여섯 번째 악장 지그(이하 ‘지그 6.6’)를 택해 선보였다. “바흐 음악에는 긍정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어린 시절의 긴 여름날이 확장된 것 같아요. 모음곡의 36개 악장 중에서도 ‘지그 6.6’가 그 낙천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상으로 만난 그에게 음반에 대한 평가를 묻자, “음반 재킷도 너무 멋지지 않
나요?”라며 일러스트레이션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오늘의 그를 만든 음반

그렉슨은 바흐의 원곡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반짝임을 신시사이저로 수놓았다. 6.6 지그에는 원곡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클래식’한 첼리스트로 성장한 그렉슨의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4세부터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 그는 스코틀랜드 내셔널 유스 오케스트라와 대영내셔널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작곡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13세 무렵, 자기 첼로 소리를 기타 페달로 증폭시키는 실험을 하면서다. 이후 런던 로열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등의 영화음악으로 알려진 필립 셰퍼드를 사사했다. 14~15세쯤 처음 접한 조지 크럼의 음악을 ‘내 인생을 바꾼 음악’으로 손꼽는 피터 그렉슨은 오늘날 동시대 클래식 음악사를 써나가는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첼리스트로서는 스티븐 라이히, 요한 요한슨, 막스 리히터 등의 작품을 초연 녹음하고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음반에도 참여했다. 작곡가로서 ‘파티나’(2021), ‘4중주(Quartets: One/Two)’(2017), ‘플로우(Flow)’(2013)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자기 음악 어법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는데, 그의 활동 반경은 ‘블랙버드’(2020), ‘블루밍 러브’(2014) 등의 영화음악, ‘바운드리스’ (2021) 등의 게임음악에까지 미친다. 무용계도 매료시켰다. 슈투트가르트 발레,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 고티에 당스 등이 그의 음악을 썼다. 오늘의 그를 만든 음반은 ‘리컴포즈드: 바흐 첼로 모음곡’(2018/DG)이다. 모음곡 전곡을 여섯 대의 첼로와 전자음향의 편성으로 개작한 것이다. 이 음악은 이후 다른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공연, 영화·드라마·광고에서 수차례 활용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이번 ‘여름 이야기’에 실린 ‘지그 6.6’도 바로 이 음반에 뿌리를 둔다. 개작한 곡을 다시 한번 변형해 선보인 것이다.
“‘여름’ 주제에 맞춰 이 곡의 밝은 에너지를 살짝 더 끌어올렸습니다. 푸딩 위에 설탕을 한 꼬집 뿌려서 맛의 꽃을 피우는 것처럼요. 처음 바흐 첼로 모음곡을 개작할 때는 겁을 먹었어요. 원곡의 무게에 압도된 거죠. 이후 같은 곡을 다른 콘셉트의 프로젝트, 다른 편성 등으로 여러 차례 재편곡해 보고 자유로워졌어요. 이제 곡의 한 가닥이 눈에 띄면 바로 잡아 당겨보는 용기가 생겼지요.”

지워지지 않는 고전의 DNA

그렉슨은 개작할 때 음악을 3차원의 조각으로 본다. 이를 들어 올려서 여러 각도로 빛을 비추고 이는 어떤 소리일지 상상한다. 더 나아가 그림자 지는 부분도 그려본다. 그러면 같은 작품을 꽤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를 소리로 구현할 때도 조각을 빚듯 공간감을 중요요소로 본다. “녹음 스튜디오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작곡 과정의 일부입니다. 미세한 악기 배치 차이가 소리 공간감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리컴포즈드: 바흐 첼로 모음곡’을 녹음할 때 주노-60, 주피터-4 등의 신시사이저를 썼는데요. 신시 사이저도 녹음 홀에 들여와 마이크를 연결하고, 사람이 연주하는 악기만큼이나 그 배치에 공을 들였어요. 공간도 그에 반응했고요. ‘리앰핑’이라고 불리는 과정입니다. 이로써 신시사이저는 음향 악기가 되는 거예요.” ‘리컴포즈드’를 처음 발매한 이래로 그는 수차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바흐를 택했나?’ ‘왜 개작해야만 하는가?’ ‘전자 음향을 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에 이르러 그렉슨은 이렇게 답할 수 있게 됐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바흐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선보인다고 했을 때 이를 질문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현대를 사는 작곡가 로서 바흐를 재해석합니다. 신시사이저는 제 악기 중 하나이고요. 아무리 원곡의 구조를 찢고 쪼개고 실험해도 그 DNA는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요, 이게 바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바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음악을 다시 쓰는 것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피아노 독주로 편곡했다. 이 작품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낭만주의기에 들어 확장된 피아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렉슨은 개작을 통해 고전에 동시대를 덧입힌 선구적인 작곡가로 막스 리히터를 꼽았다. 리히터는 정확히 10년 전, 비발디 ‘사계’를 개작한 음반(‘리컴포즈드: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DG)을 발매해 주목받았다. “리히터의 ‘사계’가 제게 길라잡이였습니다. 비발디 원곡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리히터만의 세련된 DNA가 음반 전체를 관통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름’의 세 악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오늘의 청중을 향해

‘리컴포즈드’ 프로젝트로 작곡가 피터 그렉슨은 성장했다. 그를 토대로 최근에는 고유한 어법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른 작품을 해석하는 힘은 결국 자신의 고유한 ‘렌즈’를 갖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주로 그늘진 마음을 표현한다. 쇼스타코비치의 느린 악장, 베토벤의 후기 4중주, 헨리 퍼셀 ‘디도의 탄식’ 등이 품은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렉슨은 그 감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가 ‘현대의 성당 오르간’이라고 부르는 신시사이저를 적극 활용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리코딩 스튜디오로 향한다. 첼리스트가 첼로를 들고 연습실에 가는 것처럼.  “전 스튜디오 너드(괴짜)에요. 녹음하지 않는 날이어도 스튜디오에 앉아 다른 음악가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합니다. 이곳은 제가 창작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워지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이곳에서 제 청중의 대부분과 소통합니다. 오늘날의 청중은 주로 헤드폰과 스피커로 음악을 만나기 때문입
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음반 리코딩 과정에 보다 많은 사람이 관심 가진다면 좋겠습니다.”

박찬미(독일 통신원) 사진 키 뮤직 매니지먼트

 


SUMMER TALES 음반

◎ 마크 브랜든 ‘아마빛 머리의 소녀’(드뷔시)
◎ 데이비드 더글라스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생상스)
◎ 루스벨트 ‘물의 유희’(라벨)

DG 4862974

◎ 브루노 카르도소 ‘캐논 D장조’(파헬벨)
◎ 라우라 마소토 ‘셰헤라자데’(림스키코르사코프)
◎ 썸원 ‘백조의 호수’(차이콥스키)
◎ 피터 그렉슨 ‘지그 6.6’(바흐)
◎ 골드문트 ‘라크메’ 중 ‘꽃의 이중창’(들리브)
◎ 마틸다 ‘카르멘’(비제)
◎ 샘 톰슨 ‘파반느’(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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